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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미래, 누구에게 달렸나?
양중메이 지음, 홍순도 옮김, 강준영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대표적인 중국 정치 연구가로 손꼽히는 양중메이(楊中美)는 장쑤성 우진 출신으로 중국의 명문 화둥대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석,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시각과 풍부한 자료등을 인용하여 급변하고 있는 중국의 정치 판도를 그 누구보다도 적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적임자로 손꼽힌다. <중국의 미래: 누구에게 달렸나?>는 양중메이가 시진핑을 필두로 한 5세대 지도자로의 권력 이양을 앞두고 있는 중국 정계를 인물 중심으로 분석한 책이다.
양중메이는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군(群)으로 이미 낙점을 받은 시진핑과 리커창이외에도 왕양 리위안차오 보시라이 왕치산과 같은 인물들을 꼽았으며, 군부쪽 인사로 류야저우 우성리 장친성 등을 선정하여 총 아홉명에 대한 인물평과 향후 이들의 활약상을 예측했다.
시진핑은 원로 시중쉰의 아들로 태자당출신이다.
사실, 그는 어느 면에서 보거나 보시라이와 많이 비교되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보시라이와는 정반대로 침착하고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무난한 성격이 급격한 방향전환보다는 체제유지를 원하는 장쩌민과 쩡칭훙의 낙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공청단 출신인 리커창을 지지했던 후진타오와 원자바오의 승인을 받아냄으로써 명실상부한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등극하였다.
한편, 마지막 순간까지 차세대 지도자 자리를 놓고 시진핑과 치열한 경합을 펼쳤던 리커창는 이변이 없는 한, 원자바오의 뒤를 이어 총리에 오를 전망이다. 리커창처럼 공청당 출신으로 차세대 지도자로 손꼽히는 인물로는 광둥성 서기 왕양을 빼놓을 수 없다. 왕양은 여러모로 보나 후진타오와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후진타오가 덩샤오핑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낙점을 받은 후 후계자로 양성된 것처럼 왕양 역시 1991년 안후이성 기층 간부로 있을 당시 개혁을 주장하는 글을 일간신문에 발표하여 개혁 개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남방시찰에 나섰던 덩샤오핑의 눈에 띄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후, 왕양은 주룽지, 원자바오 전총리의 지원 속에서 승승장구를 이어오고 있다.
시진핑을 차세대 지도자로 추천한 쩡칭훙이 태자당이자 상하이방으로 양대 세력 사이의 연합과 힘의 균형을 중재해온 인물이라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향후 쩡칭훙처럼 중국 정계의 핵심 세력인 공청단과 태자당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할 인물로는 리위안차오가 1순위다. 리위안차오는 홍군의 주력 부대였던 신사군의 원로간부 리간청의 아들이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아버지가 홍위병의 타도의 대상이 되는 바람에 고교진학대신 상하이의 농장으로 내려가 어쩔 수 없이 노동자 생활을 하게 된다.
1970년 공청단 간부로 승격한 리위안차오는 1972년 노동자 농민 군인 출신 중 일부에게 대학 진학의 기회를 주었던 특별 조치를 통해 상하이 사범대학 수학과에 입학한다. 대학 졸업후, 수학교사 생활을 하던 그는 1978년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푸단대 수학과에 재입학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졸업 후 대학에 남은 리위안차오는 대학 공청단 부서기를 거쳐 상하이 공청단 서기로 승진한다.
지난 2월 최측근인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이 주중 미영사관으로 진입하면서 결국 낙마한 보시라이는 말 그대로 '풍운아'이다.
그는 보이보의 둘째 아들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가 고등학생이던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부친이 반역파로 내몰리자 어머니 후밍은 홍위병의 위협을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어머니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보시융, 보시라이 그리고 보시청 등 보씨 3형제는 롄둥에 가입하여 문화대혁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가 결국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보시라이는 20세를 전후로 한 5년을 지옥같은 감옥에서 견뎌야만 했다.
마침내 보이보가 사면되자 보시라이 형제도 감옥에서 풀려난다. 감옥에서 나온 후 베이징 대학에 입학한 보시라이는 졸업 후에는 랴오닝 성 등 지방으로 내려가 초급 간부로 활약했다. 이 즈음, 군의관인 리단닝과 결혼하여 아들 리왕즈를 둔다. 구카이라이와 만난 것은 보시라이가 지방 간부로 일할 때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는 결국 이혼하고 베이징대학교 출신 변호사인 구카이라이와 재혼하면서 둘 사이에 보과과라는 아들을 둔다.
보시라이가 다롄시장으로 있던 당시 다롄은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면서 '북방명주'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지만 다롄시 서기 차오바이춘을 필두로 한, 일부 관리들과는 화합하지 못했다. 그의 독단적인 일처리 방식이 주위의 원성을 사게 되면서 보시라이는 시진핑보다 월등한 성과에도 불과하고 중앙후보위원에 진입하는데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야심가였던 보시라이는 정치적 장벽에 굴하기는 커녕 상부부장 직위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다시 한번 기회를 엿본다.
시진핑과 보시라이의 운명이 선명하게 엇갈린 시점은 아마도 2006년 상하이시 서기 경선이 아닐까싶다.
그 당시 후진타오는 원자바오 총리와 손잡고 상하이방의 실세였던 당시 상하이시 서기 천량위를 축출한 다음 자신의 사람으로 상하이시 서기를 임명하기 위해 인선에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었다. 이때 물망에 오른 인물들이 류옌둥, 리위안차오, 리커창, 보시라이, 시진핑 등이었다. 그러나 이때 해외 인터넷 사이트에 '보시라이가 상하이서기 적임자'라는 글이 올라간 사건이 일어나는데, 풍문에 따르면 그 글을 올린 이가 다름 아닌 그의 아내 구카이라이였다고 한다. 역시,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상하이시 서기를 놓고 버린 경쟁에서 보시라이는 시진핑에게 판정패하고 만다.
그러나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보시라이는 절치부심 다시 같은 태자당인 왕치산과 국무원 부총리 자리를 놓고 한판 승부를 준비한다.
국무원 부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원자바오로부터 신임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보시라이는 상무부장으로 이동할 때 자신을 도와준 상무 부총리인 우이를 저버리고 원자바오총리에게 밀착 접근한다. 우이는 여장군이란 별칭을 갖고 있는 만큼 청렴결백하고 능력있는 정치가였지만 원자바오총리와는 코드가 맞지 않았다. 자신의 도움으로 지방에서 중앙 정계로 진출한 보시라이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원자바오 총리에게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자 우이는 왕치산을 적극적으로 추천했고 원자바오 총리 역시 왕치산을 부총리로 임명한다. 보시라이로서는 세번째 고배를 마신 셈이다.
충칭 서기로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보시라이는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되찾고자 한 것처럼 좌익물결을 불러 일으킨다.
일명, '창홍타흑(唱紅打黑: 혁명가를 부르고 조직폭력배를 소탕한다)'이다. 그러나 혁명가곡 공연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 붓고 조직 폭력배 소탕은 자신에게 반기를 들고 전 서기였던 왕양광둥성 서기를 따르던 각계 인사들을 숙청하는 빌미에 불과했다.
자신이 신임하던 왕리쥔과 어떻게 반목하게 되었는지 그 내막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중앙위원 진출을 노리고 있는 보시라이에게는 그간 자신을 대신하여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은 왕리쥔의 존재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보시라이의 비리와 치부를 왕리쥔이 알고 있는 이상 보시라이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미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지목받고 있는 왕리쥔을 사정의 칼날에서 끝까지 보호해줄수도 없는 노릇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를 버림으로써 그와의 모든 연결 고리를 끊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시라이와 함께 산전수전 다 겪은 왕리쥔 역시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염량세대에 능했던 그는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미 영사관으로 망명을 신청하고 만다. 잘만 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행여 실패하더라도 혼자 덤터기를 쓰는 억울함만큼은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시 그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그는 마지막 순간 지푸라기 대신 보시라이의 발목을 확실하게 붙잡고 말았으니 말이다.
현재로선 보시라이가 다시 부활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그렇지만 저우융캉을 포함하여 과거 그의 '덕'을 본 사람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사과의 썩은 부위만 도려내듯 보시라이 한명만 숙청하기도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 역시 혼자서만 외롭게 저승길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최대한 많은 길동무를 데리고 가려고 하지 않을까.
보시라이만큼은 아니지만 사지에서 살아온 인물로 왕치산이 있다.
야오이린의 사위인 그는 개혁파로 1989년 6.4 톈안먼 사건 당시 하마터면 숙청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실제로 그와 뜻을 같이 했던 개혁파들은 톈안먼 사태의 여파로 대부분은 화를 면치 못했다. 화를 당하기는 커녕 왕치산은 오히려 톈안먼 사태 후, 상무 부총리로 취임한 주룽지의 신임을 받으면서 파격적으로 건설은행 총재에 임명되면서 경제계에 첫발을 내딪는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주룽지는 왕치산을 광둥성 부성장으로 임명하여 광둥성 서기 리창춘을 보좌하도록 한다. 리창춘이 누구인가?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는 장쩌민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인물이 아니던가. 그런 그의 밑에서 호흡을 맞춘 덕에 왕치산은 2002년 하이난 성 서기로 발령받는다. 왕치산이 하이난 성 서기로 부임한지 이듬해 사스가 창궐하자 그는 다시 베이징시 부서기로 취임한다.
국가적 재난 앞에서 왕치산은 위기를 기회로 삼아 사스를 잘 막아낸다. 그리고 2004년 마침내 베이징 시장으로 당선된다. 그후, 탄탄대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왕치산은 장인 야오이린처럼 국무원 부총리 자리에 오르면서 5세대 핵심 지도층으로 부상한다.
양중메이는 굳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마오쩌둥의 말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인민해방군을 장악하는 자가 대륙의 진정한 패자라고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중국 군부의 핵심 인물과 그들의 의중을 파악하는 것 역시 향후 중국 정치 판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양중메이는 공군 전략가인 류야저우, 원양 해군의 미래를 걸머쥔 우성리, 총참모장 자리에 가장 가까이 접근해있다고 평가받는 장친성 등을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을 이끌 군부의 핵심지도자로 꼽았다.
중국의 군부는 차세대 지도자 그룹이 형성되는데에 있어 실질적이고도 구체적인 역할을 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만약 막후에서 권력 투쟁이라도 벌어진다면 최후의 승리는 인민해방군이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은 자명해보인다. 시진핑이든 리커창이든 군부와 직접적으로 '통'하는 인물은 없다. 군인 출신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이 군부의 핵심 세력을 통해 군대를 장악하려 할 것이다.
후진타오 역시 장쩌민으로부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를 최종적으로 승계받으면서 명실상부한 1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시진핑이 국가주석 자리에 올라 대내외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더라도 중앙군사위원회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않는 한 '절름발이왕'에 불과하다. 그런데 시진핑이 군부를 장악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소요되는데, 바로 이 기간이야말로 군부내 반발 세력에 의한 쿠데타 발생 가능성이 최고조에 이르는 시기라 할 수 있다. 보시라이가 추락한 것은 어쩌면 이와같은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인물에 가장 가깝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