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부쩍 딴청을 부리게 된다.
하던 일이나 해야만 하는 일들을 뒷전으로 미룬 채, '멍'하니 공허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진다.
얼마전까지 울긋불긋 화려함을 뽐내던 나무들은 온데간데 없고, 그 자리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아있다.
'결국은 저렇게 다 내려놓을 것을... 어쩌자고 봄부터 싹을 틔우고 여름 내내 잎을 키웠을까...?'싶다.
무기력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누군가 그러더라. 무기력은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하는 병(病)이라고...
우울증이 병이라는 건 알겠는데 무기력이 병이라니...?
언뜻 이해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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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심리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마틴 셀리그만은 한 발 더 나아가 무기력은 외부로부터 학습된다고 했다.
그는 개를 대상으로 한 공포반응실험을 통해,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면 무기력에 쉽게 빠져버린다는 걸 확인했다.
전기충격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옆 우리로 피할 수 있는 개들과 그렇지 못한 개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전자의 경우는 비록 전기충격이 가해지더라도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반면, 후자의 상황에 노출된 개들은 설령 옆 우리도 피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충격을 고스란히 감내했던 것이다!
인간 역시 개와 마찬가지다.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더 이상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단정짓고는 상황을 전환시키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이처럼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자주 노출되면 누구나 무기력에 빠지고 만다. 무기력은 단순히 일시적인 의욕상실만을 불러오지 않는다. 무기력 상태가 지속되면 자신을 무가치하고 무능력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된다.
무기력이 무섭고 두려운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존재(存在)'감으로부터 출발하는데, 무기력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인정 즉, 자기 '부재(不在)감'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존재감을 잃은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앞의 실험에 처해졌던 개들은 전기충격이라는 실험 환경을 바꿀 수 없었다.
인간이 철저하게 계산해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러번 시도해도 변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개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 것 뿐이다.
이것이 바로 외적 환경으로부터 무기력이 학습되는 매커니즘이라 하겠다.
전기충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 어떠한 노력도 보이지 않게 된 개의 무기력은 누구의 잘못인가?
개의 무능력인가...?
아니면, 개의 나태함때문인가...?
개의 무기력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실험 환경때문이라면, 우리를 종종 무기력의 늪으로 빠뜨리는 것은 불공정한 사회환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틴 셀리그만은 어린 시절 학대와 소외에 시달렸거나 경쟁이 심한 조직에 몸담고 있는 경우 무기력에 훨씬 쉽게 노출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1등만을 기억하는 사회, 승자와 패자가 확실하게 구분되는 사회, 과정이 아닌 결과만으로 평가받고, 상명하달과 위계질서가 분명한 조직 사회에서는 누구나 결국엔 '실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뛰어나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할지라도 영원한 1등일수는 없으며, 언제나 게임의 승자가 될 수도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무기력에 빠지는 건 개인의 잘못만이 결코 아니다.
무기력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에도 마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데 소개된 각종 무기력 극복 방법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삶에 대한 개인의 의지력을 높이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다. 무기력을 조성하는 사회 환경을 둘러보고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다시 힘을 내서 바뀌지 않는 환경에 온몸으로 부딪히라고 개개인을 몰아세운다.
무기력에 빠지기는 쉽지만, 그 늪에서 벗어나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단순히 마음을 다독이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의지는 삶에 대한 의미를 발견한 순간 생겨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동안 개인의 심리 문제로 치부해왔던 무기력를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봐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개인의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
제도와 규범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억압하는 사회,
그 속에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 끝없이 경쟁하면서, 삶의 의미를 잃고, 삶에 대한 의지마저 꺽인 채,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