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섬으로 점심먹기 - 한·중 문화비교론
김혜원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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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문화비교론: 中韓文化談>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중국 밖의 중국' 혹은 '중국 아닌 중국'인 홍콩과 한국을 비교한 것이다. 불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1997년부터 홍콩에서 거주하면서 홍콩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강의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이후,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폭증하고  중국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과 주재원 등이 늘어나면서 중국 대륙을 소개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룬 것과는 대조적으로 홍콩에 대한 읽을 거리는 주로 관광 안내서 위주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혜원의 <딤섬으로 점심먹기>는 홍콩(인)과  한국(인)을 비교 분석한 보기 드문 인문서라 하겠다. 

 

언어와 문화에서부터 생활방식과 의식의 차이까지 상당히 여러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끈 건 문명과 문화의 차이와 한국어와 중국어를 비교한 부분 그리고 한류가 인기 있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었다. 

 

우선, 저자는 도입부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언급하면서 소위 '문명'이란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기술적 진보인 반면, 문화란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인들이 오랫동안 고수해와서 쉽게 바뀌지 않는 일종의 '습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랍(이슬람교)과 미국(기독교) 간의 충돌을 주로 설명하고 있는 앞의 책 제목은 당연히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화의 충돌'이라고 해야 옳다고 지적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동양' 혹은 '동양적 사고'를 일컬는 Oriental 혹은 Orientalism이 이제는 '서양인에 비친 혹은 서양인이 보고 싶어하는 동양'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는데, 이는 서구 문명과 문화가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한 발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동양인이 바라보는 '동양' 혹은 '동양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인들은 자못 문화적 우월감에 빠졌더랬다. 그러나 과연 한국 가수가 부른 한국어 노래가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해서 한국 문화가 소위 '세계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 가수나 그룹의 노래 및 드라마와 영화 등 문화 컨텐츠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 사회에서도 환영받는 것은 '서구화'에 성공한, 즉 다시 말하면 서양인이 기대하는 아시아의 모습이자 서양을 본받고 싶어하는 아시아인의 내재적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류'로 통칭되는 한국산(産) 문화 상품에 열광하는 아시아와 서구 사회를 보면서 한국 문화의 우수함이자 세계화의 성공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100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홍콩이지만 여전히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혹은 단체주의)가 강하고 아시아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중국 대륙의 '콴시'는 매우 폐쇄적인 집단주의인 반면 한국의 집단주의(온정주의)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세력을 외부에 과시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알면 알수록 한국인과 중국인은 엇비슷 한 듯 하면서도 무척 다른 것 같다.

 

중국어를 맨 처음 배운던 당시, 나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가 시제를 표현할 수 없고, 한국어에서는 조사 등으로 간단하게 전달되는 것을 중국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찍이 한 저명한 언어학자가 '중국어는 언어가 아니라 기호'라고 한 말이 지나친 비약은 아닌 셈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중국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어떻게 두나라의 언어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언어유형학에서는 중국어를 '고립어(孤立語)'로 분류하는데, 이는 중국어에는 어휘의 형태적 변화 또는 활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인이 한자를 계속 사용하는한, 그들의 말인 중국어는 계속 고립어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어휘의 형태적 변화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말(소리)을 표기하기에 아주 제한적이며 또한 표기될 수 없는 말은 자연히 살아남지 못하게 되므로, 결국 말로서의 중국어(漢語)는 그의 문자인 한자로 표기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진화할 수 있다. 즉, 한자라는 글이 그들의 말 중국어의 진화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86~87 中-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한글이 정말로 배우기 쉽게 체계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자라는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말인)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기가 정말 힘들겠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94 中-

 

일본어와 한국어 두 언어를 모두 배워 본 외국인이면 한결같이 한국어가 훨씬 더 배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슷한 문법구조를 가진 일본어와 비교해도 한국어에서는 배워야 할 문법이 너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기 쉬운 한글이 한국어의 문법을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자는 너무 앞서 가는 말의 진화를 제어(또한 여과)함으로써 그 문법구조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데, 한글은 그러하지 못했다. (중략)

 

요약하자면, 한국어의 문법체계가 지금처럼 복잡하고 방만해진 이유 중 하나는, 한글이 너무 유연하고 또한 '오백년 밖에' 안 된 젊은 문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문법적 진화를 가로막았던 한자와 결별하고 한글을 만나서 지난 오백 년 동안 많은 진화 과정을 겪었다. 그러한 진화 과정에서, 소리를 음소단위로 구별하여 표기할 정도로 유연하고 또한 신생문자였기 때문에, 한글은 중구난방으로 마구 진화하며 한국어를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어의 문법 체계가 더 나은 짜임새를 갖추려면 좀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바로 중국어이다. 중국어에는 어미의 활용과 같은 문법적 기능이 없고 문법이 아주 단순한데, 이는 보수적인 한자가 중국어의 문법적 진화를 '지나치게' 제어했기 때문이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96~97 中-

 

 

이 밖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이 돈과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때문이라고 설명한 부분에도 공감이 갔다.  외모 역시 학벌과 마찬가지로 '돈벌기 경쟁'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이니 말이다. 그 동안은 이와 같은 학벌지상주의와 외모중시풍조를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동양적 집단주의나 유교적 가치관 탓으로 돌렸으나, 이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성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훨씬 더 잘 구축되어 있는 싱가포르와 자본주의 역사가 오래된 홍콩은 한국처럼 학벌와 외모를 중시하는 정도가 훨씬 더 미약하다는 점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반면, 사회주의식 복지제도 대신 자본주의식 시장경제를 선택한 중국 대륙의 경우 학벌과 외모를 중시하는 풍조에 있어서 한국을 가장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편, 저자는 한국인의 집단주의(단체의식, 그중에서도 일체감)를 강력한 평등주의와 연관지었다. 즉, 단체의식이 강하면 구성원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남과는 다르기 위함'이나 '남보다 나은'이 아닌 '남들만큼은 나도 해야 한다'는 평등주의가 결국 '남들이 하면 나도 한다'로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점은 아시아에서는 제일 먼저 선진국으로 발전한 일본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일본인의 경우도 집단주의가 발달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집단주의는 한국처럼 평등의식에서 출발한 것일까?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문화적 스텍트럼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일본은 동양적인 집단주의적 성향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이는 한국처럼 극단적인 평등주의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서구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양적 습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다.  

 

아시아는 서구에 비해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다름'을 '차별'이나 '격차'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서구의 문화는 오히려 '다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바로, 서구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동경과 컴프렉스(complex)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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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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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최선입니까?"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식이었다. 

이 말을 유행시킨 드라마는 정작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 말이 나왔을까? 

 

 

비운의 천재 여류 시인으로 알려진 실비아 플라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자전적 소설 <벨 자>를 남겼다. 이 작품은 '죽기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 책 중 한권'이며, '가장 빼어난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작품명 '벨 자(bell jar)'는 실험용 진공 용기를 말하며, 작품 속에서는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사회적 관습을 상징한단다.  

 

 

줄거리는 '특기가 장학금과 상 타기'일 정도로 어렸을때부터 다재다능했던 여대생 에스더 그린우드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잡지사 수습사원으로 여름 한달을 뉴욕에서 보내는 전반부와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극심한 신경쇠약에 걸렸다가 일상으로 되돌아 오는 과정을 그린 후반부로 나뉜다.

 

 

 

 

 

'출세와 부의 상징' 뉴욕이라는 도시는 저자인 실비아 플라스와 주인공인 에스더 그린우드 모두 선망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짧은 머뭄은 권태와 부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말하겠지.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라니까. 십구년간 촌구석에서 살면서 잡지 한 권 못 사 볼 형편이었던 여자애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더니 이런저런 상을 받고 결국 뉴욕을 휩쓸고 다니네."

하지만 난 휩쓸고 다니지 못했다. 내 자신조차 마음대로 못했다. 호텔에서 사무실로, 파티장으로, 파티장에서 호텔로, 다시 사무실로 멍청한 무궤도 전차처럼 다닐 뿐. 다른 여자애들처럼 들떠서 지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주위가 소란한 가운데 둔하게 움직이는 폭풍의 눈 같다고 할까.

 

-실비아 플라스, <벨 자>p 11 中-

 

 

이 나이 또래가 대부분 그러하듯, 세상에 대한 냉소와 치기로 가득하다.

 

 

 

뭔가 내 인생은 특별할 것만 같고...

나 아닌 타인의 삶을 관조할 여유가 없으며...

세상은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움직여줘야 하는 곳이다...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는 낯선 뉴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무엇이 그녀를 화나게 했고, 그 누가 그녀를 엇나가게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순결에 대한 의무와 이성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또래와 자신을 비교하며 동질감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추구하는 모순된 성향과....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엄마를 향한 이유 없는 반발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는 젊음 특유의 가벼움까지... 

 

 

작가 또한 이런 주인공(혹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열아홉 시절, 내게는 순결이 가장 큰 화두였다.

세상을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로 나누지 않고, 섹스를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었다. 그것만이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인 것 같았다. 

 

 

-실비아 플라스, <벨 자>p 113 中-

 

 

 

내 눈에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사춘기를 다소 심하게 앓는 소녀처럼 보인다. 십대와 작별하고 성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혹독한 '성인식'을 거쳐야 한다. 성인식이란, 아이로서 자신의 유치함과 한계를 자각하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어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이기 쉽다. 특히, 십대 시절 유난히 자의식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성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유년기와의 작별을 거부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다.

다만, 자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서른이라는 나이에 스스로 삶을 마감한 작가의 삶과 결합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 해석된 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안타깝게도,

작품속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지만, 저자인 실비아 플라스는 서른이라는 짧은 삶을 극단적으로 마무리했다. 어린 딸과 아들을 남겨둔 채...

 

 

그녀에게 묻고 싶다.

"이게 정말 최선입니까?"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고,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작품에 희망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뛰어난 시들과 소설 작품을 남겼다면 최소한 남은 이들에게 '이별'의 이유만이라도 알려줘야하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다 떠났다면, 최소한 그 몸부림의 흔적에 새겨진 의미만이라도 남겨야하지 않겠는가?

 

 

 

부디, 이 작품을 통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더랬는데... 

그녀의 생각과 느낌과 호흡까지도 공감하고 싶었는데...

그래야지만이 그녀를 마음껏 애도하고 영원히 기릴 수 있을 것 같았더랬는데...

 

아쉽게도,

나의 기대와 희망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겨진 채,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다.

 

 

굿바이! 실비아 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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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부르는 소리 잭 런던 걸작선 4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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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접한 명작이다.

1876년 출생한 잭 런던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발달로 배금주의가 난무한 미국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표현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야성이 부르는 소리>는 알레스카로 금을 캐기 위해 모여든 인간 군상을 따라 썰매끌이로 팔려온 '벅'이라는 '개의 시선'으로 쓰인 작품이다. 

 

캘리포니아 남쪽의 대저택에서 한가롭게 살던 네살배기 벅은 세인트버나드종인 아빠와 셰퍼트종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러 판사의 집에서 '왕'처럼 지내던 벅의 삶은 정원사의 조수인 매뉴얼에 의해 단돈 100달러에 팔려가면서 말 그대로 거친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다.

 

개몰이꾼들의 몽둥이질과 다른 개들의 엄니(어금니) 앞에서 벅은 서서히 잠재되어 있던 야성을 되살린다.

 

벅의 첫도둑질은 그가 험난한 극지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격자임을 말해주었다. 적응력,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이 부족하면 당장에 무참히 죽을 수 있다. 이는 또한 무자비한 생존 싸움에서는 허영이자 약점에 불과한 벅의 도덕성이 부패하고 산산조각났다는 뜻이다.

 

-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p35 中-

썰매팀의 교활한 리더 스피츠...

애꾸눈 솔렉스...

썰매개답게 최후를 맞이하는 데이브...

등등... 다른 썰매개들과 어울리면서 벅은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의 법칙 즉, 생존의 법칙을 깨닫는다.

 

개의 시선으로 쓰여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사람과 개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생과 사를 가르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는 사람도 개도 그저 매순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명체일 뿐이다.

 

썰매끌이 개로서 자신의 임무에 자부심을 느끼던 데이브의 최후는 인간과 동물(개)을 나누는 기준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둘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데이브는 너무나 약해져서 썰매를 끌다가 몇 번이나 쓰러지곤 했다. 그러자 스코틀랜드계 인디언 혼혈은 썰매를 멈춘 뒤 데이브를 팀에서 빼내고 솔렉스를 앞자리에 세우려했다. 그의 의도는 데이브가 쉴 수 있도록 썰매 뒤에서 자유롭게 달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픈데도 데이브는 썰매끈이 풀리는 동안 자신이 쫒겨나는 것에 분개하여 투덜거리고 으르렁댔고,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를 솔렉스가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는 상심하여 낑낑거렸다. 썰매를 끄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기 때문에,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도 녀석은 다른 개가 제 일을 하는 것을 못 견뎌했다. (중략)

 

데이브는 썰매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편이 편할 텐데도, 한사코 그렇게 하지 않고 훨씬 가기 힘든 부드러운 눈을 밟고 허우적거리며 달리다 끝내 녹초가 되었다. 녀석은 쓰러졌고, 그렇게 쓰러진 채로 긴 썰매 행렬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갈 때 애처롭게 울부짖었다.(중략)

 

개몰이꾼은 당황했다. 그의 동료들은 개들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거부당했을 때 얼마나 상심하는지에 대해, 너무 늙어 일을 못하거나 부상을 당한 개들이 썰매팀에서 밀려난 것 때문에 죽은 사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그들은 데이브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썰매를 끌다 마음 편히 죽게 해주는 것이 인정을 베푸는 일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데이브는 다시 썰매끈을 차게 되었고, 내상의 고통으로 무심결에 몇 번이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전처럼 자랑스럽게 썰매를 끌었다. 녀석은 몇 번이나 쓰러져 질질 끌려갔고, 한번은 썰매와 부딪혀 그 뒤로는 뒷다리 하나를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데이브는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텼고, 개몰이꾼은 불 옆에 녀석의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튿날 아침 데이브는 너무 약해져서 썰매를 끌 수 없었다. 썰매끈을 채울 시간이 되자 녀석은 개몰이꾼에게 기어가려 애썼다. 필사의 노력으로 겨우 일어섰지만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러자 녀석은 동료들이 썰매끈을 차고 있는 쪽으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갔다. 녀석은 앞발을 내밀었다가 몸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고, 다시 앞발을 내밀어 몸을 확 끌어당겨 조금씩 나아갔다. 그러나 힘이 완전히 소진됐다. 동료들은 눈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들 곁으로 오고 싶어하는 데이브를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강가의 삼림 지대 뒤로 사라질 때까지도 녀석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갑자기 썰매 행렬이 멈췄다. 스코틀랜드계 혼혈이 방금 떠나온 야영지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는 서둘러 돌아왔다. 채찍이 날리고 방울이 경쾌하게 울리자 썰매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그러나 강가의 삼림 지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벅도 알았고, 다른 개들도 알았다.

 

-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p69~72 中-

 

나는 존 손턴과 벅 사이에 흐르는 신뢰와 사랑보다도 데이브가 보여준 이 마지막 장면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인간과 교감하는 개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존 숀턴에게 보여준 벅의 신뢰와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주인에 대한 애완동물의 헌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반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썰매를 끌려고 했던 데이브의 모습은 본능을 뛰어 넘는 행위라 하겠다.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주인에 대한 보답(give and take)으로써의 사랑과 헌신이 아닌, 자기 존재(삶)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추구하고 부여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차원에까지 접근했다고 한다면 인간에 대한 모욕일까?

 

저자인 잭 런던 역시 벅의 손턴을 향한 유난한 사랑을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문명의 증거'로 봤다. 문명과 본능(야생) 사이를 오가던 벅은 손 턴이 죽자 미련없이 문명의 세계를 떠나 야생의 세계로 들어선다.

 

벽난로와 지붕에서 태어난 성실함과 헌신도 그의 본성이었지만, 그는 야성과 교활함도 잃지 않았다. 손턴의 불 옆에 앉아 있는 벅은 대대로 인간의 문명에 길들여진 따뜻한 남쪽 지방의 개라기보다는 야생의 세계에서 온 야생개였다.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인의 물건을 훔치지는 않았지만, 다른 야영지에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은 아무럽지 않게 훔쳤다. 아주 약삭빠르게 훔쳐서 들키는 법도 없었다. - p99 中-

 

벅은 온종일 웅덩이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거나 야영지를 초조하게 배회했다. 죽음이란 움직임의 정지이자 살아 있는 삶과의 이별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존 손턴이 죽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죽음은 벅에게 허기와 유사하지만, 쓰리고 또 쓰리고 먹을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공허함을 남겼다. 벅은 이따금씩 멈춰서서 이하트족의 시체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 고통을 잊곤 했다. 그럴 때면 자신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대단한 자부심-을 자각했다. 그는 삼라만상의 가장 고귀한 사냥감, 즉 인간을 죽였고,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에 맞선 것이었다. 벅은 호기심에 차서 시체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들은 너무 쉽게 죽었다. 허스키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웠다. 화살과 창과 몽둥이만 없으면 그들은 적수가 되지 안았다. 그 후로 벅은 인간들의 손에 화살과 창과 몽둥이가 쥐어있지 않는 한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 p134~135 中-

 

 

한 세기 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사실적이고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야성)과 인간(문명) 세계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잭 런던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최근에서야 알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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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보는 눈 - 한국 사회 빈곤에 대한 편견을 깨자 세상을 읽는 눈
신명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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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

"빈곤은 인류사회의 필요악이다"

"가난한 사람은 다 가난한 이유가 있다"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니까 가난한 거다"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면 누구나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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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게도 나는 그동안 이런 말들을 나도 모르게 내면화시켜 오지 않았나 싶다. 

우리사회에서 빈곤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정치적 담론이 되기에 앞서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빈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냉대와 모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며, 빈자 역시 가난이 무슨 죄인냥(물론, 자랑 또한 아니지만) 침묵하고 숨어들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종종 선거를 앞두고 정치인이나 논객들이 빈곤을 언급하곤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이슈나 피상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을 뿐이다. 

 

나 역시, 확고한 세계관을 갖기 위해 부던히 노력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마치 빈곤은 나와는 아주 먼 일인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읽은 신명호의 <빈곤을 보는 눈>은 빈곤에 대한 나의 식견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상(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재조정해준 고마운 책이다.

 

저자는 지나치게 감상적이지도 이론적이지도 않은 객관적인 시선으로 빈곤의 정의와 원인 그리고 해결방안에 대해 설명한다. 그의 차분하면서도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은 단순히 빈곤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을 뛰어넘어 21세기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삶이 어째서 全지구적으로 빈곤이라는 거센 파도 앞에 직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하는지까지 알려준다.

 

이런 책들을 일컬어 '사회과학서'라고 하겠지만 나에게 이책은 '빈곤은 더 이상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이자 정치적 문제'라는 점을 새롭게 일깨워준 '인문철학서'라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젊은 시절 십여년 넘게 빈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쌓은 내공과 중년을 지나면서 무르익은 저자의 학문적 깊이가 돋보인다.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좌파진영의 선전선동 구호도 보수를 대변하는 언론매체의 교묘한 말장난보다도 더 귀 기울이게 된다.

 

 

빈곤이란 단순히 소득이 적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 누려야 할 적정한 수준에서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비해 굶어죽는 사람이 없으므로 우리사회에서 빈곤은 퇴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언이라는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그렇다면, 빈곤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지극히 게으르거나 질병 혹은 예기치 못한 사고 등 개인적 불운이 겹쳤기 때문일까? 물론, 이와 같은 이유들 역시 사람을 빈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겠지만 절대적인 원인이라고 볼 순 없다. 만약, 이상과 같은 이유들을 빈곤의 절대적인 이유로 본다면, 일을 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위 '워킹 푸어'계층의 증가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빈곤의 발생 원인을 저자는 지난 70년대 서구 영미 사회에서 나타난 이후 8,9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자유주의 노선'에서 찾고 있다. 신자유주의란 한마디로 말하면, 이윤추구를 위해서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고, 경제행위에 따른 각종 규제가 완화되고 풀린 사회를 말한다. 자본이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면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시장(자본)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할 정부'가 오히려 '시장의 편에 서서 국민으로부터 시장을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왔다. 과거에 비해 세계 경제는 더욱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퇴치되기는 커녕 더 한층 강화, 확대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투자와 고용창출을 위해 세금을 줄이고...'

'수출 기업을 돕기위해 고환율 정책을 쓰며...'

'고용시장 유연화라는 이름으로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하고...'

'경쟁력 강화라는 명분으로 공공분야를 민영화하고...'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며 복지예산은 축소시키고...'

 

그러고보니, 우리 정부가 한 일들도 하나같이 국민이 아닌 시장(자본)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민주사회인 우리나라의 정부 대표는 선거를 통한 투표로 뽑이지 않는가? 숫적으로 소수인 자본가(부자)들이 아무리 몰표를 준다고 해도 그들만을 위한 대표가 선출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빈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펼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정책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저자는 미국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농민 중소기업 유색인종 등을 대변하는 정당인 민주당과, 부유층 자본가 보수적 백인층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공화당의 양당구조에서, 2000년 대선 때 극도로 가난한 농촌 지역이 극우파 후보 조지 W. 부시에게 80%가 넘는 표를 몰아준 현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빈곤층 보수화 현상의 원인이 궁금했던 토마스 플랭크(『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의 저자)라는 미국의 저널리스트는 방대한 조사와 분석 끝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문제는 정책이 아니라 문화와 신앙이었다. 공화당과 보수주의 세력은 전략적으로 그렇게 몰아갔다. 그들은 경제 문제를 정치와 분리시키면서 진짜 문제는 낙태와 동성애와 총기 규제를 찬성하고 애국심을 우습게 아는 민주당과 리버벌리스트에게 있다고 공격했다. 그들은 진정한 미국인은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으며 사명감과 애국심이 충만하다는 문화적 프레임을 만들어 민주당 지지자들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표리부동한지를 부각시켰다. (중략)

빈곤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라는,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영혼의 위기"라는 공화당 의원의 주장이 오히려 먹혀들어갔다. (중략)

미국의 서민들은 자신들의 경제가 왜 악화되었는지를 따지기보다는 '강한 미국'과 '경건한 미국인'이라는 오래된 가치를 선택했다. 공화당 정부 아래에서 부자를 위한 감세 조치가 내려지고 실업자가 늘어나는데도, 경제위기는 불가항력적인 것이고 더 큰 문제는 미국을 망치는 불경스러운 진보파들의 작태라는 우파의 선전이 대중에게 설득력을 얻었다.

 

-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p268~271 中-

 

미국 역시 OECD국가 중 빈민층의 비율이 매우 높고,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북서부 유럽에 비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보수당인 공화당이 득세한 이유를  아주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90년대 초반, 민주당 출신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빌 클린턴의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라는 선거 구호가 떠오른다. 그래, 맞는 말이다. '경제는 곧 정치요, 정치는 곧 경제인 것'이다.

 

한편, 저자는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정치는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영/호남이라는 지역주의와 세대간 갈등이 주요 이슈였기 때문에 빈자가 보수정당을 지지하는지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다만, 그는 한국에서는 서민 밀집지역의 투표율이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의 투표율보다 낮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투표에 덜 적극적인 것은 정치가 자신들의 처지를 바꿔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기권한 사람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지 못한 정치층의 잘못인가?

 

가난한 사람들이 민주당이나 진보당을 자신들의 정당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은 그 정당들이 새누리당과 다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노무현정부도 마찬가지였다. 필자는 정치인 노무현의 서민적 풍모를 사랑하고 지역감정과 권위주의를 타파하고자 기울였던 눈물겨운 노력을 칭송한다. 필자는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진정성에 존경의 염마저 품는 자이지만, 그의 경제정책이 서민대중의 편에 섰다고는 인정할 수 없다.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말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물론, 안다. 소를 죽이지 않으면서 휘어진 뿔을 바로잡아야하는 대수술의 고민과 어려움을 어찌 짐작 못할까? 그러나 정권은 오직 정책의 결과로서 말할 뿐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가 '국정과제 어젠다'로 둔갑하고 재벌 개혁을 위한 초기 정책들이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사실을 가난한 사람들은 모른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그저 민주당 정권이 진정 자신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에 남는 게 없을 뿐이다. 집권 기간 중 집값 폭등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흔히 있었던 현상이라는, 정치 공급자의 천연덕스러운 변명을 수요자인 가난한 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러니 '정치'가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고객의 무심함을 나무라서는 안 될 노릇이다. 노무현의 말처럼 농부가 밭을 탓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빈곤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이다. 빈곤의 문제는 정치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정치를 통해서 풀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신명호, <빈곤을 보는 눈> p280~281 中-

 

"빈곤의 문제는 결국 정치의 문제다."라는 저자의 말에 어지러운 현기증이 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랏님이 구제해야 할 의무가 있고...

빈곤은 인류사회의 필요악이라는 말은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교묘한 거짓말일 뿐, 가난은 인류의 절대악으로 반드시 퇴치되어야 하며...

가난은 게을러서도 일을 안해서도 아닌,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짜여진 사회구조와 질서 때문이라는 걸...

 

현재 우리 사회는,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학력자본이라고 불리는 공부(성적) 역시 '개천에서 나는 용은 더 이상 없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난한 자에게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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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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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를 고민하기에 앞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저마다 조금씩 양보를 해야 한다면,

나는 과연 양보를 할 수 있는지...?

양보를 한다면,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것(갖고 있는 것)들 중,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세상이 변하길 원한다면, 우선 자기 자신부터 변하지 않으면 안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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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기껏해야 십여년 전의 가까운 '과거'일 뿐인데 말이다.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tv와 독서 혹은 신문 및 잡지 등이 외부로부터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매개체였다. 그리고 간혹 흥미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어 추가로 알고 싶은 내용이나 궁금증이 생겨도 상황과 조건이 여의치 않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가슴에 담아둬야 했다. 

 

요즘처럼 인터넷을 통해 즉시 궁금증이나 추가로 알고 싶은 내용 등을 접할 수가 없기 때문에 더 많은 정보와 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막연했던 궁금증은 명확해졌으며 다양한 시도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문제해결 능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우리 삶 속에서 체험과 경험을 통한 내적인 성장은 더 멀어진 것 같다. 궁금증과 지적인 욕구를 너무나도 손쉽게 해결하다보니 오히려 호기심은 사라지고 생각하는 힘과 문제 해결 능력은 갈수록 결여되는 것 같다.  

 

나 역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면서도 이게 '과연 스마트한 삶일까?'라는 질문을 불연듯 던지게 된다.

외식을 할때도... 쇼핑을 할때도... 여행을 갈때도...

우선 인터넷으로 소위 '정보'라는 걸 먼저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정보'가 알려준대로 '그곳'을 찾아가서 '정보'가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한다.  맞으면 기뻐하고, 다르면 화를 내면서 말이다.

 

소위, 낯섦을 통한 배움이나 성장은 기대할 수 없다.

 

성장이란 접해보지 못했던 사물과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동안 알고 있던 지식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새롭게 적응해가는 과정이다. 즉, 기존의 지식과 지혜가 맞는지를 재확인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뛰어넘어 더 큰 질서와 더 넓은 세계와 마주하는 것이다.

 

인터넷을 통해 얻은 '정보'는 언뜻 보면 유용한 것 같지만, 새로움(낯섦)과 마주했을 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체험의 기회와 성장의 계기를 우리로부터 앗아간다. 우리가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에 집착하고 의지한다는 건, 바꿔 말하면 '낯섦에 대한 거부요, 새로움으로부터의 도피'라 하겠다. 그 결과,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기를 멈춘 채 인터넷의 정보를 확인하는 역할만 하게 된다. 그러면서 이를 '스마트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인터넷 보고 찾아갔는데 맛은 별로.'라던지...

'인터넷으로 본 모습과 실제 모습이 똑같네.'라던지...

'인터넷에서는 이러저러 하더니 실제는 저러이러할 뿐.'이라던지...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우리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 수많은 시행착오을 거치면서 마침내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난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도전과 실패를 통한 성장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패와 거듭된 도전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배워나가는 것 대신 타인의 지식과 지혜(인터넷의 정보)에 무임승차하여 단 한번의 선택과 시도가 곧장 성공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심지어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리석고 비문명적인 인간으로 치부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인간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인간 관계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신뢰의 부재'라고 하겠다. 신뢰란 서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계를 맺을 때에만 가능하며 이런 관계는 함께 한 시간과 경험의 깊이와 두께로 결정된다. 오랜 세월 함께 하면서 서로 천천히 이해하고 알아갈 때에만 생기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요즘은 SNS등으로 소통은 활발해졌으나 인간 관계는 빈약해졌다.

접속이 쉽고 빠른 만큼 관계 단절 또한 간편해졌다. 해고도 이별도 문자로 한다. 이를 두고 서로 어색하게 얼굴 맞대지 않아서 좋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렇게 인간관계가 편리함(?)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말그대로 인관관계 또한 소비하는 극단적인 소비사회를 맞이하게 될 뿐이다. 아니, 이미 이런 사회에 접어들었다고 봐야 하리라. 개인 블로그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소설네크워크)를 통해 자신의 사생활을 공개하고 심지어 생중계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세상이니 말이다.

 

현대인이 이렇게 SNS에 사생활을 공개하는 건, 그만큼 외롭다는 방증이다. 누군가와 소통하고 싶지만 1:1 대면접촉은 낯설고 불안하다. 일단 나와 다른 사람은 두렵고 무섭다. 어느 순간, 타인은 나와 또다른 세상을 연결해주는 매신저가 아니라 나의 세계를 침범해 들어온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인간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가 아닌 '나와 남'의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거울이요 창(窓)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남'이란 나의 세상 너머 존재하는 그러므로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낯선 대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안쓰럽게도 상처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나의 세계 밖에 있는 외계인과도 같은 대상과 끝없이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맺어진 인간관계는 너무나도 '스마트'하고 '스피드'하다. 바야흐로 인간관계 또한 인스턴트화 시대에 접어들었다.

 

한마디로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접속하지만 관계부재 소통부재의 사회라하겠다. 이를 엄기호라는 학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단속(斷續)사회'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는 동명저서 <단속사회>에서 현대사회를 '같고 비슷한 것에는 끊임없이 접속해 있지만 타인의 고통처럼 조금이라도 자신과 다른 것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외면하며 개입하려 하지 않는, 소위 자기를 '단속(團束)'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차단하고 동일성만 추구하는 단속사회'라고 정의한있다.

 

바야흐로, 우린 모두 단속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과 기술의 결합으로 탄생한 현대사회의 '편리함'이야말로 우리가 외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접속과 차단을 수시로 하면서도 또 다른 타인을 가슴 깊이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인간 본연의 심성을 포기한 댓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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