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lor Purple (Paperback, International Edition)
앨리스 워커 지음 / Harcourt / 2007년 3월
평점 :
절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영화의 원작은 앨리스 워커라는 흑인 여류작가의 작품으로 80년대 초반에 쓰여졌단다. 생각보다 최근(?)작이라서 다소 놀랐다. 그러니까 소설이 출간되고 퓰리처상 등을 수상하면서 바로 영화화 된 것이리라.


작품의 배경은 마차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것으로 봐서 19세기 후반 혹은 20세기 초반-흑인마을에 자동차가 등장한다는 걸 감안하면 20세기 초반일 가능성이 크지만-미국의 흑인 가정이다.


처음에는 흑인 여성의 인권을 다룬 작품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작품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차별문제를 바탕으로 하여,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과 근친상간 그리고 동성애까지......

소재와 내용만 놓고 본다면 막장도 이런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을 정도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님도 백인이고 남자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바로 '와스프(WASP: 앵글로색슨 백인 신교도)'다.

잘 알다시피, 와스프는 미국 사회의 주류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은 20세기부터 21세기에 걸쳐 세계 패권국가라는데에는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오늘날 세계는 '미국인이면서 백인에 신교를 믿는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더 컬러 퍼플>은 소외받는 흑인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과 극복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주인공인 씰리와 네티는 자매다.

언니 씰리는 의붓아버지-그 당시에는 생부인줄 알고 있었다.-에게 성폭행을 당해 아이 둘을 출산한다. 그녀의 엄마는 끝끝내 자매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은 채 병으로 죽고 만다. 네티 대신 아이들이 딸린 남자에게 시집을 간  씰리를 기다리는 건 남편의 학대와 끝없는 노동뿐이다. 남편은 첫사랑인 슈그를 잊지 못하는 상태에서 병든 슈그를 집으로 데려와 씰리로 하여금 돌보게 만든다.

정말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더 말도 안되는 건 남편의 애인인 슈그를 향한 씰리의 '사랑'이다.

여성간의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동성애 영화라고 하기엔 너무도 가벼운 뭐라 정의내리기 어렵다.


작가는 굳이 두 마리의 토끼를 쫒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앨리스 워커는 지나치게 욕심이 많았거나 아니면 의욕이 앞서지 않았나 싶다.

왜냐하면 이상에서 언급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네티가 언니의 아이들을 입양한 흑인목사 부부를 따라 아프리카로 선교를 가면서 아프리카 토속신앙와 개신교의 충돌(?)까지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앨리스 워커가 20세기를 대표적인 흑인 인권 운동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흔히, 현장 운동가들은 예술과 문학보다는 이념과 행동을 더 중시하므로...



이 작품이 예상을 깨고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어쩌면 세상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절대 바뀌지 않는 단단한 세상이 어쩌다가 우연히 보여준 작은 '호의'가 아니었을까?


베스트셀러가 반드시 베스트북인 건 아니듯, 상을 수상한 수상작품들이라고 해서 모두 다 뛰어난 작품성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시대 상황과 출판사 및 문학상 주최측 사이의 오묘한 헤게모니로 인해 시공간을 뛰어넘는 명작은 쉽게 묻혀버리고, 대중의 관심과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킬 작품들이 환영받기 쉽다.


미국인들은 과거 흑인노예제도를 갖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흑인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극과 극'을 달리는 것 같다.

지나치게 우호적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비판적이거나......


만약 작가가 인종문제든 남여차별문제든 어느 한가지 주제만을 선택하여 깊숙히 천착해 들어갔더라면 시대를 뛰어넘어 공감을 얻는 더 한층 뛰어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끝으로, 번역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자인 안정효는 원문을 최대한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직역(?) 번역가라 하겠다.

한편, 앨리스 워커는 작품 속에서 흑인토속영어(black folk English) 을 고스란히 재연해 놓았고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주인공 씰리가 하느님께 쓰는 편지형식을 취하고 있다. 문법도 맞지 않고 발음대로 적은 문장들이 대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씰리가 나이를 먹어가고 글자를 깨우치게 되면서 문장들은 서서히 현대 영어 문법에 가까워진다.


<더 컬러 퍼플>이라는 작품이 갖는 가장 큰 매력 중에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이 중반부를 거쳐 후반부로 갈수록 서서히 완벽해지는 문장들은 주인공 씰리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색다른 감흥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마치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리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박경리의 <토지> 등의 작품을 통해 걸쭉한 지방 토속사투리와 구한말에 쓰였던 사라진 옛표현들을 접하며 느끼는 감동처럼 말이다.


역자에게 가장 어려운 건, 원문 텍스트의 문체를 살려내는 일이다.

원 문 텍스트에 사용된 언어 자체의 특징과 매력이기때문에 또다른 언어로는 표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역자 역시 후기를 통해 이 점이 가장 고민스럽고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원작의 문체적 특징을 최대한 살려내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문장 해체'라는 번역 기법을 채택하여 아주 훌륭하게 목적을 이루었다.

영어 번역가들 사이에서 이 작품이 '바이블'처럼 인정받고 있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소설가로도 널리 알려진 안정효의 세심한 번역이 없었더라면 <더 컬러 퍼플>은 어느 한 시절을 풍미하고 사라져 버리는 베스트셀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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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프롬은 자신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즉, 어떻게 사랑하는지 배우고 싶다면, 다른 기술이나 음악, 그림,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한 가지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이론에 따라 훈련하되, 실패시 문제점을 파악한 후 교정해 나가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다하더라도 완벽하게 숙달되기전까지는 배우려는 노력을 멈추어서도 안된다. 만약, 노력을 게을리하면 그 수준에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퇴보하고 만다. 그러므로 다음에 다시 시작하고자 할 때에는 멈추었던 그 지점에서가 아니라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쉽게 빠지지만 사랑을 제대로 하는 기술을 익힌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사랑의 기술을 마스터(?)한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은 열정'이라고 말할 때, '사랑은 헌신이요 희생'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할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한다.

애완동물이나 아기들의 사랑은 절대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대상을 사랑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에 따르는 헌신과 희생은 강요된 의무에 가깝다.(어느 한쪽의 헌신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사랑을 유아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부모의 절대적인 헌신과 희생 속에서 성장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사랑의 기술을 익힌 성숙한 성인의 경우에는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한 것'임을 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사랑에 헌신하고 희생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후에도 그 빈자리를 지킨다.  


우린 잘 알고 있다.

하나는 '사랑했다'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한다'라고 했을 때, 먼저 마음이 떠난 자가 오히려 인간관계의 주도권을 쥔 강자가 되어, 아직 마음이 떠나지 않은 약자의 관계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걸...

그리고 결국엔,

사랑이 지나간 빈자리엔 후회와 분노와 원망이 빠르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린 깨닫게 된다.

경멸도 증오도 아닌, 사랑때문에 단지 사랑때문에 상처입을 수 있다는 걸...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완벽하게 배워 익힌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진정한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면서, 스스로는 사랑에 울고 웃었노라 착각하며 떠나고 만단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이라 여겼던 건,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가장한 자기연민 혹은 나르시시즘으로, 완전한 사랑을 위한 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습이었다면, 더더욱 실패와 상처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실수없이 무언가를 배울 수 없고,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통달할 수 있는 진리란 것은 없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많이 아프다면, 상처 없이 사랑을 배우려고 했던 건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사랑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었고, 앞으로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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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충성 - 충성과 배신의 딜레마
에릭 펠턴 지음, 윤영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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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처럼 모순적인 가치관도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충성은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추앙받아 왔다.

가족에 대한 충성...

친구에 대한 충성...

회사나 조직에 대한 충성...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까지....


그런데 문제는 충성의 대상이 다름에 따른 충돌이 너무나도 흔히 일어난다는 점이다.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가족에 대한 헌신을 포기해야 하며, 가족에 충성하기 위해선 조직과 국가를 배신해야 하는 일들이 허다하다.


<위험한 충성>은 바로 이와 같은 딜레마에 대한 솔루션을 제공해주는 책이다.

해 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저자인 에릭 펠턴은 우선 충성이라는 가치관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인류 역사상 어떻게 적용되어 왔는지를 알려준다. 충성은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했던 초기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이데올로기였다. 

위험한 야생짐승을 사냥하고 다른 부족으로부터 종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매우 위험했으며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여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높은 충성심이 필수적이었기에 인류는 충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이처럼 충성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더 이상 야생 생활을 하지 않게 된 사회에서도 인류는 생존하기 위해 충성해야만 했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생존하기 위해 충성을 버리기도 한다. 대다수의 배신은 단순히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이, 그저 상대방을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기 위해 행해지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 충성과 배신은 생존이라는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지만 정반대적인 이율배반적 가치관이라 하겠다.


내부고발자를 예로 들어보자.

그가 속한 조직 입장에서 그는 조직에 충성하지 않은 배신자이다. 그러나 조직의 범주를 뛰어넘어 사회나 국가 혹은 인류 전체로 봤을 때 과연 그의 행동은 지탄받아 마땅한 배신일까?

우리는 조직에 대한 충성이 강한 조직일수록 외부에 대해서 매우 폐쇄적이고 부패하기 쉽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조직에게는 이로운 행동이 국가에게는 해로운 경우,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충성을 해야 하는가? 공동선의 관점에 보자면, 당연히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이 언제나 올바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국가에 대한 충성이야말로 국가를 파멸로 몰아가고 인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역사는 반복해서 말해주고 있다.


인류의 통치자들은 하나같이 피지배자들의 '충성'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통치이념은 과거 나치당과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 가족 해체를 불러왔다. 보편적인 정의와 선에 의한 충성이 아닌 경우, 충성에 따른 피해는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일방적으로 충성만을 강조하는 국가와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충성이라는 천으로 가리려는 불편한 '음모'가 감추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찍이 톨스토이가 주장했듯, 충성의 대상을 국가나 가정에 한정시키지 않고 인류 전체로와 확대시키면 문제가 해결될까?


톨스토이는 애국심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터무니없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쓴다. "애국심은 본질적으로 다른 나라를 희생하여 자신이 속한 나라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이끌기 때문에 비도덕적이다."  

-에릭 펠턴, <위험한 충성> p263 中-



이에 대해 저자는 건전한 정의와 보편적인 선에 입각한 국가에 대한 충성 즉, 애국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조국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유형의 사랑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변덕스럽고 자극적일 수 있다. 우리는 반추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호전적인 애국주의가 발현될 수 있는 천박한 충동이 꿈틀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가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기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이 필요하다. 자치를 통해 유지되는 공동체라면 더욱 그렇다.

-에릭 펠턴, <위험한 충성> p273 中-




충성이 자주 충돌을 불러온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충성이라는 가치관을 폐기처분해야만 하는걸까?

만약, 충성을 버린다면 우린 과연 믿음과 헌신 그리고 사랑을 어디서 느끼고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여기에, 충성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가족에 충성하는 것은 자식의 범죄행위까지 감추어야 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마찬가지로 친구에 대한 의리는 경제적 피해를 입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친구에게 돈을 융통해주는 행위로 표출되어서도 안 된다. 가족을 사랑할수록 가족이 올바른 길을 걸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친구를 믿을수록 잘못된 길로 들어선 친구를 묵인하거나 동조하는 것이 아닌 '구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족에 대한 진정한 충성(헌신)이요, 친구에 대한 진정한 충성(의리)인 것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충성'은 충성이 아니다.


충성은 도전과 좌절을 초래한다. 하지만 모든 좌절이 그렇듯, 모순되는 충성의 까다로운 갈등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우리는 그런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어떤 충성이 바람직한 것인지, 누가 진정으로 충성하는지, 누가 충성을 악용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충성은 오류를 피할 수 없으며, 또 피해 갈 수도 없다. 충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나약함에 의해 쉽게 타락할 수 있는 미덕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폐기해버린다면, 사랑과 믿음과 헌신도 함께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다.


-에릭 펠턴, <위험한 충성> p283 中-


쉽게 간과하고 말았을...

그래서 어쩌면 진정한 의미를 깨닫기 못한 채,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생을 '배신'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는...

이 땅의 충성스러운(?) 이들에게 한여름 소낙비와 같은 책이다.


올바른 충성을 위해서는 부지런함과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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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거스미스 세라 워터스 빅토리아 시대 3부작
세라 워터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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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을수록 아무말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저 감탄사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뿐이다.



살아 있는 등장인물들, 생생한 배경, 그리고 탄탄한 스토리 전개와 숨막히는 반전 등등...

진부할수도 있는 시대소설을 철저한 고증에 입각하여 실감나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 '동성애'라는 소재조차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동성애를 정면으로 다루었기에 신선한 충격과 더 큰 감동을 느낄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드가 깨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모드에게 갔다. 커튼 사이 공간으로 모드를 바라 보았다. 모드는 베개에서 일어나 잠옷 끈을 매고 있었다. 지난밤 내가 풀어 놓은 끈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다시 몸 안에서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모드가 눈을 들어 내 눈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시선을 피했다.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모드는 자기 옆으로 오라고 나를 부르지 않았다. 모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드는 내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지만 잠자코 있었다. (......)

나는 모드를 데리고 벽난로 위에 있는 은거울로 데려갔고, 내가 머리를 빗기고 핀을 꽂아 주는 동안 모드는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자기 얼굴을 만지는 내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핀을 거의 다 꽂았을 때야 고개를 들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눈을 깜빡였다. 뭔가 할 말을 찾는 듯했다. 모드가 말했다. (p188~189)



베개에서 몸을 일으키자 잠옷이 가슴팍에서 벌어진다. 수가 어둠 속에서 리본을 풀어 둔 것이다. 나는 다리를 움직인다. 수의 손이 미끄러지고 누르던 곳이 촉촉이, 아직도 촉촉이 젖어 있다. 그리고 수가 와서 나와 시선을 맞춘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수가 시선을 돌린다. 처음엔 수가 그저 어색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타고 내성적이라 그렇다고 생각한다.(......)

수가 나를 거울로 부른다. 나는 수의 얼굴을 본다. 반사된 모습이 기묘해 보인다. 일그러지고 왜곡되어 있다. 수는 내 머리에 핀을 찌르지만 눈은 계속해서 자신의 투박한 손만 바라본다. 나는 생각한다. <수는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입을 연다. (p372~373)


'이게 과연 사랑일까?'

'그 사람 마음도 내 마음과 같을까?'

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 반드시 상대방의 감정을 확인하려 든다.

그리고 섣불리 상대방의 감정을 단정짓고는, 자신의 감정마저 부정하고 부인해 버린다.

특히,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사랑의 경우에는 더더욱...



"내가 정말 정신없이 잤지?"

"네." 내가 말한다.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악몽도 꾸지 않으시고 말이죠."

"악몽은 안 꿨어." 모드가 말했다. "꿈을 하나 꾸기는 했지만, 하지만 무척이나 달콤한 꿈이었어. 아마...... 아마, 그 꿈에 네가 나왔던 거 같아. 수......"

모드는 기다리고 있다는 듯 내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모드 목에서 맥박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그에 맞춰 내 맥박도 뛰었다. 가슴 속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때 모드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면, 모드는 내게 키스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사랑해요>라고 말했다면, 모드도 다시 그렇게 말해 주었을 것이다. 그러고 모든 것이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모드를 구할 수도 있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모드를 운명에서 구할 방법을 찾을수 있었는지도 몰랐다. 우리는 젠틀먼을 속일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모드를 데리고 도망쳐 랜트 스트리트로 도망갔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될 터였다. 모드에게 진실을 털어놓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하니 더욱 몸이 떨렸다.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모드는 너무나 단순했다. 너무 착했다. 모드에게 뭔가 문제만 있어도, 마음속에 못된 구석만 있었어도 좋았으련만......!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진홍색 멍뿐이었다. 단 한번의 키스가 그 자국을 만들었다. 버러에 가게 되면 모드는 어떻게 행동할까?

게다가, 버러에서 모드와 함께 있게 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존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석스비 부인이 떠올랐다. 모드가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핀을 고정한 다음 벨벳 망사를 씌웠다. 나는 침을 삼키고 말했다.

" 아가씨 꿈에서요? 아닐 거예요. 아가씨, 제가 아닐 거예요. 분명..... 분명, 리버스 씨일 거예요." 나는 창가로 걸어갔다. "보세요. 저기 계시잖아요! 벌써 담배를 거의 다 태우셨네요. 저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좀 기다려 보시기만 하면요."(p189~190)

 

사랑이...

운명이...

스쳐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이다.



"내가 정말 정신없이 잤지?" 굉장히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안 그래?"

수의 눈꺼풀이 떨린다.

"그러셨어요." 수가 대답한다.  "악몽도 꾸지 않으시고 말이죠."

"악몽은 안 꿨어. 꿈을 하나 꾸기는 했지만." 내가 말한다. "하지만 그 꿈은...... 그 꿈은 무척 달콤했어. 그 꿈에 네가 나왔던 거 같아. 수......"

수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리고 수가 홍조를 띠는 것을 보면서, 입 맞추던 순간 수의 입술이 누르던 힘이, 우리의 격렬하고 불완전하던 키스의 이끌림이, 밀어 올리던 수의 손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나는 수를 속일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수를 속일 수 없다.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냐.>나는 말할 것이다. <넌 나를 착하다고 생각하지. 난 착하지 않아. 하지만 난 너와 함께라면, 착해지도록 노력할 수 있어. 이건 리처드의 계획이었어. 우린 그 계획을 우리 걸로 만들 수 있어.......>

"아가씨 꿈에서요? " 마침내 수가 내게서 떨어지며 말한다.

"아닐 거예요. 아가씨, 제가 아니에요. 리버스 씨일 거예요. 보세요! 저기 계시잖아요. 담배를 거의 다 태우셨네요. 아가씨는 저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수는 한 번 말을 더듬는다. 하지만 그다음 계속 말을 잇는다. "저 분이 그리워지실 거예요. 좀 기다려 보시기만 하면요."(p373~374)


수전과 모드가 갈등하는 장면이다.

수전은 모드와의 관계를  이미 지난 과거의 일로 묻어두려 한다. 이유는 앞으로 닥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한편, 모드는 수와의 관계를 현재로 바라보고 있다. 오히려 리처드(젠틀먼)와의 계략을 이미 지난 과거로 삼고 마음을 바꾸어 수전을 구하려 한다.

미세한 시제의 변화로 작가는 독자에게, 모드는 수전을 위해 모든 걸  포기했지만 수전은 모드를 위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암시해 준다.


이 밖에도,

예민한 독자라면 이 장면에서 두 등장인물이 느끼는 두 사람간의 대화 역시 똑같아 보이지만, 뉘앙스적 차이가 상당하다는 걸 감지하게 된다.


수전은 갈등하고, 모드는 결심한다.

물론, 모드도 심리적 갈등을 하지만 수전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수월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수전은 그렇지 않다. 결국 사랑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다. 그러나 수전의 이런 머뭇거림이 모드에게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위의 두 인용문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모드는 수전의 말을 훨씬 더 단호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드는, 수전은 아니라고 모드 자신이 느낀 것과는 다르다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날 하루 종일 우리는 서로 서먹서먹해했다. 우리는 걸었지만, 떨어져 걸었다. 모드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내가 피했다. (......) 그날 저녁 모드가 밤새 뒤척이고 한숨 쉬는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뒤척이고 한숨을 쉬었다. 우리 둘을 연결한 실이 내 심장을 당기고 있기에, 너무나 세게 당기고 있기에 심장이 아려 왔다. 침대에서 일어나 모드에게 가고 싶은 마음이 백번도 넘게 들렸다. <모드에게 가! 뭘 기다리는 거야? 모드 옆으로 가!>라는 생각이 백번도 넘게 들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만약 그렇게 했을 때 일어날 일이 떠올랐다. 모드 옆에 누우면 모드를 만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드의 숨결이 내 입술에 닿으면 키스하고 싶어지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키스를 하면 모드를 구하고 싶어지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다음 날 저녁에도, 그다음 날 저녁에도 나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 더는 밤은 없었다. 시간이, 언제나 그토록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돌연 빠르게 흘러 4월말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무언가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 (p190)


나는 수의 손에 한 대 맞기라도 한 양 잠시 놀라 멍하니 앉아 있다. (......)

모든 것이 바뀌었다. 아니 전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 수가 화장방으로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수가 앉아서 얼굴을 감추는 모습을 지켜본다. 나는 기다리지만, 수는 내 쪽을 보지 않는다. 다시는 수가 나를 정직하게 바라보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나는 수를 구할 생각이었다. 내가 정말로, 정말로 리처드의 계획에서 발을 뺀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가 이제는 너무나 명확하게 보인다. 리처드는 수를 데리고 브라이어를 떠날 것이다. 왜 수가 머물겠는가? 수는 갈 것이고, 나는 남을 터이다. 삼촌 곁에, 책 옆에, 스타일스 부인 옆에, 새로운 유순하고 멍들기 쉬운 여자 아이 옆에...... 나는 내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삶을 이루어 온 시간을, 분을, 날을 생각해 본다.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아직도 살아 나가야 할 시간을, 분을, 날을 생각해 본다. 그 모든 시간이 어떨지를 생각해 본다. 리처드가 없다면, 돈이 없다면, 런던이 없다면, 자유가 없다면, 그리고 수가 없다면.


그리고 그렇게 해서 당신은 알게 된다. 결국은 사랑 때문에, 경멸도, 악의도 아닌, 단지 사랑 때문에 내가 결국은 수를 상처 입히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p374~375)



상대방으로부터 사랑이 거부되었다고 확신하고 상대방으로 향하던 자신의 사랑을 거두어 들이는 순간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 세라 워터스는 단순히 주인공의 시점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뛰어난 점은 같은 공간 같은 상황을 수전과 모드 두 주인공이 어떻게 각자 다르게 이해하고 느끼는지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그것도 여러 이야기들을 한참이나 한 다음에 말이다. 독자들은 또 다시 같은 상황 같은 공간속으로 인도됨으로써 기묘한 '기시감'에 빠져 버리고 만다. 

이런 작가의 '트릭'을 몰랐던 독자들은 시제의 변화에 어리둥절하다가,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

하나는 '사랑했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하고 있음'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작가의 철저한 '계산'에 의한, '복선'이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다.



엇갈린 운명...

음모와 배신...

거부할 수 없는 사랑...

그리고 오해와 진실...



세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는 놀랍도록 완벽한 소설이다. 

'진부하고 통속적이며 외설적인 내용'이 그녀의 손을 거쳐 '재밌고 실감나며 감동적인 작품'으로 탄생했다. 

역자의 말처럼 세라 워터스야말로 최고의 '핑거스미스'라 하겠다. 그녀는 놀랍도록 완벽한 솜씨로 독자의 마음을 훔쳐냈다. 작품 제목인 '핑거스미스'는 영국 빅토리아시대에 소매치기, 사기꾼, 속이는 사람 등을 일컫는 표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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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번호 113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20
류성희 지음 / 황금가지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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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번호 113>은 범죄추리소설이지만 초반에 범인이 들어나므로 '누가, '어떻게'에 기반한 정통추리물이라기보다는 '왜, 어째서'에 무게가 실려 있다.


한 젊은 남자가 무참히 살해된다.

범인은 젊은 여자다.

그녀는 어째서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을까?

여자는 엄마에 대한 과거의 기억에 집착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가정적으론 불행한 중년 여인이 있다.

우연히 딸의 살인 현장을 보고는 딸의 범행을 감추려 한다.

모성이란 이렇게 무모하리만치 강한 걸까?

여인은 딸의 죄를 뒤집어 써서 희생양이 됨으로써 자신의 과거 잘못을 스스로 징벌하려 한다. 이런 행동이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딸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라는 건 모른 채.


엄마로부터 벗어나려는 또 다른 젊은 여자가 있다.

엄마의 집착이, 자신을 향한 엄마의 그 사랑이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검사가 되어 사건을 파헤치고, 다시 변호사의 신분으로 진범을 밝혀낸다.

이 과정에서 비록 너무 늦었지만 엄마에 대한 미움이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깨달음은 이렇듯 언제나 한발 뒤늦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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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류성희 작가의 단편추리소설들을 읽고는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그녀의 장편인 <사건번호 113>은 읽기 전부터 기대가 컸던 작품이다.  

대형서점에서 심심풀이로 몇 페이지를 넘겨 읽다가는 추석 명절 연휴를 앞두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명절 연휴 기간 동안 다 읽어 버렸다.

기대가 컸기 때문인지 아쉬움 또한 큰 작품이다.

법률과 법정 및 재판 과정 등등...

작가 나름대로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여 사실성을 높이려 했으나, 지나치게 주제의식에 매몰되었다는 느낌이다. 

작품속에서 작가는 철저하게 등장인물 뒤로 자신을 감춰야 한다. 등장인물보다 작가의 목소리가 커지면 생동감이 사라지고 사실성이 떨어져 독자는 감정이입을 방해받게 된다.


작가는 법을 이야기하고 싶었단다.

변호사 혹은 검사로 또는 딸이나 엄마의 입장에서 바라본 '사실'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며, 법의 잣대 역시 신분과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의 부조리를 말하고 싶었으리라.


법의 잣대는 어떤 상황에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공정한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살인에는 무조건 사형'과 같은 법이 공정하다고 할 순 없듯이...

법이 공정하고 공평하기 위해선, 상황과 입장에 따라 불공정하고 불공평해 질 수 밖에 없다.

바로, 법의 부조리다.


하긴 뭐...

우리의 삶 자체가 부조리함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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