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 전2권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나와 비슷한 연배의 작가들의 글들은 어딘지 모르게 남다르게 다가온다.

아마도 시대공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4도에 나온 <청춘의 문장들>이 다시 화제다. 아마 지난 5월 후편 격인 <청춘의 문장들 +>가 나왔기 때문이리라. 십년이라는 시차에서 오는 느낌이나 감동이 남다르기 때문에 이런 시리즈물 아주 좋아한다. 하물며 나와 동년배인 작가가 쓴 것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목록 중 하나다.


작가가 서른넷에 출판된 <청춘의 문장들>은 이십대를 막 지나 직장생활을 거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직후까지의 작가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추억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하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및 습작의 세월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열정적이고 치열하다. 뭔가 이루고자 하는 충만함이랄까...? 확실히 청춘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 당시 나 역시 막 서른에 접어든 시기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십대와 이십대의 방황과 낯섦에서는 많이 벗어났지만 여전히 막막했으며 여전히 헤매이고 있었더랬지...


그때 그시절 내 곁에 있었던 김광석 역시 작가를 찾아갔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작가의 애상에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뚝ㅡ'하고 비명을 지른다. 팽팽하게 작동하던 방어기제가 순식간에 무장해제되는 순간이었다. 김광석만 나오면 이 모양이다. 우리 세대는....  작가 김연수만 만나도 역시 이 모양이지. 우리 세대는...

어....?!

아니다.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20대 심지어 10대조차도 김광석은 레전드인 것 같다. 그리고 <청춘의 문장들> 플러스가 올해 다시 출판된 걸 보면, 김연수 역시 여전히 2,30대에게도 사랑받는 작가인 것 같다.


김연수 작가의 말처럼, 우리 세대와 우리 윗세대는 공감대가 너무 없었다. 성장한 환경 차이가 너무 많이 났으니까... 그러나 그 이후 세대들끼리는 의외로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나도 느낀다. 인간의 감성이 진화하는 속도는 생각보다 느리다. 최소한 경제 성장 속도보다는 확실히 느리다. 감성 즉 문화란 어느 정도 경제가 발전한 다음에 형성되고 향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90년대 이후 완만한 경제성장속도만큼이나 우리의 문화적 감수성 코드 역시 천천히 바뀌어 온 게 아닐까 싶다. 즉, 5,60년대 청춘을 보낸 세대와 7,80년대 청춘을 보낸 사람들은 서로 공유할 '거리'가 별로 없지만, 8,90년대 청춘들과 2000년대 이후 청춘들과는 의외로 공감대가 크고 넓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즘은 띠동갑과 친구가 되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게 되었다. 아이유와 김창환이 듀엣으로 <너의 의미>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41 -


<청춘의 문장들 +> 발문을 쓴 작가 김애란은 이를 두고, "세상의 모든 인연들은 두 번 만난다. 한번은 각자의 나이로, 또 한번은 상대방의 나이가 되서..."라고 표현했다.

순간 머리속이 '멍'해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땅이 쑥 꺼지는 것 같은... 이런 기분, 언젠가 느꼈던 적이 있었더랬지....

내가 우리 엄마가 날 낳았던 그 나이가 되었을 때, 그해 내 생일날, 난 엄마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엄마가 아닌, 나처럼 꿈을 갖고 있는 여자로, 오롯한 하나의 인격체로 다가왔더랬지... 그순간 엄마를 향한 솟구치던 미안함과 애틋함과 고마움과 연민과 사랑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작가는 이런 마음을 <청춘의 문장들 +>에서 이처럼 풀어놓았고, 난 그만 눈물줄을 놓아 버렸다.

부모가 된다는 건 자기 인생을 희생하면서 아이의 인생을 떠맡는 거예요. 우리 부모 세대들은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 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자기 삶의 일부를 희생한다는 뜻이에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부일 수도 있고...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38 -


그렇구나...

그런 거였구나...

나의 탄생과 성장은 그 누군가의 삶의 희생 일부 위에 세워진 것이었구나....

어쩌면, 일부가 아닌 전부였던 그 누군가의 삶...


부모가 된다는 건 바다를 건너는 법을 배우는 것이란다. 망망대해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유일한 위안은 우리 부모님이 나보다 앞서 그 바다를 건너갔다는 사실 단 한가지 뿐.


마음에 시퍼런 멍이 든다는 건, 이럴 때 하라고 존재하는 표현인가 보다.



<청춘의 문장들> 곳곳엔 고전과 한문, 한시가 자주 등장한다.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낯선 것들이다. 작가는 몇 백년 혹은 그보다도 훨씬 더 먼 옛날 옛적 사람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냈지만, 난 아쉽게도 그와 같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고풍(?)스러워서 책장을 덮으라치면, 등장하곤 하는 빼어난 문장들... 문장들...


나도 모르게 손을 놀려 백지에 옮겨 적어 본다. 

작가가 밑줄 그어가며 읽었던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들을 소개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 역시 밑줄 긋고 백지에 옮겨 적는 문장들...

이런 문장들은 사소하지만 때론 조각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갈 때 '노'가 되어 주기도 한다는 걸 잘 안다. 이런 건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알 수 없으니 절대로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는 사실. 중년에 접어든 내가 깨달은 거라곤 이점 하나뿐이다.  

 

아!

나 또한, 벌써 이만큼이나 바다를 건너왔구나.    

이런 걸, 알만큼...

 

내가 아는 건 바로 이점이다. 

아! 이런 걸 알만큼, 나 또한 벌써 이만큼이나 바다를 건너왔나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242 -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가정법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배웠고 3차 방정식을 그래프로 옮기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95 -


재촉하는 만큼 빨리 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이가 들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쯤이야 들어준다는 것. 삶이 너그러운 건 그때 뿐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210 -


흘러간다.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 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이지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212 -


<청춘의 문장들> 이후, 다시 십년이 흘렀다.

나도 작가도 이젠 중년이다. 원치 않아도... 누가 뭐래도....

그렇지만 지난 십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십대와 이십대는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오르건만 삼십대는 도무지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에 없다.

왜, 일까?


<청춘의 문장들 +>을 읽으면서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에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42 -


내가 삼십대에 만났던 사람들...

내가 삼십대에 겪었던 일들은...

모두 내 이십대의 연장이자 그림자였구나! 

그래서 삼십대에 본 하늘은 이십대에 봤던 하늘만큼 강렬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으니 기억에도 없는 것이구나!

내 생애 가장 푸르른 하늘은 바로 이십대에 봤던 그 하늘,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구나!



저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들을 청춘이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하도 많아서 남은 시간 같은 것은 따져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진짜 젊은 사람들이죠. 그래서 어떤 일에 자신의 전부를 걸 수도 있어요.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가능한 거죠.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65~166 -


그래, 맞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갖고 있는 거라곤 시간밖에 없었던 나에게 어른이란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서어서 시간이 흘러서 청춘이란 이 혼란한 시기가 빨리 내 인생에서 지나가기만을 바랬더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청춘의 시간들은 참 느리게도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흘러 갔을 것'이라고 추측형을 쓴 건, 그 당시에는 시간의 흐름이 결코 느리다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춘의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먼 훗날의 깨달음이었다. 


피는 꽃이 좋았던 시절에는 그 꽃잎들이 지는 걸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나이가 들고, 이제는 지는 꽃은 모두 화려한 옛 시절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심규선과 덕원의 <왜죠>라는 노래를 들었다. '꽃처럼 한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왜 꽃처럼 내 곁을 떠나려 하는 건가요?라는 가사처럼, 수없이 반복된, 꽃지는 시절의 이별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떨어지는 꽃잎 앞에서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91 -


인생이란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이란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지...?

당신도 나와 엇비슷하게 문학을 공부했을 뿐이잖아!

당신도 나와 똑같은 음악을 듣고 똑같은 책을 읽었을 따름이잖아!

당신도 나와 똑같은 하늘아래 똑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나이 먹었을 뿐이잖아!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은 느끼고 표현하는데.... 나는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하는 걸까...? 


그래서 당신은 작가가 된 것이고, 나는 못 된 것이겠지...



당신은 언제 눈물을 흘리는가? 적어도 나는 짐작과는 다른 일들을 겪을 때 눈물을 흘린다. 대체적으로 삶이란 짐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 뒀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소설은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다.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나와 당신이 함께 납득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당신이나 내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혹은 진심으로 기뻐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당신과 내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당신이나 나나 이제 다른 존재가 돼 살아가겠지만, 그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00~101 -


나 또한 젊은 시절, 세상이 나만 미워한다고 생각했더랬다.

난 이렇게 간절하건만....

난 이렇게 혼신을 다하고 있건만...

난 이렇게 온몸으로 아파하고 있건만...

세상의 빛은 늘 다른 사람들 차지였지.... 그런 널, 난 참 많이도 원망하며 미워했더랬지... 


그런데 지나고 보니 세상이 나에게도 너그러움 한움큼은 베풀어주었구나...싶다.

일단, 세상은 나에게 좋은 문장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난 책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았더랬지... 나에게 책읽기는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지금도 이는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혜로워지다가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런 게 사람이라면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겠는데요, 지금까지 살아보니까 사람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좋아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빠지지도 않은 것 같아요. 뛰어난 사람들만이 시간이 갈수록 좋아질 수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빠질 가능성이 더 많아요. 조금만 방심하면 나빠지게 돼 있는 게 인간이거든요.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35 -


인류가 계속되는한, 청춘의 무지는 반복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청춘의 문장들>을 읽는다고 해서 젊은 독자들이 젊은 시절 열심히 살아야겠다, 뭐,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는 건 무리겠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시간이 아주 많이 남았으니까 대충 살아도 됩니다. 이것저것 다 해보기도 하고, 그냥 시간만 보내기도 하고요. 청춘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너무 잘 살아보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거잖아요. 젊었을 때는 천 년을 살 수 있는 사람처럼 살았으며 해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보고 싶은 거 다 보고요.


하지만 그런 낮을 보낸 날에도 밤은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고, 그 밤에 대개 우리는 혼자겠죠. 그런 밤이면 아마 시간이 너무 많아서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거예요. 맞아요 .그래서 청춘은 무거워요. 빨리 늙었으면 싶기도 하고요. 그럴 때 저는 저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가 마음이 동하면 잘 알지도 못하는 문장들에 줄을 그었죠. 그렇게 책에다 몇 번 밑줄을 긋다가 잠들고 나면,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됐죠. 역시 어마어마하게 많이 남은 나날 중의 첫번째 날, 누군가에게 <청춘의 문장들>은 그 새로운 날에 돌이켜보는, 지난 밤의 밑줄 그은 문장 같은 것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97 -


지난 주말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청춘의 문장들>과 <청춘의 문장들 +> 두권의 책을 내리 읽었다.


뭐라 할 말이 없다.

그저 참 좋다... 라는 말밖에는...


이 책에 대해서 김애란 작가는 발문에 이렇게 적어 놓았더라.

<청춘의 문장들>은 누군가 오래 본 문장, 앞으로 누군가 오래 볼 문장, 바로 청춘의 문장들이다. 라고...

한권의 책에 바쳐지는 발문으론, 최고 중에 최고가 아닐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여성주의 책들을 읽었다.

모두 세 권이지만 어떻게 보면 한 권 같은 책이다.

 

이들 책들을 알게 된 건, 우주처럼 넓고 넓은 인터넷 세상에서 솔직하게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찾아들어간 사이트에서였다. 그 사이트 안의 여러 카테고리 중, '자기만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블로그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위험성을 차단하면서도 비공개 글쓰기가 아니라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 조만간 그곳에 입주(?)하려고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을 무렵, 2000년 문을 연 이래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공간과 소통을 추구해왔던 그 사이트가 경제적인 이유등으로 올 11월 폐쇄된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아, 이런...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난, 참 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여성이면서도 이쪽 방면으로는 자의반 타의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사이트의 '자기만의 방'에 쓰여졌던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 2007년도에 출판된 적이 있음을 알아냈고, 마침내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에서 절판된 <언니네 방> 1권과 2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니네 방> 후속작을 표방하고 2009년도에 출간된 <언니들, 집을 나가다>라는 책도 더불어 찾아내 읽는 기쁨을 맛봤다.  특히,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미혼도 기혼도 아닌 비혼을 선택한 사람(남자도 포함되어 있다.)들의 목소리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그러므로 미혼이나 기혼뿐만 아니라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과 앞으로 선택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여성이기에 받아야만 했던 차별과 고통과 학대와 폭력의 경험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이 아려오면서 동시에 분노가 치민다. 남성의 이중성과 이 사회의 집단기만뿐만 아니라 여성의 체념과 저항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너무 가감없이 다가와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면서도 평소 사회 제도에 냉소적이던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사회 발전을 위해 도대체 넌 무슨 일을 했니?' 하고 자문하고 부끄러워하는 고질병을 또 다시 앓아야만 했다. 이 책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잠한 곳에 싸움을 붙이는 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스스로 잘살고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책들은, 그동안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잡고 있었던 반(反)여성주의를 확인하는 기회 또한 제공해주었다. 

고백하자면 대학 재학 시절부터 나름 총명함(?)을 자랑하던 나는 여성주의에 대해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갖고 있었더랬다.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동성인 내가 보기에도 왠지 불편하고 거북했다. 나조차도 충분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하고 거북한 '느낌'들....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처럼 나에게 여성주의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낯설고 어색한 그 무엇, 그래서 피하기만 했던 그 어떤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지도 잘못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세월과 함께 익숙해져 내 안에서 더욱 돈독해져만 갔다.  

 

이 책들을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느낌들'은 바로 수천년 간 인류가 주장하고 공고히 해온 전통이자 문화이며 규범이요 제도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걸...


여자는 순종적이고, 양보해야 하며, 참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뭔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 전통문화와 사회제도를 전복시키려는 되먹지 못한 행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남자처럼 큰소리로 뭔가를 말하고, 뜻대로 행동하는 건 전통을 해치고 국가와 사회를 망치는 길이다... 등등...

.

.

.

바로 이와 같은 사회 규범들로 인해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반여성주의자로 길러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한 후 명절에 일만 하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며느리에게만 일을 시키고...

차별과 학대 받으며 성장한 여자 아이는 엄마가 되어 또 다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ㅡ쫄병은 원래 몰매를 맞는 거야!

ㅡ나도 쫄병일 땐 조리돌림 당했어.

ㅡ억울하면 너도 선임되서 그대로 하면 되잖아.


그래, 바로 이런 거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혹은 '원리'?)로 인해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이 무슨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양, 공공연하게 확산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여성(쫄병)으로서 차별 받으면서 느낀 분노를 엉뚱하게도 며느리(후임자)에게 전가하는 이와 같은 고질적인 악순환은 어째서 일어나는 걸까? 

그 이유는 남성우월(위계질서)과 여성비하(집단주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기만만하던 젊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희생한 다음, 여성이라는 지위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고 거부하게 만든다. 그래서 차별받은 딸이 엄마가 되어 다시 딸을 차별하고, 학대받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 다시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전가시키는 것이다.  뭔가 잘못됐지만 큰소리로 '잘못됐다!'고 주장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도 어서 빨리 피해자 신분에서 가해자 신분으로 전환되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아는데, 모두가 그렇게 하니 나도 어쩔 수 없다....?!'


남들이 모두 걸어가는 길이 반드시 옳은 길도 유일한 길도 아니다.

오히려 모두 잘못된 길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혹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게 억울해서 다른 사람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전통과 규범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잘못된 길로 먼저 걸어들어선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여긴 잘못된 길이라고... 그러니 이쪽이 아닌 다른 길로 가라고...

   

이땅의 많은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에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길을 잃지 말라고 조언하며 타이른다.

 

내가 걸어온 길 그대로 밟아서 따라오면 된다고... 그럼, 힘도 덜 들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엇보다도 혹시나 길 위에서 뭔가 잘못되더라도 길 탓을 하면 된다고...  그렇지만 만약 되바라지게 어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걸어갔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스스로 책임질거냐고....

 

그런데 여기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있다.

원래 길이란 없는 거라고.... 그러니 잃을 길 따위도 없으니 걱정 마시라고... 내 두발로 걸어가는 길, 내가 알아서 갈 터이고 책임도 내가 질 거라고... 그러니 어르신이나 가시던 그 길 계속 쭉 가시라고... 

 


 

어느 학자가 ' 한강의 기적을 라인강의 기적과 비교하는 건 한국에게 모욕이다''라고 한 말이 불연듯 떠오른다.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최강대국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큼 강대국이었던 독일의 경제성장과 식민지 약소국에 내전까지 치러야했던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 난이도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우리 한국인 정말 대단하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현대사는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난 한국인인게 정말 자랑스럽다.


그러나,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울수록 한국이 선진국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창피함도 동시에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남다름'이란 칭찬이 결코 아니다.

남과 다름은 곧 '죽음'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배려하지 않는다. 한국과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갖고 있는 나라와 비교하면 이런 면에서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언급해야 할 경우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넘어서 분노를 느낄 정도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이웃나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여전히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 중국과 비교해봐도 남여 성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편이다. 


OECD 국가 중,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하위권에 머물러 있으며, 남여 임금격차도 40%씩이나 차이나고, 비정규직의 2/3는 여성들이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 정도가 언론에서 언급되는 수준이다. 즉, 이는 남자든 여자든 전국민이 체감하는 성차별 지수란 의미다. 만약,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은 생각보다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

.

.

새로운 계절과 함께 나를 찾아온 이 책들은 좋은 책이기에 앞서 훌륭한 책들이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집단주의에 무릎 꿇지 않고 잘못된 역사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서 개인적 위험과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혹은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한 사람들의 고백이고 다짐이기 때문이다. 

난, 이런 사람들을 인생의 진정한 승자라고 생각하며 진짜 용기있는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책들, 꼭 읽어야할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만 죽어라 읽어댄다. 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 목표 중 하나인 '한달에 한권 고전 읽기' 프로젝트(?)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주로 제목은 어렸을때부터 익숙하건만 도무지 내용이 뭔지 모르거나 알쏭달쏭한 고전들을 섭렵해보려고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전보다는 신간을 찾게 되고, 무엇보다도 고전이라 불리우는 것들이 하나같이 분량이 많다. ㅠㅠ

 

미국의 마트 트웨인과 함께 찰스 디킨스는 19세기 영문학의 거장이요, 현대문학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단편 <크리스마스 캐롤>은 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단골 시나리오라서 다들 친숙할 것이다. 암튼 그의 대표작들인 <두 도시 이야기> <데이비드 코퍼필드> <올리버 트위스트> 그리고 <위대한 유산>등을 모르고서는 현대 영미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저 문학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현대 서구 문화의 토대라고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단순히 우리나라에 수입되는 헐리우드 영화만 보더라도 원전이 영국 문학작품인 경우는 셀 수도 없이 많다. 해리포터 시리즈와 반지의 제왕 등 환타지물들과 범죄, 추리물의 거장 아가사 크리스티까지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19세기 영국 문학과 맞닿아 있다. 


아, 부럽다....


서론이 길었지만 결론은 이런 이유들로 인해 최근에 찰스 디킨스 작품을 읽었고 앞으로도 읽어야겠다는 뜻이다. 그러니 여러분들도... (ㅋㅋㅋㅋ)


예상했던 대로 작품은 대단히 교훈적이다.

등장인물들의 얽히고 섥힌 '인연'들과 '반전' 등등... 스토리는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불필요한 묘사와 등장인물을 통한 '해설'이 너무 단조로웠다.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선인과 악인의 대립 구조를 통해 '청교도 정신'과 '신사도'를 강조한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요약하면,


어린 주인공 핍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누나와 매부에 의해 성장한다. 누나는 비록 강한 성격의 드센 여자였지만 동생과 가족을 끔찍히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그 드센 성격이 불러온 불운으로 목숨은 건지지만 뇌를 크게 다쳐 침대에 누워서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편, 그녀의 남편이자 핍의 매부인 대장장이 조는 다소 묵뚝뚝하고 무식한 인물이지만 자신의 신분에 맞는 자족적인 삶에 만족할 줄 알았으며, 무엇보다도 핍에 대한 우의와 애정을 지키는 숭고한 인물이다. 그리고 총명한 여자인 비디는 핍을 좋아했지만 핍이 '위대한 유산'을 상속받아 런던으로 신사가 되기 위해 떠나자 그를 보내준다. 뿐만 아니라 핍의 병든 누나를 돌봐주고 마침내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조와 결혼을 한다. 조는 아내인 핍의 누나가 죽자 자신을 대신하여 아내를 돌봐준 비디와 결혼을 한다. 나이차이는 상당했을 듯...

 

 

반면, 콤피슨과 올릭(조의 대장간에서 일하던 인부로 핍의 누나를 뒤에서 공격하여 장애를 입힌다)은 전형적인 악인이라고 할 수 있다. 콤피슨은 헤비샴의 배다른 남동생으로 헤비샴의 약혼자와 결탁하여 헤비샴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그리고 아벨 매그위치를 범죄의 길로 인도한다. 그의 사악함은 결국 아벨의 목숨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까지 앗아가고 만다.

이 세상엔 용서받을 수 없는 유형의 인물도 있는 법이다.

 

한편, 자신의 슬픔을 에스텔러에게 투영시키고 핍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킨 헤비샴이라는 인물은 비록 악인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타인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실패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헤비샴처럼 핍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했던 아벨 매그위치에 대해서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짓지 어렵다. 그의 선함이란 비록 하층민으로 살아오면서 어려서부터 사회의 냉대와 학대를 받았지만 자신에게 선의를 베푼 소년에게 '위대한 유산'으로써 선의에 보답하려했다는 점이리라.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의 행동은 자신이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희망사항을 소년 핍을 통해 대리 만족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순수한 의도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주인공 핍은 에스텔러를 만난 후부터 그녀에 대한 사랑-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을 키워간다. 그래서 자신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가난하고 무식한 자신의 가족(매부와 누나)을 부끄러워하면서 신사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된다. 신사가 되기만 한다면 에스텔러의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뜻밖에도 '위대한 유산'이 상속되면서 핍은 꿈에도 그리던 신사가 되기 위해 런던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렇지만 영국의 상류사회 속에서의 핍은 비록 옷차림과 행동거지는 신사의 그것이었을지 몰라도 진정한 신사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려 한 사람이 예상했던 헤비샴 부인이 아니라 범죄자인 매그위치라는 사실을 알고는 갈등하다가 그를 보호해주고 국외로 탈출시켜 목숨을 구해주고자 하는 과정을 통해 진정한 신사로 거듭나게 된다.

 

반면,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신사'라 할 만한 인물은 핍의 매부인 조와 친구인 허버트라 하겠다.

비록 허버트는 핍과의 첫만남에서 발생했던 싸움에서는 보기좋게 패배했지만 외모와 지위라는 배경에 미혹된 사랑을 선택한 핍과는 달리 성품을 보고 사랑을 할 줄 아는 인물이다. 이 점에서, 허버트는 조 그리고 비디와 동급의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인물로는 제이거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웨믹이다. 그는 직장과 가정에서 철저하게 이중적인 삶을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그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혹은 '장악')하는 현명함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의도를 알 수 없는 선의적 행동을 한다. 이 밖에도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인물과 인물을 이어주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제이거스라는 인물 역시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에게선 마치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시선이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제이거스는 작가의 화신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으로, 작품 속 여성 인물들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하나같이 비정상으로 그려진다. 

외모가 추하거나 성격이 거칠지 않으면 요조숙녀 둘 중 하나로 그려진다.

그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부여하고 요구했던 역할이라 하겠다. 즉 인류에게 꼭 필요한 출산과 육아 및 가정 살림을 담당하며, 남성이 자신의 삶을 살고 꿈을 이루도록 철저하게 봉사하고 보조하는 역할들 말이다.


20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여전히 여성에게는 가혹하고 불리한 것 같다.

찰스 디킨스와 비슷한 19세 초중반에 활동했던, 역시 영국의 여류작가 샬롯 브론테는 '커러 벨'이라는 남자이름으로 <제인 에어>를 발표해야만 했다.

섬세한 심리묘사로 유명한 그녀의 작품들은 당시 여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사랑에 목숨 거는 상류층 여성 아니면 엄청난 노동에 시달리는 하층민 여성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 '제인'는 오히려 당시 사회가 부여한 여성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발표되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명전'의 반열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역설적이게도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건 희생과 헌신이라는 걸 말해준다.

여성이란 바로 희생과 헌신의 또 다른 이름에 다름 아니었다. 

.

.

.

그나저나 나는 왜 바로 윗 문장에서 'ㅡ었'이라는 과거형 어미를 사용한 걸까...?

오늘날 사회는 더 이상 '여성'이란 희생과 헌신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기 때문일까....? 아님, 과거 한때의 '흑역사'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희망사항이라도 투영시켰기 때문일까...?


고전을 읽으면 사고력을 키워준다고 하는데, 이 책 정말 고전임에 틀림없다.

그저 소설책 한권 읽었을 뿐인데, 내 생각은 어느덧 여성주의에까지 뻗어나가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재의 유전자, 광인의 유전자
필립 R. 레일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제목에 비해, 그닥 흥미롭지는 않았다.

내 선택에 따른 의무감으로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참 고민스럽다. 

읽기를 포기하자니 찝찝하고, 다 읽자니 괴롭고...

 

일단, 2002년도에 책이 출간될 당시엔 최신이었을 연구자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최신이 아니라는 점이 책읽기의 재미를 급격하게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몇몇 챕터들은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동성애는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조울증과 정신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들은 정말 유전자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 외모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인품도 유전되는가? 아니면 후천적 환경으로 조성되는 것인가? 등등...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과학적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지만, 저자는 유전적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코발트 블루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우유보다는 커피를, 아침보다는 저녁을 더 선호하는 것도...

바뀌지 않는 오래된 성격들과 오래된 습관들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유전자 덕분(?)이란다.

 

왠지 허탈함이 쓸고간 마음 한켠이 벽돌 한장만큼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동안 내가 저질러왔던 못난 행동들과 수많은 실수들 그리고 인품적 결함 등에 대해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영향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넓다는 건, 실로 '양날의 칼'이 아닐까 싶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질병을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전자에 따른 책임회피나 차별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류는  일찍이 지난 20세기 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라든지 지적장애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불임시술 등등... 유전자에 따른 차별의 피해를 톡톡히 경험한 바 있기에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찬반 양론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인간 유전자와 관련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동식물에 대한 유전자 연구 및 이에 대한 활용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다만, 연구사례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나열한 나머지 신빙성은 확대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자연과학 분야에 흥미나 기초 지식이 부족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상당히 지루했다. 

 

 

한편, 유전자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인류가 직면하게 될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 보면.... 문제는 더한층 복잡해진다.

 

심심하면 한번씩 뉴스거리로 올라오곤 하는 유전자 조작 식품들...

전국민을 단번에 생물학자로 만들어버린 줄기세포 연구...

불임치료용으로 보관되고 있는 냉동 수정란의 처분 권한과 이용 규칙 등등...

 

이 밖에도 유전자 검사와 관련 정보를 어디까지 용인하고 공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와 '알 권리' 등이 서로 충돌하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은 불을 보듯 확실하다.

 

 

그런데 정말 치료 목적의 인간 복제와 식량 증진 차원에서의 동식물 복제 그리고 재대혈 냉동 보관 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인류는 더욱 행복해질까?

 

특히 재대혈을 냉동 보관하면 골수이식이 필요하거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재대혈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재대혈 냉동 보관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부유한 부모가 아니면 자신의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태반에서 재대혈을 추출하여 냉동보관할 수가 없다고 한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향후 질병 치료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내 머리 속에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건 다름 아닌,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인류의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끝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좋은 성격과 나쁜 습관들...

개인의 성적 취향 및 정체성...

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부신 외모와 사랑스러운 미소까지도...

 

전부 다 '유전자의 영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분의 종말 - 특별한 자와 아무것도 아닌 자의 경계를 넘어서
로버트 풀러 지음, 안종설 옮김 / 열대림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학력차별, 외모차별, 경력차별 등등...

 

우린 모두 다양한 차별을 겪고 있으며 다들 '차별'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차별 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신분주의는 민족이나 종교, 피부색, 성별 등과 같은 표면적인 차이와는 무관하게, 신분에 근거한 힘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권력의 차이, 그 자체가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신분의 차이는 단순히 권력의 차이를 반영할 뿐이기 때문에 신분의 차이 역시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낳지는 않는다. 피부색이나 성별의 차이가 생래적인 문제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학대와 조롱, 수탈과 정복의 구실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부하 직원을 못살게 구는 직장 상사, 웨이터를 괴롭히는 주방장이나 손님, 선수를 들들 볶는 코치, 교사를 모욕하는 교장, 조교를 착취하는 교수, 학생을 조롱하는 선생, 급우를 따돌리는 학생, 자녀를 얕잡아보는 부모, 용의자를 학대하는 형사, 병자를 아무렇게나 다루는 간호사... 신분주의는 아랫사람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노바디로 대함으로써 그들의 존엄성에 상처를 준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28~30 中 선별 발췌-

 

 

2004년 출판되었다가 2009년도에 재출간된 로버트  풀러의 <신분의 종말>을 읽는 과정은 뜻밖의 깨달음과 함께 통렬한 고통을 동반한다. 

 

인류는 여전히 '신분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나 역시 이와 같은 '신분주의' 사회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살아왔다는 깨달음은 생각보다 뼈아픈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태어나면서 곧 '신분'이 결정되었다. 귀족신분으로 태어나면 귀족이고, 노예로 태어나면 노예인 것이다.

인류는 이와 같은 불평등에 맞서왔고, 보기좋게 신분 차별의 철폐를 가져왔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는 '신분차별'이란 말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타고난 신분제 사회는 종말을 고했다. 그 뒤에 펼쳐진 세계는 능력에 따른 사회로, 소위 능력껏 신분(지위)를 쟁취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모순이 숨겨 있다. 언뜻 공정하고 평등해 보이는 능력위주사회야말로 절대적으로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린 솔직히 평등하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된 신분 즉 지위는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신분(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과 불평등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므로 마땅히 지양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20세기 들어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과는 달리 신분주의의 타파는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신분이 고정불변하지 않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신분주의에 따른 '희생자' 소위 '아무것도 아닌 자'인 '노바디'들이 신분주의를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유색인종이라면 당연히 인종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여 성차별적인 사회에 'No'라고 말하리라. 그런데, 만약 당신이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바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다음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노바디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대개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곳이다. 노바디가 스스로 노바디임을 잘 밝히지 않는 이유는 남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치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싶은 바로 그 욕구 때문에 노바디는 더욱더 무력해진다. 좀처럼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지만,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면 그들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다. 노바디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신분 때문에 학대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남을 학대하려 한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123 中-

 

그럼, 특별한 자인'섬바디'와 아무것도 아닌 자인 '노바디' 사이의 차별은 당연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둘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신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건 마치 남여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남성과 여성에 따른 차이 자체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저자는 인류 사회 발전을 위해서 신분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며 신분에 따른 차이 역시 당연히 받아들이되, 신분의 차이가 신분적 차별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선 먼저 '섬바디'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섬바디에서 노바디가 될 수 있으며, 노바디에서 섬바디도 될 수 있다.  즉, 섬바디에 대한 노바디의 과도한 환상과 숭배를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곧 우상의 신화화를 극복하라는 주문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어째서 신을 숭배하는 것도 모자라 같은 인간마저 숭배하려 하는걸까?

어찌하여 인간 존엄성이라는 숭고한 지위를 스스로 내던지고 섬바디가 되어 노바디를 학대하려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신분주의 그 자체에 있다. 신분적 차이가 차별이 되면, 섬바디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유동적인 신분구조를 고착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놓쳐선 안될 점은 바로 소수 섬바디들의 신분구조 고착화에 다수인 노바디들 또한 동조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노바디도 언젠가는 섬바디가 되어 그런 지위를 누리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옛속담에 '시집살이 혹독하게 당한 며느리일수록 혹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란 말인가?

 

고맙게도 저자는 이와 같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해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섬바디들이 명예를 얻는 대가로 자율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디가 되지 않기 위한 보험에 가입하고 싶어한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실제로는 아주 방어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 대가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희생하고 하나의 역할 모델로, 혹은 본보기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봉사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바디는 그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들은 무대 바깥에서, 화려한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어떤 실험이나 실패, 변화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자유를 누린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노바디는 섬바디를 꿈꾸고 섬바디는 노바디를 꿈꾼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노바디로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신분주의가 설 땅을 잃은 세상에서도 취향과 기술, 재능의 차이가 다양한 개인적 편차를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디와 섬바디가 다같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또한 섬바디와 노바디는 정기적으로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특정한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른 사람을 섬바디라 부르고, 밑바닥을 차지한 사람을 노바디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에게는 이미 섬바디가 자신의 성공을 영구적인 권력의 장악으로 확장시킬 것이라는 낡은 생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섬바디'와 '노바디'라는 개념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상실하고 각각 '공적인 사람'과 '사적인 사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289~291 中 선별 발췌-

 

 

요즘 우리 사회에 '인정투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인정투쟁이란 헤겔의 철학 이론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점잖게 행동하려는 이유는 한결같이 인정받기 위해서다. 

 

가족으로부터의 인정...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인정이라함은 남과는 다른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특별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남을 이기고 좌절시킴으로써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정은 곧 존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설령 우리가 신분차별에 익숙한 섬바디를 두려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존경하진 않는다. 그런데 차별을 일삼는 섬바디들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들 역시 그저 존경받고 싶을 따름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 또한 명확해 보인다.

.

.

.

사실, 신분주의 타파는 다양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일찍부터 주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함으로써 신분주의의 철폐야말로 존중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최대치로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