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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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들이 있다.

읽은 다음 몇 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독후감을 쓸 수 없는....

심지어, 이미 손에는 다른 작가의 다른 작품이 들려있음에도 불쑥 불쑥 떠오르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바로 그런 책이다.

1980년 5.18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만약 또 '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서 5.18을 배경으로 한, 소위 '후일담' 문학은 이미 문학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한시절을 풍미(?)하지 않았나 싶다. 공지영이나 공선옥같은 이들은 이 사건이 없었다면 과연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다. 이는 작가로서 그들의 실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이 사건을 작품의 주제 혹은 소재로 삼아 깊숙하게 천착했다는 의미에서다. 

그래서 나 역시 '5.18'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여러편 만나봤고, '꽃노래도 많이 들으면 물리듯이' 그렇게 식상함을 갖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전혀 뜻밖이었다.

 

같은 노래를 어떻게 편곡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되듯, 그녀의 작품은 지금까지 나온 '5.18'관련 작품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가 아닐까 싶다.

 

정미와 정대 남매....

이들 남매가 세들어 살던, 주인집의 막내아들 동호...

동호와 함께 마지막까지 그곳에 있었던 선숙, 은주 누나....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

 

그날 이후.

우린 다 알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빛고을 '광주'는 단순한 지명이 아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걸... 그리고 광주 출신이라면 왠지 모르게 옷깃을 여미게 되고 그 사람 앞에서만큼은 행동거지를 조심하게 된다는 걸....

이런 감정을 '부채감'이라고 하는지 혹은  '죄책감'이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단순한 '호기심'이나 '부담감'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뭐랄까...?

함께 하지 못했음에서 오는 미안함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음에서 오는 자책감이 서로 뒤엉킨 그런 심정이랄까.

 

광주 출신으로 열살 나던 1980년 그해 1월 서울로 이사를 왔다는 작가...

타지역 출신들도 이러할진데... 비록 어린 나이라고는 하더라도 눈치는 빤했을 그런 나이에 마주한 5.18은 이젠 중년이 된 작가를 오랫동안이나 따라다니지 않았을까 싶다.

 

마침내,

작가는 용기를 내어 영혼들을 불러오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무명천을 걷기 전에 너는 눈을 감지 않는다. 피가 비칠 때까지 입술 안쪽을 악물며 천을 걷는다. 걷은 다음에도, 천천히 다시 덮으면서도 눈을 감지 않는다. 달아났을거다,라고 이를 악물며 너는 생각한다. 그때 쓰러진 게 정대가 아니라 이 여자였다 해도 너는 달아났을 거다. 형들이었다 해도, 아버지였다 해도, 엄마였다 해도 달아났을 거다.  -한강, <소년이 온다> p45 中-

 

 

두려움을 견디며 나는 누나를 생각했어. 이글거리는 태양이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팽팽히 기우는 걸 보면서, 뚫어지게 내 얼굴을, 감긴 눈꺼풀들을 들여다보면서 누나를, 누나만을 생각했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느껴졌어. 누나는 죽었어. 나보다 먼저 죽었어.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하려고 하자, 눈물 대신 피와 진물이 새어 나오는 통증이 느껴졌어. 눈이 없는데 어디서 피가 흐르는 걸까, 어디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한강, <소년이 온다> p50 中-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뭐라고 생각하는가?

마마, 호환, 돈도 아닌, 바로 양심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계엄군으로부터 최후의 통첩을 받고도 시청을 떠나지 않았던 그들은...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

모든 사람들이 기적처럼 자신의 껍데기 밖으로 걸어나와 연한 맨살을 맞댄 것 같던 그 순간들 사이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이, 부서져 피 흘렸던 그 심장이 다시 온전해져 맥박 치는 걸 느꼈습니다.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압니까, 자신이 완전하게 깨끗하고 선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양심이라는 눈부시게 깨끗한 보석이 내 이마에 들어와 박힌 것 같은 순간의 광휘를.   -한강, <소년이 온다> p114~116 中-

 

그저 양심때문에,

목숨을 잃어야 했고...

그저 양심때문에,

간신히 살아났어도 제대로된 삶을 이어가지 못했던 그들...

 

그후 우리는 이따금 만나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서로가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고, 교통사고를 내고, 빚이 생기고, 다치거나 병을 얻고, 정 많고 서글서글한 여자를 만나 잠시 모든 고통이 끝났다고 믿고,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모든 걸 무너뜨려 다시 혼자가 되는 비슷한 경험을 거울 속 일그러진 얼굴처럼 지켜보는 사이 십년이 흘렀습니다. 하루하루의 불면과 악몽, 하루하루의 진통제와 수면유도제 속에서 우리는 더이상 젊지 않았습니다. 더이상 누구도 우리를 위해 염려하거나 눈물 흘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자신조차 우리를 경멸했습니다. 우리들의 몸속에 그 여름의 조사실이 있었습니다. 검정색 모나미 볼펜이 있었습니다. 하얗게 드러난 손가락뼈가 있었습니다. 흐느끼며 애원하고 구걸하는 낯익은 음성이 있었습니다.   -한강, <소년이 온다> p126 中-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잘 처리되었다고 생각했더랬다.

가해자들은 이미 죄과를 충분히 받았으며,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또한 잘 이루어졌다고...

 

그런데도...

왜 이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걸까?

왜 이렇게 억울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걸까?

 

이제야 할 것 같다. 

이 세상엔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상처도 있다는 걸....

.

.

.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참으로 놀라운 작품이다.

그나저나...

글솜씨도 유전되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글솜씨를 물려준 걸까...? 아닐까...?

작가 한강은 작가 한승원의 친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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