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엮다 오늘의 일본문학 11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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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엮다'

알듯 말듯한 제목이다. 배를 만든다는 걸까?

이처럼 아리송한 제목을 달고 있는 것들에 요즘 끌린다. 얼마전에 읽었던 김연수 소설집 <사월의 미, 칠월의 솔>도 그렇고... 그 안에 실려 있던 <인구가 나다>라는 작품도 그렇고...

 

본격적으로 읽기에 앞서, 역자의 설명을 살짝 엿보니 '배를 엮다'는 사전을 만든다는 뜻이란다. 그렇다면 왜 사전을 만드는 걸 '배를 엮다'라고 했을까? 그냥 '사전 만들다' 혹은 '사전을 편찬하다'라고 하면 될 것을...

 

"사전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야."

아라키는 혼을 토로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 떠오르는 작은 빛을 모으지.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거야."

(......)

부디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게. 아라키는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많은 사람이 오래 안심하고 탈 수 있는 배를. 외로움에 사무칠 것 같은 여행의 날들에도 든든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배를.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p36~37 中-

 

'아, 그렇구나!'

'사전이란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였구나.

구절 구절 가슴에 와 박힌다.

 

굳이 역자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요즘 종이사전은 한마디로 '찬밥'신세다. 한때는 상급학교에 입학하면 제일 먼저 교복과 함께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은 기본으로 갖추곤 했지만, 이제는 전자사전이나 스마트폰에 내장된 사전이 대세가 된지 오래다. 사전은 부채나 손목시계처럼 생활 필수품에서 기념품 혹은 장식품을 거쳐 조만간 골동품 대열에의 합류를 코 앞에 두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부지불식간에 골동품이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일본 작가 미우라 시온은 출판사에서도 '돈 먹는 부서'로 전락한 '사전편집부'의 사전편찬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겐부쇼보라는 출판사의 사전편집부에서 무려 15년에 걸쳐 사전 <대도해:大渡海>를 편찬해 내는 과정은 한마디로 녹록찮다. 사전 이름 또한 '넓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을 담은 '대도해(大渡海0'다. 교수 출신으로 사전편집부 고문인 마쓰모토 선생, 일생을 사전만 만들다 퇴직한 아라키, 영업부에 있다가 퇴직하는 아라키 대신 사전편집부로 스카우트(?)되는 마지메와 사전편집부에 뒤늦게 합류한 기시베 그리고 사전편집부에 있다가 다른 부서로 이동한 니시오카까지 모두 한권의 사전이 나올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괴짜'라고 하면 딱 어울릴 만한 주인공 마지메와 가구야의 러브스토리는 단조로울수도 있는 스토리 라인에 양념과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여자로서는 드물게 일본 요리 장인이 되는 가구야라는 여성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그녀의 활약(?)을 더 많이 기대했었는데 마지메와 결혼하는(보잘것 없는 남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판타지) 것에만 방점이 찍혀 있어 아쉽다. 

 

한편,

잘 팔리지 않는 사전 편찬에 적극적이지 않은 출판사측과 주인공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언뜻 국가가 공금을 투입하여 사전 제작 비용을 댄다는 이야기가 흘러 나오는데, 이에 대한 마쓰모토선생의 견해는 곰곰히 생각해볼만 하다. 

 

"공금이 투입되면 내용에 간섭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겠지요. 또 국가의 위신을 걸기 때문에 살아 있는 생각을 전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권위와 지배의 도구로서 말을 이용할 우려도 있습니다."

"말이란, 말을 다루는 사전이란, 개인과 권력, 내적 자유와 공적 지배의 틈새라는 항상 위험한 장소에 존해하는 것이죠."

-미우라 시온, <배를 엮다> p388 中-

 

 

끝으로,

곳곳에 명문장이 숨어 있다.

오래동안 기억하고 싶다. 가급적 그 누군가와 함께...

 

 

#- 사전은 감수자와 원고 집필자와 편집자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전의 사용자도 포함해서 많은 지혜와 힘을 집약하여 긴 시간에 걸쳐 다듬어 간다. p146

 

#- 한정된 시간밖에 갖지 못한 인간이 힘을 다해 넓고 깊은 말의 바다로 저어 나간다. 무섭지만 즐겁다. 그만두고 싶지 않다.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언제까지도 이 배를 계속 타고 싶다. p186

 

#- "난 10대 때부터 요리사 수업의 길에 들어섰지만, 마지메 씨를 만나서 비로소 말의 중요성을 깨달았죠. 마지메 씨가 '기억이란 말이다'라고 하더군요. 향이나 맛이나 소리를 계기로 오래된 기억이 깨어날 때가 있잖아요, 그건 말하자면 모호한 채 잠들어 있던 것을 언어화하는 거라고 해요" p270

 

#- 죽은 이와 이어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과 이어지기 위해 사람은 말을 만들었다. p328

 

#- 우리는 배를 만들었다. 태고부터 미래로 면면히 이어지는 사람의 혼을 태우고, 풍요로운 말의 바다를 나아갈 배를.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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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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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이 있다.

읽은 다음 몇 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독후감을 쓸 수 없는....

심지어, 이미 손에는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이 들려있음에도 불쑥 불쑥 떠오르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1980년 5.18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만약 또 '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5.18을 배경으로 한, 소위 '후일담' 문학은 이미 문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한시절을 풍미(?)하지 않았나 싶다. 공지영이나 공선옥같은 이들은 이 사건이 없었다면 과연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이는 작가로서 그들의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이 사건을 작품의 주제 혹은 소재로 삼아 깊숙하게 천착했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나 역시 '5.18'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여러편 만나봤고, '꽃노래도 많이 들으면 물리듯이' 그렇게 식상함을 갖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전혀 뜻밖이었다.

 

같은 노래를 어떻게 편곡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되듯, 그녀의 작품은 지금까지 나온 '5.18'관련 작품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아닐까 싶다.

 

정미와 정대 남매....

이들 남매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의 막내아들 동호...

동호와 함께 마지막까지 그곳에 있었던 선숙, 은주 누나....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

 

그날 이후.

우린 다 알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고을 '광주'는 단순한 지명이 아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걸... 그리고 광주 출신이라면 왠지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고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된다는 걸....

이런 감정을 '부채감'이라고 하는지 혹은  '죄책감'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단순한 '호기심'이나 '부담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뭐랄까...?

함께 하지 못했음에서 오는 미안함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음에서 오는 자책감이 서로 뒤엉킨 그런 심정이랄까.

 

광주 출신으로 열살 나던 1980년 그해 1월 서울로 이사를 왔다는 작가...

타지역 출신들도 이러할진데...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더라도 눈치는 빤했을 그런 나이에 마주한 5.18은 이젠 중년이 된 작가를 오랫동안이나 따라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마침내,

작가는 용기를 내어 영혼들을 불러오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한강, <소년이 온다> p45 中-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 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한강, <소년이 온다> p50 中-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마마, 호환, 돈도 아닌, 바로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계엄군으로부터 최후의 통첩을 받고도 시청을 떠나지 않았던 그들은...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모든 사람들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한강, <소년이 온다> p114~116 中-

 

그저 양심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고...

그저 양심때문에,

간신히 살아났어도 제대로된 삶을 이어가지 못했던 그들...

 

그후 우리는 이따금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가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고, 교통사고를 내고, 빚이 생기고, 다치거나 병을 얻고, 정 많고 서글서글한 여자를 만나 잠시 모든 고통이 끝났다고 믿고,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무너뜨려 다시 혼자가 되는 비슷한 경험을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처럼 지켜보는 사이 십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p126 中-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잘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더랬다.

가해자들은 이미 죄과를 충분히 받았으며,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또한 잘 이루어졌다고...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걸까?

왜 이렇게 억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걸까?

 

이제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엔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도 있다는 걸....

.

.

.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다.

그나저나...

글솜씨도 유전되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글솜씨를 물려준 걸까...? 아닐까...?

작가 한강은 작가 한승원의 친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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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NFF (New Face of Fiction)
류드밀라 페트루솁스카야 지음, 이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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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작가 이름도 책 제목도 내용도 참 독특하다.

사실 우리에겐 매우 낯선 이름이지만 러시아를 대표하는 칠순이 넘은 여류작가란다. 특히, 그녀의 작품은 어둠고 비참한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로 외면받다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야 러시아의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의 한명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총 스물한편의 단편들이 하나같이 미완의 작품처럼 읽혀졌던 이유가...

너무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묘사하면 검열에 걸릴 수 있기 때문에 마치 전설이나 옛이야기 하듯.... 어느 시절 어느 곳에서나 일어났을 법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처럼 힘을 한껏 뺀 것일까...

 

페트루셉스캬야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고통스럽고 힘든 삶을 산다. 그저 그런 운명을 타고났을 수도 있고 시대를 잘못 만났을 수도 있다.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그들의 하루하루는 늘 힘들고 고통스럽다.

 

어떤 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을 불의의 사고로 눈앞에서 떠나보내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친다. 어떤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를 따로 두고 재미없고 구질구질하기만 한 가정이라는 족쇄에 묶여 있다.

 

한편 이 주인공의 아내는 한 번도 자신을 봐주지 않는 남편만을 바라보며 해바라기처럼 살아간다. 치료약은 고사하고 원인조차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도는 도시가 배경인 이야기도 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외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채 고립되어 오로지 살기 위해 살인을 서슴지 않는 상태가 된다.

 

뭔지 모를 위험을 피해 도시의 안락하고 윤택한 삶을 스스로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오지 중의 오지를 찾아 숨어드는 가족도 있다. 이 가족이 찾아든 시골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노파들이 있다.

 

아이를 유산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업둥이를 제자식처럼 잘 키워보려는 엄마도 있고 사랑을 잃고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잃은 여자들도 있다. 법마저 포기한 극악무도한 강도들로 하루하루 숨죽인 채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도 있다. 하나 뿐인 딸을 잃은 아버지도 있고 하나 뿐인 아들을 잃은 어머니도 있다.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만 들어도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지지 않는가.

 

-류드밀라 페트루셉스카야, <이웃의 아이를 죽이고 싶었던 여자가 살았네> 옮긴이의 말 中-

 

이렇게 단순화시켜 이야기의 큰 틀만 살펴보니,

그 어떤 곳에서 그 누군가에게 일어났었고...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그런 이야기들이지 않은가.  

이유야 제각각이요 원인이야 분명 있겠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세상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도 피할래야 피할수도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며, 나와 당신 또한 그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 바로 이 점 한가지 뿐이다.

 

재미있는 책이라곤 말 못하겠다....

훌륭한 책이란  말도 못하겠다...

다만,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는 의미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드는 책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볼때, 이 책은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최소한 나에게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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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배신 - 생각을 멈추면 깨어나는
앤드류 스마트 지음, 윤태경 옮김 / 미디어윌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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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에 나온 신간이다.

꼼꼼한 독서목록에 의해 읽을 책들을 선별(?)하곤 하는 내가 신간을 그것도 제목조차 들어본 적 없는 책을 집어 드는 경우는 매우 드문 편에 속한다. 앤드류 스마트의 <뇌의 배신> 역시 습관적으로 신간코너를 살피던 내 시선에 포착된 책으로, 일단 제목에 낚인 듯...

 

주제는 간단명료하다.

창의적인 발상과 철학적 성찰은 바쁘게 일하는 다망(多忙)한 때가 아니라, 소위 '무위(無爲)'의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이다.

 

뉴턴이 산책을 하다가 때마침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저자는 바로 이와 같은 통찰과 깨달음의 순간인 '아하 모멘트(Aha moment)'를 신경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2001년 위싱턴대학교 신경과학자인 마커스 라이클은 '휴지 상태 네트워크' 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고 부르는 신경망을 발견한다. 이 두뇌 부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된다.

 

(...) 두뇌에는 특정 기능을 전담하는 부위가 여럿 존재한다. 예를 들어, 시각 피질은 초기 시각 정보를 처리하고, 편도체는 경고신호를 보내 절체절명의 시기의 위험요소에 맞서서 대응할지, 도망칠지를 결정하도록 돕는다. 휴지 상태 네트워크는 다행스럽게도 길에서 강도를 만나는 일을 겪지 않았을 때나, 누군가에 분신과 같은 휴대전화를 빼앗겨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때에 작동하는 두뇌 부위다. 딱히 하는 일이 없을 때, 휴지 상태 네트워크에 불이 들어와 자신, 즉 본인에게 얘기하기 시작한다.

 

휴지 상태 네트워크는 고유구조를 띠고 있고 개인별 편차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딴생각을 하거나 몽상에 잠겼을 때, 화창한 오후에 눈을 감고 잔디밭에 누워 있을 때나 근무 중 창밖을 바라볼 때 활성화된다. 흥미롭게도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아하 모멘트'는 본인 두뇌의 휴지 상태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도록 허용하는 사람들이 더 자주 경험하게 된다.

 

사실 휴지 상태 네트워크는 상당수 실험심리학자들과 신경과학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개념이다. 외부 신호로 두뇌를 자극하지 않는 상태에서 관찰되는 모든 두뇌 활동은 그저 노이즈일 뿐이라는 것이 인지 신경과학의 기본 가정이기 때문이다.

 

(한편,) 조지 부자키 교수는 두뇌 활동은 대부분 내면적 요인에 따라 나타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신호는 두뇌 활동에 사소한 동요만 일으킬 뿐이다. (....하지만) 어떠한 두뇌도 외부 자극이 차단된 상태에서 개발될 수 없다. 두뇌는 외부 세계를 경험하면서 수정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두뇌는 자기 생성적 패턴을 통해 스스로 균형을 유지하는 복잡계다.

 

-앤드류 스마트, <뇌의 배신> p32~37 발췌-

 

나는 저자가 주장하는 '두뇌의 휴식'이 창의성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내면적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바쁨을 능력 있음으로, 반면 한가함을 무능력으로 연관지어 버리는 현대 사회는 일찍이 자본주의가 자리잡고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노동 시간과 내용을 통제하려는 발상에서 출발했다.

 

물론, 저자의 주장처럼 인구와 도시의 폭발적인 확장으로 늘어나는 도시 빈민들을 보면서 당시 마틴 루터와 같은 종교인들이 '의욕이 없는 게으름뱅이'로 간주한 것이 노동과 효율에 대한 현대인 특히 미국인의 집착을 불러왔다는 관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와 같은 '한가=나태=빈곤'이라는 일차원적인 등식의 성립은 빈곤의 발생 원인이 복잡한 경제, 사회적 환경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태만 때문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는 진작부터 글쓰기 전문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름 괜찮은 책들을 내는 사람들이 주로 교수나 시간적 여유가 많은 직업군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한가하게 골프치고 놀러(?)다니는 소위 '경영자'들이 비지니스 분야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발상과 통찰력 심지어 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취미를 전문가 못지 않은 안목과 취향으로 발전시켜 나갔는지가 늘 궁금했다.

 

특히, 이들은 사회적으로 하나같이 바쁜 사람들ㅡ진짜는 바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던 바빠 보이는 사람들ㅡ로 분류되지 않는가?

수업을 하고 연구를 하고 ....

학회에 나가거나...  미팅과 회의를 주재하고....

결재 서류를 읽고 서명을 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책을 집필할 여유가 있으며, 빼어난 통찰력과 전문가 뺨치는 취미와 안목을 갖출 수 있었을까?

 

이 책은 바로 이와 같은 궁금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답을 알려준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들은 전혀 바쁘지 않다.

즉, 시간과 노동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특별한 극소수의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은 하나같이 언제 뭘 어떻게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인간이란 무릇 남이 시키면 하기 싫은 법이다. 스스로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의 경우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신나고 재밌다. 인간은 이처럼 신나고 재밌는 유희의 시간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한다. 

 

"진정으로, 철저하게, 철학적으로 나태한 사람만이 철저하게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세상에 혜택을 준다. 이는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크리스토퍼 몰리의 <게으름에 관하여> 中-

 

저자는 미국 소설가 크리스토퍼 몰리의 <게으름에 관하여>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한가는 나태와 빈곤의 원흉이 아니라 개인을 행복으로 이끄는 복음이자 인류를 진보시키는 원동력임을 설득력있게 알려준다.  

 

이와 같은 관점에 비추어, 저자는 노동자의 업무 방식과 노동 시간 등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프로그램인 '테일러주의'와 '식스시그마' 등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와 함께 어린 시절의 공상이야말로 아이의 두뇌 발달과 인성 함양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언급한다.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감에 휩싸이는 부모들과 생산성 향상을 위해 직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리하려고만 하는 경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저자는 어린 아이의 두뇌는 한가지 놀이나 행위에 몰두하는 것처럼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상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건강해진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현재 우리 사회는 이처럼 공상할 권리를 아이로부터 빼앗아가는 교육제도와 사회구조가 너무나도 공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아니 어쩌면 교육제도 자체가 아니라 바로 '내 아이는 남과 다르게!'를 외치면서도 결국은 '남들보다 빠르게!'에 몰두하는 부모의 교육관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부모의 가치관이 변하려면 효율과 능률만을 강조하는 사회적 통념과 제도가 통째로 바뀌지 않으면 안되리라. 

 

다소 엉뚱한 발상이긴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는 어린 시절 들었던 '먹으면 죽는 약'이라는 이야기 한토막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는 뭐 다들 알고 있을 테지만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소화(笑話)>중 '지략담(智略譚)'에 나오는 이야기로 상좌스님이 아끼는 꽃병을 실수로 깨버린 동자스님이 평소 스님이 애지중지하면서 '먹으면 죽는 약'이라고 하던 '꿀'을 다 먹어 버린다. 출타했다 돌아온 스님이 자초지종을 묻자, 스님이 아끼는 꽃병을 깨는 죽을 죄를 저질러서 스스로 죽으려고 '먹으면 죽는 약'을 먹었단다. 

이야기의 핵심은 어린 스님의 현명함과 상좌스님의 위선을 폭로하는 데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사람들에게 근면함과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사람들일수록 하나같이 대부분의 시간을 하릴없이 빈둥거리면서 보낸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들은 나태야말로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 주며 창조적 영감의 씨앗이라는 걸 일찌감치 파악한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나태의 장점을 깨닫고 나태함을 즐기다가 세상의 진실을 알아버릴까봐 혹은 자신들을 부양하기 위한 노동의 의무를 등한시하거나 저버리려고 할까봐서 칭송받아 마땅한 '나태'에 주홍글씨를 깊게 새겨 놓은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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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청년 논객 한윤형의 잉여 탐구생활
한윤형 지음 / 어크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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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년세대(1950~1960년생): 산업역군으로 통칭되며 산업화세대라고 부른다. 이들 중, 특히 1955년~1963년도에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붐세대라고 한다.

- 386세대(1960~1970년생): 민주화세대 혹은 민주화 1.0세대라고 하며,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 X세대(1970~1980년생): 서태지와 HOT로 대표되는 대중문화를 본격적으로 소비한 세대로, 신세대 혹은 정보화 1.0세대라고 부른다.

- N세대(1980~1990년생): 문화적으로 X세대의 계보를 잇고 있으며 십대에는 N세대 혹은 웹 1.0세대로 불리웠다. 2013년을 기점으로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인 이들은 소위 '88만원 세대'로 통칭된다.

- G세대(1990년대~2000년대생): 대한민국 수립 이후, 가장 많은 경제적 자원이 투입된 십대를 보낸 세대로 외국어 능력과 컴퓨터 및 모바일 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이제 막 20대 초반에 접어든 이들의 미래 또한 바로 직전 세대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 같진 않다.

 

 

한윤형의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을 읽었다.

이 책은 2013년 책이 출판된 시점을 기준으로 30대 초반인 저자가 20대 중반 정확하게는 2007년부터 발표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2007년도는 소위 '88만원 세대' 담론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직접 읽지는 않았으나 당시 사회적으로 교류하던 대다수 사람들이 88만원 세대라는 특수한 환경 덕분에 나는 88만원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88만원세대'란 19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십대를 보내고 2000년대에 이십대에 접어든 이들로, 이들이 십대를 보내던 시기엔 N세대로 불리웠다. 이들은 전쟁의 폐허위에서 산업화를 거둔 장년세대의 자녀들로 대중문화를 최초로 소비한 세대인 X세대의 뒤를 이어 출현했다. X세대란 197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두 차례의 올림픽을 보면서 십대를 보내고 대학진학률이 채 50%가 되지 않던 90년대 초중반 대학에 입학한 후, 1997년 IMF가 터지기 직전 취업을 한 세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나타난 이들을 소위 '88만원 세대'라고 부른다. 이들은 월드컵과 노무현 정부의 탄생과 더불어 이십대를 맞이했다. 6,70년대의 산업화와 80년대의 민주화 그리고 90년대의 대중소비문화를 거친 한국사회에 화룡정점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세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지도 않았건만 이들의 취업 상황은 녹록찮았다. 

 

저자인 한윤형에 따르면 '88만원세대'는 2007년 당시 88만원을 벌던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88만원 세대론'은 원래부터 88만 원을 벌었던 젊은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왔는데도 88만 원을 벌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진 젊은이들을 위한 담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베스트 셀러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사실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할 수 있는가?"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179-

 

상승과 발전의 시대만을 거쳐온 한국 사회에서 이들은 처음으로 하락과 정체 심지어 쇠퇴를 경험했거나 하게될 세대다.

바로 이와 같은 특징으로 인해, <아프니까 청춘이다>류의 이들을 위로하는 책들이 볼 물 터지듯 쏟아졌던 것이다.  그런데 <88만원 세대>의 저자인 우석훈과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윤형은 이와 같은 '청춘 상담'에 강한 거부감을 표출했다. 그리고 이들의 지적은 현실을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김난도의 조언이 결국 그의 강의가 대상으로 하는 서울대생들에게나 최적화된, 80년대 대학을 다닌 기성세대의 꼰대질이라 말해야 할까? 자못 진보적인 척하는 김어준과 김형태의 조언이, 한국 자본주의의 현실과 동떨어진, 서구 68세대나 한국 386세대의 추억을 더듬는 퇴행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엄기호는 이들과는 전혀 다르게 강의실의 청춘들의 생각을 수렴하여 시대를 모색하는 방법을 택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20대들의 멘토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까? 물론 이 모든 말이 가능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질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이들의 담론이 소비되는 양상이 이런 식의 조언의 내용에 대한 비판과 전혀 다른 층위에 놓여 있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139-

 

저자의 지적처럼 20대는 말을 잃은 세대다. 그들은 침묵함으로써 스스로를 규정한다.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서의 여당 승리를 두고는 '개념없는 20대의 정치 무관심'과 '20대의 보수화'를 원인으로 지목한 목소리들이 한동안 울려퍼졌더랬다. 그러나 20대의 정치무관심과 보수화를 언급하기에 앞서, 소위 386세대의 보수화와 기득권화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민중해방과 조국통일을 부르짖던 그들....

80년대에 대학에 입학했던 그들은 소비문화에 젖어 있다며 90년대 학번들을 꾸짖으면서 자신들의 낮은 학점을 마치 계급장처럼 자랑했더랬다. 학사경고가 누적되고 학점이 바닥을 기어도 그들은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노조가 있는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IMF때에는 비교적 젊은 30대 중반에서 4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조기퇴직의 철퇴를 운좋게 피해갔을 뿐만 아니라 대량 퇴직한 50대의 빈자리를 빠르게 차지하면서 예상보다 빠른 승진과 연봉 상승의 혜택을 입은 세대다. 그리고 '양키 고 홈!'을 외치던 그들은 결혼하자마자 2세를 위해 원정출산을 감행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교육의 부조리를 일갈하면서 기꺼이 기러기 아빠가 되길 자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에 의해 탄생한 노무현 정부가 부동산 상승을 막지 못하자 부동산 투기의 막차에 올라탔고, 2007년과 2012년 대선에선 부동산 가격 하락을 막아줄 것 같은 보수여당에 몰표를 주면서 중산층으로서의 기득권을 필사적으로 수호하고자 했다.

 

이 정도면 거의 '386 X새끼론'에 버금가지 않을까?

'20대 X새끼론'을 이야기한다면 얼마든지 '386 X새끼론'도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자, 이게 바로 세대 충돌과 세대 담론이 생산되고 확대되는 공식이라 하겠다.

실제로 일부 50대이상 보수 장년층은 386세대와 20대를 세대 갈등의 전위병으로 삼으려 시도한 바 있으며, 이와 같은 시도는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한윤형은 서서히 한국 사회에 뿌리잡기 시작한 세대 담론 속에는 사회문제를 특정 세대의 책임으로 전가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있다고 지적한다. 정말이지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세대론에서 설득력을 느끼는 이들의 불안감이 폭로하는 사회문제는 어떤 진보적인 가치 지향에서 잡히는 그런 문제가 인다. 그 불안감이 던지는 질문은 "한국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체제를 재생산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은 부동산 가격의 지속적인 상승을 통해 자산을 축적했고, 약해진 기업의 경쟁력을 신규 노동시장에 진입한 이들의 임금을 낮추면서 보충해 왔다. 적나라하게 요약하자면 '집값'은 높이고 '사람값'은 낮추는 체제를 운용해온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체제를 지지해왔던 중산층 자신들의 자녀조차 월급으론 독립을 꿈꾸지 못하게 된 '멋진 신세계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168-

 

 

정치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한 지금. 세대 갈등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심정이다. 

그러나 정치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아니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경험으로 깨달은 지금. 우리는 또 다시 정치를 논해야 하지 않을까?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게 정치라면 이 세상을 바꾸는 것도 결국은 정치이기 때문이다.

 

20대는 산업화 세대가 더 이상 산업화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을 지목해도, 민주화 세대가 더 이상 민주화가 되지 않는 이유로 자신들을 지목해도, 군소리 없이 듣기만 했다. 어쩔 때는 자기네들 스스로 그 말이 좋다고 여기저기 퍼다 나르는 마조히즘적인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시대를 잘 만나 예술을 그 정도로 할 수 있었다 평할 수 있는 김형태나 신해철 같은 이들이 청년의 무기력함이나 정치 무관심을 질타해도 그게 옳은 말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를 받았으나 그 투자를 회수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20대들은 부채감에 시달린다. 그 부채감이 그들로부터 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이나 현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얘기하지 않고 자신들을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사회에서 겉돌게 된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284-

 

정치적으로 무능한 오늘날 20대의 현실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비평'의 대상이다. 그리고 비평을 넘어 상황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결국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는 정치적 행동이 절실하다.   -한윤형,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 p290-

 

 

이글을 마주한 순간, 코끝이 시큰해졌다.

 

20대는 훈계를 해야할 철모르는 다 큰 아이도 아니고 개념없다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이들도 아닌, 그저 내 손주고 자녀이며 조카고 후배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십대의 선배라는 사실이 불연듯 가슴 깊숙히 파고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제, 다같이 고민해야 한다.

지금 당장 현재가 아닌,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말이다.

미래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면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각오가 기성세대에게서부터 피어올라야 하는 건 아닐까....?

그게 나이 한살이라도 더 먹은 이로서의 도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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