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 집을 나가다 - 가족 밖에서 꿈꾸는 새로운 삶 스물여덟 가지
언니네트워크 엮음 / 에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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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성주의 책들을 읽었다.

모두 세 권이지만 어떻게 보면 한 권 같은 책이다.

 

이들 책들을 알게 된 건, 우주처럼 넓고 넓은 인터넷 세상에서 솔직하게 나만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찾아들어간 사이트에서였다. 그 사이트 안의 여러 카테고리 중, '자기만의 방'이라는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회원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블로그처럼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는 위험성을 차단하면서도 비공개 글쓰기가 아니라는 장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하여, 조만간 그곳에 입주(?)하려고 시기를 저울질 하고 있을 무렵, 2000년 문을 연 이래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공간과 소통을 추구해왔던 그 사이트가 경제적인 이유등으로 올 11월 폐쇄된다는 소식을 접해야만 했다.


아, 이런...

안타깝고 또 안타까웠다.

난, 참 운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여성이면서도 이쪽 방면으로는 자의반 타의반 문외한이었던 나는 그 사이트의 '자기만의 방'에 쓰여졌던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 2007년도에 출판된 적이 있음을 알아냈고, 마침내 이용하는 공공도서관에서 절판된 <언니네 방> 1권과 2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언니네 방> 후속작을 표방하고 2009년도에 출간된 <언니들, 집을 나가다>라는 책도 더불어 찾아내 읽는 기쁨을 맛봤다.  특히, <언니들, 집을 나가다>는 미혼도 기혼도 아닌 비혼을 선택한 사람(남자도 포함되어 있다.)들의 목소리가 충실하게 담겨 있다. 그러므로 미혼이나 기혼뿐만 아니라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과 앞으로 선택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여성이기에 받아야만 했던 차별과 고통과 학대와 폭력의 경험들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이 아려오면서 동시에 분노가 치민다. 남성의 이중성과 이 사회의 집단기만뿐만 아니라 여성의 체념과 저항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너무 가감없이 다가와서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러면서도 평소 사회 제도에 냉소적이던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사회 발전을 위해 도대체 넌 무슨 일을 했니?' 하고 자문하고 부끄러워하는 고질병을 또 다시 앓아야만 했다. 이 책들을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잠잠한 곳에 싸움을 붙이는 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스스로 잘살고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페미니스트들은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이 책들은, 그동안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잡고 있었던 반(反)여성주의를 확인하는 기회 또한 제공해주었다. 

고백하자면 대학 재학 시절부터 나름 총명함(?)을 자랑하던 나는 여성주의에 대해 알게 모르게 반감을 갖고 있었더랬다. 각종 집회와 시위에서 목소리 높여 주장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동성인 내가 보기에도 왠지 불편하고 거북했다. 나조차도 충분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불편하고 거북한 '느낌'들....

인간은 낯선 것에 대해선 본능적으로 피하거나 거부하는 것처럼 나에게 여성주의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낯설고 어색한 그 무엇, 그래서 피하기만 했던 그 어떤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터무니 없지도 잘못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느낌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가면서 세월과 함께 익숙해져 내 안에서 더욱 돈독해져만 갔다.  

 

이 책들을 읽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조차도 쉽게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느낌들'은 바로 수천년 간 인류가 주장하고 공고히 해온 전통이자 문화이며 규범이요 제도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걸...


여자는 순종적이고, 양보해야 하며, 참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뭔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건 전통문화와 사회제도를 전복시키려는 되먹지 못한 행태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여자가 남자처럼 큰소리로 뭔가를 말하고, 뜻대로 행동하는 건 전통을 해치고 국가와 사회를 망치는 길이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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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와 같은 사회 규범들로 인해서 여성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반여성주의자로 길러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한 후 명절에 일만 하던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며느리에게만 일을 시키고...

차별과 학대 받으며 성장한 여자 아이는 엄마가 되어 또 다시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ㅡ쫄병은 원래 몰매를 맞는 거야!

ㅡ나도 쫄병일 땐 조리돌림 당했어.

ㅡ억울하면 너도 선임되서 그대로 하면 되잖아.


그래, 바로 이런 거였다.


바로 이와 같은 '이치'(혹은 '원리'?)로 인해 '여자의 적은 여자다' 라는 말이 무슨 과학적 근거라도 있는 양, 공공연하게 확산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여성(쫄병)으로서 차별 받으면서 느낀 분노를 엉뚱하게도 며느리(후임자)에게 전가하는 이와 같은 고질적인 악순환은 어째서 일어나는 걸까? 

그 이유는 남성우월(위계질서)과 여성비하(집단주의)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강하게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패기만만하던 젊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혹은 직장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희생한 다음, 여성이라는 지위 자체를 스스로 부정하고 거부하게 만든다. 그래서 차별받은 딸이 엄마가 되어 다시 딸을 차별하고, 학대받은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어 다시 며느리에게 집안일을 전가시키는 것이다.  뭔가 잘못됐지만 큰소리로 '잘못됐다!'고 주장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도 어서 빨리 피해자 신분에서 가해자 신분으로 전환되기만을 학수고대한다.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아는데, 모두가 그렇게 하니 나도 어쩔 수 없다....?!'


남들이 모두 걸어가는 길이 반드시 옳은 길도 유일한 길도 아니다.

오히려 모두 잘못된 길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혹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게 억울해서 다른 사람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다. 전통과 규범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이런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잘못된 길로 먼저 걸어들어선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외쳐야 한다.

여긴 잘못된 길이라고... 그러니 이쪽이 아닌 다른 길로 가라고...

   

이땅의 많은 어르신들이 젊은이들에게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길을 잃지 말라고 조언하며 타이른다.

 

내가 걸어온 길 그대로 밟아서 따라오면 된다고... 그럼, 힘도 덜 들고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엇보다도 혹시나 길 위에서 뭔가 잘못되더라도 길 탓을 하면 된다고...  그렇지만 만약 되바라지게 어른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걸어갔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기라도 하면 스스로 책임질거냐고....

 

그런데 여기에 대해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있다.

원래 길이란 없는 거라고.... 그러니 잃을 길 따위도 없으니 걱정 마시라고... 내 두발로 걸어가는 길, 내가 알아서 갈 터이고 책임도 내가 질 거라고... 그러니 어르신이나 가시던 그 길 계속 쭉 가시라고... 

 


 

어느 학자가 ' 한강의 기적을 라인강의 기적과 비교하는 건 한국에게 모욕이다''라고 한 말이 불연듯 떠오른다.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최강대국에게 도전장을 내밀만큼 강대국이었던 독일의 경제성장과 식민지 약소국에 내전까지 치러야했던 한국의 경제성장은 그 난이도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

나도 한국인이지만 우리 한국인 정말 대단하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현대사는 '기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래서, 난 한국인인게 정말 자랑스럽다.


그러나,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울수록 한국이 선진국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창피함도 동시에 느낀다.

 

한국사회에서 '남다름'이란 칭찬이 결코 아니다.

남과 다름은 곧 '죽음'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를 배려하지 않는다. 한국과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갖고 있는 나라와 비교하면 이런 면에서 한국은 여전히 후진국이다.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언급해야 할 경우에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넘어서 분노를 느낄 정도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이웃나라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리가 여전히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는 중국과 비교해봐도 남여 성차별은 여전히 심각한 편이다. 


OECD 국가 중,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하위권에 머물러 있으며, 남여 임금격차도 40%씩이나 차이나고, 비정규직의 2/3는 여성들이라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이 정도가 언론에서 언급되는 수준이다. 즉, 이는 남자든 여자든 전국민이 체감하는 성차별 지수란 의미다. 만약, 조금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한국 사회의 성차별은 생각보다 뿌리 깊고 광범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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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절과 함께 나를 찾아온 이 책들은 좋은 책이기에 앞서 훌륭한 책들이다.

전부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집단주의에 무릎 꿇지 않고 잘못된 역사에 편승하지 않기 위해서 개인적 위험과 희생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혹은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한 사람들의 고백이고 다짐이기 때문이다. 

난, 이런 사람들을 인생의 진정한 승자라고 생각하며 진짜 용기있는 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책들, 꼭 읽어야할 사람들은 읽지 않는다.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만 죽어라 읽어댄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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