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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G. ㅣ 스토리콜렉터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 <R.P.G>는 일본 최고의 미스테리 작가 중 한명이라고 불리어지는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이다. 책 제목인 R.P.G는 'Role-Playing Game'의 약자이다. 롤플레잉이란 실제 상황을 상정하여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면서 문제 해결법을 터득하도록 하는 학습법, 실제 역할연기법이다.
도쿄 도내에 있는 식품회사 과장이었던 48세인 도코로다 료스케라는 남자와 나오코라는 여자의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두 살인사건의 연관성을 의심하면서 범인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도코로다 료스케와 시부야에서 살해당한 이마이 나오코 사이에 개인적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나오코는 도코로다의 식품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코로다와 나오코가 만나왔던 사실이 밝혀진다. 자신의 남자친구를 가로챈 경험이 있는 나오코로 인해 살인사건을 의심받는 'A코'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 와중에 경찰은 도코로다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역할놀이를 한 사실이 발견한다.
"도코로다 료스케가 소지했던 노트북 하드디스크를 조사한 결과 그가 회사와 가정의 인간관계 외에 인터넷상에서 친구들을 사귀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코로다 료스케에게는 인터넷상에 또 다른 '가족'이 있었던 것이다. 아내와 딸과 아들, 도코로다 료스케를 포함해 4인 가족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아버지', '어머니','가즈미','미노루'라고 부르며 빈번히 메일을 주고받았고 채팅으로 대화를 했다. 또한 그들의 관계는 인터넷상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적어도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한 듯도 했다. 도코로다 료스케가 가즈미에게 또 만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던 것이다. 가장 먼저 확인했지만 닉네임 어머니는 도코로다 하루에가 아니었고, 가즈미도 도코로다 가즈미가 아니였다. 그녀들은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 역할을 연기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고 이구동성으로 진술했다."
소설 <R.P.G>를 읽어나가는 중간 중간에 인터넷상에서 도코로다 료스케를 중심으로 '가족' 역할 놀이를 한 이메일을 볼 수 있었다. 가즈미가 미노루에게 썼다는 이메일, 아버지가 가즈미에게 쓴 이메일 등 가족 역할 놀이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가즈미(딸), 미노루(아들) 이라는 가족 구성원이 등장한다.
"알 수 없는 일들뿐이라 생각하는 데도 질렸어. 어째서 난 이모양일까? 미노루는 불안하지 않아?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불안해.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일까?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때때로 내가 있을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거야. 내가 사라져도 친구들은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 미노루도 그렇지? 또 새 친구를 찾으면 그만이잖아. 부모도 그래.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게 부모라고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변변치 못한 아이라면 없는 편이 나아. 나는 부모님 기대에 아무 보답도 못 하고 있어. 어재서 우리 딸은 이 모양일까, 부모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실걸."
"미노루가 걱정 많은 가즈미에게 한마디 해주라고 부탁하더구나.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를 사랑한단다. 너는 착한 아이야."
살해된 도코로다의 친딸 가즈미는 몇달 전부터 스토커에게 미행당한 사실과 아버지와 관련된 수상한 사람의 이야기를 경찰에게 전한다. 가즈미는 성적이 우수하고 똑똑한 학생이었다. 가즈미는 경찰서에서 아버지 도코로다가 인터넷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역할놀이를 하며 교류가 있었던 세 사람인 닉네임 '가즈미', '미노루', '어머니'를 만난다. 가즈미가 취소실밖에서 세 사람을 보고있는 동안 경찰은세 사람을 순서대로 불러 심문을 시작한다.
"리쓰코(가즈미)는 시네마 아일랜드 게시판과 채팅방에서 속내를 털어놓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는 이야기. 학교도 시시하고, 친구와는 표면적으로밖에 사귀지 못하고,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이야기. 남자친구도 없다. 이대로는 앞날이 불안해서 못 견디겠다. 내 인생은 텅 빈 상태로 지나가버리는 것 아닐까? 그런 불안을 의논할 상대도 없다. 부모님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질 뿐이다. 아버지는 가정에 무관심하고, 어머니도 냉담하다. 어머니는 나를 친구처럼 대하지만 그건 그냥 그러는 편이 어머니도 적당히 편하지 때문이다. 결코 자기 일처럼 걱정해주지는 않는다. 그 누구도."
"자기 생각을 말하고, 누가 그 생각에 대해 이것저것 말해주는 게 굉장히 즐거운 일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어머, 그래? 마음대로 해.' 이게 아니라 제가 열심히 생각한 걸 열심히 받아주고 대답해주는 사람이 있다니 기뻤어요. 집에서는 부모님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잔뜩 써버렸어요. 그 글에도 역시 반응이 많았어요. 그것 말고도 이런 영화를 보면 좋다는 추천도 받았고, 쓸쓸해도 지면 안 된다는 위로도 받았고, 정말 즐거워서.... 어렸을 때 친했던 친구 이름이에요. 가즈미. 초등학교 4학년 때 오사카로 전학 가버렸어요. 동경이랄까? 전 어렸을 때 가즈미가 되고 싶었거든요. 굉장히 착한 아이였어요. 상냥하고 귀엽고, 게다가 똑똑해서 모두들 그 애를 좋아했어요. 집에 놀러가면 가즈미네 어머니도 굉장히 상냥하셨고요."
"나는 이 세상에 있을 자리가 없고, 늘 그렇게 느꼈다고 썼어요. 그랬더니 많은 사람들이 위로도 해주고, 설교도 해주고, 조언도 해줬어요."
리쓰코에게는 고민을 들어주고, 진지하게 의논해주고, 이해심 많고 상냥하고, 딸의 행복을 첫 번째로 생각한다고 말로 아름답게 표현해주는 '아버지'가 생긴 것이다.
"'가즈미, 아버지란다.' 첫머리가 그랬어요. "네가 이 사이트에 드나드는 줄 이제야 알았구나. 글을 읽고 놀랐다. 아버지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래서 너를 몹시 쓸쓸하게 만들었구나, 미안하다."그런 글이었어요. 전..... 기뻐서 눈물이 날 뻤했어요. 아버지하고 가즈미는 부녀지간. 인터넷 속에서 아버지가 생긴 거에요. 늘 원했던 타입의 아버지 말이에요."
"우리는 다들 외로워. 현실 생활 속에서는 그 누구도 도저히 진정한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진정한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고독한 거야. 마음을 이어줄 끈이 필요해."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얼굴을 마주하면 얼굴밖에 안봐요. 외면만 본다고요. 마음을 이어주는 진정한 끈은 그런 외면을 초월한 곳에만 있는데, 친구도, 부모도, 제가 웃으면 즐거우니까 웃는다고만 생각해요. 저는 진정한 나를 감추고 남들한테 맞추는 건데 말예요. 다른 사람들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시늉을 하고, 제가 그렇게 힘겹게 따라하는 줄 알아차리지도 못해요. 아무도 저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지 않아요. 그냥 풍경인 거예요. 하지만 인터넷 속에서라면 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진정한 내 모습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도코로다 료스케와 도코로다 하루에, 도코로다 가즈미의 불행의 원천, 크게 떠들만한 소리를 아니지만 그곳에는 엄연한 사실이 있다. 부모자식 간에도 궁합이 있어, 인간적으로 서로 맞지 않는다면 혈연도 저주스러운 속박이 될 뿐이라는 사실이다. 시간만 있다면 그 속박을 길들여 적당히 거리를 재며 서로 상처 주는 일 없이 생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도코로다 가정은 그럴 시간을 잃었다.
소설 <R.P.G>의 마지막 부분에 반전에 놀랐다. 도코로다 료스케의 친딸 가즈미는 자신만의 정의를 쫓다가 스스로에게 무너져버렸다. 누구든 나를 배반하고 상처 입히는 존재는 결코 용서치 않겠다는 가즈미,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일이라고 말하는 가즈미였다. 가즈미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강하게 의지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불사한다.
"치카코 형사님, 나 말이죠. 어렸을때는 아버지가 정말 귀여워해 주셨어요. 어화둥둥, 보물처럼 대해주었죠. 그래서 난 아버지를 정말 좋아했어요. 아버지에게도 저는 자랑스럽고 귀여운 딸이었고요. 너무나 아름다운 관계죠? 아버지는 나라는 딸이 아니라 아름다운 관계를 사랑했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려서 자기 의사가 없이 아버지의 깜찍한 인형으로 있는 동안에는 한없는 애정을 쏟아주셨던 거에요. 아버지의 바람기도 제가 어리고 귀여운 가즈미였을 무렵에는 조금 잠잠했을 거에요."
"정의요. 누구든 이기심 때문에 남을 상처 입히면 그에 응당한 대가를 받는 거야. 그뿐이에요. 당연한 일이죠.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이에요."
도코로다 요스케는 그가 구축한 인간관계는 어디까지나 그를 둘러싼 인간관계일 뿐이었다. 중심은 도코로다 료스케였다. 그는 그의 위성으로 움직여주는 인간만을 원했다. 하지만 가즈미는 처음으로, 더군다가 그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면서 자기 의사로 그것을 부정하고 거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아내를 길들인 것처럼 딸도 길들이려 했다.
"만일 도코로다 가즈미가 인터넷에 발을 들여놓았다면 어땠을까? 허망한 상상이지만 다케가미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가즈미가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고, 닉네임의 그늘에 온전히 몸을 숨기고 그 속내를 누군가에게 말할 기회를 얻었더라면? 분노로 어둡게 그늘진 눈동자나, 상심으로 완고하게 일그러진 입매는 숨긴 채, 그저 언어로 그런 감정을 누군가에게 쏟아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 인터넷 속의 누군가는, 피와 살을 갖추고 행동력이 있었던 탓에 어설프게 가즈미에게 휘둘린 이시구로 다쓰야가 하지 못했던 역할을 해주었을지도 모른다. 가즈미에게 사로잡히지 않고, 가즈미에게 휘말리지 않는 거리에게 그녀에게 말을 건네고, 그녀를 보듬으며, 그녀의 분노를 이해하는 역할을."
소설 <R.P.G> 끝부분에 도쿠가나가 읊었던 사이조 야소의 '나비'라는 시가 인상적이었다.
" - 나비 -
이윽고 지옥에 내려갈 때,
그곳에서 기다릴 부모와
친구에게 나는 무엇을 가지고 가랴.
아마도 나는 호주머니에서
창백하게, 부서진
나비의 잔해를 꺼내리라.
그리하여 건네면서 말하리라.
일생을
아이처럼, 쓸쓸하게
이것을 쫓았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