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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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경험의 베껴쓰기가 아닌, 주제의 구현이여야 한다.

아무리 좋은 경험이라 한들 작가에게 주제의식이 없다면 그 경험은 반나절 '이야기 거리'일 뿐, 읽을 때마다 재해석되는 명작이 될 수 없다.

 

주제를 구현함에 있어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은 마치 소리없이 내려 어느순간 온세상을 뒤덮어 버리는 눈송이를 닮아 있다.

무심한 듯... 끊임없이... 그러나 작심한 듯... 그래서 결국은 전혀 다른 세상을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을 다시 읽었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잘 안다고... 충분히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더랬는데, 아니었다.

마치 새로운 작품을 읽기라도 하는 것처럼 익숙한 듯 낯선 그 문장들과 느낌들은 또 다시 나를 감탄과 감동으로 이끌었고...

 

 

이 작품은 총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열다섯 살 주인공 미하엘과 서른 여섯 한나의 첫만남과 사랑 그리고 일방적인 이별을 다루고,,,

2부는 법대생이 된 미하엘과 한나의 두번째 만남 그리고 한나의 과거가 펼쳐지며,,,

3부는 한나의 수감생활과 무려 10년동안 이어지는 미하엘의 책읽기와 그들의 영원한 이별이다.

 

이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다양하다.

누구는(처음엔) 나이를 초월한 에로틱한 사랑 이야기라 하고...

누구는(두번째엔) 법과 정의의 이야기라고 하며...

누구는(세번째인 이번엔) 용서와 그리움이라고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처음 접했는데 그 당시 1부가 참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책이 아닌 영화를 그것도 단 한차례만 본 사람이라면 이 작품에 대해서 나와 비슷한 인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한마디!  '원작 소설을 꼭 읽어 볼 것. 최소한 두번... 그 이상이면 더 좋고...'

 

내가 이 작품을 두번째로 만난 건, 원작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2부만 다시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당시, 나에게 이 작품은 '법과 정의'에 관한 묵직한 이야기로 다가왔더랬지... 

그리고, 참 많이 화가 났더랬지.

법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옳고 그름의 역설에 대해서...

홀로코스트를 마치 면죄부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끝으로 유대인이라면 무조건 관용과 아량적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 세계에 대해서... 

 

 그 후...

'법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저자의 통렬한 질문은 꽤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더랬다.

 

문맹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감춘 한나는 무죄인가? 유죄인가?

1인칭주인공 시점으로 철저하게 미하엘의 관점에서만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우린 한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한나의 목소리가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과연, 그녀의 전범 행위는 무죄인가? 아니면, 유죄인가?

 

 

"당신은 당신이 수감자들을 죽음 속으로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까?"

"아뇨,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이 왔고, 이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자리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당신 그리고 당신 그리고 당신은 후송돼서 죽어야 해'라고 말했나요?"

한나는 재판장의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저는...... 제 말은...... 하지만 재판장님 같았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한나는 진심에서 그렇게 물은 것이었다. 그녀는 어떻게 달리 행동해야 했는지, 어떻게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재판장에게 그 같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듣고 싶었던 것이다.

(중략)

"이 세상에는 우리가 간단하게 응해서는 안 되고, 또 목숨이 걸리지 않은 것이라면, 그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가 이런 말을 해놓고, 그다음에 한나나 자기에 대한 말로 직접 넘어갔더라면 모든 것은 끝났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은 해서는 안 되고, 그 대가가 무엇인지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질문의 진지함에 걸맞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특별한 상황에서 그녀가 어떻게 행동해야 했는지를 알고 싶어 한 것이지,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알려고 한 게 아니었다. 재판장의 답변은 졸렬하고 궁색해 보였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119~120 中-

 

 

이 부분에서 우린 한나에게 더이상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니, 우리에겐 처음부터 그녀의 유무죄를 판단할 자격이 주어져 있지 않음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 모두를 대변하는 재판장의 답변이 졸렬하고 궁색하듯, 한나처럼 유대인 수용소에서 일하지 않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알량한 도덕심은 한줌의 티끌에 불과하다. 

 

<인생은 아름다워><쉰들러 리스트> <피아니스트> 등등... 물론, 좋은 영화들이다.

우리들에게 뜻모를 죄책감과 함께 유대인에 대한 연민과 관용을 불러 일으킨 영화들...  그러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를 두번째로 접한 이후, 난 유대인의 슬픔과 아픔을 직시함과 동시에 그들의 나라(이스라엘)가 행하고 있는 반인륜적 작태 역시 간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향해 발포와 공습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행동은 졸렬하며, 그런 졸렬한 행동의 근거에 자리하고 있는 그들의 굳은 신앙심 역시 궁색해 보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시 3년이 흐른 뒤 이번에 다시 책으로 세번째 만났을 땐, 나는 그동안 놓쳤던 그러나 작품 속에 엄연히 담겨 있는 이해와 용서 그리고 그리움의 정서를 꿰뚫어 보게 되었다.  

 

한나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거칠된 좌절된 자신의 사랑에... 대한, 미하엘의 이해와 용서...

문맹이라는 수치심을 극복한 한나의... 자신에 대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이해와 용서...

 

나는 내가 그녀를 배반하고 부정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게서 떠나버렸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녀는 단지 전차 회사에서 자신의 약점이 노출될까 봐 두려워 도망친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쫒아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내가 그녀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전히 유죄였다. 그리고 범죄자를 배반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으므로 내가 유죄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범죄자를 사랑한 까닭에 유죄였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144~145 中-

 

 

재판장과 검사 그리고 한나의 변호사는 한 사람의 필체가 15년 넘도록 그대로 유지되는지, 그래서 필체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한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몇 번이나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또는 무엇인가를 물으려고 했다. 그녀의 태도는 갈수록 불안해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말했다.

"전문가까지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그 보고서를 썼다는 사실을 시인합니다.

(중략)

그 때문일까? 그녀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놀라게 하는 쪽을 택했다고,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회피하고, 방어하고, 숨기고, 위장하고 또 남에게 상처를 주는 행동의 근거가 되는 수치심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한나의 수치심이 법정과 수용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범죄자임을 자백한다고?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범죄를 저지른다고? 

(중략)

정체가 더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쫓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실과 자신의 정의를 위하여 싸운 것이다. 자신을 늘 약간은 위장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완전히 솔직해질 수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안타까운 진실이요 안타까운 정의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싸움이 그녀의 싸움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탈진 상태였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법정에서만 싸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감추기 위해서 늘 싸워왔고 또 싸웠다. 그것은 실제로는 힘찬 후퇴일 수밖에 없는 전진과 실제로는 은폐된 패배일 수밖에 없는 승리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139~144 中-

 

 

그러니까...

한나는 자신이 문맹임을 밝히면 얼마든지 자기에게 씌워진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신의 약점을 감춤으로써 죄를 인정하는 형식을 보인다. 그녀는 패배한 것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으면서까지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세상을 더이상 상대하지 않으려 한 것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패배자는 한나가 아닌 바로 세상(법과 정의)인 셈이다. 

 

재판장을 만나 한나의 재판 결과에 개입하려고 결심했던 미하엘 역시 어쩌면 이 점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잘난 척만 하는 재판장의 훈계만 듣고는 침묵함으로써 한나의 의도를 존중하게 된다. 그리고 아울러서 스스로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써 한나와 죄를 함께 짊어지고자 한다. 바로 여기에서 미하엘은 좌절된 자신의 첫사랑을 한단계 승화시킨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랑이 가져다 주는 기쁨과 환희는 함께 하면서 그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은 함께 하려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사랑이 지나간 뒤안길은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쓸쓸하고 씁쓸하며 심지어는 처절하고 참담하기까지 하다.

 

 

신문에서 오려 낸 사진에는 검은 양복 차림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는 한 중년 신사와 소년의 모습이 있었다. 나는 중년 신사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소년이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 학교장에게 상장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은 한나가 그 도시를 떠나고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시 글을 읽을 줄 모르던 그녀가 그 사진이 실린 지역 신문을 정기구독하고 있었던 것일가? 어쨌든 그녀는 사진 내용에 대해서 알아내고 또 그것을 입수하기 위해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녀는 재판이 열리던 중에도 그 사진을 몸에 지니고 있었을까? 나는 다시 가슴과 목구멍에 눈물이 고여오는 것을 느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218 中 -

 

 

한나를 향한 그리움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에 나는 가슴이 아려왔다. 나는 그리움을 이기려고 애쓰면서, 그것은 한나와 나의 실제 상황과 전혀 다르며, 우리의 나이와 우리의 환경과도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영어를 할 줄 모르는 한나가 어떻게 미국에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그녀는 자동차를 운전할 줄도 몰랐다.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나는 한나가 죽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또 나의 그리움이 그녀하고는 상관없는 형태로 그녀에게 고정되었음도 깨달았다. 그것은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p224~225 中 -

 

 

꼬마의 졸업사진을 간직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던 (미하엘을 향한) 한나의 그리움...

카세트 테이프에 책을 읽어 녹음하는 것으로 달랠 수밖에 없었던 (한나에 대한) 미하엘의 그리움...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눈물이 고이는 대신, 가슴이 아려왔다. 

그리고...

나목(裸木)의 마지막 낙엽 한장처럼 나에게 떨어진 생각 한조각...

'두 눈에 고인 눈물은 떨구면 그만이지만, 가슴 속에 차오른 눈물은 어떻게 하지...? 그 눈물들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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