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종말 - 특별한 자와 아무것도 아닌 자의 경계를 넘어서
로버트 풀러 지음, 안종설 옮김 / 열대림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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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성차별, 연령차별, 학력차별, 외모차별, 경력차별 등등...

 

우린 모두 다양한 차별을 겪고 있으며 다들 '차별'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그리고 자신은 절대 '~~차별 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신분주의는 민족이나 종교, 피부색, 성별 등과 같은 표면적인 차이와는 무관하게, 신분에 근거한 힘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권력의 차이, 그 자체가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신분의 차이는 단순히 권력의 차이를 반영할 뿐이기 때문에 신분의 차이 역시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낳지는 않는다. 피부색이나 성별의 차이가 생래적인 문제인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차이가 학대와 조롱, 수탈과 정복의 구실로 이용된다는 점이다.

 

이 같은 예는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다. 부하 직원을 못살게 구는 직장 상사, 웨이터를 괴롭히는 주방장이나 손님, 선수를 들들 볶는 코치, 교사를 모욕하는 교장, 조교를 착취하는 교수, 학생을 조롱하는 선생, 급우를 따돌리는 학생, 자녀를 얕잡아보는 부모, 용의자를 학대하는 형사, 병자를 아무렇게나 다루는 간호사... 신분주의는 아랫사람을 마치 투명인간처럼, 노바디로 대함으로써 그들의 존엄성에 상처를 준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28~30 中 선별 발췌-

 

 

2004년 출판되었다가 2009년도에 재출간된 로버트  풀러의 <신분의 종말>을 읽는 과정은 뜻밖의 깨달음과 함께 통렬한 고통을 동반한다. 

 

인류는 여전히 '신분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나 역시 이와 같은 '신분주의' 사회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로 살아왔다는 깨달음은 생각보다 뼈아픈 고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태어나면서 곧 '신분'이 결정되었다. 귀족신분으로 태어나면 귀족이고, 노예로 태어나면 노예인 것이다.

인류는 이와 같은 불평등에 맞서왔고, 보기좋게 신분 차별의 철폐를 가져왔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는 '신분차별'이란 말을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타고난 신분제 사회는 종말을 고했다. 그 뒤에 펼쳐진 세계는 능력에 따른 사회로, 소위 능력껏 신분(지위)를 쟁취할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모순이 숨겨 있다. 언뜻 공정하고 평등해 보이는 능력위주사회야말로 절대적으로 불공평하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겠지만, 우린 솔직히 평등하지 않다. 태어나면서부터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능력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된 신분 즉 지위는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런 신분(지위)의 차이에서 오는 차별과 불평등은 인간 존엄성에 위배되므로 마땅히 지양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20세기 들어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던 것과는 달리 신분주의의 타파는 매우 어려운 일처럼 보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신분이 고정불변하지 않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신분주의에 따른 '희생자' 소위 '아무것도 아닌 자'인 '노바디'들이 신분주의를 없애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서, 만약 당신이 유색인종이라면 당연히 인종차별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 만약, 당신이 여성이라면 당연히 남여 성차별적인 사회에 'No'라고 말하리라. 그런데, 만약 당신이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바디'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다음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노바디의 땅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은 대개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인구밀도가 아주 높은 곳이다. 노바디가 스스로 노바디임을 잘 밝히지 않는 이유는 남들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치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분을 숨기고 싶은 바로 그 욕구 때문에 노바디는 더욱더 무력해진다. 좀처럼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지만, 막다른 골목에까지 몰리면 그들도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다. 노바디들은 서로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에게 등을 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신분 때문에 학대받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스스로 남을 학대하려 한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123 中-

 

그럼, 특별한 자인'섬바디'와 아무것도 아닌 자인 '노바디' 사이의 차별은 당연한 것일까?

 

이에 대해서 저자는 둘 사이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신분 자체를 없애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건 마치 남여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서 남성과 여성에 따른 차이 자체를 없애야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저자는 인류 사회 발전을 위해서 신분은 당연히 존재해야 하며 신분에 따른 차이 역시 당연히 받아들이되, 신분의 차이가 신분적 차별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우선 먼저 '섬바디' 신화를 깨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섬바디에서 노바디가 될 수 있으며, 노바디에서 섬바디도 될 수 있다.  즉, 섬바디에 대한 노바디의 과도한 환상과 숭배를 떨쳐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이는 곧 우상의 신화화를 극복하라는 주문으로 다가온다.

 

인간은 어째서 신을 숭배하는 것도 모자라 같은 인간마저 숭배하려 하는걸까?

어찌하여 인간 존엄성이라는 숭고한 지위를 스스로 내던지고 섬바디가 되어 노바디를 학대하려는 걸까?

 

그 이유는 바로 신분주의 그 자체에 있다. 신분적 차이가 차별이 되면, 섬바디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항구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유동적인 신분구조를 고착화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놓쳐선 안될 점은 바로 소수 섬바디들의 신분구조 고착화에 다수인 노바디들 또한 동조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노바디도 언젠가는 섬바디가 되어 그런 지위를 누리겠다는 심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옛속담에 '시집살이 혹독하게 당한 며느리일수록 혹독한 시어머니가 된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는 인간의 근본적인 속성이란 말인가?

 

고맙게도 저자는 이와 같은 질문에 현명한 답을 해주고 있다.

 

모든 사람은 섬바디들이 명예를 얻는 대가로 자율권을 상실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디가 되지 않기 위한 보험에 가입하고 싶어한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실제로는 아주 방어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 대가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희생하고 하나의 역할 모델로, 혹은 본보기로 자신이 속한 집단에 봉사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노바디는 그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들은 무대 바깥에서, 화려한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어떤 실험이나 실패, 변화에 연연할 필요가 없는 자유를 누린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노바디는 섬바디를 꿈꾸고 섬바디는 노바디를 꿈꾼다.  창의력을 발휘하고, 진정으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노바디로서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신분주의가 설 땅을 잃은 세상에서도 취향과 기술, 재능의 차이가 다양한 개인적 편차를 보여주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바디와 섬바디가 다같이 인간으로서 동등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또한 섬바디와 노바디는 정기적으로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될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특정한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른 사람을 섬바디라 부르고, 밑바닥을 차지한 사람을 노바디라 부를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에게는 이미 섬바디가 자신의 성공을 영구적인 권력의 장악으로 확장시킬 것이라는 낡은 생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섬바디'와 '노바디'라는 개념이 지금과 같은 의미를 상실하고 각각 '공적인 사람'과 '사적인 사람'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로버트 풀러, <신분의 종말> p289~291 中 선별 발췌-

 

 

요즘 우리 사회에 '인정투쟁'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인정투쟁이란 헤겔의 철학 이론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매일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며, 자신의 모습을 가꾸고 점잖게 행동하려는 이유는 한결같이 인정받기 위해서다. 

 

가족으로부터의 인정...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인정...

세상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인정이라함은 남과는 다른 특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만의 특별함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남을 이기고 좌절시킴으로써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인정은 곧 존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설령 우리가 신분차별에 익숙한 섬바디를 두려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존경하진 않는다. 그런데 차별을 일삼는 섬바디들도 사실은 인정받고 싶었을 따름이다. 그들 역시 그저 존경받고 싶을 따름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 또한 명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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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신분주의 타파는 다양한 표현으로 많은 이들에 의해 일찍부터 주장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간과하지 않고 오히려 강조함으로써 신분주의의 철폐야말로 존중받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을 최대치로 만족시킬 수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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