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랜덤하우스 히가시노 게이고 문학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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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

<편지>는 <백야행> 등 추리소설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작가의 감성 소설 중 하나이다.

 

동생의 학비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강도살인을 저지른 형과 그런 형을 둔 동생 즉 가해자 가족의 이야기이다. 초반부는 형이 강도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상황과 가족사 등을 그리고 있는데, 문장구조나 묘사등으로 볼때 추리소설 작가인 게이고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되고 있다.

 

중반부는 가해자를 형으로 둔 동생 나오키가 '형' 때문에 구체적으로는 '형이 보낸 편지'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결국은 회사에서도 밴드부에서도 쫒겨나고 사랑하는 여자조차 빼앗기게 되는 고난의 과정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나오키를 동정하고 응원하면서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가까이 하려는 하지 않는다. 살인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물론, 나오키가 겪는 부당한 대우는 동정받기에 충분하지만 작가는 그런 나오키의 상황을 무분별하게 감싸지는 않는다. 오히려 히라노 사장의 말을 빌어, 사회로부터의 차별과 편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슬픔과 아픔의 무게가 큰 것이다. 다케시마 츠요시가 동생에게 편지를 쓰고 피해자의 아들인 오다타씨에게도 몇 년에 걸쳐 끊임없이 사죄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마음의 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는 범죄자의 자기만족일지도 모른다.

 

아마 그런 심리가 클 것이다. 일단, 죄를 인정하고 어떤 식으로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죄를 하면 '죄값'을 치렀다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도 있는 법이라서 이와 같은 '죄값치르기'가 관계자들의 잊고 싶은 기억을 부단히 되살리는 것이다. 츠요시 역시 맨 마지막에 동생으로부터 절교 편지를 받고 나서야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동생 말이 맞습니다. 저는 편지 같은 걸 쓰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습니다. 오카타 씨에게 보낸 편지도 아마 틀림없이 오가타 씨에게는 범인의 자기만족에 불과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을 거란 사실을. 그걸 사죄하고 싶어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이 편지가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케시마 츠요시 올림.                                                     -<편지> 409p 中-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는 역자가 2003년 출판본을 기준으로 옮겼다고 밝힌 걸로 보아 2000년대 초반에 쓰여진 작품이다. 작품 속에는 집단을 우선시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일본인의 특성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남다르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차별의 이유가 되는 사회에서 가해자와 그 가족에 촛점을 맞춘 작품의 탄생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이고와 같은 네임밸류를 갖고 있는 작가가 아니었더라면 시도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 작품은 지극히 일본스러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미국처럼 개인주의와 합리성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피해자의 가족이 겪는 차별과 편견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또 다른 불공정과 불평등이기 때문이다. 역자(권일영氏)가 소개한, 이노우에 유메히토의 해설 역시 이 점을 언급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존 레논의 사망 후 일본인인 그의 아내 오노 요코가 보여준 이중적인 태도야말로 지극히 '일본적'이라는 점 말이다. 오노 요코는 <이매진>의 가사처럼 차별과 편견없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신문광고를 하는 한편, 존 레논의 대역 배우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에게 총을 쏜 살인자의 이름(마크 데이비드 채프먼)과 같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출연을 반대했다. 그 무명배우는 출연료와 함께 배우로 뜰 수 있는 기회마저 동명이인이란 이유만으로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다.

편견과 차별을 주장했던 일본인 오노 요코...

그녀는 지극히 일본인다운 '이중성'에 갖혀 있었던 것이다.

 

내 눈에 비친,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은 이중적인 일본사회의 단면을 지극히 일본인답게 비판한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 중 그 누구도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승리감을 맛보지 못한다. 다케시마 츠요시와 나오키는 물론이거니와 한때 나오키를 사랑했던 아사미, 그리고 밴드부의 데라오 유스케 유미코, 나오키의 아내 유미코와 딸 미키까지 그 누구도 자신의 인생이 아닌, 타인이-혹은 사회가- 강요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일본인 작가가 '가족이란 보는 눈만 없다면 쓰레기처럼 갖다 버리고 싶은 그 어떤 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가족은 삶의 희망이자 버팀목이기도 하지만 또한 삶의 무게요 장벽이기도 하다. 가족과 사회 집단을 우선히 하는 사회에서 가족으로 버림받거나 가족을 버린다는 건 '사회적 자살 행위'나 다름 아니다.

 

츠요시는 가족을 위해 살인을 함으로써 본의아니게 가족을 사회적 죽음 속으로 내몰고, 동생 역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길을 택한다.

종종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난제 속에서 인간성의 진실을 보기도 한다.

 

올 설명절에도 "가족과 함께 하는 기쁜 명절되세요!"라는 인삿말들을 주고 받았겠지만, 이 인삿말처럼 모든 가정이 평온하고 따스한 설 명절을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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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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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이후 두번째로 접하게 된 요네하라 마리의 <러시아 통신>은 영토 크기의 차이만큼이나 정서적으로 멀리 있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에 충분하다. 특히, 1991년 소련 해체이후 공산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체제로 전환해 가는 혼란기의 러시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러시아 통신>은 일본인으로서 어린 시절 러시아의 위성국 체코에서 수학하면서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을 '일찍' 그리고 '직접' 접하고 무엇보다도 일러동시통역사로 활동했던 그녀의 독특한 이력이 없었더라면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 그 어떤 신문기사나 다큐멘터리보다도 훨씬 더 실감나고 정확하게 구소련과 러시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점에서 나를 포함한 그녀의 열혈 독자들은 요네하라 마리에게 어느정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러시아 하면, '시베리아의 혹한과 독한 보드카 및 예술의 나라' 정도의 이해 수준밖에 갖고 있는 못한 나에게 요네하라 마리는 러시아의 화장실 문화(?)와 '다챠' 그리고 그들의 순박한 인간애에 대해 때론 일본인 특유의 조근조근한 목소리로 설명해주는가 하면 때론 러시아인 특유의 열정에 찬 목소리로 웅변한다. 그러나 그녀의 펜끝은 언제나 '사랑에 진실'을 향하고 있다.

 

충격적인 발견이나 재발견을 무한히 안겨주었던 실험국가는 소멸했다. 하지만 그 실험 자체가 무의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과학이라고들 하지만 적어도 자연과학은 아니지. 자연과학이라면 인간에게시험해보기 전에 동물실험을 했을 테니까.

 

러시아인들의 이와 같은 재담으로 웃어넘기는 그 실험의 무참하고도 익살스러운 소멸 과정 역시 또 하나의 실험이었다. 생각해 보면 1917년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탄생시켜서 세계를 뒤흔들더니 이제 다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향하는 노정에 돌진하려는 러시아는 인류를 대표해서 20세기 최대의 역사적 실험 두 가지에 도전한 것이다.

                                                                         요네하라 마리 <러시아 통신> 中-

 

74년만에 해체되는 대국의 모습은 '환란' 그 자체였다. 국민투표로 러시아 최초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옐친은 불과 3년만에 소련 공산당이 70년 동안에도 이루지 못 한, '사회주의가 더 좋다'라는 인식을 러시아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주었다. 소련이 해체된 후, 자본주의 질서가 자리를 잡아가기까지 10여년 동안 러시아에서는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자행되었다. 권력과 연이 닿아 있는 사람이거나 눈치 빠른 사람들에게 이 시기는 부를 축적하는 '행복한 시절'이겠지만 대다수 일반 민중의 삶은 처참하게 내동댕이쳐졌다.

 

중국은 이런 러시아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기 전의 정치 민주화는 없다'라는 굳건한 자세로 21세기를 맞이했다. 만약, 중국이라는 또 다른 실험국가가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경제'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선진화된다면 여기에는 러시아의 공(功)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하겠다.

 

동시 통역사로서 러시아 지도층을 가까이에서 접한 요네하라 마리의 예리한 시각 덕분에 우리는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그라스노스트(개방)로 상징되는 고르바초프와 탱크위의 연설로 유명한 옐친의 인간성까지 살짝 엿볼 수 있는 행운까지 잡을 수 있다.

 

끝으로, 인문 사회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그녀의 에세이집들과 소설 등 많은 작품들이 너무 늦게 한국에 소개되었다는 점이 매우 유감스럽다. 1998년 일본 현지에서 출판된 <러시아 통신>역시 2011년 요네하라 마리가 우리곁을 떠나지 5년이나 훌쩍 지나 한국에 번역, 출판되었다. 만약 우리가 요네하라 마리를 조그만 일찍 만날 수 있었더라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소련과 서서히 무대위로 등장하는 러시아를 조금은 더 관심있는 자세와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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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사이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커뮤니케이션 강의 지식여행자 12
요네하라 마리 지음, 홍성민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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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예기치 못한 우연이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 주나 보다. 

도서관의 신간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한권의 책은 러시아어 동시 통역사인 저자에 대한 나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썸네일   썸네일  

 

 

요네하라 마리는 자신의 전문 분야인 통번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다. 특히 그의 범상찮은 어린 시절의 경험과 동시 통역사로서의 직업적 체험들이 어우려져 저자만의 독특한 세계를 펼쳐보이지만 그 세계가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국제화와 세계화에 대한 분석은 가히 촌철살인이라 할 만하다. 

국가와 국가 사이라는 뜻인 국제화(국제화)는 영어로 Internationalization이라고 하며, 영어로 globalization 또는 globalisation인 세계화는 서구에서는 자신들의 질서를 세계에 보급시키는 걸 의미하는 반면, 일본을 포함한 비서구는 이를 세계적 표준에 스스로를 맞추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영미권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세계화'의 의미는 달리 해석되므로 통번역 과정에서도 이 점을 충분히 유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제화가 곧 세계화요, 세계화가 곧 국제화'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한방 제대로 맞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은 모두 비서구에 속하므로 세계화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가 같다는 점이다. 그동안 세계화를 全球化로 국제화를  国际化로 얼마나 많이 옮겨왔던가...안도(?)의 한숨과 함께 갑자기 '오역의 혐의'에서 자유로운 영어권 통번역사들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궁금해진다.


또한 요네하라 마리는 오역의 역사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특히 '동정녀' 마리아란 표현은 히브리어 원서의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처녀'로 잘못 번역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의도적인 오역이었든 단순한 번역 실수였든 간에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어쩌면 인류 역사는 오해와 오류와 오역의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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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람이라면 한두편씩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봤다는 신경숙 작가.

자타가 공인하는 '국민'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독서 이력서에는 고작 단 한줄뿐이다. 1985년 <겨울 우화>로 데뷰한 작가가 1993년 발표한 단편집 <풍금이 있던 자리>가 내가 읽은 작가의 작품 전부이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한창 '문학열'에 불타 있던 때에 우연히 찾아 들었던 그녀의 강연이 한없이 '우울'했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그랬다. 나에게 깊이 새겨진 작가의 이미지는 우울과 몽상 그리고 나약함이었다. 


그런 그녀가 최근 다시 내 곁에 찾아왔다. 한창 기승을 부리는 꽃샘 추위와 함께...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옌례커의 <딩씨마을의 꿈>, 요시모토 바나나의 <호수> 등과 함께 '2011년 맨아시아 문학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이후 마침내 최종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여기까지는 국제적으로 국가의 위상을 드높인 여타의 소식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탈북자 북송 문제가 쟁점이 되는가 싶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주해군기지 건설 찬반논란과 한미FTA발효 등으로 언론의 관심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린 시점에서 뜻밖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바로, 지난 3월15일.

한 미FTA가 발효되던 그날 홍콩에서 열린 '맨아시아 문학상' 수상식장에서 신경숙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수상소감을 마무리했단다. (신경숙 작가의 수상소감 전문을 중국어로든 한국어로든 혹은 영어로든 구하려고 검색을 했지만 구할수 없어 아쉬움이 크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동시통역사가 말을 받았다. "지금 생존을 위해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들이 다시 북송되는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콘래드호텔 7층 시상식장에서 저녁식사를 끝내가던 참석자 100여명이 허리를 세우고 수상자를 바라봤다. 신경숙이 말했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람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조선일보 '만물상' 中-


'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만의 깊은 슬픔에 빠져, 마치 세상과 담 쌓듯이 도 닦듯이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는 이기적(?)인 작가인 줄로만 알았었는데......


그녀의 수상소감은 그 유명한 하루키의 예루살렘 문학상 수상소감인 '벽과 알'에 버금가는 '힘'이 느껴졌다.


저는 오늘 한명의 소설가, 그러니까 전문적인 거짓말쟁이로 여기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물론 소설가만이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정치가들도 거짓말을 합니다. 

(......)

(그러나) 오늘은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내게 예루살렘 상을 받으려고 여기에 가지 말라고 충고하더군요. 심지어 만일 간다면 사람들에게 제 책을 사지 말라고 선동하겠다는 경고까지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물론 그 이유는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때문입니다. UN은 봉쇄된 가자의 거리에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비무장한 일반 시민들, 어린이와 노인들이라고 발표했습니다.

(......)

수상 통지를 받은 후 수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스라엘로 여행을 가고 문학상 수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이 충돌상황에서 제가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인상을, 그것도 내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휘두르고자 하는 국가의 정책을 지지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닌지 말입니다. 물론 이런 인상을 주는 것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전쟁도, 어떤 국가도 지지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당연히 제 책들이 보이코트 당하는 것들 보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 심사숙고한 끝에 여기까지 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

그러나 한 가지 굉장히 개인적인 메시지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 항상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종이 조각에 적지도 벽에 붙여 놓지는 못했을지라도, 그러니까 그건 내 마음의 벽에 각인되어 있는 말인데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

“높고 단단한 벽과 그것에 부딪쳐 깨진 계란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계란 쪽에 서겠다.”

그래요, 그 벽이 얼마나 옳거나 그 계란이 얼마나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계란을 지지합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렸는지 결정해야 할 겁니다. 아마도 시간이나 역사가 그렇게 하겠지요. 만일 어떤 소설가가 그 이유가 무엇이든지 그 벽을 지지하는 작품을 썼다면 그 작품에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

어느 정도는 우리들 개개인이 계란이라고. 우리들 각자가 독특하고 대체불가능한 영혼을 담은 깨지기 쉬운 계란껍질이라고. 이것이 나의 진실이고 여러분 각자의 진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 정도야 어떻든 모두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벽의 이름은 뭘까요? 바로 시스템입니다. 그 시스템은 우리를 보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벽은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게 되고 우리를 죽이거나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죽이게 만듭니다. 차갑고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인간이며, 국적과 인종과 종교를 초월하여 개인들이며 시스템이라는 단단하고 높은 벽과 마주하고 있는 깨어지기 쉬운 계란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우리에게 승리의 희망은 없습니다.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너무나 강력하며, 그리고 너무나 차갑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어떤 승리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과 타인의 영혼의 절대적인 유일함과 대체불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영혼을 함께 연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온기로부터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우리 각자는 느낄 수 있고 살아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스템은 그런 영혼이 없습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우리를 착취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시스템이 그 자신의 생명을 취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시스템이 우리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시스템을 만든 것입니다.


이점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전부입니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서> by 무라카미 하루키 中-


그렇다! 

신경숙은 정말 약하디 약한 작가이다. 더 이상 '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벽의 일부가 될 수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거대한 '벽' 앞에서 산산히 부서지고 마는 약하디 약한 계란의 편에 섰다.



여기 또 한명의 작가가 있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또한 중국인이 아니기도 하다. 이름은 아라이(阿來), 고향은 쓰촨성 서북부 티베트 자치구인 마얼캉현.


중국어에는 '一方水土一方人'이란 표현이 있다. 사람은 나고 자란 지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중국인인 아라이의 작품은 전혀 중국적이지 않다. 중국 소설 특유의 익살이나 허풍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흔적조차 없고 서사적 구조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다. 중국인에 의해 중국어로 쓰여진 소설이 '중국'답지 않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 작가가 그만큼 중국인의 색채를 띄고 있지 않거나 중국에서 나고 자라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쩌면 티베트인인 작가의 작품이 '중국적'이지 않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티베트인은 중국 한족과는 전혀 다른 생활풍습과 종교와 사유세계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 당대 작가의 작품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 아라이의 목소리는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마음을 비우고 오롯히 티베트적인 분위기에 젖어 보려 노력했으나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티베트와 티베트인에 대한 이해가 그만큼 적고 얕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아라이의 작품은  신(新),구(久) 시대의 변화와 위협받는 민족 정체성을 담담하게 그려냄으로써 아려한 아픔을 자아낸다.


'거라'는 빈총을 내던지면서 소리쳤다.

"왕! 왕왕!"

"왕왕! 왕!"

그가 흉내낸 사냥개 소리는 경쾌하면서도 낭랑하게 숲 전체를 가득 채웠으며, 그 누구도 자신을 침범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 동물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 거라가 오늘 총을 쏜 것이 처음이라면 개 짖는 소리는 마을 전체에서 제일 잘 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개짖는 소리를 배웠다. 사람들이 말했다. "거라, 한번 짖어봐."그러면 거라는 왕왕 짖어댔다.

(.....)

"거라는 자신이 엄마와 똑같이 피를 흘렸고 엄마와 똑같은 신체적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문밖에선 눈 내린 뒤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고, 방 안에선 화로 속의 불꽃이 타닥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공기 속에서는 아들과 엄마의 피냄새가 떠다녔다.

(.....)

엄마가 말했다.

"그 곰 정말 크더라."

"엄마의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많이 아팠어요?"

"많이 아팠지. 듣기 괴로웠나 보구나?"

"아니에요. 엄마"

엄마가 눈물을 반짝이면서 머리를 숙여 거라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엄마의 몸에서 젖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거라의 몸에서도 한약냄새와 피냄새가 물씬 났다.

                                                                              -아라이, <소년은 자란다> 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년 '거라'와 역시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동생을 출산하는 엄마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다름 아닌 '피'이다. 소녀가 출산의 고통을 겪은 후 여자로 거듭나듯, 소년 역시 사냥을 통해 남자로 거듭난다. 소년은 엄마가 동생을 출산하는 사이, 동네 아이들의 사냥을 따라갔다가 무섭게 자신을 추격하는 곰을 쓰러뜨린다. 진정한 남자의 길로 자신을 이끌어줄 아버지가 없는 소년은 이렇게 스스로 성장한 것이다. 마치 엄마 '쌍단'이 떠돌이 몸으로 지촌 마을에 정착하여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아들 거라를 낳고 또 다시 거라에게 예쁜 여동생을 낳아주었듯이...

 

아라이의 <소년은 자란다>는 마치 한편의 영화와도 같다. 짧은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주제의식과 함께 시각과 청각 뿐만 아니라 후각적 효과까지 뛰어나다. 학창시절 교과서에 실려 있던 기-승-전-결에 따른 스토리 라인이 선명한 명작 한편을 접한 기분이다.  

 

훌륭한 작가는 '경험을 재현하지 않고 주제를 구현한다'고 했던가.

이 점에서 볼 때, 아라이는 자신이 성장한 티베트 마을 지촌에서 겪은 경험을 배경으로 '인간과 삶'이라는 주제를 아주 잘 구현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그의 작품은 고작 한편 뿐이다. 언젠가는 그의 '진정성'이 세상에 전해질 날이 반드시 오겠지만, 만약 그가 '계란의 편'에 서게 되고 또한 그 이유 하나만으로 거대한 '벽에 부딪쳐 산산히 부서지기라도 한다면, 어쩌면 우린 영영 그의 작품을 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런 연유로 하여, 나는 조급하게 중국어로 출판된 아라이의 작품집들을 사방팔방 수소문하여 소장하려는 것이다.

.

.

.

신경숙, 하루키 그리고 아라이...

내 마음 속에 두고 두고 기억될 작가들이다.

왜냐하면,

'성공이란 타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란 말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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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니콜라스 카 지음, 최지향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이 우리의 뇌 구조를 바꾸고 있다'

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인터넷 세상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충분한 가치를 갖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의 편리함과 컴퓨터를 인류 두뇌의 대체물로 확신하고 있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1부에서는 문자와 도구가 인류의 사고를 어떻게 확장시켰는지를 다루고 있다. 기록 이전의 시대 즉 문자가 없던 시대에 인류의 지혜는 곧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바로 인류의 기억력이었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기억력에 의지하여 연설을 통해 지혜를 전수시켰다. 그후, 문자가 탄생하고 기록 문화가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더 이상 두뇌의 기억력에만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여러 권의 저서를 남긴 플라톤이야말로 글쓰기를 통해 사상 체계를 이루고 전달한 최초의 학자일 것이다.


완전한 구어 문화에서 사고는 인간의 기억력의 지배를 받는다. 지식은 기억해내야 하는 무엇이며, 기억해내는 대상은 머릿속에 품고 있는 것 내에서 가능하다. 인간이 문자 없이 살았던 수천 년 동안 언어는 개인의 기억 영역에서 복잡한 정보를 저장하도록 하고, 말을 통해 이 정보를 다른 사람들과 교환하기 쉽도록 진화했다. 진지한 생각은 기억 쳬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반면, 글로 쓰여진 말은 개인의 기억력이라는 속박에서 지식을 자유롭게 했고 기억과 암송을 위한 리드미컬하고 형식적인 구조에서 언어를 해방시켰다. 글쓰기 능력은 매우 중요하며 인간 잠재력의 보다 완벽하고 내적인 실현을 위해 진정 핵심적인 것이었다. 글쓰기는 의식을 고취시킨다.

-<생각하지 핞는 사람들> '문자, 새로운 사고의 도구'中-


니콜라스 카는 학자들이 실시한 의미있는 실험이나 논문들을 인용하여 깊이 있게 몰입해서 문자을 읽을 때 인간 두뇌의 시냅스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반면, 인터넷에서의 글읽기는 몰입과 사색을 방해하며 장시간에 걸친 집중적인 읽기 작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검색과 같은 반복적인 작업은 우리의 뇌구조까지 바꾼다는 것이다! 사실, 정보의 바다라고 일컬어지는 인터넷에서 정보와 정보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만 다닐 뿐, 의미 있게 정보를 활용하고 재생산하는 일은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이 되지 않았는가.


인터넷에서 쉽게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인류는 예전처럼 많은 정보들을 뇌속에 저장하려 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인류는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 망각의 바다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건 인류는 스스로 컴퓨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생각하는 힘을 컴퓨터에게 위임한 후 컴퓨터에 속박되어 있는 노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을 인터넷에 아웃소싱하는 것을 환호하는 이들은 은유를 호도하고 있다. 그들은 생물체의 기억이 지닌 근본적으로 유기적인 인격을 간과한 것이다. 정말 기억을 풍부하게 하고 그 특징을 형성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신비함과 연약함뿐 아니라 우연성 때문이다. 몸이 변하듯이 변화하면서 시간 속에 존재한다. 기억을 되살리는 바로 그 행동은 새로운 시냅스의 말단을 만드는 단백질 형성을 포함하는 모든 강화 과정을 다시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셉 르두가 설명했듯이 "기억을 하는 뇌는 기억을 처음 형성하는 그 뇌가 아니다. 오랜된 기억을 현재의 뇌가 이해하기 위해 기억은 업데이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검색과 기억' 中-


또한 저자는 구글 북서치 즉, 구글도서관이라 불리우는-도서관의 종이책들을 스캔하여 검색과 이용 서비스를 제공하려는-프로젝트를 언급하면서 <책의 미래> 저자인 로버트 단턴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하버드 강단에 서며, 도서관 시스템을 관장하고 있는 로버트 단턴은 이렇게 말한다. "구글과 같은 사업체는 도서관을 단지 학문의 전당으로서만 보지는 않는다. 그들은 도서관을 발굴 준비가 된, 자신이 '콘텐츠'라 부르는 것 혹은 잠재적인 자산으로 본다." 그는 이어서 비록 구글이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증진시킨다는 찬사받을 만한 목표를 추구해 오긴 했지만 이윤 추구를 위한 기업에 철도나 철강도 아닌 정보에 대한 접근성의 독접을 허락한다는 것은 너무 많은 위험을 수반한다."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구글이라는 제국' 中-


로버트 단턴의 <책의 미래>를 읽었을 때는 솔직히 핵심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으나, 니콜라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로버트 단턴이 인류를 위해 한, '위대한 행적'을 깨닫게 되었다. 즉, 인류에게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천사의 선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탐구서을 쓴 조지 다이슨은 구글플렉스를 방문한 후 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안락함은 거의 압도적이었다. 행복한 골든 리트리버들이 잔디 위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스프링클러 사이를 느긋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손을 흔들며 웃고 있었고, 도처에 장난감이 널려 있다. 나는 이내 생각지도 못한 악마가 어두운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악마가 지상으로 내려온다면 몸을 숨기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 같은 반응은 분명히 과하긴 하지만 이해할 만하다. 구글의 엄청난 야심과 어마어마한 자금 그리고 지식 세계에 대한 제국적인 디자인과 함께, 구글은 우리의 희망뿐 아니라 두려움 또한 담고 있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세르게이 브린은 "어떤 이는 구글이 신이라고 말합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또 어떤 이들은 악마라고도 합니다."라고 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구글이라는 제국' 中-


1544년 경. 금 주조 기술자였던 구덴베르크가 인쇄기를 발명하여 종이책의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자, 그 당시 지나치게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와 독서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인류를 게으르게 만들고 정신 세계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처럼 구글의 '도서검색서비스'와 '인터넷의 편리함'에 가해지는 비난의 목소리들이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뇌를 컴퓨터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은 인류의 두 다리를 대신했던 기차, 자동차의 탄생이나 눈을 대신하는 망원경의 발견과는 다른 차원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망원경과 같은 발명품들은 인류에 의해 인류를 위한 편리함을 제공할 뿐 인류의 지위에 위협을 가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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