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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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훌륭한 예술작품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종류의 가치가 따로 또 같이 존재한다. 물론, 문학의 경우도 그렇다.

 

첫째는 인식의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인간과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알게 한다. 그 '무언가'는 과학 철학 종교 등이 제공하는 인식적 가치와 함께 갈 수도 있고 그것들을 거스를 수도 있지만, 최상의 경우에는 그것들과 무관한 곳에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

 

둘째는 정서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우리를 기쁘게 혹은 슬프게 한다. (...) 그러나 어떤 작품은 기쁨을 슬프게 하고  슬픔을 기쁘게 해서 낯선 정서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그 경우 우리는 익숙한 정서를 작품에서 재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제공하는 낯선 정서에 서서히 젖어들어가게 될 것이다.

 

셋째는 미적 가치다. 훌륭한 예술 작품은 아름답다. (...)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작품은 흔히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것을 전복하는 추의 미학을 보여주기도 하고 심드렁한 방식으로 미추를 해체하여 이상한 아름다움에 도달하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지만,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다.  

-신형철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 후주 中 발췌-

 

 

훌륭한 문학 평론집의 가치는 썩 괜찮은 작품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신형철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를 읽었다는 건, 여러 권의 시집을 읽은 후거나 빼어난 문학작품 한편을 읽은 것처럼 묵직하다.

얼마전 내가 재미없게 읽었던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했고 번역했다는 사실과 역시나 심드렁하게 읽었던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이 실은 '본능-욕망-충동-사랑'이라는 감정의 패턴을 성실하게(?) 따른 놀라운 작품이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언 매큐언의 <속죄>, 구스타프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리고 김소연의 <마음사전>과 권혁웅의 <두근 두근>을 포함한 산문집들을 독서목록에 올렸다. 내가 만약 이 책들을 애써 찾아 읽는다면 그건 순전히 신형철 이 사람 때문이다.

 

 

ㅡ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다. p127

ㅡ 사회적 약자를 재현하는 일은 어렵다. 시의 의식이 동정의 눈물을 흘릴 때 시의 무의식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태를 힘껏 막아내야 하기 때문에

ㅡ 시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아주 조금씩 바꾸기는 할 것입니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이수명의 시처럼, p204

ㅡ 사유를 건너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를 뒤흔든다. p54

ㅡ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p42

ㅡ 지옥의 문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될 때 열린다. 나는 가해자가 되고 사랑은 파괴된다. p230

ㅡ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가련한 사랑이다. p271

ㅡ '한'사람이 문득 '이'사람이 되어 사랑이 시작되고, '이' 사람이 어느덧 다시 '한' 사람이 되면 애도는 끝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의 내막이 본래 이토록 헐렁한 것인지도 모른다. p86

ㅡ 때로 사랑은 거짓말의 힘으로 세월을 견딘다. 상대의 거짓말을 묵인해주는 거짓말, 그것이 같은 세월을 견디고 있는 이에 대한 예의가 되기도 한다. p86

ㅡ 인물에게 감정이입하는 '정서적 독서' 말고 상황의 사회심리학적 의미를 곱씹는 '성찰적 독서'를 유도하기 위해서다.p317

ㅡ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가장 숭고해진다. (...) 무신론자에게 희망은 신이다. p304~305

ㅡ 고독은 인간의 근본조건으로 우리는 어떻게든 그것과 친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p350

(이렇게 옮기고 나서, 그 아래에 '고독은 삶의 맨얼굴이기 때문에...'를 내 멋대로 붙였다.)

ㅡ 삶을 견디게 하는 아름다움과 삶을 서글프게 만드는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문득 이 두 손 중 하나를 우리에게 내밀고 우린 하릴없이 그 손을 잡는다. p371

 

 

그의 문장 하나 하나에 저만치 떠내려갔다가 밀려오기를 여러차례 반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기어이, '글의 무게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깨닫게 만들고 나서야 살포시 내려놓는다.  

 

현기증이 인다.

나는 오늘 신형철의 산문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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