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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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헤르타 뮐러라는 작가 이름도, <숨그네>라는 작품명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출판사가 야심차게 출판한 세계문학전집목록에 올라있는 걸 확인하고는 <호텔 뒤락>과 함께 '선정'한 책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란 걸 알고는 처음부터 재미를 기대한 건 아니었으나 역시 진도가 쉽게 나가진 않았다. 처음 몇 페이지만 읽다가 2~3일 공백기(?)를 거친 후, 한나절만에 완독했다.  


일단 작가 소개부터 간단히 하면,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 가정에서 태어나 공산독재 시절 엄청난 탄압을 받다가 80년대 독일로 망명했다. 그후, 그녀는 루마니아에서 공산독재정권에 '침묵'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의 삶을 주로 그렸다고 한다. 특히, <숨그네>는 독일계 루마니아인이 패전후 소련의 수용소로 끌려가 5년동안 강제노동을 당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의 모친 역시 그녀를 출산하기 전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노역을 했다고 하니, 작가로서의 그녀의 성향은 어쩌면 이미 '결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종착력 향해 숨가쁘게 달려가던 때였다.

그 당시 친독일 국가이던 루마니아가 소련의 침공을 받고 공산주의화되면서 소련으로부터 나치 독일에 의해 파괴된 소련 재건을 위해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독일인들을 소련으로 보내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하여, 17세부터 45세까지 당시 독일계 루마니아인들은 가축을 실어 나르는 기차에 태워져 우크라이나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5년동안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역사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패전 후 평범한 독일인들 역시 승전국 소련에 의해 고통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책 읽어 주는 남자>라는 작품을 접하고 나서야 독일인의 입장으로 2차 세계대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쟁을 일으킨 행위를 옹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 당시 전쟁과 전체주의가 휩쓸던 독일 사회에서 개인이 양심과 이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으며 용기가 필요했는지... 전후, 패전국민으로서 감내해야했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었던 수치와 고난의 역사가 평범한 독일인들의 삶을 어떻게 갈갈이 찢어놓았는지... 한번쯤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뮐러의 작품 <숨그네>의 주인공 레오 역시 1944년 새벽 3시에 루마니아 경찰의 손에 이끌려 수용소행 기차에 오른다. '너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영혼없는 인삿말'을 가슴에 품고서 열일곱살 레오는 그렇게 가족과 '생이별'을 했다. 그렇지만 레오에게 가족과의 이별이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그의 가족이 레오를 홀가분히 떠나보냈기 때문이고 레오 역시 가족으로부터의 '떠남'을 일종의 '탈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레오는 당시 루마니아 사회에서 범죄자 취급받던 동성애자였고, 그의 가족 역시 동성애자인 레오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불편해했다. 


수용소에서의 삶은 '배고픔' 그 자체였다. 

작가는 주인공 레오의 시선으로 수용소에서의 중노동과 일상화된 죽음 그리고 굶주림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주인공 레오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실감나게 들려주는 적극적인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사실을 보고(報告)하는 마치 제3자의 역할에 충실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독자는 주인공과의 감정이입에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등장인물과의 동화 여부가 작품의 '흥행'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이와 같은 글쓰기 전략은 작가에게 상당히 불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뮐러가 이와 같은 글쓰기 전략을 채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위 '전범(戰犯)'의 후손으로서 행여 자신의 '폭로'가 또다른 손가락질이나 오해를  불러오지는 않을까 우려했기 때문일까? 작품을 읽는 내내 풀리지 않던 의문은 '작가 후기'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어머니도 오년간 수용소 생활을 했다.

루마니아의 전체주의적인 과거를 회상시키는 강제추방이라는 주제는 입에 올려서는 안 될 금기였다. 가족끼리나 함께 추방되었던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수용소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마저도  늘 암시에 그쳤다. 이 비밀스러운 대화가 내 어린 시절을 함께 했다. 나는 대화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두려움은 감지할 수 있었다.

2001년, 나는 강제추방을 당했던 우리 마을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동료 오스카 파스티오르도 강제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에 관한 글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나를 돕고자 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만났다. 그가 이야기하면 나는 받아 적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책을 쓰자는 바람이 우리 안에 싹텄다.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2006년 갑자기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초고 일부와 수기 메모로 채워진 공책 네 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죽음 이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메모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친밀함 때문에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그로부터 일 년 후에야 고심 끝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와 이별하고 혼자 소설을 써야 한다고. 그러나 오스카 파스티오르가 없었다면 수용소 일상에 대한 세세한 묘사들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9년 3월 헤르타 뮐러, <숨그네> 작가후기 中-


 

그러니까 그녀의 모친을 포함하여 강제추방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집단 침묵'이라는 암묵적인 방식으로 과거와 상처에 접근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침묵한다고 아물거나 잊혀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되어 끊임없이 되새기고 회상함으로서 천천히 과거의 상처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진정으로 '화해'하지 않으면 절대로 치유될 수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음의 상처는 가슴 깊이 흔적을 남겨 시시때때로 우리를 공격하는데, 이를 심리학적 용어로는 '트라우마'라고 한다. 이처럼 치유되지 않은 마음의 상처에 빠져 있는 사람들 곁에서 성장한 작가에게 트라우마의 잔영은 고스란히 전해져, 그녀 역시 보이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거대한 침묵의 유리벽 안에 갇힌 삶을 '강요'받았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그녀는 스스로를 갇두는 행위라는 것도 모른 채 자꾸만 유리벽 속으로 숨어들기만 하는 주변 사람들과는 달리 그 벽을 깨고 나온다. 그녀의 선택은 집단침묵 대신 폭로였다. 그러나 간접 체험자인 그녀는 직접 체험자이면서 독일로 망명한 글쓰기 동료이자 같은 고향출신인 오스카 파스티오르도의 고백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숨그네>가 1인칭 주인공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적 심지어 방관자적 시선처럼 느껴졌던 것은 이와 같은 작가의 '거리 두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공교롭게도 <숨그네>가 발표된 해인 2009년 가을 그녀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선정 이유로는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그려냈다"라고 한다. 책 제목이기도 한 '숨그네'는 그녀 특유의 조어법에 의해 탄생한 단어로, 말 대신 침묵하면서 심호흡을 하는 것으로 대신했던 강제 수용소 체험자들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그네가 왔다 갔다 하듯 들숨과 날숨을 쉬면서(어찌됐던 살아야 함으로 숨은 쉬어야 하니...) 고통을 들이마시고 희망을 내품는 '실존'을 상징한다.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강제추방 당해 5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했던 파스티오르는 수용소의 상황을 '실존의 절대영도'라고 표현했단다. 한계 상황으로 인간을 몰아넣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런 수용소들이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퍽 유감스럽다. 특히 이런 곳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우리들은 호흡하는 매순간마다 희망 대신 고통을 들이마시며 생존과 투쟁을 벌이는 이들이 있다는 걸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끝으로, 뮐러의 <숨그네>는 나로 하여금 루마니아라는 나라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루마니아'하면 먼저 공포 환상 문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드라큐라 백작과 전설의 체조선수인 코마네치 그리고 차우세스쿠라는 독재자가 떠오른다.

 

동유럽 어딘가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로 소련의 영향을 받았던 소위 '빨갱이 나라'...

미치광이 독재자를 20년 동안이나 숭배했던...

그래서 그가 처형된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배고픔에 허덕이고 있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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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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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중국 대륙에서는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치뤄졌다.

마오쩌둥은 운이 좋은 것 같다. 공산주의 혁명을 이끈 지도자들이 생전에 몰락했거나 아니면 사후에 재평가된 것에 반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오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륙에서 여전히 추앙받고 있으니 말이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문화대혁명 시기 호흡기 전문의와 기생충병 전문의를 부모로 두었다는 이유로 '하방(下放)'당했던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전적 소설이다. 1954년 출생한 다이 시제이(戴思杰)는 열일곱살이던 1971년 '하늘긴꼬리닭' 계곡에 자리잡은 어느 농촌 마을로 하방되었다. 문화대혁명기는 현대판 '분서갱유'의 시대였다.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노래하는 모든 문학작품들은 금서(禁書)가 되었다. 주인공 역시 똥지게를 짊어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위험한 탄광에서의 고된 노역보다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에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중국의 현대사실주의 소설처럼 이 작품 역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들을 너무나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일명 '안경잡이'가 몰래 갖고 있는 발자크의 소설들을 빌려보기 위해 주인공과 그의 단짝 뤄는 방앗간 노인을 구슬려 구전 민요를 부르게 하여 가사를 적어오는 장면이나 주인공이 바이올린으로 모짜르트 곡을 연주하고는 부르주아풍이라고 의심하는 마을 촌장에게 '모짜르트가 마오쩌둥을 생각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갖다붙여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등은 '풍자'의 극치를 보여준다.


'꽌시(关系)'의 도움으로 하방을 끝내고 도시로 되돌아가는 안경잡이의 소설책 가방을 통째로 훔친 주인공과 뤄는 마침내 인간의 욕망을 가감없이 그려낸 발자크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만다. 특히, 주인공이 재봉사에게 뒤마의 '몽테크리스토프백작'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뤄는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하는 소녀와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뤄가 소녀의 관심과 사랑을 얻어내는 방식 역시 서양 소설을 읽어주고 읍내에서 상영한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뤄는 마을을 잠깐 떠나면서 친구인 주인공에게 자기 대신 여자친구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친구 대신 친구의 여자친구를 찾아가 문학작품을 읽어주면서 주인공은 그녀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애정은 그로 하여금 놀라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게끔 만들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위해 읍내 병원의사를 설득하여 낙태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건, 의사를 매수(?)한 수단이 돈도 아니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발자크의 소설책 한권이라는 점이다!


 

하긴, 발자크가 어디 의사만 매혹시켰던가?

주인공과 친구 뤄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재봉사의 딸 역시 발자크에 깊이 빠져 있었다. 발자크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자유와 원초적인 욕망은 산골 소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어쩌면 그녀는 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들려주는 발자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펜끝에서 그려지는 자유의 숨결은 마침내 산골 소녀의 욕망을 일깨운다. 유산계급인 지식청년을 무산계급으로 만드는 재교육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하방'이 역설적이게도 무산계급을 '재교육'시킨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라는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발자크의 작품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하늘긴꼬리닭'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비춰준 '창(窓)'이었다.


프랑스 국적인 다이시제이는 소설가일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그가 연출한 <식물학자의 딸>이라는 작품도 동성애라는 모티브를 빌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평가하고 탄압하는 중국공산주의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란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빼어난 영상미와 작품성으로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해 베트남 등지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와 <식물학자의 딸> 은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만 다를 뿐 일관된 주제, 즉 '모든 지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의 표현이며, 이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런 시도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라는 점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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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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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작가인 요 네스뵈의 <스노우맨>을 제외하고는 스칸디나비아 3국 출신 작가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째인 것 같다.

스웨덴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그러나 밀레니엄 시리즈의 스티그 라르손을 비롯해서 영화 <렛미인>의 원작가인 욘 아이비데 등등... 요즘 스칸디나비아 문학 열풍이 만만찮다. 그러고보면 북극과 가까운 이들 나라들은 옛부터 북극 신화의 발원지로 유명했다. 산타클로스 역시 이곳 출신이지 않은가. 이 지역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풍부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것 같다.

스웨덴 출신인 요나스 요나손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첫 작품부터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쏟아낸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말 그대로 100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양로원을 탈출한 알란 엠마누엘 칼손이라는 어느 영감님의 이야기다.

작품은 2005년 5월2일부터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알란 영감의 도피행각을 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알란 영감의 파란만장한 과거사가 펼쳐지는데, 한 사람의 과거사인지 20세기 인류역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1905년 5월2일 스웨덴 플렌시의 소읍 윅스훌트에서 태어난 알란은 10세에 폭약 회사에 취직해서 폭약 기술을 익히다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거세까지 당한다. 병원에서  풀려난 그는 스페인 사회주의자인 에스테반을 만나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스페인 내전(1936~1939년)을 겪으며 프랑코 장군을 만나고, 다시 미국으로 흘러들어가 핵폭탄 개발을 담당하던 앨러모스에서 커피 나르는 웨이터 일을 하다가 당시 미부통령 트루먼과 친구가 된다. 결국 그의 요청으로 알란은 쑹메이링 장제스 부인을 따라 중국 대륙으로 가게 되는데, 뜻밖에도 이빈 시에서 마오쩌둥의 세번째 부인인 장칭을 구해준다. 시베리아 산맥을 넘어 중국 대륙을 탈출한 알란은 이란의 테헤란에서 비밀경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가 1948년 무사히(?) 조국으로 돌아온다. 스웨덴 정부가 제공한 사례금으로 호텔에서 머물며 느듯한 한때를 보내던 알란은 우연히 만난 한 남자를 따라 가게 되는데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러시아 핵무기 과학자인 포포프였다. 알란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지만 반공산주의자로 몰려 블라디보스토크 수용소에 갇힌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블라디보스토크를 탈출한 알란은 소위 아인쉬타인의 숨겨진 동생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만나는가 하며, 때마침 북한을 방문한 마오쩌둥을 만나  그에게 장칭을 구해줬던 사례를 톡톡히 받는다. 그 사례는 다름 엄청난 '달러'였다. 이 돈은 미국이 장제스에게 제공했던 대외원조비로 장제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이 차지한 달러의 일부였다. 이 돈으로 알란과 아인쉬타인 동생은 함께 인도네시아 발리로 건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곳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만다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만다는 정치인이 되었다가 수하르토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프랑스 인도네시아 대사로 임명된다. 이때 프랑스로 함께 오게 된 알란은 68프랑스 혁명이 한창인 가운데 영국의 수상 처칠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인연으로 미국의 스파이로 암약(?)하게 되는데 임무는 다름 아닌 러시아의 핵물리학자인 포포프를 첩자로 포섭하는 일이었다. 80세를 코앞에 둔 알란은1982년 고향으로 돌아와 고양이 한마리와 함께 잘 살다가 고양이를 잡아 먹은 여우를 잡기 위해 폭약을 설치했다가 집을 통째로 날리면서 양로원으로 오게 된다. 그리고 양로원에서 100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 창문을 넘어 탈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사건 사고들...

결국, 갱단의 돈가방을 훔친 알란 노인은 악명 높은 도둑이었던 율리우스. 만년 학생 베니, 코끼리 소냐의 보호자인 <예쁜 언니> 구닐라, 베니의 형 보세, 前 갱단 두목인 예르딘 그리고 그들을 쫓던 수사관 아론손 등을 모두 친구로 만들어 발리로 건너가 행복한 여생을 보낸다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재밌다. 개인적으로 유일한 여성 등장인물이라고도 할만한 구닐라 비에르클룬드, 즉 4.5톤 코끼리 소냐를 키우는 <예쁜 언니>의  과거사가 빠져 있어 무척 아쉽긴 하지만 20세기 역사적 인물들과 주인공 알란 영감을 엮어내는 작가의 솜씨가 제법이다. 물론, 억지스러움도 없지 않으나 인생이 교과서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소설이 사실을 나열하는 것도 아닌지라 '이런 거짓말이 어딨어?'라는 독자의 볼 맨 소리에, 작가는 '여기 있지. 어딨긴 어딨어!'라는 시치미로 응수한다.


그나저나 북극의 사람들이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들의 성격이 주인공 알란 노인처럼 낙천적인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작가인 요나스 요나손은 1994년까지 기자로, 그 이후에는 성공한 사업가였다가 2005년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한 후 스위스 티치노에 머물면서 2009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출간했다고 하니, 요양차 심심풀이로 소설을 썼음에 틀림없어 보인다. (아궁~ 부러워라)

사업가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번 만큼 (세금을) 내야 하는 그들 나라'의 제도적 특성상, 요나손의 경제력은 우리나라의 은퇴한 중산층 수준에서 그다지 높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만약 그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일찌감치 은퇴하여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글로 엮어낼 수 있었을까? 도대체 한국에서 요양하기 위해 40대 중반에 은퇴하여 한적한 휴양지에서 4년 동안 푹 쉬면서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 걱정에 노심초사 은퇴는 커녕 아픈 몸을 일으켜 억지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설령, 은퇴했더라도 노후를 생각하며 모아 놓은 돈을 쓰지도 못하고 쳐다만 보면서 하루하루를 한숨속에서 보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나에게 묘한 '시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부럽고 또 부러웠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가가 책임지는 그 사회제도가 부럽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쓸데없는 기대나 걱정을 하지 않는 주인공의 유연함과 낙천성이 부러웠으며....

삼촌의 유산으로 30년 동안 대학에서 이것저것 공부만 한 베니라는 등장인물의 팔자도 부러웠고...

무엇보다도 작가인 요나스 요나손이 한없이 부러웠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받고 싶어 목을 매는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나라가 바로 스웨덴이다. 잘 알다시피, 노벨은 스웨덴 출신으로 다이나마이트를 개발하여 엄청난 돈을 번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작품 속 100세 노인 알란 칼손이 폭약 전문가로 나오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오히려 스웨덴 출신으로 70년대 활동한 그룹 아바(ABBA)가 언급되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솔직히 나도 모르게 애국심이 옅어지곤 한다. 

아무튼, 여러모로 '문화강국은 행복하고 창의적인 국민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을 재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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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한동안 소원했던 친구들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분주해진다. 그러나 친구를 만난다고해서 우정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쉽게도 현대인에게 친구는 많으나 우정은 점점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일찍이 그리스인들은 세가지 사랑을 찬미했더랬다.
피조물(인간, 자식)에 대한 조물주(신, 부모)의 무조건적 사랑인 아가페(agape)와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정열적 사랑인 에로스(eros)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바로 필리아(Philia)다. 필리아는 우정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덕의 하나로 규정한 바 있으며, 키케로는 우정을 사랑의 근간으로 보았다. 키케로가 우정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아미키디아(amicitia)'의 어원은 사랑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모르(amor)'다.

우정이란, 서로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삶에 대한 용기와 희망 그리고 기쁨을 얻을 수 있으며, 마치 거울에 비춰보듯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통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얻는다. 내 마음속 이야기들을 한점 부끄럼없이 '고백'할 수 있는, 나 아닌 또 다른 타인을 갖고 있다는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며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정은 당연하게 주어지거나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꺼이 헌신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서로의 목소리에 기꺼이 귀기울여주고,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선의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처럼 특별한 감정이 사랑보다 훨씬 낮은 것으로 취급받는다는 게 너무나도 유감스럽다.

진정한 우정이란 술 몇잔에 안부 몇마디에 돈 몇푼에 얻을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고해서 잊혀지거나 퇴색되는 것 또한 아니다.
.
.
.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친구...

내가 아무것도 아닐때,
사는게 너무 괴롭고 힘들때,
그저 말없이 내곁에 있어줬던 친구...
나에게 내가 몰랐던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어줬던 친구...

자신을 인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몸소 보여줬던 친구...

뜻을 이루기 위해 모든 걸 희생하면서도 뒤돌아설땐 모든 걸 내려놓았던 친구...

내가 끊임없이 친구의 우정을 의심할 때 진정한 우정을 보여주었던 친구...

그리고,

내가 진짜 진정한 친구가 되었을 때 내 곁을 떠난 친구...

나는 친구를 통해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났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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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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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알고 싶었다. 

선의든 악의든 사람들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녀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사람들의 끊이지 않는 관심을 잘 보여주듯 그녀에 관한 책들은 제법 많은 편이다. 그러나 샹탈 토마의 작품(영화<페어웰, 마이퀸>의 원작)처럼 작가의 상상이 추가된 경우이거나 프랑스 혁명의 가치에 맞게 각색된 非역사적인 역사서적들은 내 관심권밖이었다.


심사숙고하여 찾아낸 작품이 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다. 일찍이 평전과 전기로 명성이 자자한 슈테판 츠바이크라면 충분히 신뢰해도 될 것 같았다. 

서문에서 츠바이크가 밝힌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인물평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가 마리 앙투아네트와 같은 나라(오스트리아) 출신으로 같은 모국어(독일어)를 사용했다는 점도 특별히(?) 작용했다.

 

진실이란 대개 그렇듯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 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마성(魔性)을 과시할 소양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를 이룰 의지도 없으며, 따라서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역사라는 위대한 창조주는 감동적인 드라마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영웅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을 필요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비극의 긴장은 등장인물의 과도한 성격에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운명과의 알력에서도 생긴다. 그것은 한 막강한 인간, 영웅이나 천재가 천부적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에 비해서 너무나 협소하고 너무나 적대적인 주위 세계와 충돌할 때 생기는 법이다. 예컨데 나폴레옹 같은 인물이 세인트헬레나의 좁디좋은 감방에서 질식할 때, 또는 베토벤같은 인물이 귀머거리 상태에 갇혀 있을 때이다. 언제 어디서든 자기에게 적당한 자(尺)와 분출구를 차지 못하는 위대한 인물에게서 나타나는 법이다.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아주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또 무시무시한 개인적인 책임에 몰릴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필자는 이런 형태의 비극을 보다 인간적인, 보다 통절한 비극으로 생각한다. 비범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비범한 운명을 추구하므로 자신의 차원을 초월하려고 하는 그의 본성에는 영웅적으로 사는 것 혹은 니체의 말을 빌리면 "위험하게"사는 것이 유기적으로 걸맞기 때문이다. (......)

영웅이 아닌 사람, 보통 사람이 받는 이런 수난을 그 사람 스스로 이해할 안목이 없다.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진짜 영웅이 겪는 비장한 수난만큼이나 대단하다. 어쩌면 보다 감동적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이란 그런 수난을 혼자서 감내해야만 하며 예술가들처럼 고통을 작품이나 혹은 지속적인 다른 어떤 형태로 변용시키는 축복 속의 구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은 더러 그런 평범한 사람도 뒤집어엎을 수 있고, 명령조의 주먹을 휘둘러 강압적으로 보통을 넘어 나아가도록 몰아가기도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야말로 그러한 역사의 분명한 증거이다.

38년이라는 생애의 초반 30년 동안 이 여인은 무심한 길을 간다. 적어도 눈에 띄는 범위 안에서는, 그녀는 한번도 선이든 악이든 평균치를 넘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인생이요 평범한 성격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그녀의 유희 세계 안으로 혁명이 밀어닥치지만 않았더라면. 미미한 이 합스브르크가(家)의 여인은 모든 시대의 수많은 여인들처럼 그저 그렇게 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춤추고 잡담하고 연애하고 웃고 화장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적선도 하고 애를 낳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취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임종의 침상에 누웠을 것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서문 中-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너무도나 사랑스럽고 평범했던 그녀를 1793년 10월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만든 건,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였고 개인이 어찌하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 여대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 딸로 태어나 프랑스와의 동맹을 위해 16살에 루이 15세의 손자인 왕세자와 정략 결혼을 한 인물이다. 루이 16세는 한나라의 국왕으로서도 한 여자의 남자로서도 수준 이하였지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만큼은 최선의 호의를 베푼 인물로 기억해도 좋으리라.

 

그녀는 열여섯이라는 아직은 한참이나 어린 나이에 왕세자비가 되어 이국땅에 왔다.

모든게 낯설었지만 호기심 많고 활동적이었던 그녀는 곧 자신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 나갔다.

화려한 궁중 무도회를 열고...

파리 가면극에 놀러가 친구를 사귀고...

왕세자비에 걸맞는 보석들과 드레스를 구입했다.

 

황녀의 신분으로 태어나 일국의 왕세자비였고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왕비의 자리에 오른 사람에게 이 정도의 소비를 과연 사치라고 할 수 있을까?

잊지 말자! 그 당시는 민주정도 공화정도 아닌 황제정이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도 당시 프랑스의 재정 악화는 왕실의 사치가 아니라 미독립 전쟁에 대한 지나친 개입과 무분별한 대외전쟁이었음이 밝혀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운명이 자신에게 부여한 권한을 아무런 의심없이 충실히 사용했을 따름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잘못이라면 철이 너무 늦게 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에 세상물정에 밝았던 어머니의 성격(마리아 테레지아)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점 역시 그녀에게는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지적하자면, 그녀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녀가 조금만 덜 아름다웠더라면....

그녀가 조금만 덜 매력적이었더라면....

그녀가 조금만 더 못생겼고 못되먹은 성격이었더라면...

어쩌면 그녀는 생명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과 아름다운 자태는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자아냈을 뿐만 아니라 위급한 순간 무분별하게 그녀에게 내밀어진 도움의 손들로 인해 그녀는 결국 목숨을 잃었다. 만약 그녀가 탈출을 도와주겠다는 그 모든 호의를 거절했거나 아니면 여러차례 있었던 탈출 기회 중 단 한번만이라도 성공했더라면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새로 알게 되었던, 그리고 너무 가슴 아팠던 점은 다름 아닌 그녀의 죽음이 예기치 못한 파도처럼 한순간에 휘몰아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차오르는 물처럼 천천히 그녀의 숨통을 조이며 다가왔다는 점이다. 


역사는 1789년 7월 바스티유 함락과 동시에 베르사유궁과 프랑스왕정이 몰락했다고 간단히 말해줄 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후 1793년 죽기까지 4년 3개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 루이 16세 가족은 베르사유궁에서 쫒겨나 생클루궁으로 옮겨갔으며 그곳에서 스웨덴 귀족인 페르센의 도움으로 바렌으로의 탈출에 성공하기 직전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파리로 이송된다. 튈르리에서 베르됭으로 다시 탕플로 이주한 왕가는 혁명군의 공격과 폭도들의 공격에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살얼음판과도 같은 긴장속에서 살아간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을 맞이한 랑발 공작 부인의 목이 폭도들에 의해 잘려져 막대에 매달려진 채 왕궁 앞에 서 있는 모습을 억지로 지켜봐야만 했다.


어디 이뿐이랴.

프랑스 민중이 그녀에게 행한 고통과 모욕은 시작에 불과했다. 루이16세가 1793년 1월 21일 단두대에서 처형 당하고, 같은해 7월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 딸(앙굴렘 백작부인이 됨)과 격리된 후, 8월 정치범 감옥으로 악명이 자자한 콩시에르즈리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심문과 재판이 이어지고 가족과의 마지막 작별도 허용되지 못한 채 결국 10월16일 단두대에 오른다.

특히, 그녀가 단두대까지 이동할 때에는 짐승들을 실어나르는 짐마차에 태워져 군중 사이를 지나갔다고 한다.  그 당시의 모습은 당시 자코뱅파의 화가였던 다비드의 스케치로 남아 있다. 


 

이 무서운 시련이 계속된 몇 주일 동안 왕비의 얼굴에서 사라진 것이 있었다. 이 여름에 어느 무명화가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의 초상을 보면 목자극에 출연했던 과거의 여왕, 로코코의 여신은 상상할 수도 없으며 튈르리 궁에 있을 때처럼 오만하고 당당하고 위엄 있는 여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백발에 베일을 쓰고 있는 이 초상화의 얼굴은 서른여덟 살의 모습이지만ㅡ너무나 많은 고생을 해서ㅡ이미 노파처럼 보인다. 지난날 그다지도 거만했던 눈에 나타나던 생동감은 전부 사라지고 말았으며 무서운 피로 속에서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앉은 채 종말의 부름까지도 아무런 반항 없이 따라가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지난날 얼굴에 보이던 우아한 품격은 고요한 슬픔으로 변했으며, 불안은 온전히 사라지고 무관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리 아투아네트의 최후의 초상은 수녀원 원장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이미 현세적인 생각은 하나도 없이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이미 이 세상의 삶이 아닌 저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움도, 용기도, 힘도 찾을 수가 없다. 왕비는 퇴위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여자다움까지도 포기했다. 피로하고 생기 없는 노부인이 아무것에도 놀라거나 겁내지 않는 푸르고 맑은 눈망울을 들고 있을 따름이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p465~466 中-


 

프랑스 민중은 한때 자신들의 왕비였던 한 여인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더란 말인가?

무지한 대중의 광기는 혁명이라는 깃발 아래 선동되어 무책임하게 나부끼는 법이다.


츠바이크는 루이16세 처형 이후, 10여 개월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떻게 숭고한 인간으로 거듭났는지...어떻게 어머니가 되어갔는지... 어떻게 진정한 왕비로 재탄생했는지.... 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철없던 왕세자비와 향락에 물들어 있던 왕비의 모습 대신 침착하게 생각에 잠기고, 정성껏 편지를 읽고 썼으며, 왕비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쳤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비장하고 숭고하다. 특히, 그녀는 왕실을 모독하는 일체의 비방과 날조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용감하게 대처했다. 역사와 국민 앞에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도록 마지막 남은 용기와 힘을 자아냈던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처럼.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에야 진정한 왕비가 되었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참으로 담담했다.

오히려 "이제 마침내 고통이 끝나는구나...'라는 일종의 안도감마저도 엿보인다. 

그녀는 모든 이들로부터-심지어는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에 일말의 아쉬움도 여한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녀는 그렇게 떠나갔다.

자신이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인물을 기억하면서...

사랑만을 가슴에 품은 채 조용히....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이 이다지도 파란만장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가족의 삶이 이처럼 극과 극을 오고갈 수 있단 말인가?



어느새 눈가에 맺힌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

.

.

끝으로,

마지막까지 왕비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으며, 영원히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려했던 페르센을 애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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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감자 2014-01-03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들은 역사서나 평전이라고 하기엔 너무 너무 재밌고, 소설이라고 하기엔 의심할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졌기에 언제나 기대 이상의 감동을 안겨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