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1 - 반지 원정대, 양장본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김번 외 옮김, 알란 리 그림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호빗>의 여파를 몰아 <반지의 제왕> 1편을 읽었다.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나온 총7권(부록 포함)중 1, 2권이었다.


이야기는 <호빗>에서 14명의 난쟁이족과 함께 스마우그를 없애고 호빗튼(샤이어)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던 빌보가 백열한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언제봐도 호빗튼의 마을은 흥겹고 따듯한 목가적 분위기로 사람의 마음을 아늑하게 만든다. 


빌보는 프로도를 자신의 후계자로 결정하고 가구와 물건 등을 일가친척과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주고는 자신의 생일 연설을 끝으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다. 프로드에게 넘겨주기 전, 마지막으로 절대반지를 사용하여 '이벤트'를 한 것이다. 비록, 빌보는 프로도에게 절대반지까지 넘겨주기로 간달프와 약속을 하지만 집을 나서며 절대반지를 몰래 주머니속에 넣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절대반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절대반지가 빌보를 선택했던 것처럼, 이제 반지는 프로도에게로 넘겨졌다. 프로드는 절대반지의 '운반자'로서 중간계 모든 종족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막중한 임무를 띄게 된 것이다. 간달프의 요청으로 리벤델로 떠나는 프로도와 그를 따라가는 샘, 메리, 피핀....

 

이들은 '흑기사'에게 쫒기면서 우여곡절 끝에 중간 기착점인 브리의 술집 겸 여인숙 '달리는 조랑말'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정찰자'로 불리우는 스트라이더(아라곤)와 조우한다.  프도로 일행은 아라곤과 요정의 도움으로 간신히 리벤델에 도착한다. 엘론드가 다스리는 요정왕국인 리벤델에서 중간계의 모든 종족들이 모여 '절대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회의가 열리고, 프로도가 운반자로 결정되면서 모두 9명(프로도, 샘, 피핀, 메리, 김리, 보르도로, 레골라스, 아르곤, 간달프)으로 이루어진 반지원정대가 결성된다. 


이들은 절대반지가 사우론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모르도르의 화염속으로 절대반지를 던져넣기 위한 위험한 여정에 오른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거 난쟁이족들이 만들어 놓았던 광산 모리아에서 지옥의 괴물 '발로그'와 싸우던 간달프가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물론, 회색 마법사이므로 다시 살아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컸다.)

 

나는 간달프를 보면서 진정한 멘토의 모습을 보았다. 타이르거나 윽박지르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면서 자기희생으로 멘티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보여준 간달프... 

 

요즘, 젊은 청춘을 위한 멘토링 열풍이 불고 있다. 너도나도 젊은이들 앞에서 한마디씩 하면서 멘토임을 자청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젊은이의 불안과 열정을 이용하여 유명해지고 사회적 영향력과 사리사욕을 챙기려고 할 뿐이다.

과연 이땅의 젊은이들에게 간달프와 같은 진정한 멘토가 있을까?

 

한편, 반지원정대에서는 보르도르를 비롯해서 절대반지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생기고 오크족과 고블린 등에게 쫒기면서 일행의 안전이 걱정된 프로도는 결국 홀로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모험담에 걸맞게 풍경과 여정 그리고 날씨 묘사가 많이 나와서 읽기 쉬운 책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튼, 두권의 책을 다 읽은 후 피터 잭슨이 2003년도에 만든 <반지의 제왕> 을 봤다. 이미 최근에 영화 <호빗>의 1탄 격이라 할 수 있는 '뜻밖의 여정'을 봤기에 기대반 설렘반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1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완벽하게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재현해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책을 읽을 때에는 상상력의 한계로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특히, 녹색과 푸르름으로 가득찬 샤이어(호빗튼)의 모습은 가히 압권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 이뿐이랴.

드넓게 펼쳐지는 초원과 들판...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산맥들...

지하세계를 묘사한 어두운 영화속 장면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편, 지하세계 역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과 끝없이 다리들이 이어진 입체적 공간으로 만들어져서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잘 들어났다. 

 

영화는 정말이지 기대이상이었다.


그동안 영화를 외면(?)해온 내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영화가 만들어진 후 원작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했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영화가 기대이상으로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특히, 감독이며 출연 배우들이  어린 시절부터 읽어서 익히 잘 알고 있는 작품의 영화화에 참여한다는걸 영광으로 생각한 터라 무려 4년에 걸친 긴 촬영기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몰입력과 빛나는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컴퓨터 그래픽등 최첨단 기술의 도움이 컸지만 작품의 전체 배경(중간계)이 되는 풍경이 정말 훌륭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세상에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스페셜 피처를 보니 영화의 대부분 장면이 뉴질랜드에서 촬영되었단다.



물론, 원작과 영화는 스토리상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여, <반지의 제왕>시리즈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원작과 영화를 함께 읽고 보길 권한다.


지금 2편인 <두 개의 탑> 원작을 읽고 있는데 영화를 보기 전에 읽었을때보다 훨씬 집중도 잘 되고 재미도 있다. 영화를 통해 새겨진 이미지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는 반대로 그만큼 나의 상상력이 뒤떨어진다는 방증이기도 하겠지만...

 

앞으로 영화와 원작(책)을 함께 보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겠다. 몇 년 동안 '영화는 원작보다 못하다'는 불필요한 편견에 사로잡혀 영화를 멀리(?)해 왔던 게 매우 후회스럽다. 작년  <설국열차>를 놓친 아쉬움이 또 다시 밀려온다...(그나저나 설국열차 dvd는 언제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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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이유없이 거부받는 일만큼 억울하고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이런 아픈 경험들을 한두번쯤 갖고 있으며 상처는 생각보다 오래간다. 그리고 때론 상처가 아문 후에도 각인처럼 심한 흉터가 남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은 이기적이라서 내가 '받은' 상처만 기억할 뿐, 내가 '준' 상처는 금방 잊고 만다.  마치, 땅에 떨어지자마자 사라져 잊혀지는 눈송이처럼...

 

이유 없이 좋은 사람이 있듯, 이유 없이 미운 사람도 분명 있다.

특별히 못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나에 대해 그 어떤 악의를 표시한 적도 없건만, 그냥 만난 그 순간부터 무조건 싫은 사람...

이런 사람, 분명 있다.

 

내가 악의적 감정을 갖고 상대방을 위기에 빠뜨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다만 그저 멀리하고 싶을 뿐이다. 그냥 내 시야에서, 내 인생에서, 사라져버리면 그뿐이다. 

 

이런 감정....

불편하고 피하고 싶지만 종종 마주하게 된다.

 

일회적 접촉이라면 별 상관없겠으나 이런저런 인연들로 묶여있거나 일적으로 일정 기간 반드시 함께 시간을 보내야만 하는 사람이라면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상대가 나보다 연배가 많거나 지위가 높다면 오히려 천만다행이다. 특히, 위계질서 속에서 상대가 '上'이고 내가 '下'라면 더욱더...

 

상대방을 실컷 미워하고 아무리 저주해도 세상이 나를 용서해줄 것 같은 터무니 없는 당당함이 마음속에 슬그머니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은 이런 '못난(혹은 못된)' 감정에 너그러운 편이다. 

 

문제는...

상대가 나보다 아래 사람일때다. 

나이도 지위도 능력도 월등히 내가 앞서 있으며, 상대는 내 도움과 호의를 원하거나 필요로 한다. 절대적은 아닐지라도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게 커다란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그를 고양시킨다. 이런 경우, 나의 감정은 세상으로부터 면죄부를 구할 수 없다. 이해는 커녕 손가락질만 되돌아올 뿐이다.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것도 아니고 그저 내 마음속 깊은 감정일 뿐인데, 지탄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다소 억울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지만 억울함과 함께 남몰래 밀려오는 죄책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죄책감에 솔직한 내 감정은 저만치 떠밀려 흘러가 버린다.  

 

 

 

ㅡ나의 감정을 감춰야 하나?

(좋아하는 감정처럼 싫어하는 감정 역시 숨길 수 없는 법이지...)

 

ㅡ상대방을 좋아하도록 노력해야 하나?

(감정이 노력으로 바뀌는 거 봤어...?)

 

ㅡ그럼, 어떡하지...?

(정답은 없어. 다만, 선택만 있을 뿐...)

 

 

이처럼 우리는 늘 '감정'에 휘둘린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거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한 죄책감마저도 받아들이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무한증식하여 폭발하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저는 도덕적 의무감과 사회적 체면 그리고 솔직한 감정 사이에서 감정을 선택하는, 감정적인 너무도 감정적인 사람입니다.'라고 큰소리로 고백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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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잭 웨더포드의 또 다른 역작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에는 칭기스 칸이 대제국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정복전쟁을 펼쳐나가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통치전략이 나온다. 칭기스 칸은 네 아들에게 각각 러시아(주치), 중앙아시아(차가타이), 몽골서부(우구데이)와 몽골동부(툴루이)를 맡기고 네 딸들은 각각 주변국인 옹구드(알아카이), 위구르(알-알툰), 오이라트(치체겐), 칼루크(툴라이)에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지역의 왕들을 사위(구레겐)로 삼아 정복 전쟁에 참여시켰다. 그러므로 통치는 자연스럽게 후방에 남아있는 여성(딸들)의 몫이 되었다. 딸들은 철저하게 아버지 칸을 위해 봉사했다. 정복전쟁시에는 중요한 후방 보급기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평화시에는 각 지역의 특산품을 아버지의 나라와 오빠들의 나라에게 보내주고 그곳의 특산품을 받아오는 등 물물교환 형식으로 제국 경제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 칸이 죽은 후, 재물과 권력에 눈이 먼 남자 형제들은 제일 먼저 누이들의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결국, 몽골제국을 주위에서 잘 감싸고 있던 이웃국가들이 무너지자 몽골제국은 마치 '잇몸 없는 이빨'과 같은 신세가 되면서 제국은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칭기스 칸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딸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칸'으로 불리운 인물이 사라지자, 초원에는 다시 스스로를 '칸'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이 나타나 부족끼리 서로 싸우는 혼돈의 시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무덤도 남기지 않은 칭기스 칸의 그림자는 때론 존경으로 때론 경멸로 사람들 사이를 떠돌게 된다.  

 

 

 

칭기스 칸 사후에 그를 묘사한 수많은 이미지와 그림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像)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의 초상이나 몽골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중국인은 성긴 턱수염에 눈의 초점이 흐린, 마음씨 좋은 늙은 숙부처럼 그려놓아, 사나운 몽골 전사보다는 비탄에 사로잡힌 중국 현자를 보는 듯하다. 페르시아의 세밀화는 칭기스 칸을 왕좌에 앉은 투르크족 술탄처럼 그려놓았다. 유럽인은 사나운 얼굴에 잔인한 눈으로 노려보는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해놓았는데, 구석구석 추하기 짝이 없다.

 

고려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의 삶에 대하여 온갖 신화와 기발한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믿을 만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이야기에 자신의 공포를 투사했다. 알렉사드로스, 카이사르, 샤를마뉴,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이 죽고 나서 수백년이 흐르면 학자들은 그들의 잔학하고 호전적인 행위들을 업적이나 역사에서 떠맡았던 특별한 임무와 비교해 보게된다. 그러나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경우 업적은 잊혀지고 이른바 범죄나 야만성만 확대되었다. 칭기스 칸은 야만인, 피에 굶주린 미개인, 파괴 자체를 즐기는 무자비한 정복자의 전형이 되었다. 칭기스 칸, 그의 몽골 유목민 무리, 나아가서 아시아 사람들 전체가 만화 속의 1차원적 인물이 되었으며, 문명화된 백인 세계 너머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 되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23~25-

 

 

 

칭기스 칸 사후 몽골족에는 이렇다할 인물이 탄생하지 않는다.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칭기스 칸의 손녀로 알려진 씨름 소녀 '쿠툴룬'의 활약상과 칭기스 칸이 여자로 환생한 것이라고 몽골인들이 믿고 있는 만두하이 카툰과 그녀의 남편인 다얀(大元) 칸의 드라마틱한 삶이 어렴풋하게 기억될 뿐, 몽골제국의 역사와 몽골족은 세계사에서 잊혀졌거나 아니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러나 정사(正史)가 미쳐 다 지우지 못한 역사의 흔적들은 사람들의 노래와 민담 그리고 언어 속에 담겨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토트>가 몽골의 공주 '쿠툴룬'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검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여전사 '뮬란' 역시 몽골의 여전사를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궁전이 몽골 '게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걸 아는가?

 

'다운증후군'을 한때 '몽골리즘'이라고 불렀던 건, 몽골인에 대한 서양인의 비하(혹은 '공포')의 산물이라는 걸 아는가?

 

스탈린이 칭기스 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몽골 초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걸 아는가?

 



'몽골반점'이라는 유전학적인 유사성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몽골은 먼 나라가 아니다. 고려가 몽골의 사위국으로써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잭 웨더포드는 제3자의 입장에서 몽골의 고려 지배를 다음과 같이 바라보고 있다. 

 


 

몽골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가 한국(당시의 고려)이었다. 몽골 족은 고려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 혹은 사위의 나라라고 불렀다. 고려 침략은 우구데이 통치 때 시작되었으나, 쿠빌라이 칸의 통치 시기에 와서야 온전히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몽골 족은 고려 왕실과 통혼을 했고 때때로 고려 왕자가 몽골 궁정에 와서 몽골 족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기도 했다. 근 70년에 걸쳐서 다섯 명의 고려 왕들이 보르지긴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 다른 사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는 전통적인 법률, 행정 구조, 조세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 시절의 구레겐과는 다르게, 고려의 사위들은 오지의 전장에 파견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고려로 시집간 몽골 왕비들은 알라카이 베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고려는 제일 마지막으로 사위국이 된 나라였으나 이 지위를 원나라가 멸망한 1368년까지 유지했다. < 고려왕조실록>의 1442년 기록에 의하면, 한 몽골 칸은 두 우방국의 관계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의 위대한 조상 칭기스 칸이 사통팔달 온 세상을 지배했을 때(......)하늘 아래서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었소. 고려는 그 어떤 나라보다 우리와 우의가 좋았지. 마치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까웠소."

고려 왕들은 몽골어를 잘하고, 몽골 친적들도 많았으며, 몽골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몽골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징 궁정의 상전들이 볼 때 몽골 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은 동시에 한국어를 했고, 한국 친척들이 있었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능력은 고려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의 이런 정신분열적 생활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커다란 개인적 희생을 요구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p194~195-

 


 


 

몽골인은 한국을 일컬어 '솔롱고스'라고 한단다.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곳' 이라는 뜻이란다. 푸른 초원의 스텝에 무지개가 뜨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쁘겠는가.

몽골인들은 어쩌면 고려인들을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환대하지 않았을까?


 

몽골인에게 '솔롱고스'로 기억되는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왕조의 통치가 한때 이민족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한 건 아니지...?

 

고려멸망과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왜곡되어진 역사를 진실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건 아닌지...?

 

서양인과 마찬가지로 몽골인을 잔혹하고 야만적인 민족으로만 기억하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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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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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권의 책은 서양인에 의해 재평가된 '칭기스 칸'의 이야기이자,제대로 평가된 '몽골제국'의 이야기라 하겠다.

역사의 뒤안길에 고이 잠겨 있던 몽골제국의 역사가 <몽골비사>라는 역사책이 발견되면서 새롭게 드러난 사실들은 그동안 서구에 의해 몽골제국과 몽골인,

더 나아가 동양의 역사가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 훼손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특히, 콜롬버스가 엄청나게 위험한 항해를 무릅쓴 이유가 '그레이트 칸' 즉 '대칸'을 직접 만나서 흑사병으로 막힌 동서 교역로를 다시 연결시켜달라고 부탁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이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콜롬버스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거하여 자신이 발견한 곳이 칸의 제국(중국의 원나라) 아랫쪽 즉 인도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마르코폴로가 묘사했던)과 너무나도 다른 신대륙 원주민을 인도사람이라고 여기고 그들을 '인디오' 와 '인디언'이라고 불렀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곳이  인도라고 생각했으며 몽골제국의 '대칸'을 만나보지 못한 채 눈을 감는 걸 원통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몽골족의 정복 활동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건 그당시 융성했던 중동의 이슬람 문명이었으며 중세 유럽은 피해는 가장 적게 입은 반면 혜택은 가장 많이 입어 마침내 르네상스로 나아가게 되었단다.

 

몽골인이 손을 댄 나라의 주민은 대개 처음에는 미지의 야만적인 부족의 파괴와 정복 때문에 충격을 받지만 곧 유례없는 문화교류, 교역확대, 생활수준개선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유럽에서 몽골인은 대륙의 귀족적인 기사들을 학살했지만, 이 지역이 중국이나 무슬림 국가들과 비교할 때 전반적으로 빈곤한 것에 실망했기 때문에 구태여 도시를 정복하려 하지도, 나라를 약탈하거나 제국에 편입시키려 하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떠났다. 결국 유럽은 고통은 제일 적게 겪었으면서도, 베네치아의 폴로 가문 같은 상인들이나 몽골 칸과 유럽의 교황이나 왕 사이에 교환한 사절을 통한 접촉의 이익은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새로운 과학기술, 지식, 상업적 부는 르네상스를 낳았으며, 유럽은 이 시기에 자신의 이전 문화 일부를 재발견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점은 동양으로부터 인쇄술, 화기(火器), 나침반, 주판 등 과학기술을 흡수했다는 사실이다.

 

13세기에 잉글랜드의 과학자 로저 베이컨은 몽골인이 승리한 것은 군사 분야의 우월성 때문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그들은 과학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몽골인은 "열렬히 전쟁에 나서기도"했지만, "철학 원리를 습득하는 데 여가시간을 바쳤기"때문에 그렇게 앞서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결과인 르네상스 기간에 유럽 생활의 모든 측면-과학기술, 전쟁, 의복, 상업, 음식, 예술, 문학, 음악-이 바뀌었다. 새로운 전투 형태, 새로운 기계, 새로운 음식에 덧붙여, 유럽인은 몽골의 직물을 받아들여 튜닉과 로브(가운 비슷한 형태의 짧은 속옷과 긴 겉옷)대신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손가락으로 뜯는 악기 대신 초원지대의 활로 타는 악기를 연주하고,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그렸다. 유럽인들은 심지어 서로 용기를 북돋으며 격려할 때 몽골인의 감탄사 후레이(hurray)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몽골인의 업적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한 최초의 작가 제프리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가장 긴 이야기를 아시아의 정복자 칭기스 칸에게 바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초서는 칭기스 칸과 그의 업적에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학식 높은 사람이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다. 지금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몽골인을 피에 굶주린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보기때문이다. 그러나 초서나 베이컨이 남긴 몽골인의 초상은 우리가 그 뒤의 책이나 영화에서 알게 된 이미지, 즉 황금, 여자, 피에 굶주린 야만인의 무리라는 이미지와 매우 다르다.

 

-잭 웨더포드, <핑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머리말 중-

 

유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적은 없지만 여러 면에서 몽골의 세계체제로부터 가장 많은 이득을 얻었다. 유럽인은 몽골 정복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교역, 기술 이전, '세계인식의 대전환'에 따른 모든 혜택을 입었다. 몽골은 헝가리와 독일에서 기사를 죽였지만 도시를 파괴하거나 점령하지는 않았다. 로마 멸망 이후 문명의 주류와 차단되었던 유럽인은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새 옷을 입고, 새 음악을 듣고, 새 음식을 먹었다. 그들의 생활수준은 거의 모든 면에서 급속하게 높아졌다.

 

-잭 웨더포드, <핑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333-

 

유럽이 몽골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건, 그당시 중세 유럽이 지독하게 가난하고 동양보다 나은 문명화된 도시가 단 한곳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천 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우랄산맥에 도달한 몽골 기마병들에게 유럽은 변변한 전리품 하나 건질 것 없는 매력없는 대상에 불과했다. 결국 그들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려 인도로 뻗어나가게 된다. 인도의 무굴제국 역시 일칸 왕국을 다스렸던 칭기스칸의 둘째아들(차가타이 칸)의 후손에 의해 세워진 제국이다. 무굴이라는 말 자체가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며, 그 유명한 타지마할궁전 역시 몽골인의 이동주택인 '게르'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하니 몽골제국의 영향력은 세계 곳곳에 뻗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렇다면, 몽골의 직접적인 공격도 지배도 받지 않았던 서양에서 몽골에 대한 비하와 왜곡의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전체 인구 고작 100만에 군사는 10만에 불과했던 몽골이 자신보다 천배나 많은 인구와 병력을 갖고 있던 중세 동유럽의 도시들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잘 훈련된 기마병과 활과 화약 무기 그리고 선전선동 전략이었다. 몽골병사들은 목표로 삼은 큰 도시를 공격하기 전에 의도적으로 주변의 작은 도시나 마을들을 초토화시켰다. 주민들을 도시 밖으로 소개시킨 후 도시를 무자비하게 약탈하고 저항하는 자들은 무자비하게 죽였다. 살아남은 자들이 근처 마을과 도시들로 도망가 그곳 사람들에게 상황을 전하게 만들어 극단적인 공포심을 자아냈던 것이다. 두려움에 빠진 도시는 방어할 여력조차 잃은 채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몽골군에게 성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18세기에 이르러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친 유럽은 자신이 이룩한 문명과 문화의 '공(功)'을 동양과 나누어 갖어야 한다는 데에 심한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초기 자연과학 심봉자들을 필두로 하여 몽골인의 모습을 잔인하고 흉측하며 아둔하게 묘사하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대로 몽골제국의 역사를 왜곡 축소시키고 심지어는 통째로 누락시켜버렸다. 

몽골제국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0세기 초, 득세한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주의를 억누르기 위해 몽골의 역사를 말살하였다. 소련의 영향으로 공산주의가 된 현대 몽골공화국에서조차 칭기스 칸을 연구하는 것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칭기스 칸이 세운 제국인 원(原) 덕분에 지금과 같은 방대한 영토를 차지하게 된 중국이 앞장서서 칭기스 칸을 자신들의 역사로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당시 '대칸'이 다스렸던 원나라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느냐하면 유목민인 몽골족이 세운 원이 멸망하고 정착민인 한족이 세운 명나라가 들어서고도 100년동안 명나라 조정은 외국으로 보내는 공식문서를 한자가 아닌 원나라의 문자인 위그르식 몽골문자로 적어 보냈다고 한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는 원을 세운 후, 티벳불교를 장려하면서 티벳승려를 시켜 파스파문자를 창제했으나 몽골어를 표기하는데에는 파스파문자보다는 위그르식 문자가 더 편리했기 때문에 위그르식 문자를 공식 문자로 채택하게 된다. 참고로, 청을 세운 만주족 역시 만주어를 위그르식 문자로 표기한다.)

 

 

저자인 잭 웨더포드는 학자로서의 양심과 책임감을 갖고 평생을 바쳐 몽골제국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칭기스 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의 집안(보르지긴)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혹은 왜곡되었던) 영웅의 인간적인 모습을 고증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장차 칭기스 칸이 될 소년(그의 이름은 테무진이다. 그의 아버지 예수데이가 테무진이라는 타타르인을 죽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은 여러 부족이 거칠 것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세계에서 성장했다. 서로 살인을 하고, 납치를 하고, 노예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추방당한 가족의 아들로서 초원에 버려져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 이 소년이 어린 시절에 만난 사람은 모두 합쳐도 몇백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공식 교육도 받지 못했다. 소년은 이런 엄혹한 환경에서 욕망, 야망, 잔혹 등 인간 감정의 전 영역을 샅샅이 목격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이미 배다른 형을 죽이기도 했고, 경쟁 관계인 씨족에게 붙잡혀서 노예 생활도 했고, 납치되었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13-

 

칭기스 칸이 태어나 성장한 몽골초원은 서로 다른 씨족들이 서로 경쟁하며 생존하던 시기였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걸 빼앗아와야만 했고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혹독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줄 아버지가 없다는 건 '죽음'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남자 형제들이 아버지의 여자와 결혼('형사취수' 제도)하여 어린 조카들을 거두지 않는 한, 초원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칭기스 칸은 유난히 운이 없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형제들은 어머니와 조카들을 버렸을 뿐만 형이 남긴 가축들마저 빼앗아가버렸다.

 

여자를 사올 가축이 없었던 테무진은 아내를 얻기 위해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다른 집에 데릴사위로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첫번째 아내이자 평생의 반려자 '부르테'를 만난다. 부르테는 테무진보다 몇 살 더 연상이었지만 그들은 정말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그들은 결혼하여 부르테의 집에서 얼마간 머물다가 테무진의 집으로 이동하던 도중 메르키트족의 습격을 받게 된다. 메르키트는 그 당시 초원의 또 다른 부족이었다.

젊은 아내를 데리고 홀로 여행을 하던 테무진은 적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부인 부르테는 입고 있던 겉옷을 사랑의 징표로 테무진에게 던져주며 남편을 멀리 쫒아내고 자신은 홀로 남아 붙잡혔다. 여자를 납치하기 위한 목적을 달성한 적들은 굳이 달아나는 테무진을 추격하지 않았기에 테무진은 죽임당하는 걸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아내가 던져준 겉옷에 눈물을 훔치며 생명을 구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테무진은 죽은 아버지가 모시던 옹칸을 찾아가 그의 도움으로 메르키트 부족을 공격하여 아내를 되찾아온다.

그러나 다시 만난 부부의 기쁨도 잠시 부르테는 바로 출산을 하게 된다. 아들이었다. 누가봐도 그 아이는 테무진의 아들이 아닌 메르키트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아이를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손님이라는 뜻을 가진 '주치'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주치는 항상 테무진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손가락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는 동생들로부터도 모욕을 받게 된다. 몽골제국의 황제 즉 '칭기스 칸'의 자리에 오른 테무진은 자신의 씨족들만 참여하는 쿠릴타이에서, 주치는 우리 씨족이 아니니 참가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자신의 아들들 앞에서 그리고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성인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라고 말하는데, 그 누가 토를 달 수 있단 말인가?"

 

주치는 칭기스 칸에 의해 우랄 산맥 인근 지역(지금의 러시아)의 통치를 위임받아 캅착 칸에 오른다. 칭기스 칸이 죽은 후 주치는 두번 다시 쿠릴타이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가 만약 쿠릴타이에 모습을 나타냈더라면 칭기스 칸 사후 아들들끼리 서로 치열하게 싸우는 과정에서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칭기스 칸 사후, 제국을 나누어 다스리던 4칸국의 칸이 된 네 아들과 손자들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면서 먼저 칭기스 칸에 의해 몽골제국의 이웃 국가로 시집가서 그지역의 통치를 맡은 누이들을 죽이는 '패륜'을 저지른다. 

 

그 다음 한 세기에 몽골 제국의 공적 생활에서 여자들의 역할이 계속 후퇴하는 동안에,  엘리트 몽골 남자들은 중국 공원, 페르시아 정원, 러시아 궁전에서 향락과 방탕한 생활로 빠져들었다. 쇠약해진 국가의 에너지를 재충전해줄 영웅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새로운 동맹들도 등장하지 않았다. 중국에 대한 몽골의 지배를 강화해줄 군대도 조직되지 않았다. 14세기 내내 몽골 지도부, 특히 보르지긴 가문은 퇴화했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뒤 세대는 앞 세대보다 무능력하고 지식도 떨어졌으며 고립되고 부패했다.

무지와 탐욕의 해로운 안개가 가문을 뒤덮었고 칸들은 육체적 쾌락과 무익한 오락에만 눈먼 사람처럼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그들은 부패한 관리에 의해 살해되었고 또 다른 무능한 칸으로 대체되었다. 몽골 연대기, 구두 전승, 사람들의 기억에 따르면 그 어떤 것보다 이런 방탕이 제국의 붕괴를 가져왔고 뒤이어 형제 간에 서로를 죽이는 대혼란이 벌어졌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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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 열정, 겸손, 용기, 정직, 솔직, 희생, 지혜...

모두 기꺼이 높이 평가받아야 할 품성이고, 멘토라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격이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용기라고 생각한다.

 

용기는...

단순히 위험을 무릅쓰는 용감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타인에게 베풀어지는 너그러움인 겸손이나 관용도 아니요,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나 거짓없는 솔직함도 아니다.

 

오히려 용기는 이와같은 이타적 행동으로 얻게 되는 개인적 존중이나 존경 혹은 자기 만족감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용기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 심지어 비난을 이겨내야만 하기에 개인적 행위가 아닌 사회적 행동이다.

또한,

용기는 거짓없는 솔직함으로 나타나지만, 타인이 아닌 자신에 대한 솔직함이기에 정직보다 훨씬 더 어렵고 위대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품성들이 번갈아가며 나를 찾아왔더랬다.

나는 인내와 열정을 마주한 바 있으며, 희생과 정직도 잘 알고있다. 

항상이라고 말할 순 없겠지만, 날 필요로하고 날 찾을 때마다 때론 기꺼이 혹은 억지로 맞이했더랬다.

 

용기 역시 여러차례 나를 찾아왔더랬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머뭇거렸고 뒤로 숨었으며 심지어 고개돌려 외면하기까지 했다.

용기는 나를 여러번 선택했으나, 난 단 한번도 용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용기 앞에서...

나는 여러번 도망쳤고...

수없이 무너졌으며... 

한없이 작아졌더랬다.

.

.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건, 개인적 의무감과 사회적 책임감으로 진정한 용기를 내어본 적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멘토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진정한 용기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갖추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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