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프롬은 자신의 명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기술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즉, 어떻게 사랑하는지 배우고 싶다면, 다른 기술이나 음악, 그림, 의학이나 공학 기술을 배우려고 할 때 거쳐야 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한 가지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이론에 따라 훈련하되, 실패시 문제점을 파악한 후 교정해 나가는 연습을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다하더라도 완벽하게 숙달되기전까지는 배우려는 노력을 멈추어서도 안된다. 만약, 노력을 게을리하면 그 수준에서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뒤로 퇴보하고 만다. 그러므로 다음에 다시 시작하고자 할 때에는 멈추었던 그 지점에서가 아니라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쉽게 빠지지만 사랑을 제대로 하는 기술을 익힌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사랑의 기술을 마스터(?)한 사람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랑은 열정'이라고 말할 때, '사랑은 헌신이요 희생'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할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라고 한다.

애완동물이나 아기들의 사랑은 절대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대상을 사랑할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랑에 따르는 헌신과 희생은 강요된 의무에 가깝다.(어느 한쪽의 헌신과 희생만을 강요하는 사랑을 유아적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부모의 절대적인 헌신과 희생 속에서 성장하면서 사랑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랑하는지 사랑의 기술을 익힌 성숙한 성인의 경우에는 '그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가 필요한 것'임을 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사랑에 헌신하고 희생할 뿐만 아니라 사랑이 지나간 후에도 그 빈자리를 지킨다.  


우린 잘 알고 있다.

하나는 '사랑했다'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사랑한다'라고 했을 때, 먼저 마음이 떠난 자가 오히려 인간관계의 주도권을 쥔 강자가 되어, 아직 마음이 떠나지 않은 약자의 관계 회복을 위한 모든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걸...

그리고 결국엔,

사랑이 지나간 빈자리엔 후회와 분노와 원망이 빠르게 자리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린 깨닫게 된다.

경멸도 증오도 아닌, 사랑때문에 단지 사랑때문에 상처입을 수 있다는 걸...



에릭 프롬은 사랑의 기술을 완벽하게 배워 익힌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평생 동안 진정한 사랑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면서, 스스로는 사랑에 울고 웃었노라 착각하며 떠나고 만단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이라 여겼던 건, 어쩌면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으로 가장한 자기연민 혹은 나르시시즘으로, 완전한 사랑을 위한 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연습이었다면, 더더욱 실패와 상처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실수없이 무언가를 배울 수 없고,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통달할 수 있는 진리란 것은 없다.



만약 지금 이 순간.

많이 아프다면, 상처 없이 사랑을 배우려고 했던 건 아닌지 스스로 되돌아볼 일이다.

사랑을 위해 무엇을 포기했었고, 앞으로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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