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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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어든 건, 순전히 개인적 취향(?)때문이었다.

사람이 너무 볼살이 없으면 왠지 저렴해 보인다. 특히, 남자 그것도 중년에 접어든 경우엔 더더욱...

그런데 이 남자는 왠지 한눈에 빠져들게 만드는 옆모습을 갖고 있다.

 

나의 취향을 제대로 자극한 이 사람은, 덴마크인으로 전직 무용수이자 배우였으며 노련한 선원이자 펜싱선수였다고 한다.

경험상 이처럼 다재다능한 사람이 쓴 작품은 성공 확률이 높은 편인데, 1992년도에 나온 이 책 역시 출간되자마자 타임지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서구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600페이지가 넘는 두툼한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고 시리다. 마치 그린란드를 뒤덮고 있는 눈과 얼음처럼...

 

 

스밀라 야스페르센.

그녀는 눈(雪)을 닮았다. 아니, 눈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덴마크인 아버지와 그린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눈처럼 차고 희다. 그리고 뜨겁다. 마치 감각을 마비시키는 얼음처럼....


 

슬픔을 표출하는 그녀의 방식은 눈(眼)이 아닌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마치 바이올린 선율처럼... 

 

나는 소파에 앉았다. 먼저 그날의 영상이 몰려온다.

나는 그냥 흘려 보낸다.

그 다음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몰려와 미묘한 우울과 가벼운 의기양양함 사이에서 진동한다.

나는 그도 역시 흘려보낸다. 그 다음에 평화가 온다.

내가 레코드를 올려놓았을 때 찾아온 것이다.

그 다음 나는 자리에 앉아서 운다.

어떤 특정한 물건이나 사람 때문에 우는 게 아니다.

내가 살아온 삶은 내가 나 자신을 위해서 창조해낸 것이었고 나는 내 인생이 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기돈 크레머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나는 운다.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p83 中-

 

 

이 책을 힘겹게(?) 다 읽은 후, 이 글을 쓰기 전 검색을 해봤더랬다. 그만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윗 문장이 가장  많이 인용되어 있었다.

낯설었지만(?), 이 문장만큼 스밀라라는 인물을 잘 표현한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인용한 문장들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펼쳐들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첫번째로 붙여 놓은 스티커 역시 정확하게 이 문장을 가리키고 있는게 아닌가.


 

그리고...

다음 단락을 통해서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이사야는 외로운 아이였고... 아이의 엄마는 무기력한 알콜중독자이며...

스밀라는 현대문명으로 상징되는 덴마크를 혐오하는, 딱 그만큼 그린란드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는 베냐를 이해하고 싶다. 지금 이 순간은 이전보다 더.

언제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내가 언제나 사물을 이해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언제나 이런 식은 아니라고 나는 혼잣말했다. 처음으로 덴마크에 왔을 때, 여러 현상을 경험했다. 덴마크인들의 소름끼치는 끔찍함이나 아름다움, 혹은 회색의 칙칙함 속에서. 그러나 그것들에 대해 설명해야 할 크나큰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이사야가 집에 올 때는, 때때로 자기 집에 먹을 것이 없을 때였다. 율리아네는 친구들과 식탁에 앉아 있었고, 담배와 웃음과 눈물과 무지막지하게 마셔대는 알코올은 있었지만 밖에 나가서 프렌치 프라이를 사올 5크로네는 없었다. 이사야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 애는 자기 엄마에게 소리친 적도 없었다. 삐친 적도 한번 없었다. 참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심하면서 내뻗은 손을 뿌리치고 자기 길을 갔다. 가능하면 다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때때로 수리공이 집에 있었고, 때로는 내가 있었다. 그 애는 나한테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서 한 시간 이상 거실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거의 어리석음에 가까울 정도로, 그린란드인다운 극단적인 예의를 유지하면서.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p329 中-

 

 

고소공포증을 갖고 있는 그린란드인 꼬마 남자 아이가 눈 덮힌 옥상에서 떨어져 추락사한다. 스밀라의 이웃이자 친구인, 이사야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시작된다.

 

이 모든 일은 한 아이가 지붕에서 떨어진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이 해결되기 이전에 절대 풀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야켈센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재확인을 받는 것이었다. 유럽인에게는 쉬운 설명이 필요하다. 그들은 언제나 모순적인 진실보다는 간단한 거짓말을 선호한다. -p455

 

나는 영웅이 아니다. 한 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을 뿐이다.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손에 내 집념을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p493

 

죽고 사는 문제가 갑자기 중요해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제 문제가 내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이상 이사야하고만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아니, 나하고만 관련된 일도 아니다. 아니 수리공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아니, 심지어 우리 사이에 있는 문제도 아니다. 뭔가 더 큰 것이다. 아마도 그건 사랑일지도 모른다. -p498

 

 


'아...!'

스밀라가 아이의 석연찮은 죽음의 이유를 찾아 나선 까닭은 다름 아닌 사랑때문이었구나...

 

분노도... 슬픔도...호기심도... 의무감도... 아닌, 순전히  사랑때문에... 인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그 사랑때문에...


 

이 문장을 읽고 나서, 독자인 나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작가 김연수의 '부탁'은 결코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입 맞춰달라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이유따위는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었다.  

 


 

 

추리소설인 이 책의 미덕은...

사건 추리에 있다기보다는 인물에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그렇지만 물론, 누구나 사랑에 압도될 수는 있다. 지난 몆 주간 나는 매일 밤 몇 분씩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나 자신에게 허락해주었다. (...)

나는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지나치게 명확하게 사물을 바라본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광기의 한 형태다. 증오, 냉담, 분노, 중독, 자살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간혹, 자주는 아니지만 때때로 나는 인생에서 사랑에 빠졌던 때를 떠올린다. 그 일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퇴어크라고 부르는 남자가 고급 선원 식당의 식탁 건너편에 앉아 있다. 이 만남이 10년 전에 이루어졌더라면 나는 그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때때로 한 사람의 카리스마가 너무 강렬하여 우리의 허울을 뚫고, 본질적인 편견과 억압을 뚫고, 내장에 곧바로 파고들 때가 있다. 5분 전, 내 심장 주위에 조임쇠가 걸리더니 이제 점점 더 죄어오고 있다. 이런 감정의 동요는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내몸의 반응으로 열이 오르고 있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찌르는 듯한 두통을 유발하고 있다.

10년 전이라면 이런 두통은 내 입을 그의 입에 갖다 누르고 그가 자기 통제력을 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그 현상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 찬 채로 바라보지만 이것은 단지 수명이 짧고 치명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p441~442 中-

 


나는, 우리는 지금 인간이 사랑에 대해 써내려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문장을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이처럼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문장 속을 지나왔는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한가운데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른다.'라는 말처럼, 나는 가장 멋진 여성을 만나고 왔으면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저 어서 빨리 이사야가 죽은 이유만 알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어리석게도...

 

 

이 단락을 인용하면서, 왠지 이 책만큼은 언젠가 꼭 다시 읽게 될 것만 같은 깊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퇴어크의 냉정함은 표면뿐이었다. 그 뒤에는 열정이 있었다. 갑자기 돌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는 내게도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갑자기 운석은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세계를 향한 서구 과학의 태도의 결정체가 되었다. 계산, 증오, 희망, 공포, 모든 것을 측정하려는 시도. 그리고 살아 있는 생물에 대한 어떤 공감보다도 더 강렬한 것. 바로 돈에 대한 욕망.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p609 中-

 

 

한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추악한 본성과 이어진다.

이사야는 진실때문에 죽었다. 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 진실을 알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진실과 대면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그냥 적당한 수준의 용기가 아니라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인간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용기를 갖출 수 있을까? 

도대체 용기란 뭘까?

사랑보다 강한 걸까? 

아니, 어쩌면 사랑 그 자체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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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즈가 울부짖는 밤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2
오사카 고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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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즐겨 찾는 블로거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모즈가 울부짖는 밤』

1986년도에 쓰여진 일본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로, 작가는 이 작품을 시작으로 경찰 내부의 음모를 다룬 시리즈물을 4편이나 연이어 발표했다고 한다. 

 

첫장면부터 죽어버리는 킬러와 킬러를 몰래 뒤쫒던 경찰...

그리고...

도심 한복판에서 극좌파의 폭탄테러로 용의자(가케히 슌조)와 한명의 여인(구라키 다마에)이 사망한다.

 

이야기는 이 두 건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이 두개의 사건을 하나로 교합하려고 시도하지만 내가 보기엔 억지로 꿰어 맞춘 기색이 역력하다. 그냥 킬러의 이야기 한가지만으로 스토리를 라인을 짰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 

같은 조직원에게 죽임을 당한 킬러는 운좋게(?) 살아나지만 그만 기억력을 잃고 만다. 그리고 경찰과 킬러가 속해 있던 우익폭력단은 킬러가 갖고 있는 사진파일을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작가와의 두뇌싸움은 어떻게 절벽에서 떨어진 킬러가 살아났느냐?와 사진파일이 갖고 있는 비밀이라 하겠다. 근데, 여기에는 트릭이 있다. 살아난 킬러는 킬러의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은 남자 쌍둥이 동생이었던 것이다. 그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꾸민 후 죽은 형의 흉내(?)을 내면서,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이다. 근데, 이 남자가 킬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설정이 다소 황당하다. 어린 시절 친아버지로부터 여자로 취급당하면서 성적 학대까지 받아서 잔인한 살인자의 길로 들어섰고, 또한 동생을 불쌍하게 여긴 형은 이를 방조했다니...

 

 

한편,

경찰의 음모라는 것 역시 조직 내에서 자신이 모시는 상관을 중심으로 뭉치거나 각자 자신의 이익이나 복수를 위해서 서로 견제하고 이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정의의 상징으로 나오는 구라키 나오타케는 폭탄테러로 숨진 아내가 자신의 상사인 무로이겐과 결혼 전부터 불륜관계였다는 걸 알고는 경찰 조직에 저항하며...

공안경찰인 아케보시 미키 그리고 오스기 료타 역시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일개 '내부고발자'에 불과할 뿐이고...

킬러가 갖고 있던 사진 파일이라는 것 역시 어이없게도(?) 불륜 관계를 확인하는 사진일 따름이었다.

 

여기에 듣도 보도 못한 사르도니아공화국의 에체베리아대통령 암살 계획이 나오는가 하면,

무로이겐 공안부장의 사위가 에체베리아대통령에게 처형되었다는 것과 구라키 부부의 죽은 어린 딸이 실은 무로이겐과의 불륜 관계에서 태어났다는 등등...

 

'막장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너무 많이 등장해서 진부하다 못해 살짝 짜증이 일었다.  1986년이면 20년도 훨씬 더 전이니, 그 당시에는 이런 소재들이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추리소설도 고전명작 아니면 최신걸작 위주로 엄선해서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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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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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그의 책 <단속사회>를 읽은 바 있다. 물론, <단속사회>는 한병철 교수의 <피로사회>에 빚진 바 크지만...

 

암튼, 언제부턴지는 모르겠으나 '청춘'에 발목 붙잡혀 있는 나로서는, 책 제목에 '청춘'이라는 두 글자만 들어가면 일단 읽고 보는 증상을 앓고 있다. 이 책도 신중하게 취사 선택되었다기보다는 아무 생각없이(?) 읽은 책으로, 2010년도에 나왔으니 벌써 5년차 되시겠다. 사회과학서로 분류될만한 책이니 5년이면 상당히 긴 시간이다. 어쩌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이제는 더 이상 현실과 부합되지 않을 위험성(?)도 크다. 그만큼 우리사회는 빠르게 움직인다. 겉모습의 변화는 말할 것도 없고 속모습까지 빠른 속도로 변해서 내가 미처 '변화'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사라져간 '변화'들도 참 많다.

 

이 책은 저자가 두 곳의 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 강의를 하면서 학생들과 소통한 '결과물'이다. 수강생들이 제출한 리포트, 수업 중 토론한 내용들을 정리한 보고서와 영화를 보고 제출한 영화평 및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답안지 등등...

교양필수인 대형 강의로 계단식 강의실에 수백명이 앉아 있는 그런 모습이 한눈에 펼쳐졌다. 겉핥기식 수업. 교수도 학생도 모두 '삽질'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시간과 공간들...

 

'어? 앗!'

그런데 뜻밖에도 이 책은 내가 상상했던 이런 강의실의 이미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십대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즉흥적이며...지극히 감상적이고... 소비지향적일 뿐만 아니라...글도 제대로 못읽고 못쓰며... 자신의 생각일랑은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한마디로 한심한 존재라는... 나도 모르게 품고 있었던 내 안의 무의식을 스스로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단 한방에 깨트려주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에게 이 책은 앞으로 오랫동안 고마운 책으로 기억될 것 같다. 

특히, 함께 한다는 건 즉 공동체란 동일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우리는 그동안 해답들만 찾아오지 않았던가...?

이 사람이 해답을 줄것 같으면 이 사람을 따라가고... 저 사람이 해답을 줄 것 같으면 저 사람을 쫓고... 이 말이 옳은가? 싶다가고, 저 말이 더 맞는 것 같고...

결국은 '결론 없음이 결론'이 되는, 고민만 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는 마치 '최대 다수의 선택이 최선'이라는 착각 속에서 '평범이야말로 평온'이라는 인생관을 신봉해오지 않았던가.

남들 다 가니까 학교에 가고... 남들 다 하니까 취업을 하고...남들 다 하니까 결혼을 하고... 역시, 남들 다 하니까 아이를 낳고... 그리고, 남들처럼 자식을 키워서 꼭 나, 너 그리고 우리같은 사람을 복제해 내지 않았던가.

 

질문을 공유한다는 건,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며 해답 역시 하나일 수 없음을 전제로 한다.  

어떤 삶이 바른 삶인가? 라는 동일한 질문에 각기 다른 '답'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답'만'을 고수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답'도' 인정해 주는 것. 공동체란 이런 것이다. 다른 질문에 같은 결론과 같은 해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질문에 각기 다른 해답을 용인하고 인정해 주는 것 말이다.

 

그렇다면, 청춘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입장은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걸까?

질문을 공유하는 쪽일까? 아니면 해답을 공유하는 쪽일까? 

 

어째서 이십대 청춘은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그들도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데...

 

어째서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식이 부모와 똑같았다면 인류는 진화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20대는 4,50대의 20대 시절과 같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각주구검의 고사가 떠오른다. 배가 움직인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해안가에 배가 당도하자마자 뱃전에 표기해둔 곳으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빠뜨린 검을 주우러 들어가는 어리석음 말이다. 기성세대가 20대에 자신이 가졌던 잣대로 현재의 20대를 판단하려는 건 각주구검과 같은 우(愚)를 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 까닭은 저자가 지적한 바대로, 질문이 아닌 해답을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86들이 탈정치화되었다고 비난하는 20대, 그들은 분명 소위 '잉여'의 시대에 진입한 첫번째 세대다. 고속 경제성장을 하던 시대에 인간은 노동의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가 미덕인 세상이 도래하자 인간은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재가 인정되고 가치를 부여받는 존재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그리고 이 사회는 그들(20대)에게 노동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한다. 쉽게 말해, 노동(일/취업)을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의미다.

대학도 못 나온 내가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대학 나온 넌 최소한 나보다는 더 잘 살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것들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청춘은 할 말이 없어진다.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청춘의 열정이 삽질이 될 수 밖에 없는 매카니즘이 작동한다. 

저자의 지적처럼 대학진학률이 80%를 넘고 안정적인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청춘은 자신이 잉여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넘어 이미 하루하루의 삶에서 자신들이 잉여로 만들어지고 있음을 경험하며 자학한다.

 

이들에겐 공부도 취업도 심지어 사랑도 허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게 다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이런 사회구조를 바꾸기위해서라도 청년들은 당장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려온다. 그럼, 어디 한번 '톡' 까놓고 말해보자. 수 천년 인류 역사상 정치가 세상을 올바르게 바꾼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혁명?

누굴 위한 혁명인가?

프랑스 파리대혁명은 나폴레옹이라는 전쟁광을 불러왔고, 중국의 신해혁명은 마오쩌둥이라는 독재자를 탄생시켰으며, 우리나라의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어떤가? 모두 군사 쿠데타와 독재자들을 지도자로 모셔오지 않았는가?

 

혁명의 깃발 아래 모이느니 차라리 홍대 클럽으로 가는 게 훨씬 더 청춘답고... 훨씬 더 건전하지 않을까?

정치에 냉소적인 20대는 더 이상 정치가, 세상을 자신이 처한 입장과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걸 일찌감치 깨우친 셈이다.

 

어떤 가치를 내세우더라도 이미 정치는 쇼이고 선동이라는 점이다. 이는 정치의 본질에 대한 불신과 냉소이다. 이들은 정치가 우리의 삶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희망을 약속하는 그 모든 정치적 언어를 불신한다. 이들은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만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이 안다. 너무 잘 안다. 너무 많이 알고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냉소한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 없다.

-엄기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p85-

 

나도 안다.

정치가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제도가 그나마 인류가 발견해낸 가장 착한(?) 제도라는 데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현재의 민주 제도에 입각한 정치적 활동, 소위' 투표'를 중요하게 생각했고 또 청춘들에게 이 점을 강조한 기성세대 중 한명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런데 청춘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관심과 투표불참으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한다는 걸... 

모든 이들의 의사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한다면, 누가 더 비민주적인 걸까? 당연히 내쪽이다.

 

 

연애와 사랑 그리고 가족에 대한 청춘의 생각들 역시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부모의 등골이나 빼먹고 보살핌을 받기만 할뿐 보답할 줄 모르는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

 

사랑이 '무너짐'이라면 무너져야 온당치 않은가.

그러나 이 시대에 무너짐이란 곧 '찌찔함'이다. 사랑은 자존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자아의 무너짐이 아니라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존심을 어떻게해서든 추스러야 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쿨함은 이 시대 젊은이에게 도덕이자 미학이다. 쿨하지 못하면 최소한 쿨한 척이라도 해야한다. 이들은 오늘을 즐기고 실연과 같은 내일의 불상사에 쿨해지려고 한다. 실연은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닌, 그저 운명이다. -p132

 

실연 또한 일대 사건이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사람을 실연의 바로 그 순간부터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대부분의 실연은 가슴이 무너지는 경험이다. (...)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실연의 상실을 견뎌내는 법까지, 이것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간다. 사랑과 실연이 성장의 드라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렇기에 상처는 인간의 성장에서 필수적이다. 상처는 인간에게 삶은 감수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을 근원적으로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삶은 '그래서'로 이어지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연결되는 윤리의 드라마임을 배우게 된다. -149

 

 

가족이 가족답지 않게 변해버린 건, 가족을 가족답게 만들기 위해선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을 가족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란 소위 '감정노동'이라고 불리며 과거엔 주로 '엄마'의 몫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가족 중 아무도 감정노동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면 보살핌을 받고 싶어 할 뿐, 집에서조차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마음은 있으나 너무 피곤해서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피곤하기 때문에... 밖에서 너무 시달리고 힘이 들어서...

 

인간은 특별한 사이일수록 용기를 내기가 힘들다. 오히려 외부사람, 이웃사람에게 친절하기가 더 쉽다. 왜나하면 그들과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닌, 가벼운 관계이기 때문이다.

가족, 너무 편하다. 그런데 너무 서로 모른다. 서로 가장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그 가장 많이 알 것 같은 만큼 가장 많이 모르는 것이 가족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서로 가장 오래 함께 있지만 가장 모르는, 가장 소중한 사람을 꼽으라면 가족들을 많이 꼽는데 왜 가장 소중한 존재이면서 서로 모르는 걸까? 왜 가장 중요한데 가장 무관심한 존재가 되는 걸까? -p132

 

물론, 우린 알고 있다.

부유한 중산층일수록 가족애가 살아있다는 걸... 안락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가사노동은 돈주고 타인의 노동을 사면 되고, 가족들이 직접 쏟지 않으면 안되는 감정노동이라는 것 역시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족만 진짜 '가족'다울 수 있는 것이다.

 

또 다시 돈 타령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가 하는 거의 대부분의 고민거리가 그러하듯 돈은 언제 어디서나 빠지지 않는다. 

시대가 이러할진대, 가족이 가족답지 못해진 책임을 가족과 가정에게만 물을 수 있겠는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건 신념도 지식도 아닌 바로 돈이었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 주진 않지만 돈이 없으면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돈은 행복이 아닌 자유다. 

우리는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진 않지만 돈이 없다면 삶이 고립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이상이다. 그것은 자유의 박탈이고 존재의 박탈이다.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좇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p199~201

 

 

어느덧 나는, 나도 모르게 한때의 내가 온몸으로 거부했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받아들인 기성세대가 되었다. 청춘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연민도 동정도 아닌, 말 그대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미묘함이다. 어쩌면, 청춘이 아니면서 청춘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넌센스'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의 머리로 생각하고...

청춘의 언어로 읽고 말하며...

청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청춘의 심장으로 살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청춘'이야말로 죽지 않은 정신, 바로 '영혼'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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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친 김에 마루야마 겐지의 또 다른 수필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을 읽었다.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가 이십대 청춘을 위한 책이라면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는 4,50대 그중에서도 퇴직한 이들을 위한 책이라 하겠다. 단순히 귀농을 준비하고 있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라고만 생각하고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가 한방 제대로 먹었다. 

 

마루야마 겐지는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봤고... 또 누구에게는 구체적인 미래이자... 암담한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마약과 같은 '귀농(歸農) 혹은 귀촌(歸村)'의 이유를 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싶더니만, 처음부터 오금이 저릴 정도로 핵심을 파고든다. 역시, 이름만으로도 관록이 느껴지는 작가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당신은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당신은 그동안 부모에 의존하고, 학력에 의존하고, 직장에 의존하고, 사회에 의존하고, 국가에 의존하고, 가정에 의존하고, 술에 의존하고, 경제적 번영의 시대에 의존하면서 이럭저럭 수십 년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홀로 설 기회를 그때마다 잃고, 그저 공부나 일을 하면서 겪은 혹독함 정도를 인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실 당신은 자신에게서,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또 도피해 온 것은 아닐까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몸으로 익혀 두지 않으면 안 될 조건을 그저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채워 둔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직장이라는 후원자를 빼앗긴 당신은 자신의 판단만을 강요받는 진정한 어른의 처지로 내몰리자 그런 어린애 같은, 너무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발상에 휘둘리고 만 것은 아닐까요.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7~18 中-

 

 

 

'당신은 홀로서기를 한 사람입니까?'

이 얼마나 무섭도록 정확한 질문이란 말인가.


老작가는 육십 평생을 살아온 기껏해야 자신보다 10살 정도 더 젊을 뿐인 노익장들을 대상으로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문체도 존칭체이고 활자도 큼지막한, 고작 200여 페이지 남짓한 수필집일 뿐이거늘...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것처럼 시작부터 숨통이 조여온다.

 

 

아름답던 자연은 얼마든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돌변할 수 있고, 순박하던 마을 주민들은 예의가 없고 고집스러울 뿐만 아니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주민을 괴롭힌다.


 

시골에서는 서민기질을 실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 노골적인 모습에 기겁을 하고 문화적 충격도 받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강하고 힘있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때론 신과 부처 같은 것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밖에 모릅니다. 당신은 이상하리만큼 보수적이고 윗사람게에 굽실거리는 이들에 둘러싸였을 때 놀라 심지어 버럭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어떤 사람들을 구성하는 특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연해질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50 中-

 


이처럼 시골사람들이 도시인과는 사뭇 다른 근성을 갖게 된 배경을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랜 세월 혹독한 자연 환경과 싸우면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강자에게 복종해야한다는 농경민족 특유의 속성이 강하게 박혀있기 때문이라고....

특히, 시골사람들을 정의할 때 곧잘 동원되곤 하는 '순박하다'거나 '소박하다'는 표현은 그 자체로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더 나아가 본능의 힘에 따른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그리고 또 다른 측면으로는 도시에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만 농촌에 남았기 때문일 거라고...

 

 

한편, 일본이나 한국이나 농촌은 주로 고령자들만 남아 있다. 즉, 젊은 사람들이 농촌에 남지 않으려 한다. 인생의 후반부를 농촌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왜 이들은 농촌에 남지 않는걸까? 설령 젊어서 도회지로 나갔더라도 은퇴 이후엔 그 좋은(?) 고향으로 되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귀촌이나 귀농을 하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시골 출신이 아니거나 시골에서 태어났더라도 농촌에서의 삶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걸까?


그건, 그만큼 농촌 생활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사를 짓지 않고 삶의 터전만 농촌으로 옮기는 귀촌(歸村) 역시 생각만큼 쉽지 않다.

솔직히 도회인들이 그리는 귀촌생활이란 도시의 편리함과 생활 습관이 보장되는 별장 생활이지 않을까.

물론, 별장을 소유하고 관리할 만큼 건강과 재산을 갖고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마는...


 

 

작가는 이 밖에도 현지인들만 이주자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같은 이주자들 중에도 흑심을 품고 시골로 흘러들어온 사람들도 있으니 주의를 당부한다. 이들은 주로 퇴직금 등 목돈을 갖고 있는 은퇴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는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 교주를 사칭하며 돈 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드는 범죄자일 확률이 크다고 한다.


 

마루야마 겐지는 이와 같은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그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몇가지 특징들까지 짚어준다.


 

자연이 너무 좋아서,

자연 속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멸종 직전에 있는 야생 동식물을 지켜 주고 싶어서,

원시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지방의 토착 문화나 예술을 세계로 알리고 싶어서,

사랑의 상처를 입고 말아서,

질문한 것도 아닌데 상대편에서 이런 이유를 늘어놓는다면 일단 그 사람은 상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

또한 이들에게는 공통된 특징이 아주 많습니다.

청산유수 같은 어조, 풍부한 표정, 한없이 밝고 그늘이 없는 웃음 띤 얼굴, 아무리 시시껄렁한 자랑이더라도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이따금 맞장구도 쳐주는 등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자세, 너무나 드라마틱한 경력, 강한 자기 도취,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36~137 中-

 


도시와 달리 시골은 문단속 등 방범과 치안 의식 및 시스템이 부족하거나 열악한데다가 생활비가 저렴하다는 등의 이유로 경제범들이 흘러들어 숨을 공산이 크다.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와는 달리 집과 집 사이가 멀어서 강력 범죄가 의외로 손쉽게 일어날 가능성 또한 크다. 그리고 목가적인 한낮의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해만 지면 펼쳐지는 칠흑같은 어둠이 주는 공포감은 작가의 표현대로 수십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는, 그런 근원적이고도 원초적인 두려움일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다 극복해내고 시골에 터를 잡은 은퇴자일지라도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나이를 먹게 되면서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일이 늘어나고...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을만큼 기력이 쇠약해질 것이며... 부부 중 어느 한명이 먼저 타계하면서 반드시 홀로 남겨지는 노인네가 생기게 마련인데... 이에 대한 대책은 커녕 당연한 이와 같은 기본적인 사실조차 고려하지 않은  채, 무작정 시골로 내려오려한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참으로 좋은 지적이라 하겠다.


 

이밖에도 작가는 노화와 죽음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한다. 가장 가까운 자연인 자신의 몸부터 먼저 돌봄으로써 말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연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감정이 행하는 대로, 본능이 행하는 대로 사는 것이라고 오해하거나 자신의 형편에 맞는 해석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자연이라는 말을 남발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져든 자신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자연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홀로서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


 

자연과 자연속에 사는 동식물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완벽한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어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장 친근하고 중요한 자연은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 자연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자연을 지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


 

사회적 지위를 만족시켰는지 아닌지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르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진정한 패배자란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거나 다스릴 방향을 잡지 못한 사람을 이를 때 써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지성과 이성에 부합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 결코 그 반대는 아닙니다. 동물로 태어나 동물인 채로 일생을 보낸 인간이야말로 진짜 패배자입니다. 패배자인 당신을 자연이 환영해 줄 리는 절대 없습니다. 오만한 신념에 젖어 자연에 깊숙이 헤치고 들어온 당신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릴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45~148 中 부분 발췌-

 


그저 단순히 귀농이나 귀촌에 대한 환상을 통해 위안이나 받고, 구체적인 정보나 얻을 요량이었는데...  책은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되묻는 진지한 철학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변해버렸다.

 

한참이나 지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다음과 같은 문장이 펼쳐져 있었다.


 

당신은 인간입니다. 본능을 거스르려면 그럴 수 있는,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분명 원숭이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날, 상식의 끈이 뚝 끊어져 버립니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요. 일 자체나 대인관계에서 오는 긴장을 느낄 필요가 없어지고 시간에 구속당하지 않게 되어 마음이 완전히 풀어졌기 때문일까요. 분명히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원인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홀로서기를 한 성인(남성)이 되지 못했고 되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어린애의 혼을 가진 채 60년을 지내왔기 때문입니다. 명령을 받아야만 움직이고 자신의 의지로는 움직일 수 없는 목각 인형, 타율적인 빈껍데기 인생밖에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당신은 다시금 어린애 시절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47~156 中 발췌 -

 


'뭐, 이 정도 가지고....'

살짝 오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나도 인생 살만큼 살았는데.... 뭘...' 하는 자만심은, 작가가 칠십 평생 살아오면서 자기 자신에게 수십번 속삭였을 다음 문장들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을 진정으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지, 결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진심으로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는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다. 정도는 달라도 그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미더워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을 약한사람으로 단정해 자기 외의 사람에게 의지하려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혹 신과 부처 같은 존재가 실제로 있더라도 그것은 당신 자신을 가리키는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닐 것이다. 신이나 악마가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 자신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요컨대 어느 쪽을 택할지는 당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에 흔들리지 않고 본능에 빠지지 않으며 의지력을 성실히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신이며 부처이고, 그 반대의 힘은 악마이며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을 것이다. 이견을 내놓는다면 그것이 그가 사기꾼이나 악당의 무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다.


-마루야마 겐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p190~191 中-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두 눈이 나도 모르게 감겼다.

시골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던 마루야마 겐지...

그가 진심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은, 다름 아닌 '인생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였다...


 

 

진정한 빛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납니다.

진정한 감동은 현실의 고단함 속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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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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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난 이 남자에 빠져 있다.

이름하여 마루야마 겐지...

칠순을 훌쩍 넘긴, 일본의 老작가다.


 

이 작가에 대해서 나는 이십대 시절 그의 첫번째 소설작품이자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여름의 흐름>을 인상적으로 읽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작품은 감옥에서 사형을 집형하는 사형집행자 이야기였던 것 같고... 


그의 적잖은 작품들이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어느 시인(故 이문구시인이 아닌가 싶지만 정확하진 않다.)은 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겐지에 울다'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는 풍문도 꽤 널리 퍼져 있다.


 

소설을 시(詩)처럼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는 그의 작품은 읽기가 참 어렵다.

그런 그가 요즘 이웃나라 한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는 모양이다. 얼마전 TV의 심야 책소개 프로그램에서 그의 수필집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작품이 소개될 정도로...


이와 더불어서 책 제목만큼이나 저돌적인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라는 그의 또 다른 수필집이 시선을 끌었다. 사실은, 작년 가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평소 이용하는 도서관에는 소장되어 있지 않아 살짝 포기하고 있던 차에 이번엔 구입해서라도 읽겠다는 각오(?)로 수소문을 했고 마침내 읽고 말았다. 역시, 발품을 조금만 더 팔면 안되는 게 없거늘.... 늘, 그놈의 게으름과 자포자기에 발목이 붙잡혀 주저앉고 마는 게 문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청춘들에게 '천기누설'과도 같은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김어준의 <건투를 빈다>가 한국 사회에 눈높이를 맞춘 '청춘을 향한 고함'이라고 한다면,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는 일본 상황에 맞춘 일본 '젊은이를 위한 외침'이라 하겠다. 


 

동물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자식에게 부양을 받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사실 노후 보장을 위한 겉포장에 불과하다는 일갈은 내 몸과 마음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부모란 이렇듯 애매모호한 존재다.

부모의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믿는 것은 부모 자신뿐이다. 인간이 아닌 동물들이 새끼에게 보이는 대가성 없는 사랑의 정반대 지점에 있는 이기적인 사랑. 안타깝게도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부모가 보이는 사랑의 진실이다. 오로지 자식을 어엿한 성인으로 키우는 것만이 목적인 부모는 너무도 적다. 더 나아가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 힘으로 살아가라고 진지하게 가르치고, 자신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 네 인생에만 집중하라고 충고하고 또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부모는 더욱 적다. 부모의 희생물로 자신의 인생을 망치는 자식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 못해 자기 부모와 똑같은 부모가 되고 마는 자식은 또 얼마나 많은가.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20-

 

 


이 땅의 부모라면...? 특히, 자식을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 부모라면... ? 깊은 밤 홀로 깨어있을 때, 한번쯤은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왜 자식을 낳았는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정말 자식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를 위한 것인가?'



 

겐지는 인생의 성인식은 '가출'로 시작해야 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둥, 너 하나만 보고 살아왔다는 둥.... 하는 부모의 만류와 땡전 한푼 없는 자신의 현실적 상황에 발목이 붙잡힌다면 이런 청춘은 영원히 독립적인 자유인이 될 수 없음을 명심하라는 준엄한 가르침과 함께 말이다. 아니 오히려 한발 더 나아가 '집 나가면 개고생'하기 때문에 집을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참으로 정곡을 찌르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다 큰 자식을 집에 붙잡아 두려는 건, 부모 뜻대로 조정하기 위함이고...

다 큰 자식이 스스로 부모집에 눌러앉으려는 건, 집 나가 개고생하지 않기 위함이고...

서로 이와 같은 계산이 맞아 떨어져 불필요한 동거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이다. 



 

 

한편, 국가와 회사에 대한 겐지의 관점 역시 두 무릎을 치게 만든다.


 

국민에게 이 세상이 사랑과 친절로 가득하다는 착각과 솜사탕 같은 가치관을 심은 장본인은 결국 탐욕스러운 자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는, 국가라는 이름의 한 조직이다. 애당초 국가를 전적으로 책임지고, 국가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고매한 정신과 능력의 소유자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쩌면 존재할지 모른다는 환상조차 단 한순간도 품지 마라.  나라를 통치하는 자들은 국민이 국가의 정체를 단박에 꿰뚫어볼 만큼 현명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것이 본심이다. 그런가 하면, 너무 어리석어 평범한 일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인간이어도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즉, 그들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의 어리석음과 노동의 정신에 반하지 않을 만큼의 현명함을 지닌 어중간한 국민을 이상적으로 여긴다. 또 그렇게 되기를 획책하면서 그 방침에 따라 세금을 쓴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60~71-


 

고용주의 목적은 고용인을 만족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에 있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사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는 인사의 당연한 철칙이 올바르게 지켜지고 있는 직장은 극히 드물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인의 잠재 능력을 간파하는 안목을 지닌 상사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능력 있는 부하에게 두려움을 느껴, 즉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까 봐 겁을 먹고 질겁해 부하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을 확률이 훨씬 크다. 그런 세계다. 직장상사에게 부하란, 출세의 도구일 뿐이다. 노동자라는 호칭에 속아서는 안된다. 그 실질적인 처지는 바로 '노예'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99~104 中-

 

 


국가와 회사가 이렇다면 종교는 또 어떨까...?

상처입은 마음의 피난처가 되어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줄... 그런 자비심 가득한 신을 만날 수 있을까?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은 신이다.' 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역시 이 점을 거듭 역설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나약함과 교활함에서 신이라는 환상이 태어났노라'고...



 

어이가 없고... 억울하고... 심지어 화가 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자꾸 고개 돌려 외면해봤자 자신의 모습만 더 초라해질 뿐이다.

인간 역시 자연계의 다른 생명체처럼 우연에 의해 이 땅에 왔고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는 것 뿐이다. 애당초 거창한 신의 부름이나 의지 따위는 없었다. 

사실, 우린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째서 나라에 애국하고 회사에 충성을 바치며 신을 찾아 나서는 걸까?


 

인간은 왜 영웅과 지배자와 강자를 원하는가.

인간은 모두 지배받고 싶어하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실천으로 살아가기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고통을 누군가 대신 없애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61-

 

 


신을 모르는 철없는 어린 시절엔 부모에게 의지한다. 아이에겐 부모야말로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다. 어른이 되어서도 가급적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최대한 늦춘다. 적당한 복종과 반항 그리고 부모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이게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집(부모)을 떠나 세상밖으로 나와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부모를 대신하여 의지할 대상을 물색한다. 독재자라도 사이비 종교인이라도 상관없다. 나의 본질을 직시할 필요없이 삶의 안락함만 제공해준다면 기꺼이 영혼을 내어준다. 자유라는 이름의 영혼을....


 

일찌기 나는 독재자와 사이비 종교를 이끄는 리더가 아닌, 그들 주위에 모여있는 일련의 사람들의 정신 세계가 참으로 궁금했다. 그들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떠받들고 있는 존재가 어리석고 무능하다는 걸 진짜 모르는 걸까? 아니다. 그들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 구호와 몸짓으로 또 다른 선량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까닭은 자신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쁜 지도자 못지 않게 소위 추종하고 옹호하는 세력과 가담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나쁜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들때문에 악이 유지, 확대된다는 점에 비춰볼 때 더 악랄하다고도 볼 수 있다. 



 

 

자, 그럼 이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만 할까?


 

인간다움이란 지성쪽에 몸을 두는 것이다. 이는 감정과 본능에 충실한 삶과는 정반대의 삶을 의미한다. 감정과 본능에 따라 사는 것은, 요컨대 동물적인 삶의 방식이다. 동물다운 것을 인간답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p80~81


 

불안과 주저와 고뇌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한 그런 것들에서 헤어날 수 없고, 헤어나려 몸부림 칠 필요도 없다. 살아있으면서 절대적인 안녕을 얻으려 한다면, 살아 있되 삶을 내던진 것이나 다름 없다. -p127


 

직관(감각)에만 의지할 뿐 생각하기를 포기한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셈이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아주 당연한 자각조차 할 수 없게 된다. 또 세상과 떨어져 있고, 진심이 변치 않는 성실하고 훌륭한 인물과 만날 수 없다. 따라서 경청할 가치가 있고, 생각하며 살도록 도와주며, 유익하고 위엄에 찬 말과도 조우할 일이 없다. -p196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마루야마 겐지의 생각은 '애절한 사랑 따윈 없다.'라는 단 한마디로 귀결된다.

국물도 건더기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다...


 

솔직히 말해서, 연애가 연애답게 느껴지는 것은 고작해야 서른살까지다. 그 이상이 되면 이미 연애와는 다른 것이 되고 만다. 물론 당사자의 생각은 다르다.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사랑이라고 확신하고 자부심까지 느끼기도 하지만,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저 추잡하기만 한,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돌리고 싶어질 만큼 끔찍한 교미에 불과하다고 냉소할 뿐이다. 본인은 그런 상황에 만족하니 제삼자가 뭐라 말한들 소용없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작 그런 일이 아니면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없는 것인가.

그 나이쯤 되면 그게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사람이 그렇게까지 추락하다니...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일자리를 잃어 가면서까지 해야 할 일인가.

그러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아도 좋지 않았는가.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p165~166 中-

 

 


이제, 알겠는가...?


 

인생이 무엇인지...?

또, 인간이란 무엇인지...?


 

 

이 책에는 마루야마 겐지 선생만큼 나이를 먹지 않아도 불혹만 되면 누구나 깨닫게 되는 진실이 담겨 있다. 

다만, 선생과 우리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진실을 선택한 반면 우리는 침묵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왜냐고...?

그게 나의 안위에 편리하니까... 그래야 젊은 시절의 나처럼 어리석은 젊은이들이 더 이상 젊지 않은 나를,  떠받들고... 보필하면서... 자각도 하지 못한 채, 젊음을... 인생을... 탕진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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