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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
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4월
평점 :
얼마전 중국 대륙에서는 마오쩌둥 탄생 120주년 기념 행사가 성대하게 치뤄졌다.
마오쩌둥은 운이 좋은 것 같다. 공산주의 혁명을 이끈 지도자들이 생전에 몰락했거나 아니면 사후에 재평가된 것에 반해,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오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대륙에서 여전히 추앙받고 있으니 말이다.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는 문화대혁명 시기 호흡기 전문의와 기생충병 전문의를 부모로 두었다는 이유로 '하방(下放)'당했던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자전적 소설이다. 1954년 출생한 다이 시제이(戴思杰)는 열일곱살이던 1971년 '하늘긴꼬리닭' 계곡에 자리잡은 어느 농촌 마을로 하방되었다. 문화대혁명기는 현대판 '분서갱유'의 시대였다.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노래하는 모든 문학작품들은 금서(禁書)가 되었다. 주인공 역시 똥지게를 짊어지고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위험한 탄광에서의 고된 노역보다 책을 읽을 수 없다는 것에 더 큰 고통을 느낀다.
중국의 현대사실주의 소설처럼 이 작품 역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들을 너무나도 해학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특히, 일명 '안경잡이'가 몰래 갖고 있는 발자크의 소설들을 빌려보기 위해 주인공과 그의 단짝 뤄는 방앗간 노인을 구슬려 구전 민요를 부르게 하여 가사를 적어오는 장면이나 주인공이 바이올린으로 모짜르트 곡을 연주하고는 부르주아풍이라고 의심하는 마을 촌장에게 '모짜르트가 마오쩌둥을 생각한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를 갖다붙여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등은 '풍자'의 극치를 보여준다.
'꽌시(关系)'의 도움으로 하방을 끝내고 도시로 되돌아가는 안경잡이의 소설책 가방을 통째로 훔친 주인공과 뤄는 마침내 인간의 욕망을 가감없이 그려낸 발자크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만다. 특히, 주인공이 재봉사에게 뒤마의 '몽테크리스토프백작'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감정은 그 무엇으로도 없앨 수 없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뤄는 재봉사의 딸인 바느질하는 소녀와 가깝게 지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뤄가 소녀의 관심과 사랑을 얻어내는 방식 역시 서양 소설을 읽어주고 읍내에서 상영한 영화의 줄거리를 이야기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뤄는 마을을 잠깐 떠나면서 친구인 주인공에게 자기 대신 여자친구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친구 대신 친구의 여자친구를 찾아가 문학작품을 읽어주면서 주인공은 그녀에게 남다른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애정은 그로 하여금 놀라운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게끔 만들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친구의 아이를 임신한 그녀를 위해 읍내 병원의사를 설득하여 낙태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건, 의사를 매수(?)한 수단이 돈도 아니요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발자크의 소설책 한권이라는 점이다!
하긴, 발자크가 어디 의사만 매혹시켰던가?
주인공과 친구 뤄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재봉사의 딸 역시 발자크에 깊이 빠져 있었다. 발자크의 손끝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자유와 원초적인 욕망은 산골 소녀의 가슴에 아로새겨졌다. 어쩌면 그녀는 뤄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들려주는 발자크와 사랑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펜끝에서 그려지는 자유의 숨결은 마침내 산골 소녀의 욕망을 일깨운다. 유산계급인 지식청년을 무산계급으로 만드는 재교육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하방'이 역설적이게도 무산계급을 '재교육'시킨 것이다.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나서야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라는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발자크의 작품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를 '하늘긴꼬리닭' 너머의 또 다른 세상을 비춰준 '창(窓)'이었다.
프랑스 국적인 다이시제이는 소설가일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이기도 하다. 그가 연출한 <식물학자의 딸>이라는 작품도 동성애라는 모티브를 빌려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평가하고 탄압하는 중국공산주의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란다.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빼어난 영상미와 작품성으로 극찬을 받은 이 작품은 중국 당국으로부터 촬영 허가를 얻지 못해 베트남 등지에서 찍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와 <식물학자의 딸> 은 소설과 영화라는 장르만 다를 뿐 일관된 주제, 즉 '모든 지적이고 예술적인 활동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의 표현이며, 이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런 시도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잔인한 폭력'이라는 점을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