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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평점 :
이 두권의 책은 서양인에 의해 재평가된 '칭기스 칸'의 이야기이자,제대로 평가된
'몽골제국'의 이야기라 하겠다.
역사의 뒤안길에 고이 잠겨 있던 몽골제국의 역사가 <몽골비사>라는 역사책이
발견되면서 새롭게 드러난 사실들은 그동안 서구에 의해 몽골제국과 몽골인,
더 나아가 동양의 역사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 훼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콜롬버스가 엄청나게 위험한 항해를 무릅쓴 이유가 '그레이트 칸' 즉 '대칸'을 직접 만나서 흑사병으로 막힌 동서 교역로를 다시
연결시켜달라고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콜롬버스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거하여 자신이
발견한 곳이 칸의 제국(중국의 원나라) 아랫쪽 즉 인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마르코폴로가 묘사했던)과 너무나도 다른 신대륙
원주민을 인도사람이라고 여기고 그들을 '인디오' 와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으며
몽골제국의 '대칸'을 만나보지 못한 채 눈을 감는 걸 원통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몽골족의 정복 활동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그당시 융성했던 중동의 이슬람 문명이었으며 중세 유럽은 피해는
가장 적게 입은 반면 혜택은 가장 많이 입어 마침내 르네상스로 나아가게 되었단다.
몽골인이 손을 댄 나라의 주민은 대개 처음에는 미지의 야만적인 부족의 파괴와 정복 때문에
충격을 받지만 곧 유례없는 문화교류, 교역확대, 생활수준개선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유럽에서 몽골인은 대륙의 귀족적인 기사들을 학살했지만, 이
지역이 중국이나 무슬림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빈곤한 것에 실망했기 때문에 구태여 도시를 정복하려 하지도, 나라를 약탈하거나 제국에
편입시키려 하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결국 유럽은 고통은 제일 적게 겪었으면서도,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 같은 상인들이나 몽골 칸과
유럽의 교황이나 왕 사이에 교환한 사절을 통한 접촉의 이익은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새로운 과학기술, 지식, 상업적 부는 르네상스를 낳았으며,
유럽은 이 시기에 자신의 이전 문화 일부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점은 동양으로부터 인쇄술, 화기(火器), 나침반, 주판 등
과학기술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13세기에 잉글랜드의 과학자 로저 베이컨은 몽골인이 승리한 것은 군사 분야의 우월성 때문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들은 과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인은 "열렬히 전쟁에 나서기도"했지만, "철학 원리를 습득하는 데 여가시간을 바쳤기"때문에 그렇게 앞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르네상스 기간에 유럽 생활의 모든 측면-과학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학, 음악-이
바뀌었다. 새로운 전투 형태, 새로운 기계, 새로운 음식에 덧붙여, 유럽인은 몽골의 직물을 받아들여 튜닉과 로브(가운 비슷한 형태의 짧은 속옷과
긴 겉옷)대신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손가락으로 뜯는 악기 대신 초원지대의 활로 타는 악기를 연주하고,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유럽인들은
심지어 서로 용기를 북돋으며 격려할 때 몽골인의 감탄사 후레이(hurray)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몽골인의 업적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한 최초의 작가 제프리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가장 긴 이야기를 아시아의
정복자 칭기스 칸에게 바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초서는 칭기스 칸과 그의 업적에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학식
높은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몽골인을 피에 굶주린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보기때문이다. 그러나 초서나 베이컨이 남긴 몽골인의 초상은 우리가 그 뒤의 책이나 영화에서 알게 된 이미지, 즉 황금, 여자, 피에 굶주린
야만인의 무리라는 이미지와 매우 다르다.
-잭 웨더포드, <핑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머리말 중-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잭 웨더포드, <핑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333-
유럽이 몽골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그당시 중세 유럽이 지독하게 가난하고 동양보다 나은 문명화된 도시가 단 한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천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우랄산맥에 도달한 몽골 기마병들에게 유럽은 변변한 전리품 하나 건질 것 없는 매력없는 대상에
불과했다. 결국 그들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인도로 뻗어나가게 된다. 인도의 무굴제국 역시 일칸 왕국을 다스렸던 칭기스칸의 둘째아들(차가타이
칸)의 후손에 의해 세워진 제국이다. 무굴이라는 말 자체가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며, 그 유명한 타지마할궁전 역시 몽골인의
이동주택인 '게르'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하니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다면, 몽골의 직접적인 공격도 지배도 받지 않았던 서양에서 몽골에 대한 비하와 왜곡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전체 인구 고작 100만에 군사는 10만에 불과했던 몽골이 자신보다 천배나 많은 인구와 병력을 갖고 있던 중세 동유럽의 도시들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훈련된 기마병과 활과 화약 무기 그리고 선전선동 전략이었다. 몽골병사들은 목표로 삼은 큰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의도적으로 주변의 작은 도시나 마을들을 초토화시켰다. 주민들을 도시 밖으로 소개시킨 후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살아남은 자들이 근처 마을과 도시들로 도망가 그곳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하게 만들어 극단적인 공포심을 자아냈던 것이다. 두려움에 빠진
도시는 방어할 여력조차 잃은 채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몽골군에게 성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은 자신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의 '공(功)'을 동양과 나누어 갖어야 한다는 데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초기 자연과학 심봉자들을 필두로 하여 몽골인의 모습을 잔인하고 흉측하며 아둔하게 묘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왜곡 축소시키고 심지어는 통째로 누락시켜버렸다.
몽골제국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 초, 득세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몽골의 역사를 말살하였다.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가 된 현대
몽골공화국에서조차 칭기스 칸을 연구하는 것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칭기스 칸이 세운 제국인 원(原) 덕분에 지금과 같은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 중국이 앞장서서 칭기스 칸을 자신들의 역사로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당시 '대칸'이 다스렸던 원나라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느냐하면 유목민인 몽골족이 세운 원이 멸망하고 정착민인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들어서고도 100년동안 명나라 조정은 외국으로 보내는
공식문서를 한자가 아닌 원나라의 문자인 위그르식 몽골문자로 적어 보냈다고 한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원을 세운 후, 티벳불교를
장려하면서 티벳승려를 시켜 파스파문자를 창제했으나 몽골어를 표기하는데에는 파스파문자보다는 위그르식 문자가 더 편리했기 때문에 위그르식 문자를
공식 문자로 채택하게 된다. 참고로, 청을 세운 만주족 역시 만주어를 위그르식 문자로 표기한다.)
저자인 잭 웨더포드는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임감을 갖고 평생을 바쳐 몽골제국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의 집안(보르지긴)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혹은 왜곡되었던) 영웅의 인간적인 모습을 고증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장차 칭기스 칸이 될 소년(그의 이름은 테무진이다. 그의 아버지 예수데이가 테무진이라는 타타르인을 죽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은
여러 부족이 거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세계에서 성장했다. 서로 살인을 하고, 납치를 하고, 노예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추방당한 가족의
아들로서 초원에 버려져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이 소년이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은 모두 합쳐도 몇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공식
교육도 받지 못했다. 소년은 이런 엄혹한 환경에서 욕망, 야망, 잔혹 등 인간 감정의 전 영역을 샅샅이 목격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배다른
형을 죽이기도 했고, 경쟁 관계인 씨족에게 붙잡혀서 노예 생활도 했고, 납치되었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13-
칭기스 칸이 태어나 성장한 몽골초원은 서로 다른 씨족들이 서로 경쟁하며 생존하던 시기였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걸 빼앗아와야만 했고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줄 아버지가 없다는 건 '죽음'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남자 형제들이 아버지의 여자와 결혼('형사취수' 제도)하여 어린 조카들을 거두지 않는 한, 초원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칭기스 칸은 유난히 운이 없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형제들은 어머니와 조카들을 버렸을 뿐만 형이 남긴
가축들마저 빼앗아가버렸다.
여자를 사올 가축이 없었던 테무진은 아내를 얻기 위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다른 집에 데릴사위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번째
아내이자 평생의 반려자 '부르테'를 만난다. 부르테는 테무진보다 몇 살 더 연상이었지만 그들은 정말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그들은 결혼하여 부르테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테무진의 집으로 이동하던 도중 메르키트족의 습격을 받게 된다. 메르키트는 그 당시 초원의 또
다른 부족이었다.
젊은 아내를 데리고 홀로 여행을 하던 테무진은 적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부인 부르테는 입고 있던 겉옷을 사랑의 징표로
테무진에게 던져주며 남편을 멀리 쫒아내고 자신은 홀로 남아 붙잡혔다. 여자를 납치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한 적들은 굳이 달아나는 테무진을 추격하지
않았기에 테무진은 죽임당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아내가 던져준 겉옷에 눈물을 훔치며 생명을 구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테무진은 죽은 아버지가 모시던 옹칸을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메르키트 부족을 공격하여 아내를 되찾아온다.
그러나 다시 만난 부부의 기쁨도 잠시 부르테는 바로 출산을 하게 된다. 아들이었다. 누가봐도 그 아이는 테무진의 아들이 아닌 메르키트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손님이라는 뜻을 가진 '주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주치는 항상 테무진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는 동생들로부터도 모욕을 받게 된다. 몽골제국의 황제 즉 '칭기스 칸'의 자리에 오른 테무진은
자신의 씨족들만 참여하는 쿠릴타이에서, 주치는 우리 씨족이 아니니 참가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자신의 아들들 앞에서 그리고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성인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하는데,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주치는 칭기스 칸에 의해 우랄 산맥 인근 지역(지금의 러시아)의 통치를 위임받아 캅착 칸에 오른다. 칭기스 칸이 죽은 후 주치는 두번 다시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가 만약 쿠릴타이에 모습을 나타냈더라면 칭기스 칸 사후 아들들끼리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칭기스 칸 사후,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던 4칸국의 칸이 된 네 아들과 손자들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면서 먼저 칭기스 칸에
의해 몽골제국의 이웃 국가로 시집가서 그지역의 통치를 맡은 누이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
그 다음 한 세기에 몽골 제국의 공적 생활에서 여자들의 역할이 계속 후퇴하는 동안에, 엘리트
몽골 남자들은 중국 공원, 페르시아 정원, 러시아 궁전에서 향락과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었다. 쇠약해진 국가의 에너지를 재충전해줄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새로운 동맹들도 등장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몽골의 지배를 강화해줄 군대도 조직되지 않았다. 14세기 내내 몽골
지도부, 특히 보르지긴 가문은 퇴화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뒤 세대는 앞 세대보다 무능력하고 지식도 떨어졌으며 고립되고 부패했다.
무지와 탐욕의 해로운 안개가 가문을 뒤덮었고 칸들은 육체적 쾌락과 무익한 오락에만 눈먼 사람처럼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부패한 관리에
의해 살해되었고 또 다른 무능한 칸으로 대체되었다. 몽골 연대기, 구두 전승, 사람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 어떤 것보다 이런 방탕이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고 뒤이어 형제 간에 서로를 죽이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193~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