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 페미나 상 수상작
샹탈 토마 지음, 백선희 옮김 / 이레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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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한편의 영화에서 시작되었다.

요즘 내 관심을 끌고 있는 레아 세이두라는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페어웰, 마이퀸>이라는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책 읽어 주는 시녀(시도니)의 시선으로 재구성한 영화는 1789년 바스티유 함락도 절대 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이유 궁전의 몰락도 인상적으로 전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인 모습과 심리를 그려내겠다던 감독의 의도도 제대로 들어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영화는 나에게 가슴 가득 아쉬움만 남겨주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나로 하여금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으니 나름 값(?)은 한 셈이다.

영화가 샹탈 토마의 소설 <마리 앙투아네트>를 근간으로 제작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바로 원작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소설은 1810년 2월 12일 예순 다섯번째 생일을 맞이한, 한 여인의 회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책 읽어 주는 시녀로 30세 초반 베르사이유에 들어가 왕비의 명으로 가브리엘 드 폴리냐크 부인의 탈출을 돕기 위해 궁을 빠져 나올때까지 약 11년동안 머물렀다. 반면, 영화는 시도니를 원작보다는 훨씬 젊은 시녀로 묘사하고 있다.

한편, 작품은 시도니의 시선으로 1789년 7월14일과 15일 그리고 16일 단 사흘 동안 일어난 일들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나열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녀의 시선이기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하며 무엇보다도 그녀가 모시고 있는 여인 즉 마리 앙투에네트에 대한 시녀의 숭배와 복종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작가가 가공의 인물인 책 읽어 주는 시녀를 탄생시킨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바로 마리 앙투이네트를 최대한 가깝게 그려냄으로써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위한 전략(?)이었으리라. 그러므로 이 작품은 역자의 말처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이면서도 또한 역사적이자 전체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나는 영화가 아닌 소설 작품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참으로 호기심 많고 다정다감한 심성의 소유자였으며...

무감각한 남편(루이16세)과는 정반대로 매우 활동적이고 외향적이며 상냥하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사치스럽고 포악하며 음탕하고 사악한 인물로 알려졌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에 의해 즉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위해 목숨을 잃은 것도 모자라 철저하게 왜곡되고 비하되어왔던 것이다!

역사가 기록해야 할 건, 오히려 권력에 기대어 온갖 악덕을 일삼아 왔던 귀족들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라는 이름의 화살은 이처럼 종종 빗나가곤 한다. 


왕궁이 기울어가자 제일 먼저 탈출한 이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방패막이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려왔던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식을 두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목숨 챙기기에 급급했다. 그들의 모습은 일견 우습광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참을 수 없는 창피함마저 자아낸다.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야 할 바로 그 순간, 동물적 본능에 지배받는 인간의 모습은 씁쓸함을 넘어 부끄럽기까지 하다. 이런 이들에 비해 마지막 순간까지 친구를 찾아다니고 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다. 


비록 가상의 인물이긴 하지만 왕비의 책 읽어 주는 시녀 시도니가 왕비의 명을 받고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건, 어쩌면 왕비의 이와 같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거부할 수 없었기때문일지도 모른다. 

 

궁정 생활과 왕비에게 쏟는 집요한 관심 때문에 나는 왕비를 볼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는 능력과 더불어, 보기도 전에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는 신비스런 능력을 갖게 되었다. 문득 나는 그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곧 나타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했다. (...) 그렇게 왕비는 마법처럼 나타났다. 나는 왕비의 친구들이 묵는 숙소들 쪽으로 연결되는 일층 복도에 있었다. 왕비는 내게 등 돌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손에 촛불을 든 채 혼자 어느 문 앞에 서 있었다. 왕비는 문을 열어 주길 청하며 한참 기다리다가 다른 친구들 처소도 두드렸다. 두드리는 문마다 똑같은 침묵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러자 그녀는 인내심을 잃고 버럭 화를 내며 비난의 말을 쏘아부쳤다. 하지만 어느 문을 흔들려다가 그 문이 자물쇠로 잠긴 것을 확인하고선 그녀의 목소리도 처졌다. (...)

나는 왕비의 두 가지 걸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는 약간 느리면서 신중한 공식적인 걸음으로 그녀를 커 보이게 했다. 또 하나는 엉덩이를 가볍게 흔들며 매우 경쾌하게 걷는 사적인 걸음으로 노래하고 싶은 욕구가 들게 했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머뭇거리며 걷는 무거운 걸음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

그녀는 가브리엘 드 폴리냐크와의 이별을 견딜 수 있게 친구들이 도와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역할이 전도되었다. 그녀가 그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필요했다.

(...)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걷지 못할 것이다. 그럴 용기가 없을 것이다. 내 혼란스런 머리 속에서 왕비는 의자에 앉은 채 내버려진 늙은 레이보 공작과 하나가 된다.

나는 눈을 감는다.

나는 그녀 때문에 운다. 그들 때문에 운다.

 

-샹탈 토마, <마리 앙투아네트> p257~ 260 中-

 

왕비에게 친구들이 필요할 때 그들은 없었다.

그들에겐 더 이상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아니었다. 그저 폭도들에 의해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가련한 여인에 불과했다.

철저하게 버림받고 혼자가 된 왕비를 보며 눈물을 흘린 이는 단 한사람 시도니 뿐이었다. 시도니는 왕비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이 마지막으로 왕비의 청을 수락함으로써 왕비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주고 마지막으로 왕비와 시녀로서 헤어짐으로써 왕비를 향한 자신의 숭배와 사랑을 보여준다.  

 

시도니는 왕비의 청을 수락함으로써 자신이 폴리냐크 부인으로 변장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결정에 갈등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도망가지도 왕비의 명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나는 눈물이 쏟아졌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내가 떠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두려움 때문에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의무 때문에 떠나는 것이었다. 난 그저 복종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무언가가 내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내 가슴을 찢어 놓고 있었다. 그 명령을 피할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피해야 했는데. 게다가 다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사람 행세를 하는 일이므로 내 역할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꼭 나여야 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너무 빨리 복종했다. 잠시 멈춰서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

다시 한번 베르사유 바깥세상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베르사유는 내 삶이었다. 평생 그랬듯이 나는 마지막 날이 어떠하리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아침, 어느 오후, 어느 저녁이 마지막 날이 되리라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밤의 다른 편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보지 못했다. 어쨌든 내가 아는 바로는 아무것도 없었다.

 

-샹탈 토마, <마리 앙투아네트> p292~ 293 中-


나 또한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 그리고 그녀들 때문에...



혹시, 영화를 보고 실망했다면 원작을 읽어 보길 권한다.

원작은 영화처럼 혹은 세간의 소문처럼 마리 앙투아네트의 동성애적 기질을 부각시키지 않으며, 몰락해가는 즉 비극으로 이어져 있는 계단으로 향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어느새 나 역시 시도니처럼 왕비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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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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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타 브루크너는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제인 오스틴과 버지니아 울프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작가이다.

특히, 그녀의 대표작이자 맨부커상 수상작인 <호텔 뒤락>은 연애와 결혼 그리고 일이 여자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작가의 대리인격인 주인공 이디스 호프는 결혼 당일 식장에 나타나지 않는 방식으로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주변인들에 의해 한적한 호텔 '뒤락'으로 쫒기듯 떠나게 된다.

그리고 호텔 뒤락에서 쇼핑과 외모 가꾸기에 몰입하는 퓨지모녀와 신경질적인 거식증 환자 모니카, 아들내외에 의해 호텔만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귀가 먹은 보뇌이유부인 등 다양한 유형의 여성들과 만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서 '돈걱정' 따윈 찾아 볼 수 없다. 퓨지모녀는 남편이 남긴 어마어마한 유산이 있고, 모니카 역시 부유한 남편을 두고 있으며 보뇌이유 역시 상당한 재력가로 나온다. 이들에 비한다면 주인공 이디스 호프의 경제력은 초라하다할 수 있겠으나 그녀 역시 나름 성공한 로맨스 소설가로 필요한 만큼의 돈은 스스로 벌 수 있는 소위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에게 단하나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결혼'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연인 데이비드와 완벽한 가정생활을 꿈꾸지만 데이비드는 이미 결혼한 몸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심한 혼란에 빠진다.

주인공 이디스가 진심으로 결혼과 원만한 가정생활을 원했다면, 즉 그녀가 이와 같은 것들에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면, 그녀는 어째서 자신에게 청혼한 제프리와의 결혼을 철회하고, 불가능한 데이비드와의 사랑만을 추구하는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이 질문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답변은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과 결혼을 중시하는 여성일수록 타인의 사랑과 결혼도 중시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만약, 데이비드가 기존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이디스와 새로운 가정을 꾸미겠다고 결심한다면, 이디스는 과연 그와의 결혼을 받아들였을까?  아쉽게도 이디스는 타인의 사랑과 결혼에 충격을 주면서까지 자신의 사랑과 결혼을 완성해야할만큼 사랑과 결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물이 결코 되지 못한다. 오히려 작품의 결말과 역자의 작품론에 비추어 볼때, 이디스가 데이비드와의 사랑에 '집착'하는 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혹은 '선택한') 것으로 해석된다.

 

애당초 결혼따윈 하고 싶지 않지만 이디스는 왠지 모르게 자신에게로 향하는 사회적 시선에 시달렸던 건 아니었을까? 

작가의 시선 역시 바로 이 '사회적 시선'으로 모아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부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은 사회적 모범으로 추앙받을 수 없으며 뭔가 부족한 여성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모럴'말이다.

(여기에서 moral의 사전적 의미를 꼭 떠올리기 바란다.)

 

애니타 브루크너가 53세의 나이에 <호텔 뒤락>을 발표했을 때, 그녀는 이미 미술사학자로 명성이 자자했으며 마흔의 젊은 나이에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여성 최초로 석좌교수가 된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뭐가 부족해서 이디스가 되었을까? 아니 이디스가 될 수밖에 없었을까?

1928년생인 작가가 결혼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역자의 해설을 살펴보면서 유추할 따름이다.

 

런던에 정착한 유대계 폴란드 이민자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브루크너는 소설을쓰기 전 이미 당대의 이름난 미술사가로 활동하며,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슬레이드 석좌교수 자리까지 올랐다. 53세라는 늦은 나이에 발표한 첫 소설이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까지 호평을 받았고 네번째 작품인 <호텔 뒤락>을 통해 부커상을 수상하며 문학적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그러나 어느 인터뷰에서 밝혔듯 브루크너에게 "그 두가지 활동(학문과 글쓰기)은 다 자연의 질서 밖에 있는 것" 으로, 오히려 자신은 "사람들이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진 다 큰 고아가 되는 대신"에 "아들이 여섯쯤 있기를"소망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정신적인 활동을 위해 꼭 결혼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하더라도 여성의 지적 활동을 담보하는 '자율성의 필요'가 정서적 안정을 주는 '관계의 필요'와 왜 갈등 관계일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왜 세월이 흘러도 해결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독자들과 함께 진지하게 생각해보고자 했다.

 

-김정, <결혼없는 결혼 이야기> 중-

 

<호텔 뒤락>이 쓰여진지 30년이 흘렀다.

 작품속에서 주인공 이디스의 나이는 38세니 현재 이디스는 68세다. 흔히, 한세대를 30년으로 치니, 그녀를 한세대 전 인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흔히, '세대차이'로 불릴만큼 이전 세대와 현재 세대를 가르는 기준은 명확하다. 그만큼 세상이 바뀌고 변했다는 방증이다. 

 

<호텔 뒤락> 이후 한세대가 지난 지금. 여성의 삶은 어떠한가?

과거보다 열배 백배 나아지고 좋아졌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다만 그러기엔 잊혀지지 않는 두건의 개인적 사건(?)들이 내 머리를 휘젓고 있는지라... 차마 비양심적 글쓰기는 못하겠다. 

 

그 두건의 사건이란?

첫번째는 2006년도인가 당시 여권내에서 이모(?)씨와 박모(?)씨 중 누구를 대통령 후보로 삼을 것인가를 놓고 설왕설래가 한창이었다. 그때 내 절친 중 하나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박모씨는 다 좋은데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그것도 애를 낳아 키워보지 않은 여자가 세상을 알까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당시 내 친구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다국적회사에서 IT 관련 영업부장으로 소위 잘 나가는 직장여성이었다. 그때 나는 '박모씨는 남편과 아이가 없어 가정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국가와 국민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낼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당시 모인 친구들은 모두 아이 둘 셋씩을 키우는 소위 '강남좌파 아줌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감히(?) 몇 십만원이나 되는 와인바 계산서를 결재할 사람의 의견에 토를 달 용기도 돈도 당시의 내게는 없었더랬다. 

 

두번째 사건은 최근의 일이다.

코레일 파업이 막 시작되었을 때였다. 평소 간식으로 잘 사먹는 도너츠 노점에서 단팥도너츠 한개를 막 입에 집어 넣었을 때인데, 젊은 두 남학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도너츠를 한개씩 사먹기 위해 좁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올해 일흔다섯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도너츠 할아버지와 함께 훈훈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철도 파업의 정당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두 남학생들 사이로 할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철도 파업 하면 안 되지. 서민의 발인데... 당장 나부터 지하철 끊기면 곤란해."

그러자 두 남학생이 이구동성으로 "할아버지! 그거 다 박근혜 때문에 그래요."

"그래? 대통령이 왜 그카는데?"

"철도 대기업에 팔아넘기고, 직원들 해고하려고 해요."

 

뭐 여기까지는 들어줄만 했다. 엄연히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 세력은 다를 수 있는 것이고, 또 자유롭게 정치적 발언을 해도 되는 세상이 도래하지 않았는가.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말이다.

"그렇게 정치 하면 안되지..."

"맞아요! 여자 주제에 정치는 무슨 정치를 한다고..."

순간 나는 분위기 파악에 나섰다. 칠순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소리이길 바라면서... 그러나 이 말은 이십대 초반의 남학생 중 한명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

.

.

한세대 전, 애니타 브루크너가 느꼈던 좌절감이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호텔 뒤락>의 주인공 이디스처럼 성공한 작가면 뭐하고, 현실에서 석좌교수가 되고 대통령이 되면 무엇하랴.

그녀들은 모두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비정상적'인 여성들인 것을....

 

 

일찍이 제인 오스틴이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억압되어있던 18세기 어쩔 수 없이 사랑과 결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현실'을 그려냈다면,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는 사회적 성공을 통한 여성의 자아 실현을 강조했다.

20세기 후반, 애니타 브루크너는 사랑과 결혼 대신 일을 선택한 여성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불행감은 어디로부터 오며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느냐고 끈질지게 물어온다. 

 

<호텔 뒤락>은 비교적 짧은 소설이지만 쉽지도 재밌지도 않다.

그러나 다 읽은 후,

한세대 전, 나의 어머니 혹은 그보다 더 한세대 앞선 나의 할머니가 갖었던 의구심과 질문들을 던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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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뇌에 관한 과학적인 보고서 - 인간은 왜 지금의 인간인가
에두아르도 푼셋 지음, 유혜경 옮김 / 새터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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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제목만큼이나 상당한 두께를 자랑한다.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소제목들이 줄줄이 이어지는 이 책은 사실 법률가이자 경제학자이며 유럽연합(EU)의 외교장관을 역임한 권력가이기도 한, 저자의 지적 호기심의 산물이라 할만하다.  

즉, 저자는 풍부한 자료들을 리서치할 비서들을 고용하고,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전문가들을 집접 만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생각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줄 편집자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이 책을 만들어낸 것같다. 

 

우주의 탄생과 인간의 진화 그리고 생명의 탄생 및 인류의 행동 유형까지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내용들만 골라서 다루고 있으나, 단 한가지의 호기심도 제대로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뭘까?

바로, 저자의 지적 욕심(혹은 '허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책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나 책으로써 가장 중요한 한가지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바로 '감동'이다.

'감동'이 없다는 건,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느낌이란 외부로부터 들어온 자극에 대한 우리 몸의 반응을 말한다.   

그리고 반응의 정도는 우리 몸 속에 축적되어 있는 기억에 의해 달라진다.

 

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저자의 논리 전개 방식을 따라가다 보니 우연히 의문점이 풀렸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한 나의 반응이 유난히 적은 까닭은 이런 분야에 대한 나의 경험, 즉 내 몸속에 쌓여 있는 관련 기억(지식)들이 너무나도 빈약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와는 반대로 과학적 호기심과 지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흥미롭게 읽힐 책이다.  

 

사실, 이 책에 대한 나의 비(非)호감은 너무나도 '과학적'이라는 데에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종족 번식을 위한 진화의 산물이며...

푸른 하늘과 쪽빛 물결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는 건, 두려움이 부재한 상태 속에서의 신경화학적 작용일 뿐이고...

격렬한 감정과 분노는 원시 인류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의 흔적일 따름이며...

등등...

이런 주장들은 인간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나의 모든 욕망과 욕구를 좌절시킨다.

 

 

예술이란, 즉 아름다움이란 노력을 우아함으로 가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학은 예술적일 순 없는 걸까?

예술가들이 엄청난 노력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듯, 과학자들의 엄청난 노력을 통해 과학에 예술성을 부여할 수는 없는 걸까?

아쉽게도 저자는, '모든 예술은 실체가 아닌 뇌의 착각(?)에 불과하며, 인류의 탄생과 발전 역시 우연일 뿐이고, 과학은 바로 이와 같은 사실 자체를 확인하는 학문'이라고 못박고 있다.  

 

나에게 문학이란 예술이 없다면,

나에게 문학이 주는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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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이야기
수잔 브리랜드 지음, 허진 옮김 / 강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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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프트 이야기

 

유명한 관광 명승지의 후미진 귀퉁이나 오래된 술집의 나무 테이블 한쪽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서툴게 새겨진 이름들과 날짜 등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수 년전의 것은 물론이거니와 수 십년 전, 심지어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새겨진 '낙서들'을 보고 있노라면, 눈살이 찌푸려지다가도 나도 모르게 짧은 '탄성'이 터져나오곤 한다.

얼굴조차 마주한 적 없고, 앞으로도 마주할 가능성 '제로'에 가까운 낙서 주인과의 '만남'은 우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인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의 오랜 손때가 묻은 물건을 대할 때에도 엇비슷한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누가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세월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물건 속에는 나보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의 숨결이 담겨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들 때문에 사람들은 오래된 '골동품'에 열광하는가 보다. 

 

수잔 브리랜드의 <델프트 이야기> 역시 이런 감정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술 정보 썸네일      미술 정보 썸네일          [베르메르] ‘음악과 와

 

막달레나는 그날 본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사람들을생각했다. 아니, 아버지의 그림만이 아니다. 세상 모든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화가는 그 사람들의 시선과 고갯짓, 그들의 외로움과 고통과 슬픔을 빌려와서는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마주할 일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막달레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고작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막달레나를 보고 또 보겠지만, 그들은 결코 그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수잔 브리랜드, <막달레나의 시선> 中-

 

초상화 앞에 서보라.

화가의 시선으로 초상화 속 주인공을 바라보게 된다.

처음엔,

색채와 명암과 구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는,

초상화 속 주인공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온다.

.

.

.

델프트는 네델란드 남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의 이름이다. 그렇다고해서 수잔 브리랜드의 <델프트 이야기>가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진 마시길...

<델프트 이야기>는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림'에 관한 이야기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에 의해 17세기 델프트에서 활동했던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으로 가정(假定)되는 '바느질 하는 소녀'라는 한폭의 초상화를 둘러싼 연작소설이다.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진주 귀고리 소녀>를 그린 바로 그 화가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진주 귀고리 소녀>의 작품 속 모델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펼쳤다면, 수잔 브리랜드는 한술 더 떠서 '바느질 하는 소녀'라는 존재하진 않지만 존재할 것만 같은 베르메르의 작품을 소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말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삶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작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 너무도 시(視)적이고 시(詩)적인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슈발리에의 <진주 귀고리 소녀>가 마음에 들었다면, 분명 이 작품도 좋아하게 되리라. 

바로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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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 10년 후, 나는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린다 그래튼 지음, 조성숙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이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내일을 예측할 여유도 주어지지 않은 채, 오늘 하루에 적응하기에도 숨이 가쁘다.

물론, 인류는 역사적으로 여러번의 기술혁신과 사회 변혁을 거쳐왔고 초기의 혼란이 없진 않았지만 변화에 잘 적응해왔다고 볼 수 있다. 


린다 그래튼의 <일의 미래>는 앞으로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를 '일'에 초점을 맞춰 살펴본 수작이다.

그녀는 일의 변화를 다섯가지 원동력 즉 기술발전, 세계화, 인구통계와 구조, 사회변화, 에너지 자원이라는 큰 주제로 묶어 통찰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화석 연료가 귀해지면서 에너지 비용 증가로 재택근무가 일반화된다는 점이었다. 머지 않은 장래에 전형적인 직장인의 모습이란 깔끔한 정장에 사무실로 출퇴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일어나자마자 클라우딩으로 연결된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개인 아바타로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동료(?)와 가상회의를 하고 이메일을 주고받는 등의 모습일 것이다. 고용 형태 역시 지금과 같은 회사 즉 조직에 소속되어 있기보다는 개별적 신분 아마도 현재의 프래랜서와 비슷한 고용형태가 널리 확산되리라. 24시간 올(All) 로그인 세상인 펼쳐지면서 일과 휴식의 경계는 더한층 불명확해지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업무량을 처리하게 되겠지만, 수준 높은 기술을 갖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이는 '일만시간의 법칙'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는 관찰력과 집중력 그리고 상당히 긴 시간의 연마가 필요한데, 24시간 로그인 상태에서는 한가지 일에 몰입하고 집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상태를 '3분이 한계인 세상'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즉, 한가지 일에 3분이상 할애하지 못하고 또 다른 작업을 처리하기 위해 기존의 작업을 중단한다는 뜻하다. 

그러고 보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SNS나 문자 착신음 속에서 수시로 하던 일을 방해받고 있다.


이 밖에도 재택근무가 일반화되면서 발생하는 또 다른 모습은 개인의 파편화와 소외다.

직접 만나지 않고 일처리가 가능해지면서 인간 관계는 더한층 기계화, 파편화될 것이다. 그 누구도 직접 만나지 않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세상 속에서 인간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사이버상의 커뮤니티가 인간 소외를 어느 정도 메꾸어 주고 일말의 행복감을 전해줄 순 있겠지만 현재와 같은 일대일 대면 접촉으로 얻는 정신적인 만족감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 리가 맞이할 미래는 역설적이다. 미래의 세상은 연결성이 증가하고 세계화하지만 동시에 점점 더 파편화되고 고립된다. 이런 문제를 헤쳐나갈 방법을 찾는 것은 의미와 가치가 있는 업무 생활을 만드는 데 아주 중요하다. 과거에는 인간관계와 네트워크가 발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미래에는 자연스러운 발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이디어와 통찰력을 제공해주는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자신과 여러 면에서 다르게 느껴지는 사람들과 기꺼이 교류하며, 키케로처럼 진실한 우정을 찾아내고 유지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태도 및 습관을 길러야 한다.


-린다 그래튼, <일의 미래> p 302~303-


앞으로 인류가 직면하게 될 일의 미래는 생각보다 암울해 보인다.

저자 역시 이런 문제점을 인식한 듯, 일에 대한 정의와 목적 변화를 주장하고 있다.

과 거 우리는 일에 대한 댓가로 제공되는 금전적 보상으로 탐욕적인 소비를 하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면 이제부터는 의미 있는 경험과 생산적인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저자의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자, 그렇다면 앞으로 변화할 일의 미래에 대비하여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저 자는 의미 있는 혁신과 발견 등 뜻밖의 성과들은 주로 일이 아닌 놀이의 과정에서 일어났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인간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기 싫고 따분해하지만 만약 놀이라고 한다면 흥미를 갖고 재미있게 즐긴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로써 성공하려 한다면 아니러니하게도 놀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 재밌고 신나게...


광 고 에이전트, 작가, 디자이너, 설계자, 사회이론가 같은 창의집단은 상상력과 공상을 통해 창의성에 불을 지핀다. 운동선수는 시합을 하고, 컨설턴트와 학자는 탐구를 하고, 수학자는 퍼즐을 풀고, 심리치료사들은 치료 게임을 이용한다. 이들은 놀이 없이는 진정으로 전문성을 이루지 못한다. 자신의 일에서 전문성을 기르려면 놀 준비를 해야 한다. 자신의 일에 열광해야, 전문성을 쌓기까지 따르는 긴장감을 사랑해야 그리고 도전의식을 발휘해야 일에 필요한 전문 능력을 쌓을 수 있다. 일의 미래에는 일과 개인생활, 일과 놀이를 구분하는 장벽이 계속해서 무너지게 될 것이다.


-린다 그래튼, <일의 미래> p 244~245-


일과 놀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려면,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설령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좋아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지라도 자신의 흥미와 취미를 살려 끝없이 배우고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 하다보면 일의 외연이 넓어지고 확장된다.

우리는 기자에서 작가로 번역가에서 소설가로 공무원에서 배우로 은행원에서 다큐멘터리 작가로 변신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일 의 미래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면 그 일에 헌신하고 일 자체를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받아들일 가능성도 커진다. 특히 탐욕적인 소비에서 생산적인 경험으로 옮겨가려 할 때는 그런 선택이 더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미래에서는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도전에 응하고 의미를 창조해주는 경험으로의 전환이 무대의 중심으로 올라온다. 생산적 경험과 의미가 보수와 소비를 대신해 일의 주요 동력이 된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고 어떤 능력을 계발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식, 창의성, 혁신은 우리가 미래의 삶을 선택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일을 대하는 태도와 감정에 따라 달라진다. 자기 일을 싫어하거나 중요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창의성을 발휘할 수 없다. 자기 일이 따분하거나 똑같은 일상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을 보살피거나 코치를 해줄 수 없다. 물론 별 탈 없이 일을 할수는 있겠지만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생기는 에너지는 절대 발휘할 수 없다.


-린다 그래튼, <일의 미래> p 240~241-


자, 이제 결론은 하나다.

우 리 앞에 펼쳐질 일의 미래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변하겠지만 일적으로 성공하려면 남보다 뛰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 하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개개인의 작업 공간이 파편화되어 있고 집단 지성과 정보가 공개되어 있는 미래의 세상에서는 중세 길드와 같은 동종 업종 종사자끼리 이익을 보장하고 독점해주는 '방어벽'이 끊임없이 공격받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예를 들면, 학위만 따면 그저 그런 교수로 대학에 자리잡아 먹고 살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인터넷 강의가 보편화되면서 다른 교수의 수업을 '카피'하거나 그저 그런 교수는 자리를 보존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 직업적으로 성공하려면 역시 전문성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전문성이란 장시간의 수련을 통해 연마되는 것이므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분야를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노력해야 승산이 있다. 일을 놀이처럼 즐겨야 한다는 건 비단 과거와 현재에만 적용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린다 그래튼의 <일의 미래>는 폭풍질주하는 현대사회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미래 직업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친절한 안내서라 할만 하다.

다 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이와 같은 책들이 그렇듯이 주로 사무, 연구직의 미래에 치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래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먹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고 문화 생활을 즐겨야 할것이므로 누군가는 식량을 재배하고 가공하고 배달하고 음식으로 만들어야 하며, 누군가는 가상 공간이 아닌 현실 공간에서 대면 접촉을 준비하고 진행해야할 것이고, 누군가는 인간에 의한 따뜻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효율성과 합리성을 추구하지만 또한 뜨거운 피와 땀을 흘리는 감정적인 존재라는 점 역시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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