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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유전자, 광인의 유전자
필립 R. 레일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평점 :
절판
흥미로운 제목에 비해, 그닥 흥미롭지는 않았다.
내 선택에 따른 의무감으로 읽어야만 하는 책들은.... 참 고민스럽다.
읽기를 포기하자니 찝찝하고, 다 읽자니 괴롭고...
일단, 2002년도에 책이 출간될 당시엔 최신이었을 연구자료들이 지금은 더 이상 최신이 아니라는 점이 책읽기의 재미를 급격하게 떨어뜨린다. 그렇지만 몇몇 챕터들은 개인적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면, 동성애는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조울증과 정신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들은 정말 유전자에 의한 것인가? 아닌가? 외모 뿐만 아니라 성격이나 인품도 유전되는가? 아니면 후천적 환경으로 조성되는 것인가? 등등...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과학적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지만, 저자는 유전적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코발트 블루를 유난히 좋아하는 것도...
우유보다는 커피를, 아침보다는 저녁을 더 선호하는 것도...
바뀌지 않는 오래된 성격들과 오래된 습관들도....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유전자 덕분(?)이란다.
왠지 허탈함이 쓸고간 마음 한켠이 벽돌 한장만큼 가벼워진 느낌이다.
그동안 내가 저질러왔던 못난 행동들과 수많은 실수들 그리고 인품적 결함 등에 대해서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영향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넓다는 건, 실로 '양날의 칼'이 아닐까 싶다.
유전자 분석을 통해 질병을 미리 알고 예방할 수 있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전자에 따른 책임회피나 차별이라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류는 일찍이 지난 20세기 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라든지 지적장애여성을 대상으로 한 미국의 불임시술 등등... 유전자에 따른 차별의 피해를 톡톡히 경험한 바 있기에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면 될수록 찬반 양론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
저자는 인간 유전자와 관련된 이야기 뿐만 아니라 동식물에 대한 유전자 연구 및 이에 대한 활용과 문제점에 대해서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다만, 연구사례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나열한 나머지 신빙성은 확대되었을지 모르겠으나 자연과학 분야에 흥미나 기초 지식이 부족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상당히 지루했다.
한편, 유전자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인류가 직면하게 될 '딜레마'에 대해 생각해 보면.... 문제는 더한층 복잡해진다.
심심하면 한번씩 뉴스거리로 올라오곤 하는 유전자 조작 식품들...
전국민을 단번에 생물학자로 만들어버린 줄기세포 연구...
불임치료용으로 보관되고 있는 냉동 수정란의 처분 권한과 이용 규칙 등등...
이 밖에도 유전자 검사와 관련 정보를 어디까지 용인하고 공개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비롯해서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 와 '알 권리' 등이 서로 충돌하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은 불을 보듯 확실하다.
그런데 정말 치료 목적의 인간 복제와 식량 증진 차원에서의 동식물 복제 그리고 재대혈 냉동 보관 기술이 보급됨에 따라 인류는 더욱 행복해질까?
특히 재대혈을 냉동 보관하면 골수이식이 필요하거나 알츠하이머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 자신의 재대혈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 그런데 재대혈 냉동 보관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부유한 부모가 아니면 자신의 자녀가 태어나자마자 태반에서 재대혈을 추출하여 냉동보관할 수가 없다고 한다. 출생과 동시에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향후 질병 치료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과연, 이런 사회를 평등하고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내 머리 속에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건 다름 아닌, 기술 발전이 반드시 인류의 행복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끝으로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서,
좋은 성격과 나쁜 습관들...
개인의 성적 취향 및 정체성...
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눈부신 외모와 사랑스러운 미소까지도...
전부 다 '유전자의 영향'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수반되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