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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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경험의 베껴쓰기가 아닌, 주제의 구현이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 한들 작가에게 주제의식이 없다면 그 경험은 반나절 '이야기 거리'일 뿐, 읽을 때마다 재해석되는 명작이 될 수 없다.

 

주제를 구현함에 있어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은 마치 소리없이 내려 어느순간 온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눈송이를 닮아 있다.

무심한 듯... 끊임없이... 그러나 작심한 듯... 그래서 결국은 전혀 다른 세상을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잘 안다고...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더랬는데, 아니었다.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익숙한 듯 낯선 그 문장들과 느낌들은 또 다시 나를 감탄과 감동으로 이끌었고...

 

 

이 작품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열다섯 살 주인공 미하엘과 서른 여섯 한나의 첫만남과 사랑 그리고 일방적인 이별을 다루고,,,

2부는 법대생이 된 미하엘과 한나의 두번째 만남 그리고 한나의 과거가 펼쳐지며,,,

3부는 한나의 수감생활과 무려 10년동안 이어지는 미하엘의 책읽기와 그들의 영원한 이별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다양하다.

누구는(처음엔) 나이를 초월한 에로틱한 사랑 이야기라 하고...

누구는(두번째엔) 법과 정의의 이야기라고 하며...

누구는(세번째인 이번엔) 용서와 그리움이라고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처음 접했는데 그 당시 1부가 참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책이 아닌 영화를 그것도 단 한차례만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서 나와 비슷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  '원작 소설을 꼭 읽어 볼 것. 최소한 두번... 그 이상이면 더 좋고...'

 

내가 이 작품을 두번째로 만난 건, 원작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2부만 다시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에게 이 작품은 '법과 정의'에 관한 묵직한 이야기로 다가왔더랬지... 

그리고, 참 많이 화가 났더랬지.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옳고 그름의 역설에 대해서...

홀로코스트를 마치 면죄부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끝으로 유대인이라면 무조건 관용과 아량적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 

 

 그 후...

'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저자의 통렬한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더랬다.

 

문맹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감춘 한나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1인칭주인공 시점으로 철저하게 미하엘의 관점에서만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우린 한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한나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녀의 전범 행위는 무죄인가? 아니면, 유죄인가?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 속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듣고 싶었던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간단하게 응해서는 안 되고, 또 목숨이 걸리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이런 말을 해놓고, 그다음에 한나나 자기에 대한 말로 직접 넘어갔더라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은 해서는 안 되고, 그 대가가 무엇인지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질문의 진지함에 걸맞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특별한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를 알고 싶어 한 것이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한 게 아니었다. 재판장의 답변은 졸렬하고 궁색해 보였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119~120 中-

 

 

이 부분에서 우린 한나에게 더이상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니, 우리에겐 처음부터 그녀의 유무죄를 판단할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음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재판장의 답변이 졸렬하고 궁색하듯, 한나처럼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하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알량한 도덕심은 한줌의 티끌에 불과하다. 

 

<인생은 아름다워><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등... 물론, 좋은 영화들이다.

우리들에게 뜻모를 죄책감과 함께 유대인에 대한 연민과 관용을 불러 일으킨 영화들...  그러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두번째로 접한 이후, 난 유대인의 슬픔과 아픔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들의 나라(이스라엘)가 행하고 있는 반인륜적 작태 역시 간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와 공습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행동은 졸렬하며, 그런 졸렬한 행동의 근거에 자리하고 있는 그들의 굳은 신앙심 역시 궁색해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3년이 흐른 뒤 이번에 다시 책으로 세번째 만났을 땐, 나는 그동안 놓쳤던 그러나 작품 속에 엄연히 담겨 있는 이해와 용서 그리고 그리움의 정서를 꿰뚫어 보게 되었다.  

 

한나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거칠된 좌절된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미하엘의 이해와 용서...

문맹이라는 수치심을 극복한 한나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이해와 용서...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쫒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144~145 中-

 

 

재판장과 검사 그리고 한나의 변호사는 한 사람의 필체가 15년 넘도록 그대로 유지되는지, 그래서 필체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한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몇 번이나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또는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했다. 그녀의 태도는 갈수록 불안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전문가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그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중략)

그 때문일까?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한나의 수치심이 법정과 수용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임을 자백한다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범죄를 저지른다고? 

(중략)

정체가 더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과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운 것이다. 자신을 늘 약간은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안타까운 진실이요 안타까운 정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싸움이 그녀의 싸움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법정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늘 싸워왔고 또 싸웠다. 그것은 실제로는 힘찬 후퇴일 수밖에 없는 전진과 실제로는 은폐된 패배일 수밖에 없는 승리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139~144 中-

 

 

그러니까...

한나는 자신이 문맹임을 밝히면 얼마든지 자기에게 씌워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감춤으로써 죄를 인정하는 형식을 보인다. 그녀는 패배한 것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까지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세상을 더이상 상대하지 않으려 한 것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패배자는 한나가 아닌 바로 세상(법과 정의)인 셈이다. 

 

재판장을 만나 한나의 재판 결과에 개입하려고 결심했던 미하엘 역시 어쩌면 이 점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잘난 척만 하는 재판장의 훈계만 듣고는 침묵함으로써 한나의 의도를 존중하게 된다. 그리고 아울러서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한나와 죄를 함께 짊어지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서 미하엘은 좌절된 자신의 첫사랑을 한단계 승화시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이 가져다 주는 기쁨과 환희는 함께 하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은 함께 하려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사랑이 지나간 뒤안길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하고 씁쓸하며 심지어는 처절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신문에서 오려 낸 사진에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한 중년 신사와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중년 신사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소년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학교장에게 상장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한나가 그 도시를 떠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시 글을 읽을 줄 모르던 그녀가 그 사진이 실린 지역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던 것일가? 어쨌든 그녀는 사진 내용에 대해서 알아내고 또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재판이 열리던 중에도 그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나는 다시 가슴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218 中 -

 

 

한나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나는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그리움을 이기려고 애쓰면서, 그것은 한나와 나의 실제 상황과 전혀 다르며, 우리의 나이와 우리의 환경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한나가 어떻게 미국에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그녀는 자동차를 운전할 줄도 몰랐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나는 한나가 죽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또 나의 그리움이 그녀하고는 상관없는 형태로 그녀에게 고정되었음도 깨달았다. 그것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224~225 中 -

 

 

꼬마의 졸업사진을 간직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미하엘을 향한) 한나의 그리움...

카세트 테이프에 책을 읽어 녹음하는 것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던 (한나에 대한) 미하엘의 그리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눈물이 고이는 대신,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나목(裸木)의 마지막 낙엽 한장처럼 나에게 떨어진 생각 한조각...

'두 눈에 고인 눈물은 떨구면 그만이지만, 가슴 속에 차오른 눈물은 어떻게 하지...? 그 눈물들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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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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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카뮈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31년 약관의 나이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리쇼는 문단의 주목을 받지만, 흔히 천재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의 운(명) 또한 딱 여기까지였다.

 

 

이 작품의 주제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욕망'이라고 하겠다. 

흔히 육체적 욕망은 정신적 욕망보다 한단계 낮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마는... 그리고 그동안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마는...

이 작품을 읽고 난 이후, 육체적 욕망이든 정신적 욕망이든 '욕망은 모두 같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 들롱브르의 불타오르는 육체적 욕망도...

오토에게 엄마를 뺏겼다고 생각하고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조르제의 정신적 욕망도...

결국은 절박함과 파괴성에 있어선 똑같다.

 

오히려,

심심풀이 연애 상대로 들롱브르 부인을 여겼던 오토보다도,

엄마의 무관심과 상처받은 자존심을 무시와 냉랭함으로 바꾼 조르제보다도,

작별인사조차 없이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 자신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하고 있다' 고 생각하는 들롱브르 부인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자신을 버리고 상대를 살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결국 파멸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면...?

 

들롱브르 부인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녀야말로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적군 포로와 몸을 섞은 '매춘부'라고 한다.

 

사랑은 함께 나누되 책임만큼은 나누려 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오토는 조국으로 되돌아갔고...(그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겠지...)

사랑과 관심을 조건으로 엄마를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영악한 아들 조르제는 부끄러운 엄마의 품을 떠나 고모에게 맡겨졌다...(그뒤, 수녀로 자손이 없는 고모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잘 살았겠지...) 

 

 

고전소설처럼 작가가 불쑥 튀어나와 '해설'을 하는 장면은 나로  하여금 불쑥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앙드레 드 리쇼는 <고통>이라는 단 한 작품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충분조건을 갖춘 작가라 하겠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치 그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진정한 사랑을 하고도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듯, 그 역시 명작을 탄생시켰지만 비극적 삶을 살다갔다.

 

나 또한 인정해야겠다.

앙드레 드 리쇼의 <고통>이 '감춰진 명작'이라는데 동의함을...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장면 때문임을...

 

오토는 조르제의 환심을 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가 저항하자 그는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아이는 섬세한 성격이었고, 억센 머리칼과 피곤해 보이는 눈이 오토를 매혹시켰다. (...)그가 테레즈와 나누는 쾌락은 조르제의 무관심 때문에 감소되었고, 특히 테레즈를 만나 성욕을 채우고 돌아올 때면 그녀의 사랑 전체를 아이의 미소 한 번과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들기도 했다. -p115

 

어느 밤, 세 사람은 어둠 속에 함께 있었다. 테레즈는 그다음 날이 조르제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입 맞추려고 달려들었다.

"륄프 씨에게도 해드리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종걸음으로 오토에게 다가가 그가 입을 맞출 수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조르제가 갑자기 피하는 바람에 오토의 입맞춤은 어둠 속에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오토는 조르제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챘지만 테레즈는 알지 못했다.

"왜 오토에게 해주지 않는 거니?"

아이는 멈칫거리더니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단숨에 말했다. 지금 당장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으리라고 느낀 것이다.

"독일 사람한테는 입 맞추고 싶지 않아서요."

테레즈는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오토의 얼굴도 백지장처럼 창백해졌으리라. 무엇인가가 아이의 목을 꽉 죄는 듯했다. 그들 사이에 깊은 침묵이 자리 잡았다. 들판 저 깊은 곳에서 폭음이 세 번 들려왔다. 소르그 탄약 공장에서 폭발 실험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오토가 일어나더니 테레즈와 악수를 하고 나서 사라졌다. 조르제 들롱브르가 아이 아닌 남자로 여겨졌다. 어쩌면 그는 분을 못 이겨 울지도 몰랐다. - p116~117

 

오토는 조르제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그 감정을 특별하게 여겨 진심으로 존중했다. 오토는 자신이 접근하려 할 때마다 저항하면서 말없이 부엌에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아이에게 감탄해 마지 않았다. 만약 자기 어머니가 전쟁중에 테레즈처럼 행동했다면 과연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는 젊고 의협적이었다. 테레즈에 대해서는 경멸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아이 앞에서는 언제나 눈길을 떨구었다. -p156

 

사랑에 오감이 멈춰버린 들롱브르 부인보다 덜 사랑에 빠져있던 오토에겐 조르제의 속마음을 읽어 낼 수 있는 일말의 분별력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조르제는 왜 오토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은 걸까?

오토가 프랑스 적국인 독일 포로여서....?

물론, 본문에선 그렇게 말했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나에게 읽힌 조르제의 진심이란...? 

오토에게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엄마의 그 사랑에 경멸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여, 난 조르제라는 아이를 '영악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앙드레 드 리쇼는 인간의 심리 그것도 가장 알기 어렵고 표현하기 어렵다는 아이의 심정을 중의적으로 그것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단언컨대, <고통>같은 중편소설을 써내려가는데 있어서 이런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것은 절대 초보자의 수준이 아니다.  근데, 이 작품은 리쇼의 첫번째 소설이다.. 그것도 스물 약관의 나이에 쓴...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압권은 듣던 바 그대로 문체였다.

흔히들, 베껴쓰고 싶은 문장이라고들 하지...

(몇몇 작가들이 떠오른다. 왠지 그의 문장과 문체들을 베꼈을 것만 같은...)

 

 

두 눈에서 눈물이 울컥 솟아나 잠시 거울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조르제는 말하자면 빛을 향해 다가가는 육체의 첫꽃잎들이었다. -p13

 

겨울밤, 북풍에 실려 온 피묻은 유령의 머리가 덧문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릴때면 한편의 진짜 드라마가 작은 램프 주위에서 펼쳐졌다. -p 20

 

어떤 목소리가 아이의 귀에 대고 너도 울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p37

 

마을 집집마다 낯익은 가구들 사이에 제 나름의 소소한 비극을 간직하고 있었다. p78

 

서로 얘기를 나누거나 만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사랑을 향해 또다른 한 걸음을 내디뎠다. p97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것들은 금세 소중해지기 마련이다. p 99

 

아이는 어머니의 무관심한 태도에 기분이 몹시 상했고, 믈룅신부가 자신의 두 눈과 귓속에 파묻어 놓은 보석을 혼자서만 간직하기로 했다. p 99

 

신이 조르제를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가려하고 있었다. 오토가 이미 조르제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만 않았어도 모든 일은 잘 되어 갔을 것이다. p 99

 

딱히 어떤 불행이 영혼을 짓누르는 게 아닌데도 소년은 불행했다. p 111

 

"저요? 아무 일도 없는데요......"

"저요?"는 얼굴 표정을 꾸밀 시간을 벌기 위해 소년이 자기 주위에 두르는 안개다. p112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섬세함이라는 보석을 발견하는 데는, 가슴 속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열정만으로도 충분하다. p135

 

 

서로를 향한 두 존재의 격렬한 사랑은 자나치게 민감한 수많은 끈으로 그들을 한데 묶어놓았었다. 가면을 쓴 신이 그 집에 들어와 모든 끈을 풀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씨를 뿌리지 않고는 그 무엇도 거둘 수 없는 법이다. 신은 언젠가 무시무시한 놀이를 주도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 수개월 동안 다른 장소에 나타났던 전투의 신이 아니라, 초라한 부엌과 버려진 여인들의 신이......-p100

 

 

그 마을과 콩타 지방에 또다시 밤이 시작되었다. 사랑을 나누기에, 그리고 신도 모르게 해치워야 할 일을 하기에 적당한 밤이었다. 밤은 연인들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철학자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범죄자 등 그 모든 신성한 무법자들의 피난처였다. 어머니가 될 처녀들이 앞치마 속에 배를 감춘 채 광장의 샘까지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수치심도 사라지는 법. 이 책은 밤의 책이다. -p101

 

 

사랑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다른 생각이 그들이 영혼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지고, 수면도 미미하지만 천천히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에, 우리는 어느 날에야 문뜩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고립된 채 벌거벗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르제의 행동이 그들로 하여금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그들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이가 일깨워준 것이다. 그들은 강요에 못 이겨 그러듯 서글픈 심정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p136

 

 

드디어 가을이 왔고, 떨어지는 낙엽은 고통의 상처가 깊은 이 작은 육체에 격렬한 욕망을 심어놓았다. 소년은 침묵에 잠긴 집 안을 서성거렸다. 차가운 계단에 앉아 있기도 했다. 겨울비 내릴 때가 가까워지자 곰팡내가 나기 시작한 응접실을 배회하기도 했다. 두 손등을 열심히 문지르자 시체 냄새가 났다. 소년은 죽음을 생각했다.

밤 날씨가 꽤 차가웠지만 오토는 계속해서 찾아왔다. 저 위에서는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으며, 두 연인은 어느 밤엔가는 영영 헤어져야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테레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토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다음엔 누가 그를 대신할 것인가? 그녀가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떠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는 남자를 곁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생각했다.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까? - p154~155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마지막 입맞춤 다음에는 그 어떤 입맞춤도 이어지지 말아야 하거늘, 도대체 왜 또 키스를 나눈단 말인가? 한없음, 끝없음과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정수가 아니던가. -p167

 

 

오토는 그녀를 버려둔 채 서둘러 마을을 떠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마을에 남겨두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이 두 사람의 가슴에 깊은 고랑을 파놓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떠나리라. 보이지는 않지만 온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남겨놓았음을 모르는 채 떠나리라.....-p202

 

 

그녀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 그 남자는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음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p206

 

그나저나...

이렇게 들롱브르 부인의 욕망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숭고하며 사랑에 가깝다 말하는 나, 위태로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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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오 쿠키를 먹는 사람들
리처드 프레스턴 지음, 박병철 옮김 / 영림카디널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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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참, 특별한(?) 책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 책이 나온 1997년 당시 나는 이 책을 소개하는 기사를 접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사 속에서 미국 남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팔로마(스페인어로 '비둘기 장'이란 뜻)산 천문대에서 근무하는 천체물리학자들이 졸음과 추위를 몰아내기 위해 별을 관측하면서 커피와 함께 오레오 쿠키를 즐겨 먹는다는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추측형을 사용한 건,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흐릿해졌기 때문에... ^^;

(* 참고로, 오레오쿠키는 미국 나비스코사에서 1912년부터 생산하는 과자다.)

 

바로 그 순간, 내 머리와 마음 속에서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이후 오랫동안 나에겐 '오레오 쿠키를 먹는 사람들 = 천체물리학자 = 별 = 아름답다'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버렸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별을 갖고 있으며 죽으면 그 별로 돌아간다고 믿게 되었다.  

 

그 후,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 볼때마다 나는 사물에 대한 아름다움을 너머, 사물을 향한 일종의 경외심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지구로부터 수억, 수십억 광년 떨어져 있는 천체에서 발하는 빛이 지구에 도달하려면 떨어진 그 거리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 눈에 비친 그 별빛은 지금으로부터 까마득히 먼 과거의 빛이다.

인간이 탄생하기도 훨씬 더 전에... 심지어 지구가 탄생하기도 훨씬 더 전에... 그 빛은 이미 '나'를 향해 출발했던 것이다....

 

그 뒤,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차례 이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싶다.

처음에는 내가 알고 있던 천체 지식들을 총동원하고 살짝 내 의견까지 곁들여서...

그만큼 난 이 책을 좋아했다. 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이 책을 구입해서 갖게 되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이 책만큼은 잘 읽게 되지 않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나면 읽어야지'... '이번엔 꼭 읽어야지...' '이 계절이 지나기 전엔 꼭 읽어야지...' '올해가 다 가기 전엔 꼭 읽어야지...'

이렇게 십 수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난 이 책의 내용을 잘(?) 알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게 되었더랬지...

 

그리고도 한참이나 세월이 더 흘러갔고...

이 책이 불행하게도 내 품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마침내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한번 잃어버린 사랑은 되돌이킬 수 없듯, 한번 내곁을 떠난 책을 다시 얻는 과정은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어렵사리 구한 책을 막상 두손에 펼쳐 들고 읽으려니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내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난해하고 낯선 용어와 이론도 그렇지만 신문기자인 저자가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육하원칙에 따라 서술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나치게 과학적(?)이었다. 내가 '별'이라고 칭하는 것을 과학자들은 '항성'이라고 불렀다. 

 

과학은 사실을 추구하고, 문학은 진실을 추구한다고 했던가. 

사실과 진실 사이에 깊고 깊은 심연이 놓여있듯...  '별'과 '항성' 의 어감적 차이만큼이나 과학과 문학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강'이 존재함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지 싶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서 지어내고 꾸며진 이야기들 탓(?)에 나는 읽으면서 여러차례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 책은 충분히 재밌고 쉽게 쓰여져서 출판되자 마자 베스트셀러였고 지금도 천체 분야의 명저로 손꼽힌다.

 

 

이 책의 주인공은...

1928년부터 1949년까지 무려 21년에 걸쳐 7층 높이의 크기로 만들어진 헤일 천체 망원경이라고도 하겠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헤일 천체 망원경(직경 508cm)을 통해 보여지는 밤하늘의 수많은 천체들이라 하겠다. 

 

천체나 우주 물리 분야라고 하면 으레 인류의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천체를 연구하는 건, 인류의 미래가 아닌 인류의 과거 심지어 지구 더 나아가 우주의 초기 탄생을 연구하는 것이다. 천체망원경을 통해 천체를  바라본다는 건 바로 과거를 바라보는 행위인 셈이다. 그리고 만물은 모두 죽은 별들의 잔해들이며,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란다. 그러니 인간은 별에서 왔다는 나의 상상은 옳았던 셈이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도 놀라운 일인가!

 

어디 이뿐인가.

한개의 항성(태양)과 아홉개의 행성(지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천왕성 혜왕성 명왕성)으로 이루어진 태양계에 살고 있을 뿐인 인간이 태양계를 너머 은하, 그 은하 너머 우주까지 내다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고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또한 100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수백 수천 수억 광년을 거슬러 올라가 까마듯한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관측한다는 사실 자체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이 책을 읽으면서 우주의 드넓음과 신비로움에 압도당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아울러, 우주의 탄생과 진실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인간의 위대함에 숙연해지지 않았다면 이 또한 거짓말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어렵고 그래서 다소 지겨울 수도 있는 책이지만, 곳곳에 아름다운 문장들이 감춰져 있다.

마치 수많은 별들 속에 혜성이 감춰져 있는 것처럼...

 

 

- 이 망원경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던 어떤 사람의 자취입니다... p89

- 기계를 신뢰하는 인류의 완고한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헤일 망원경에는 우주를 향한 인류의 열망과 두려움이 담겨있는 것이다. p131

- 팔로마 산에서 얼어죽지 않은 채로 새벽을 맞이하려면 오레오 쿠키를 먹어라. p144

- 그는 <몬테크리스토 백작> 속의 한 구절을 항상 마음 속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다음 두 마디로 집약된다.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을 가져라.'" p277

- 언젠가 인류는 행성을 소유할수도 있겠지만 별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다. p317

 

 

 

 

+ )

 

오랫동안 좋아해온 짝사랑과 조우하는 기분은 어떤 걸까?

지금, 바로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내멋대로 재구성되었던 상상이 현실이 되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격스러운...

 

그래,

우리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겠지만, 사랑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겠지...

인류가 언젠가는 행성을 소유할 수도 있겠지만 별만큼은 결코 가질 수 없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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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계급사회 - 누가 대한민국을 영어 광풍에 몰아 넣는가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
남태현 지음 / 오월의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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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영어 광풍 현상과 그 원인을 짚어낸 책이다.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존칭체'를 사용한 모양인데,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뻔한 소리를 아이에게 설명하듯 해서 살짝 짜증이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간부분을 넘어가면서 영어로 막대한 이익을 얻는 집단을 고발(?)하고 한국사회에서 영어란 효용가치보다는 계급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는 점을 꼬집었다.

 

올초부터 영어 회화 공부를 한해 목표로 잡고는 지금까지 나름 잘 지켜오는 나 역시,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영어 회화를 공부하는 거지?"

나의 경우엔 좋은 직장이나 승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먼훗날 해외여행 갔을 때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잠시 후, 학창시절부터 영어에 맺혔던 '한(限)'을 풀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영어를 잘 하는 친구가 쉽게 대학가고 직업적으로도 빨리 성공하는 걸 보면서 느꼈던 억울함...

영어를 잘 하는 친구 앞에서 (특별한 이유도 원인도 모른 채) 기 죽어야만 했던 슬픈 흑역사들...

 

지은이는 이와 같은 내 마음이 바로 대다수 한국인들이 영어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이라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한가지 더 놀라웠던 건,

영어광풍사회를 정부와 대기업이 나서서 조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은이는 정부의 고위층 인사들과 대기업 간부 등등.... 하나같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미국에서 학위를 받아온 비율이 높다는 점을 신빙성 있는 자료들과 함께 제시하면서 한국사회에서 영어란 출세의 방편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소위, 세계화 시대에 적응하거나 글로벌 인재가 되기 위해서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세계화가 미국화는 아닐 터인데.... 어째서 이 사회는 술 권하는 사회, 빚 권하는 사회를 너머 영어까지 권하는 사회가 되었단 말인가.

굳이 영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분야, 굳이 영어가 쓰이지 않는 직업에도 영어 시험 점수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정말 전국민의 영어 구사 능력이 국가의 안위와 발전을 판가름 지을 만큼 중요하다면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영어를 공용어로 지정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영어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영어 사교육이 판을 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글을 너무 많이 사랑해서?

애국심 때문에?

절대로 아니다.

이는 단지 영어 공용화를 하지 않으려는 전제하에 갖다 붙이는 효과적인 핑계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광풍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건,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계급을 가르는 '기준'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상류층과 중산층 그리고 하류층을 가르는 '기준'으로써 영어점수와 구사력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효과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영어가 개인의 노력이나 타고난 능력 등 기타 다른 요인보다는 경제력에 따라 그 효과가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어를 잘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창한 영어 없이는 성공은 점점 더 힘들어 보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기를 쓰고 영어를 합니다. 점점 더 멀어져가는 상류층에 더 늦기 전에 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사기가 숨어 있습니다. (...) 더 많은 보통 사람들이 따라할수록 상류층에서는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점점 더 비싼 교육으로 대응합니다. (...) 보통사람으로선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경쟁인 셈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보죠. 돈 수억원을 들인 상류층이나 공립학교를 나온 노동자의 자녀도 다 완벽하게 영어를 하게 됐다고 상상해봅시다. 그럼 우리 사회의 영어광기는 사라질까요? 물론 영어 광기는 사라질 테죠. 영어가 외국인과의 소통보다는 신분 상승의 도구로서의 역할이 더 크고 한국에서 엘리트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큰 이상 모든 사람들이 영어를 구사한다면 영어가 가진 계급적인 의미는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계급 간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영어가 그 계급적 역할을 못하게 된다면 상류층은 자연스레 그 시대에 맞는 대체물을 찾겠지요. 중국어가 될수도 있고, 러시아어가 될 수도 있고, 유대교 경전이 될 수도 있고, 태국의 무술인 무예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영어 망국병은 영어 망국병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대신 영어 망국병은 한국 사회의 계급 문제인 것이죠. 계급 간의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신분 상승의 가능성에 대한 불안과 욕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

그렇다면, 영어의 문제는 개인이나 한 집단이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죠.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적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남태현, <영어계급사회> p191~193 中-

 

 

영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어쩌면 우리나라가 친미적일 수 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와 맞닿아 있다고도 하겠다.

내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미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나라의 근간을 유지할 수 있었던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반세기가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냉전이라는 과거에 묶여 절뚝거릴수밖에 없는 나라에서 어쩌면 아직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영어로 상/중/하 계급이 갈리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당장 세상이 바뀌진 않는다.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은 여전히 영어 공부에 시간과 돈을 쏟아 부을 것이며...

중산층은 가족의 행복을 담보로 상류층 영어 교육을 따라가느라 헉헉거릴 것이며...

정부와 대기업 등 기득권세력들은 얼마 안되는 기득권을 나누어 주는 기준으로 여전히 영어를 들이밀 것이다.

 

그러나, 

예전엔 모르고 무작정 따라만 했거나 사기를 진실인냥 철썩같이 믿었다면, 이젠 알고도 모르는 척 당해주자는 것이다.

그래도 속이야 상하겠지만...

배가 꼬이고 아프겠지만...

 

혹시 아는가?

이 사기극에서 운좋게 내가 사기의 대상에서 주체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

.

.

이런 게 바로 악습인줄 알면서도 악습이 답습되고 결국엔 규범과 전통이 되는 원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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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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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물론,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첫째는 인식의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한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종교 등이 제공하는 인식적 가치와 함께 갈 수도 있고 그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지만,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들과 무관한 곳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

 

둘째는 정서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한다. (...) 그러나 어떤 작품은 기쁨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기쁘게 해서 낯선 정서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익숙한 정서를 작품에서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제공하는 낯선 정서에 서서히 젖어들어가게 될 것이다.

 

셋째는 미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아름답다. (...)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작품은 흔히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것을 전복하는 추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하고 심드렁한 방식으로 미추를 해체하여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다.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후주 中 발췌-

 

 

훌륭한 문학 평론집의 가치는 썩 괜찮은 작품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는 건, 여러 권의 시집을 읽은 후거나 빼어난 문학작품 한편을 읽은 것처럼 묵직하다.

얼마전 내가 재미없게 읽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했고 번역했다는 사실과 역시나 심드렁하게 읽었던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 실은 '본능-욕망-충동-사랑'이라는 감정의 패턴을 성실하게(?) 따른 놀라운 작품이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언 매큐언의 <속죄>,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김소연의 <마음사전>과 권혁웅의 <두근 두근>을 포함한 산문집들을 독서목록에 올렸다. 내가 만약 이 책들을 애써 찾아 읽는다면 그건 순전히 신형철 이 사람 때문이다.

 

 

ㅡ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p127

ㅡ 사회적 약자를 재현하는 일은 어렵다. 시의 의식이 동정의 눈물을 흘릴 때 시의 무의식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태를 힘껏 막아내야 하기 때문에

ㅡ 시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아주 조금씩 바꾸기는 할 것입니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이수명의 시처럼, p204

ㅡ 사유를 건너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를 뒤흔든다. p54

ㅡ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p42

ㅡ 지옥의 문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될 때 열린다. 나는 가해자가 되고 사랑은 파괴된다. p230

ㅡ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가련한 사랑이다. p271

ㅡ '한'사람이 문득 '이'사람이 되어 사랑이 시작되고, '이' 사람이 어느덧 다시 '한' 사람이 되면 애도는 끝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내막이 본래 이토록 헐렁한 것인지도 모른다. p86

ㅡ 때로 사랑은 거짓말의 힘으로 세월을 견딘다. 상대의 거짓말을 묵인해주는 거짓말, 그것이 같은 세월을 견디고 있는 이에 대한 예의가 되기도 한다. p86

ㅡ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는 '정서적 독서' 말고 상황의 사회심리학적 의미를 곱씹는 '성찰적 독서'를 유도하기 위해서다.p317

ㅡ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가장 숭고해진다. (...) 무신론자에게 희망은 신이다. p304~305

ㅡ 고독은 인간의 근본조건으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p350

(이렇게 옮기고 나서, 그 아래에 '고독은 삶의 맨얼굴이기 때문에...'를 내 멋대로 붙였다.)

ㅡ 삶을 견디게 하는 아름다움과 삶을 서글프게 만드는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문득 이 두 손 중 하나를 우리에게 내밀고 우린 하릴없이 그 손을 잡는다. p371

 

 

그의 문장 하나 하나에 저만치 떠내려갔다가 밀려오기를 여러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기어이, '글의 무게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게 만들고 나서야 살포시 내려놓는다.  

 

현기증이 인다.

나는 오늘 신형철의 산문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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