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딤섬으로 점심먹기 - 한·중 문화비교론
김혜원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3년 3월
평점 :
<한중 문화비교론: 中韓文化談>이라는 부제처럼 이 책은 '중국 밖의 중국' 혹은 '중국 아닌 중국'인 홍콩과 한국을 비교한
것이다. 불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1997년부터 홍콩에서 거주하면서 홍콩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강의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이후, 중국을 여행하는 한국인 단체 관광객이 폭증하고 중국에서 유학하는 한국 학생들과 주재원 등이 늘어나면서 중국
대륙을 소개하는 책들이 봇물을 이룬 것과는 대조적으로 홍콩에 대한 읽을 거리는 주로 관광 안내서 위주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혜원의
<딤섬으로 점심먹기>는 홍콩(인)과 한국(인)을 비교 분석한 보기 드문 인문서라 하겠다.
언어와 문화에서부터 생활방식과 의식의 차이까지 상당히 여러 분야를 아우르면서도 너무 깊지도 너무 얕지도 않아서 부담없이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관심을 끈 건 문명과 문화의 차이와 한국어와 중국어를 비교한 부분 그리고 한류가 인기 있는 이유를 설명한 부분이었다.
우선, 저자는 도입부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언급하면서 소위
'문명'이란 인류 전체에게 적용되는 기술적 진보인 반면, 문화란 특수한 민족이나 지역인들이 오랫동안 고수해와서 쉽게 바뀌지 않는 일종의
'습관'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아랍(이슬람교)과 미국(기독교) 간의 충돌을 주로 설명하고 있는 앞의 책 제목은 당연히
'문명의 충돌'이 아닌 '문화의 충돌'이라고 해야 옳다고 지적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원래는 '동양' 혹은 '동양적 사고'를 일컬는 Oriental 혹은 Orientalism이 이제는 '서양인에 비친 혹은 서양인이 보고
싶어하는 동양'이라는 의미로 바뀌었는데, 이는 서구 문명과 문화가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한 발상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동양인이 바라보는
'동양' 혹은 '동양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일까?
얼마 전,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한국인들은 자못 문화적 우월감에 빠졌더랬다. 그러나 과연 한국
가수가 부른 한국어 노래가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고해서 한국 문화가 소위 '세계화'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한국 가수나 그룹의 노래 및 드라마와 영화 등 문화 컨텐츠가 아시아를 넘어 서구 사회에서도 환영받는 것은 '서구화'에 성공한, 즉
다시 말하면 서양인이 기대하는 아시아의 모습이자 서양을 본받고 싶어하는 아시아인의 내재적 욕망을 효과적으로 충족시킨 것에
다름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류'로 통칭되는 한국산(産) 문화 상품에 열광하는 아시아와 서구 사회를 보면서 한국 문화의 우수함이자 세계화의
성공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밖에도 100년 넘게 영국의 식민지였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홍콩이지만 여전히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혹은 단체주의)가
강하고 아시아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한국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다만, 중국 대륙의 '콴시'는 매우 폐쇄적인
집단주의인 반면 한국의 집단주의(온정주의)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세력을 외부에 과시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알면 알수록 한국인과 중국인은 엇비슷 한 듯 하면서도 무척 다른 것 같다.
중국어를 맨 처음 배운던 당시, 나는 표의문자인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가 시제를 표현할 수 없고, 한국어에서는 조사 등으로
간단하게 전달되는 것을 중국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을 알고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일찍이 한 저명한
언어학자가 '중국어는 언어가 아니라 기호'라고 한 말이 지나친 비약은 아닌 셈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와 같은 중국어와 한국어의 차이가 어떻게 두나라의 언어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한다.
언어유형학에서는 중국어를 '고립어(孤立語)'로 분류하는데, 이는 중국어에는 어휘의 형태적 변화 또는 활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인이 한자를 계속 사용하는한, 그들의 말인 중국어는 계속 고립어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표의문자인
한자로는 어휘의 형태적 변화를 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말(소리)을 표기하기에 아주 제한적이며 또한 표기될 수 없는 말은
자연히 살아남지 못하게 되므로, 결국 말로서의 중국어(漢語)는 그의 문자인 한자로 표기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진화할 수
있다. 즉, 한자라는 글이 그들의 말 중국어의 진화를 제한한다는 것이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86~87 中-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한글이 정말로 배우기 쉽게 체계적으로 잘 만들어진 문자라는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말인) 한국어는 외국인이 배우기가 정말 힘들겠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94 中-
일본어와 한국어 두 언어를 모두 배워 본 외국인이면 한결같이 한국어가 훨씬 더 배우기 어렵다고 말한다. 비슷한
문법구조를 가진 일본어와 비교해도 한국어에서는 배워야 할 문법이 너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배우기 쉬운 한글이 한국어의 문법을 어렵게 만든
측면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문자는 너무 앞서 가는 말의 진화를 제어(또한 여과)함으로써 그 문법구조를 체계화시킬
수 있는데, 한글은 그러하지 못했다. (중략)
요약하자면, 한국어의 문법체계가 지금처럼 복잡하고 방만해진 이유 중 하나는, 한글이 너무 유연하고 또한 '오백년 밖에' 안 된 젊은
문자이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문법적 진화를 가로막았던 한자와 결별하고 한글을 만나서 지난 오백 년 동안 많은 진화 과정을 겪었다. 그러한 진화
과정에서, 소리를 음소단위로 구별하여 표기할 정도로 유연하고 또한 신생문자였기 때문에, 한글은 중구난방으로 마구 진화하며 한국어를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다. 따라서 한국어의 문법 체계가 더 나은 짜임새를 갖추려면 좀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바로
중국어이다. 중국어에는 어미의 활용과 같은 문법적 기능이 없고 문법이 아주 단순한데, 이는 보수적인 한자가 중국어의 문법적 진화를 '지나치게'
제어했기 때문이다. -김혜원, <딤섬으로 점심먹기> p96~97 中-
이 밖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이 돈과 외모에 집착하는 이유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때문이라고 설명한
부분에도 공감이 갔다. 외모 역시 학벌과 마찬가지로 '돈벌기 경쟁'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이니 말이다. 그 동안은 이와 같은 학벌지상주의와 외모중시풍조를 '남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동양적 집단주의나
유교적 가치관 탓으로 돌렸으나, 이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보는 것이 훨씬 더 타당성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복지제도가 한국보다 훨씬 더 잘 구축되어 있는 싱가포르와 자본주의 역사가 오래된 홍콩은 한국처럼 학벌와 외모를 중시하는 정도가 훨씬 더
미약하다는 점 역시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다. 반면, 사회주의식 복지제도 대신 자본주의식 시장경제를 선택한 중국 대륙의 경우
학벌과 외모를 중시하는 풍조에 있어서 한국을 가장 빠르게 닮아가고 있다는 점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편, 저자는 한국인의 집단주의(단체의식, 그중에서도 일체감)를 강력한 평등주의와 연관지었다. 즉, 단체의식이 강하면 구성원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남과는 다르기 위함'이나 '남보다 나은'이 아닌 '남들만큼은 나도 해야 한다'는 평등주의가 결국 '남들이 하면 나도
한다'로 변질된 것이라고 한다.
이 점은 아시아에서는 제일 먼저 선진국으로 발전한 일본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일본인의 경우도 집단주의가 발달한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집단주의는 한국처럼 평등의식에서 출발한 것일까?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문화적 스텍트럼을 갖고 있다는 점으로 보아 일본은 동양적인 집단주의적 성향을 여전히 갖고
있지만 이는 한국처럼 극단적인 평등주의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발로라기보다는 다양성을 중시하는 서구사회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동양적 습관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읽혀질 수 있을 것 같다.
아시아는 서구에 비해 공통점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문화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다름'을 '차별'이나 '격차'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성향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반면,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서구의 문화는 오히려 '다름'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태도를 갖고 있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바로, 서구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동경과 컴프렉스(complex)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