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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앙드레 드 리쇼 지음, 이재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카뮈에게 영감을 준 작품으로 더 알려져 있다.
1931년 약관의 나이에 발표한 이 작품으로 리쇼는 문단의 주목을 받지만, 흔히 천재의 운명이 그러하듯 그의 운(명) 또한 딱
여기까지였다.
이 작품의 주제를 단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욕망'이라고 하겠다.
흔히 육체적 욕망은 정신적 욕망보다 한단계 낮은 것으로 취급되고 있다마는... 그리고 그동안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마는...
이 작품을 읽고 난 이후, 육체적 욕망이든 정신적 욕망이든 '욕망은 모두 같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 들롱브르의 불타오르는 육체적 욕망도...
오토에게 엄마를 뺏겼다고 생각하고 엄마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조르제의 정신적 욕망도...
결국은 절박함과 파괴성에 있어선 똑같다.
오히려,
심심풀이 연애 상대로 들롱브르 부인을 여겼던 오토보다도,
엄마의 무관심과 상처받은 자존심을 무시와 냉랭함으로 바꾼 조르제보다도,
작별인사조차 없이 떠나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 자신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하고 있다' 고 생각하는 들롱브르 부인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자신을 버리고 상대를 살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결국 파멸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가는 게 사랑이라고 한다면...?
들롱브르 부인은... 사랑을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한다면...? 그녀야말로 아름답고 숭고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를 적군 포로와 몸을 섞은 '매춘부'라고 한다.
사랑은 함께 나누되 책임만큼은 나누려 하지 않았던, 이기적인 오토는 조국으로 되돌아갔고...(그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겠지...)
사랑과 관심을 조건으로 엄마를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영악한 아들 조르제는 부끄러운 엄마의 품을 떠나 고모에게 맡겨졌다...(그뒤,
수녀로 자손이 없는 고모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어 잘 살았겠지...)
고전소설처럼 작가가 불쑥 튀어나와 '해설'을 하는 장면은 나로 하여금 불쑥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앙드레 드 리쇼는 <고통>이라는 단 한 작품으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충분조건을 갖춘 작가라 하겠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치 그의 작품 속 주인공처럼 진정한 사랑을 하고도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듯, 그 역시 명작을 탄생시켰지만
비극적 삶을 살다갔다.
나 또한 인정해야겠다.
앙드레 드 리쇼의 <고통>이 '감춰진 명작'이라는데 동의함을...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장면 때문임을...
오토는 조르제의 환심을 사려고 무진 애를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이가 저항하자 그는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감탄하기도
했다. 아이는 섬세한 성격이었고, 억센 머리칼과 피곤해 보이는 눈이 오토를 매혹시켰다. (...)그가 테레즈와 나누는 쾌락은 조르제의 무관심
때문에 감소되었고, 특히 테레즈를 만나 성욕을 채우고 돌아올 때면 그녀의 사랑 전체를 아이의 미소 한 번과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종종 들기도
했다. -p115
어느 밤, 세 사람은 어둠 속에 함께 있었다. 테레즈는 그다음 날이 조르제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아이가 어머니에게 입
맞추려고 달려들었다.
"륄프 씨에게도 해드리렴."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종걸음으로 오토에게 다가가 그가 입을 맞출 수 있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조르제가 갑자기 피하는 바람에 오토의
입맞춤은 어둠 속에서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오토는 조르제가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챘지만 테레즈는 알지 못했다.
"왜 오토에게 해주지 않는 거니?"
아이는 멈칫거리더니 잠시 아무 말 않고 있다가 단숨에 말했다. 지금 당장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영영 할 수 없으리라고 느낀 것이다.
"독일 사람한테는 입 맞추고 싶지 않아서요."
테레즈는 피가 한꺼번에 얼굴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오토의 얼굴도 백지장처럼 창백해졌으리라. 무엇인가가 아이의 목을 꽉 죄는 듯했다. 그들
사이에 깊은 침묵이 자리 잡았다. 들판 저 깊은 곳에서 폭음이 세 번 들려왔다. 소르그 탄약 공장에서 폭발 실험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오토가
일어나더니 테레즈와 악수를 하고 나서 사라졌다. 조르제 들롱브르가 아이 아닌 남자로 여겨졌다. 어쩌면 그는 분을 못 이겨 울지도 몰랐다. -
p116~117
오토는 조르제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그 감정을 특별하게 여겨 진심으로 존중했다. 오토는 자신이
접근하려 할 때마다 저항하면서 말없이 부엌에서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그 아이에게 감탄해 마지 않았다. 만약 자기 어머니가 전쟁중에
테레즈처럼 행동했다면 과연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는 젊고 의협적이었다. 테레즈에 대해서는 경멸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아이
앞에서는 언제나 눈길을 떨구었다. -p156
사랑에 오감이 멈춰버린 들롱브르 부인보다 덜 사랑에 빠져있던 오토에겐 조르제의 속마음을 읽어 낼 수 있는 일말의 분별력이 남아 있었다.
그나저나...
조르제는 왜 오토에게 호의를 보이지 않은 걸까?
오토가 프랑스 적국인 독일 포로여서....?
물론, 본문에선 그렇게 말했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다.
어디 보자...
그러니까, 나에게 읽힌 조르제의 진심이란...?
오토에게 굴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사랑하는 엄마의 그 사랑에 경멸을 보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여, 난 조르제라는 아이를 '영악하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앙드레 드 리쇼는 인간의 심리 그것도 가장 알기 어렵고 표현하기 어렵다는 아이의 심정을 중의적으로 그것도 탁월하게 표현해내는데
성공했다.
단언컨대, <고통>같은 중편소설을 써내려가는데 있어서 이런 부분에까지 생각이 미쳤다는 것은 절대 초보자의 수준이
아니다. 근데, 이 작품은 리쇼의 첫번째 소설이다.. 그것도 스물 약관의 나이에 쓴...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압권은 듣던 바 그대로 문체였다.
흔히들, 베껴쓰고 싶은 문장이라고들 하지...
(몇몇 작가들이 떠오른다. 왠지 그의 문장과 문체들을 베꼈을 것만 같은...)
두 눈에서 눈물이 울컥 솟아나 잠시 거울을 타고 흘러내릴 때까지, 조르제는 말하자면 빛을 향해 다가가는 육체의 첫꽃잎들이었다.
-p13
겨울밤, 북풍에 실려 온 피묻은 유령의 머리가 덧문에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들릴때면 한편의 진짜 드라마가 작은 램프 주위에서 펼쳐졌다.
-p 20
어떤 목소리가 아이의 귀에 대고 너도 울어야 한다고 속삭였다. p37
마을 집집마다 낯익은 가구들 사이에 제 나름의 소소한 비극을 간직하고 있었다. p78
서로 얘기를 나누거나 만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함께 사랑을 향해 또다른 한 걸음을 내디뎠다. p97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것들은 금세 소중해지기 마련이다. p 99
아이는 어머니의 무관심한 태도에 기분이 몹시 상했고, 믈룅신부가 자신의 두 눈과 귓속에 파묻어 놓은 보석을 혼자서만 간직하기로 했다. p
99
신이 조르제를 어머니에게서 빼앗아 가려하고 있었다. 오토가 이미 조르제에게서 어머니를 빼앗아 가지만 않았어도 모든 일은 잘 되어 갔을
것이다. p 99
딱히 어떤 불행이 영혼을 짓누르는 게 아닌데도 소년은 불행했다. p 111
"저요? 아무 일도 없는데요......"
"저요?"는 얼굴 표정을 꾸밀 시간을 벌기 위해 소년이 자기 주위에 두르는 안개다. p112
지적 능력에 한계가 있는 존재가 자신에게서 섬세함이라는 보석을 발견하는 데는, 가슴 속에 존재하는 아주 작은 열정만으로도 충분하다.
p135
서로를 향한 두 존재의 격렬한 사랑은 자나치게 민감한 수많은 끈으로 그들을 한데 묶어놓았었다. 가면을 쓴 신이 그 집에 들어와 모든 끈을
풀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우연히 내던져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씨를 뿌리지 않고는 그 무엇도 거둘 수 없는 법이다. 신은 언젠가
무시무시한 놀이를 주도하기 위해 찾아온다. 그 수개월 동안 다른 장소에 나타났던 전투의 신이 아니라, 초라한 부엌과 버려진 여인들의
신이......-p100
그 마을과 콩타 지방에 또다시 밤이 시작되었다. 사랑을 나누기에, 그리고 신도 모르게 해치워야 할 일을 하기에 적당한 밤이었다. 밤은
연인들과 불면증에 시달리는 철학자들,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범죄자 등 그 모든 신성한 무법자들의 피난처였다. 어머니가 될 처녀들이 앞치마 속에
배를 감춘 채 광장의 샘까지 찾아가는 모험을 감행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수치심도 사라지는 법. 이 책은 밤의 책이다. -p101
사랑이 시작된 뒤 처음으로 두 사람 모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좋지 않은 징조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열정이 식어가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다른 생각이 그들이 영혼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도 시간이 흐르면 사그라지고, 수면도 미미하지만
천천히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기에, 우리는 어느 날에야 문뜩 우리 자신이 모든 사람들로부터 멀리 고립된 채 벌거벗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르제의 행동이 그들로 하여금 주위를 둘러보게 만들었다. 이 세상에 그들 두 사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아이가 일깨워준
것이다. 그들은 강요에 못 이겨 그러듯 서글픈 심정으로 서로를 껴안았다. p136
드디어 가을이 왔고, 떨어지는 낙엽은 고통의 상처가 깊은 이 작은 육체에 격렬한 욕망을 심어놓았다. 소년은 침묵에 잠긴 집 안을
서성거렸다. 차가운 계단에 앉아 있기도 했다. 겨울비 내릴 때가 가까워지자 곰팡내가 나기 시작한 응접실을 배회하기도 했다. 두 손등을 열심히
문지르자 시체 냄새가 났다. 소년은 죽음을 생각했다.
밤 날씨가 꽤 차가웠지만 오토는 계속해서 찾아왔다. 저 위에서는 전쟁이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었으며, 두 연인은 어느 밤엔가는 영영
헤어져야만 하리라고 생각했다....... 테레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토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다음엔 누가 그를 대신할 것인가? 그녀가 두려운
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떠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는 남자를 곁에 둘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생각했다.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까? - p154~155
두 사람은 악수를 했다. 마지막 입맞춤 다음에는 그 어떤 입맞춤도 이어지지 말아야 하거늘, 도대체 왜 또 키스를 나눈단 말인가? 한없음,
끝없음과 같은 느낌을 갖는 것이야말로 사랑의 정수가 아니던가. -p167
오토는 그녀를 버려둔 채 서둘러 마을을 떠날 것이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마을에 남겨두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이 두 사람의 가슴에
깊은 고랑을 파놓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떠나리라. 보이지는 않지만 온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치유되지 못할 상처를 남겨놓았음을 모르는 채
떠나리라.....-p202
그녀는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 못했는데, 이제 그 남자는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음을 후회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p206
그나저나...
이렇게 들롱브르 부인의 욕망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아름답고 숭고하며 사랑에 가깝다 말하는 나, 위태로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