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잭 웨더포드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잭 웨더포드의 또 다른 역작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에는 칭기스 칸이 대제국을 다스리면서 동시에 정복전쟁을 펼쳐나가기 위해 만들어낸 독특한 통치전략이 나온다. 칭기스 칸은 네 아들에게 각각 러시아(주치), 중앙아시아(차가타이), 몽골서부(우구데이)와 몽골동부(툴루이)를 맡기고 네 딸들은 각각 주변국인 옹구드(알아카이), 위구르(알-알툰), 오이라트(치체겐), 칼루크(툴라이)에 시집보낸다. 그리고 그 지역의 왕들을 사위(구레겐)로 삼아 정복 전쟁에 참여시켰다. 그러므로 통치는 자연스럽게 후방에 남아있는 여성(딸들)의 몫이 되었다. 딸들은 철저하게 아버지 칸을 위해 봉사했다. 정복전쟁시에는 중요한 후방 보급기지로써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평화시에는 각 지역의 특산품을 아버지의 나라와 오빠들의 나라에게 보내주고 그곳의 특산품을 받아오는 등 물물교환 형식으로 제국 경제의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아버지 칸이 죽은 후, 재물과 권력에 눈이 먼 남자 형제들은 제일 먼저 누이들의 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결국, 몽골제국을 주위에서 잘 감싸고 있던 이웃국가들이 무너지자 몽골제국은 마치 '잇몸 없는 이빨'과 같은 신세가 되면서 제국은 순식간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

 

칭기스 칸이 대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딸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진정한 '칸'으로 불리운 인물이 사라지자, 초원에는 다시 스스로를 '칸'이라고 부르는 인물들이 나타나 부족끼리 서로 싸우는 혼돈의 시기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무덤도 남기지 않은 칭기스 칸의 그림자는 때론 존경으로 때론 경멸로 사람들 사이를 떠돌게 된다.  

 

 

 

칭기스 칸 사후에 그를 묘사한 수많은 이미지와 그림이 나왔지만 실제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려진 초상화는 없다. 역사의 다른 정복자와는 달리 칭기스 칸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자신의 상(像)을 조각하거나, 동전에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새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칭기스 칸의 초상이나 몽골의 기록이 없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중국인은 성긴 턱수염에 눈의 초점이 흐린, 마음씨 좋은 늙은 숙부처럼 그려놓아, 사나운 몽골 전사보다는 비탄에 사로잡힌 중국 현자를 보는 듯하다. 페르시아의 세밀화는 칭기스 칸을 왕좌에 앉은 투르크족 술탄처럼 그려놓았다. 유럽인은 사나운 얼굴에 잔인한 눈으로 노려보는 전형적인 야만인으로 묘사해놓았는데, 구석구석 추하기 짝이 없다.

 

고려에서 아르메니아에 이르기까지 많은 학자들이 칭기스 칸의 삶에 대하여 온갖 신화와 기발한 이야기들을 지어냈다. 믿을 만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이야기에 자신의 공포를 투사했다. 알렉사드로스, 카이사르, 샤를마뉴,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이 죽고 나서 수백년이 흐르면 학자들은 그들의 잔학하고 호전적인 행위들을 업적이나 역사에서 떠맡았던 특별한 임무와 비교해 보게된다. 그러나 칭기스 칸과 몽골인의 경우 업적은 잊혀지고 이른바 범죄나 야만성만 확대되었다. 칭기스 칸은 야만인, 피에 굶주린 미개인, 파괴 자체를 즐기는 무자비한 정복자의 전형이 되었다. 칭기스 칸, 그의 몽골 유목민 무리, 나아가서 아시아 사람들 전체가 만화 속의 1차원적 인물이 되었으며, 문명화된 백인 세계 너머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의 상징이 되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p23~25-

 

 

 

칭기스 칸 사후 몽골족에는 이렇다할 인물이 탄생하지 않는다.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칭기스 칸의 손녀로 알려진 씨름 소녀 '쿠툴룬'의 활약상과 칭기스 칸이 여자로 환생한 것이라고 몽골인들이 믿고 있는 만두하이 카툰과 그녀의 남편인 다얀(大元) 칸의 드라마틱한 삶이 어렴풋하게 기억될 뿐, 몽골제국의 역사와 몽골족은 세계사에서 잊혀졌거나 아니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 그러나 정사(正史)가 미쳐 다 지우지 못한 역사의 흔적들은 사람들의 노래와 민담 그리고 언어 속에 담겨 대대로 전해 내려왔다.

 


 

그 유명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토트>가 몽골의 공주 '쿠툴룬'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검은 머리를 질끈 동여맨 채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여전사 '뮬란' 역시 몽골의 여전사를 그린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인도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궁전이 몽골 '게르'를 형상화 한 것이라는 걸 아는가?

 

'다운증후군'을 한때 '몽골리즘'이라고 불렀던 건, 몽골인에 대한 서양인의 비하(혹은 '공포')의 산물이라는 걸 아는가?

 

스탈린이 칭기스 칸의 무덤을 찾기 위해 몽골 초원을 샅샅이 뒤졌지만 발견하지 못했다는 걸 아는가?

 



'몽골반점'이라는 유전학적인 유사성은 차치하더라도 우리 역사에서 몽골은 먼 나라가 아니다. 고려가 몽골의 사위국으로써 '칸'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잭 웨더포드는 제3자의 입장에서 몽골의 고려 지배를 다음과 같이 바라보고 있다. 

 


 

몽골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가 한국(당시의 고려)이었다. 몽골 족은 고려를 무지개가 뜨는 나라 혹은 사위의 나라라고 불렀다. 고려 침략은 우구데이 통치 때 시작되었으나, 쿠빌라이 칸의 통치 시기에 와서야 온전히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몽골 족은 고려 왕실과 통혼을 했고 때때로 고려 왕자가 몽골 궁정에 와서 몽골 족의 언어와 관습을 배우기도 했다. 근 70년에 걸쳐서 다섯 명의 고려 왕들이 보르지긴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 다른 사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려는 전통적인 법률, 행정 구조, 조세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칭기스 칸 시절의 구레겐과는 다르게, 고려의 사위들은 오지의 전장에 파견되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고려로 시집간 몽골 왕비들은 알라카이 베키처럼 권력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고려는 제일 마지막으로 사위국이 된 나라였으나 이 지위를 원나라가 멸망한 1368년까지 유지했다. < 고려왕조실록>의 1442년 기록에 의하면, 한 몽골 칸은 두 우방국의 관계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우리의 위대한 조상 칭기스 칸이 사통팔달 온 세상을 지배했을 때(......)하늘 아래서 그분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없었소. 고려는 그 어떤 나라보다 우리와 우의가 좋았지. 마치 피를 나눈 형제처럼 가까웠소."

고려 왕들은 몽골어를 잘하고, 몽골 친적들도 많았으며, 몽골 궁정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심지어 몽골 이름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베이징 궁정의 상전들이 볼 때 몽골 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은 동시에 한국어를 했고, 한국 친척들이 있었고, 한국 이름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백성에게는 여전히 한국인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능력은 고려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고려 왕들의 이런 정신분열적 생활은 그들 자신과 가족들에게 커다란 개인적 희생을 요구했다.

 

-잭 웨더포드, <칭기스칸의 딸들, 제국을 경영하다> p194~195-

 


 


 

몽골인은 한국을 일컬어 '솔롱고스'라고 한단다.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곳' 이라는 뜻이란다. 푸른 초원의 스텝에 무지개가 뜨면 얼마나 아름답고 예쁘겠는가.

몽골인들은 어쩌면 고려인들을 '무지개가 뜨는 아름다운 곳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환대하지 않았을까?


 

몽골인에게 '솔롱고스'로 기억되는 우리는 과연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왕조의 통치가 한때 이민족에 의해 좌우되었다는 수치심을 극복하지 못한 건 아니지...?

 

고려멸망과 조선왕조의 정당성을 위해 왜곡되어진 역사를 진실의 전부라고 믿고 있는건 아닌지...?

 

서양인과 마찬가지로 몽골인을 잔혹하고 야만적인 민족으로만 기억하고 있진 않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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