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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ㅣ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음.......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저 감탄사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살아 있는 등장인물들, 생생한 배경, 그리고 탄탄한 스토리 전개와 숨막히는 반전 등등...
진부할수도 있는 시대소설을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실감나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 '동성애'라는 소재조차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었기에 신선한 충격과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드가 깨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모드에게 갔다. 커튼 사이 공간으로 모드를 바라 보았다. 모드는 베개에서 일어나 잠옷 끈을 매고 있었다. 지난밤 내가 풀어 놓은 끈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몸 안에서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모드가 눈을 들어 내 눈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모드는 자기 옆으로 오라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 모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드는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
나는 모드를 데리고 벽난로 위에 있는 은거울로 데려갔고, 내가 머리를 빗기고 핀을 꽂아 주는 동안 모드는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자기 얼굴을 만지는 내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핀을 거의 다 꽂았을 때야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뭔가 할 말을 찾는 듯했다. 모드가 말했다. (p188~189)
베개에서 몸을 일으키자 잠옷이 가슴팍에서 벌어진다. 수가 어둠 속에서 리본을 풀어 둔 것이다. 나는 다리를 움직인다. 수의 손이 미끄러지고 누르던 곳이 촉촉이, 아직도 촉촉이 젖어 있다. 그리고 수가 와서 나와 시선을 맞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수가 시선을 돌린다. 처음엔 수가 그저 어색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타고 내성적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가 나를 거울로 부른다. 나는 수의 얼굴을 본다. 반사된 모습이 기묘해 보인다.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있다. 수는 내 머리에 핀을 찌르지만 눈은 계속해서 자신의 투박한 손만 바라본다. 나는 생각한다. <수는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입을 연다. (p372~373)
'이게 과연 사랑일까?'
'그 사람 마음도 내 마음과 같을까?'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 반드시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하려 든다.
그리고 섣불리 상대방의 감정을 단정짓고는, 자신의 감정마저 부정하고 부인해 버린다.
특히,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사랑의 경우에는 더더욱...
"내가 정말 정신없이 잤지?"
"네." 내가 말한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악몽도 꾸지 않으시고 말이죠."
"악몽은 안 꿨어." 모드가 말했다. "꿈을 하나 꾸기는 했지만, 하지만 무척이나 달콤한 꿈이었어. 아마...... 아마, 그 꿈에 네가 나왔던 거 같아. 수......"
모드는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내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모드 목에서 맥박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맞춰 내 맥박도 뛰었다.
가슴 속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모드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면, 모드는 내게 키스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사랑해요>라고 말했다면, 모드도 다시 그렇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고 모든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모드를
구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모드를 운명에서 구할 방법을 찾을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젠틀먼을 속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모드를 데리고 도망쳐 랜트 스트리트로 도망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될 터였다. 모드에게 진실을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하니 더욱 몸이 떨렸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모드는 너무나 단순했다. 너무 착했다. 모드에게 뭔가 문제만 있어도, 마음속에 못된 구석만 있었어도 좋았으련만......!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진홍색 멍뿐이었다. 단 한번의 키스가 그 자국을 만들었다. 버러에 가게 되면 모드는 어떻게 행동할까?
게다가, 버러에서 모드와 함께 있게 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존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석스비 부인이 떠올랐다. 모드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핀을 고정한 다음 벨벳 망사를 씌웠다. 나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
아가씨 꿈에서요? 아닐 거예요. 아가씨, 제가 아닐 거예요. 분명..... 분명, 리버스 씨일 거예요."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보세요. 저기 계시잖아요! 벌써 담배를 거의 다 태우셨네요. 저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좀 기다려 보시기만
하면요."(p189~190)
사랑이...
운명이...
스쳐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내가 정말 정신없이 잤지?" 굉장히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안 그래?"
수의 눈꺼풀이 떨린다.
"그러셨어요." 수가 대답한다. "악몽도 꾸지 않으시고 말이죠."
"악몽은 안 꿨어. 꿈을 하나 꾸기는 했지만." 내가 말한다. "하지만 그 꿈은...... 그 꿈은 무척 달콤했어. 그 꿈에 네가 나왔던 거 같아. 수......"
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수가 홍조를 띠는 것을 보면서, 입 맞추던 순간 수의 입술이 누르던 힘이, 우리의 격렬하고 불완전하던 키스의 이끌림이, 밀어 올리던 수의 손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나는 수를 속일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수를 속일 수 없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나는 말할
것이다. <넌 나를 착하다고 생각하지. 난 착하지 않아. 하지만 난 너와 함께라면, 착해지도록 노력할 수 있어. 이건
리처드의 계획이었어. 우린 그 계획을 우리 걸로 만들 수 있어.......>
"아가씨 꿈에서요? " 마침내 수가 내게서 떨어지며 말한다.
"아닐 거예요. 아가씨, 제가 아니에요. 리버스 씨일 거예요. 보세요! 저기 계시잖아요. 담배를 거의 다 태우셨네요. 아가씨는 저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수는 한 번 말을 더듬는다. 하지만 그다음 계속 말을 잇는다. "저 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좀 기다려 보시기만 하면요."(p373~374)
수전과 모드가 갈등하는 장면이다.
수전은 모드와의 관계를 이미 지난 과거의 일로 묻어두려 한다. 이유는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한편, 모드는
수와의 관계를 현재로 바라보고 있다. 오히려 리처드(젠틀먼)와의 계략을 이미 지난 과거로 삼고 마음을 바꾸어 수전을 구하려 한다.
미세한 시제의 변화로 작가는 독자에게, 모드는 수전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수전은 모드를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
이 밖에도,
예민한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두 등장인물이 느끼는 두 사람간의 대화 역시 똑같아 보이지만, 뉘앙스적 차이가 상당하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수전은 갈등하고, 모드는 결심한다.
물론, 모드도 심리적 갈등을 하지만 수전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수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전은 그렇지 않다.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나 수전의 이런 머뭇거림이 모드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위의 두 인용문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모드는 수전의 말을 훨씬 더 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드는,
수전은 아니라고 모드 자신이 느낀 것과는 다르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날 하루 종일 우리는 서로 서먹서먹해했다. 우리는 걸었지만, 떨어져 걸었다. 모드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내가 피했다. (......) 그날 저녁 모드가 밤새 뒤척이고 한숨 쉬는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뒤척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둘을 연결한 실이 내 심장을 당기고 있기에, 너무나 세게 당기고 있기에 심장이 아려 왔다. 침대에서 일어나 모드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백번도 넘게 들렸다. <모드에게 가! 뭘 기다리는 거야? 모드 옆으로 가!>라는 생각이 백번도 넘게 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만약 그렇게 했을 때 일어날 일이 떠올랐다. 모드 옆에 누우면 모드를 만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드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으면 키스하고 싶어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키스를 하면 모드를 구하고 싶어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에도, 그다음 날 저녁에도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더는 밤은 없었다. 시간이, 언제나 그토록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돌연 빠르게 흘러 4월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무언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p190)
나는 수의 손에 한 대 맞기라도 한 양 잠시 놀라 멍하니 앉아 있다. (......)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니 전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수가 화장방으로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수가 앉아서 얼굴을 감추는 모습을 지켜본다. 나는 기다리지만, 수는 내 쪽을 보지 않는다. 다시는 수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수를 구할 생각이었다. 내가 정말로, 정말로 리처드의 계획에서 발을 뺀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하게 보인다.
리처드는 수를 데리고 브라이어를 떠날 것이다. 왜 수가 머물겠는가? 수는 갈 것이고, 나는 남을 터이다. 삼촌 곁에, 책 옆에,
스타일스 부인 옆에, 새로운 유순하고 멍들기 쉬운 여자 아이 옆에...... 나는 내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을 이루어 온
시간을, 분을, 날을 생각해 본다.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아직도 살아 나가야 할 시간을, 분을, 날을 생각해 본다. 그 모든 시간이 어떨지를 생각해 본다. 리처드가 없다면, 돈이 없다면, 런던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면, 그리고 수가 없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신은 알게 된다. 결국은 사랑 때문에, 경멸도, 악의도 아닌, 단지 사랑 때문에 내가 결국은 수를 상처 입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p374~375)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이 거부되었다고 확신하고 상대방으로 향하던 자신의 사랑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라 워터스는 단순히 주인공의 시점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뛰어난 점은 같은 공간 같은 상황을 수전과
모드 두 주인공이 어떻게 각자 다르게 이해하고 느끼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도 여러 이야기들을 한참이나 한 다음에
말이다. 독자들은 또 다시 같은 상황 같은 공간속으로 인도됨으로써 기묘한 '기시감'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런 작가의 '트릭'을 몰랐던 독자들은 시제의 변화에 어리둥절하다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
하나는 '사랑했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복선'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엇갈린 운명...
음모와 배신...
거부할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오해와 진실...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는 놀랍도록 완벽한 소설이다.
'진부하고 통속적이며 외설적인 내용'이 그녀의 손을 거쳐 '재밌고 실감나며 감동적인 작품'으로 탄생했다.
역자의 말처럼 세라 워터스야말로 최고의 '핑거스미스'라 하겠다. 그녀는 놀랍도록 완벽한 솜씨로 독자의 마음을 훔쳐냈다. 작품 제목인 '핑거스미스'는 영국 빅토리아시대에 소매치기, 사기꾼, 속이는 사람 등을 일컫는 표현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