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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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다.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가장 많이 팔렸다는『파이 이야기』를 나는 어느 서평가의 빼어난 문장 속에서 만났다. 물론, 이안 감독에 의해 2013년  『Life of Pi』로 영화화되었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었다. 영화는 어떻게 해서든 꼭 찾아보기로 마음 먹었다.

 

화자는 총 세명이다.

하나는 작가 즉 얀 마텔이고, 또 다른 화자는 피신 몰리토 파텔 즉 파이이고, 다른 하나는 침춤호 침몰 사건을 조사했던 오카모토씨다.

 

작가인 화자(얀 마텔)은 두 편의 전작을 실패한 후, 훌쩍 인도로 떠난다. 그리고 폰디체리라는 곳의 한 카페에서 '내 이야기를 믿는다면 당신은 신을 믿게 될거요'라고 말하는 노신사(프란시스 아디루바사미)를 통해 무려 227일간 벵골 호랑이와 함께 구명정에 있다가 살아 돌아온 소년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그리고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는 그 소년을 찾아간다. 소년의 이름은 파신 몰리토 파텔, 어릴 적엔 주로 '파이'로 불렸다.

 

그리고...

그로부터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작가는 작품을 쓰기 위해 당시 침춤호 침몰 사건을 조사했던 오카모토씨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마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형식처럼 보이는 이 부분 역시 작품의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작가 역시 처음부터 자신이 들려준 '파이 이야기'를 독자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신빙성을 높이고 작품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서 이와 같은 구조를 선택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소설이란 꾸며진 이야기라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파이 이야기만큼은 실제로 일어났었던 사건일지도 모른다는 환상에 자주 빠지곤 한다.

 

이 작품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고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믿을 수 밖에 없는 아니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

 

파신 몰리토 파텔은 인도 폰디체리에서 아버지(산토스 파텔)와 어머니 그리고 세살 위인 형 라비와 살고 있었다. 그가 열 다섯살 되던 해에 동물원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캐나다로의 이민을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파나마 선적의 일본 화물선 '침춤호'에 오른다. 그날은 달력으로 1977년 6월21일이었다.

 

그로부터 열 이틀 후, 태평양을 건너가던 침춤호는 침몰하고 만다. 날씨가 나빴던 것도 아니고 충돌 등 불의의 사고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건조된지 29년이나 됐고 구조변경을 한 침춤호가 갖고 있던 구조적인 문제와 몇몇 불운의 결합이 불러온 사고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선원들을 포함하여 침춤호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가장 어렸을 파이에게는 신이 함께 했다는 점이다. 하나도 아닌 여럿의 신들이...

  

구명정에 올라탄 파이는 가까운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세살배기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발견하고는 구명튜브를 던져 파커가 구명정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밖에도 구명정에는 배에서 뛰어내릴 때 다리를 심하게 다친 얼룩말과 하이에나 그리고 1톤 바나나 더미에 앉아 있던 암컷 오랑우탄이 마지막으로 승선한다.

 

세로 폭이 기껏해야 2~3미터 가로 길이는 7~8미터에 불과한 구명정 안에서도 약육강식의 법칙은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초식동물이자 다리까지 다친 얼룩말이 제일 먼저 하이에나에게 잡아 먹히고... 잡식성인 오랑우탄이 하이에나에게 저항해보지만 결국 날카로운 이빨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리고 하이에나는 벵골 호랑이의 한끼 식사로 얌전히 제공되고...

 

이제 구명정에는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소년 파이만 남는다.

 

파이에게는 몇 십일을 버틸 수 있는 음식과 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낚시도구와 태양열 증류기까지 있었지만 문제는 파커였다. 파커를 피해 구명조끼로 뗏목을 만들어 피신하고 파커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해 물고기와 바다거북을 건져 올린다.

 

파이는 두려움이 밀려들 때마다 신을 찾았다.

 

나는 환경에 맞게 조절한 종교의식을 거행했다-사제나 성찬식 집례자가 없는 혼자만의 미사를 올렸고, 신상도 없고 공양도 없는 힌두교식 제사를 올렸다. 메카가 어느 쪽에 있는지도 모른 채 엉터리 아랍어로 알라신께 예배했다. 그런 의식이 위로를 주었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힘들었다. 정말이지 힘들었다. 신을 믿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고, 깊은 신뢰를 갖는 것이고,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때로는 내 마음이 분노와 절망과 약함으로 급속히 가라앉아서, 태평양 바닥에 처박힐 것 같았다. 거기서 다시 올라오지 못할까 두려웠다. -p287

 

절망은 빛이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무서운 어둠이었다. 그것은 이루 표현 못 할 지옥이었다. 그것이 늘 지나가게 해주시니 신께 감사하다. 다시 매달라고 아우성치는 매듭이나 그물 주변에 물고기 떼가 나타났다. 내 가족 생각을 했다. 그들이 이런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해서도 어둠이 휘휘 젓다가 결국 물러갔고, 그때마다 신은 내 마음에 환한 빛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나는 계속 사랑하면 됐고. -p288

 

파이에게는 신들뿐만 아니라 선한 햇살과 매혹적인 달빛...

 

그리고 리처드 파커도 함께 했다. 

 

"정말로 사랑해. 사랑한다. 리처드 파커. 지금 네가 없다면 난 어째야 좋을지 모를 거야. 난 버텨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 못 견뎠을 거야. 희망이 없어서 죽을 거야. 포기하지 마. 리처드 파커. 포기하면 안 돼. 내가 육지에 데려다 줄게. 약속할게. 약속한다구!" -p324

 

리처드 파커는 몇 차례 넘어졌다. 밀림이 시작되는 곳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가 내 쪽으로 방향을 틀 거라고 확신했다. 날 쳐다보겠지. 귀를 납작하게 젖히겠지. 으르렁대겠지. 그렇게 우리의 관계를 매듭지을 거야. 그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 밀림만 똑바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더니 고통스럽고,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함께 겪으면서 날 살게 했던 리처드 파커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내 삶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 고난을 딛고 살아나서가 아니었다. 사람을 본 것이 감동적이긴 했지만, 내가 흐느낀 것은 리처드 파커가 아무 인사도 없이 날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서투른 작별을 하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일의 순서에 맞추어 형식을 차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가능하다면, 일에 의미 깊은 모양새를 입혀야 한다. 예컨대 당신이 내 뒤죽박죽 이야기를 100장으로 구성할 수 있을까? 한 장이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딱 100장으로? 하긴 내 별명이 싫은 것도 그 때문이다. 숫자가 영원토록 따라다니는 게 거북하다. 하지만 인생에서 일을 알맞게 마무리 짓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야만 놓아버릴 수 있으니까.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꼭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말을 남기게 되고, 후회로 마음이 무거워진다. 작별인사를 망친 일이 오늘날까지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다. -p391~392

  

생과 사를 함께 했던 파커의 뒷모습을 보면서 울부짓는 파이의 모습이 선하다.

소년은 왜 울어야만 했을까?

이별 없는 이별을 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준비되지 않은 이별이 슬픈 까닭은 이별 자체가 아니라, 작별인사조차 없는 이별로, 이별과 이별조차할 수 없기때문이다.

  

햇살에 일렁이는 푸른 바다처럼 작품 속에는 곳곳에서 깊은 철학적 사유와 은유들이 반짝거린다.

 

나는 며칠인지, 몇 주일인지, 몇 달인지 헤아리지 않았다. 시간은 우리를 갈망하게 할 뿐인 환영인 것을. 내가 살아 남은 것은 시간개념 자체를 잊은 덕분이었다. -p264

 

내 가장 큰 바람은-구조보다도 큰 바람은-책을 한 권 갖는 것이었다. 절대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 긴 책.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시각으로 모르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책. 아쉽게도 구명보트에는 성서가 없었다.-p286

 

상반되는 것 중 최악은 권태와 공포다. 우리 삶은 권태와 공포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추다. -p298

 

잔잔한 바다와도 같은 작품은 식충섬에서의 일주일이 지난 후, 격하게 흔들리더니만 기어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 속으로 독자를 집어던져버린다. 

이 정도면  반전이 아닌 사기(?)에 가깝다.

 

그리고...

자칫 볼거리 풍부한 해양모험소설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작품은 이렇게 해서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나는 두 분께, 그사이 227일 동안 일어난 일을 두 가지로 이야기해드렸어요."

"그랬지요."

"두 이야기 다 침춤 호의 침몰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했어요."

"그렇죠."

"두 분은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고,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지 증명할 수 없어요. 내 말을 믿을 수밖에 없지요."

"그렇죠."

"두 이야기 다 배가 가라앉고, 내 가족 전부가 죽고, 나는 고생하지요."

"맞아요."

"그럼, 말해보세요. 어느 이야기가 사실이든 여러분으로선 상관없고, 또 어느 이야기가 사실인지 증명할 수도 없지요. 그래서 묻는데요, 어느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나요? 어느 쪽이 더 나은가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동물이 안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그거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치바: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요."

오카모토:" 그래. 동물이 나오는 쪽이 더 나은 이야기 같아요."

파이 파텔: "고맙습니다. 신에게도 그러길."

(침묵)

  

영화만 본 많은 사람들은 파이가 들려준 두 가지 이야기 중,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닌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진짜로 믿는다고 한다. 태평양에 표류하던 파이가 227일만에 멕시코에 도착한 후, 조사차 나온 일본인 오카모토와 그의 조수 치바씨에게 자신이 겪은 일들을 들려주는 과정에서 너무 끔찍해서 차마 하지 못하고 동물들이 나오는 것으로 바꾸어 이야기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정말 구명정에는 처음부터 동물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탔을까?

다리를 다친 중국인 선원(얼룩말)과 그의 다리를 자른 프랑스 요리사(하이에나), 그리고 요리사에게 용감히 맞서다가 그에게 죽임을 당하는 파이 엄마(오랑오탄)와 그 요리사를 죽이는 파이(호랑이)....

 

 

무엇이 진실일까?

아니, 애당초 진실이 무엇이라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소설의 진위 여부를 찾아헤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 말이다.

 

 

그저,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이야기라고만 하겠다.

그렇지만, 믿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말도 꼭 덧붙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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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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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그는 분명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미국적이다.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한국산(産)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미국산(産)이라는 뜻도 아니라는 의미니까...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에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의 작품 역시 이와같은 꼬리표를 떼어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부터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은 시종일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된다.  보통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독자와 화자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감정적 동화가 부드럽게 일어나는 법인데, 이 작품은 어찌된 영문인지 과속방지턱을 만난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덜컹거린다. 이게 독자에게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혀져 사실성을 높이고자 한, 작가의 글쓰기 전략이었다는 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감지되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닌 이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제3자의 입장일 수 밖에 없고, 이점은 작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자전적 기록일지라도 얼마든지 실제보다 더 강하게 혹은 더 약하게 감정의 기조를 조절할 수 있다. 마치 사실보다 더 진짜같고 실물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사진처럼...


 

아마도 작가는 이점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시점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감정적인 어조를 지양하고 건조체로 일관한 건 아닌지... 마치 사실만을 기록한 일지(日誌)나 역사책처럼...

 

독자의 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의 이와 같은 전략은 나에겐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하겠다.

강력한 감정의 쓰나미를 겪지 않아서 다소 재미없는 독서였고, 별 다른 감상(느낌)이 없어 독후감 쓰기마저 미적거리게 만들었지만,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을 달 수 없었으니까...


 

이 작품의 뛰어남은 무엇보다도 남다른 경험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사실은 전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전쟁 중 윤간이나 강간 등은 수시로 일어나는 일일테고 사람을 동물처럼 아니 동물보다 더 잔인하게 다루고 죽이는 일쯤이야 다반사로 일어났음은 설령 참전 경험이 없다하더라도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작품 속 주인공인 프랭클린 하타와 같은 경험(혹은 정신적 트라우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말이다.

 

전쟁 이후 그들의 후일담은 다양한 스토리로 표면화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이 투명하게 비추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했다기보다는 '외면'했기 때문이다.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내야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척 '하는 삶을 우리는 이창래의 장편소설 <척 하는 삶>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삶이란 결국은  '~척'하는 것이고, 인생이라는 것 역시 '척'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친절한 척, 별일 없는 척,

사랑하지 않은 척, 혹은 사랑하는 척,


 

이런 것들이 지식층과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예절이자 중산층 삶의 표상이요, 무엇보다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삶에 대한 숙달이라고 우리 대부분은 믿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인 프랭클린 하타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으로 모범적인 삶을 영유한 인물의 전형이다.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위안부로 끌려온 다섯번째 여자 끝애(조선여자 K)에게 정신적 사랑인지 육체적 욕망인지 애매모호한 감정을 느꼈고, 결국 끝애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일본 장교(오노 대위)를 은장도로 찔러 죽인 위안부를 위해 그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으며 그녀를 탈출시켜 함께 살기로 굳게 맹세한 군인(구로하타 소위=플랭클린 하타)이라 한들,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타가 자신이 사랑한 여자의 죽음을 막기는 커녕,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엔도 상병을 제외하곤... 엔도 상병은 자신이 좋아하는 위안부를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고 부대원 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비록 왜곡된 방식이긴 하지만 전쟁터라는 극단적인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엔도 상병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능욕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자기도 함께 죽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완성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주인공 하타는? 조선인 위안부 끝애를 향한 하타의 사랑은 어떻게 증명되고 완성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까...?

 

단언컨대, 내가 이 작품을 2~3년만 더 일찍 읽었더라도 난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하기는 커녕, 끝까지 읽지도 않고 도중에 포기했을 가능성 아주 크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작품들을 주로 읽고 있으며 공감 또 공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않고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삶을 관조하는 문장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행복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나 혼자 간직하고 끌어안아야 할 것인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처럼 어떤 뚜렷한 형태가 없다. 그 기억의 따뜻함은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겨울 해처럼 덧없고, 나에게 남은 것은 내 반박하는 증류기의 신경질적인 열기뿐. -p62

 


어떤 면에서 내가 한 행동은 일종의 무시였다. 나는 이 애를 서니로서, 까다롭고, 성급하고, 화 잘 내는 서니로서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시하면서 나는 그것이 합의를 구축하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전형적인 일 처리 방법이라고,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인생을 조화시키는 그 어려운 일에서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합리화했다. 사실 그런 합리화는 체계적인 공작이며, 언제나 무지막지하게 성공을 거둔다. 삶의 불확실함과 복잡함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구체화되고 진실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삶의 정확한 양식과 내용을 깨닫는다는 것 또한 대단히 매혹적인 일이다. 밀어내고, 밀어내고, 또다시 밀어냈는데 옛 수로표지들이 다시 한 번 까닥 하며 떠올라, 눈앞의 물에 점점이 박혀 빛나는 불의 고리를 이루는 것. -p392~393

 

 

나는 내 운명이나 숙명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조주의 얼굴에서 위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서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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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증보판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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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 과학 분야에 선천적으로 취약한 내가 흥미를 보이는 유일한 분야가 있다면 생물 그중에서도 진화생물학이다.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 그의 <진화론>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다양한 책들이 출판 되었고, 이를 계기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와 제프리 밀러의 <연애> 등을 비롯해서 이쪽 분야의 책들을 꽤(?)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나처럼 이런 분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최재천 교수의 책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 역시 진화생물학(혹은 진화심리학)으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다. 즉, 동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행동 및 자연현상까지 진화론적으로 접근하여 해석하려는 이 책은 나름의 통찰력을 선사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였던 건 문학작품의 존재 이유를 진화론적으로 설명한 부분이었다.

 

이야기에 대한 별스러운 애착은 인간이 다른 진화적 적응들을 갖추다 보니 부수적으로 발현하게 된 부산물일 수 있다. 예컨데 우리의 마음이 진화한 소규모 집단에서는 누군가의 은밀한 사생활을 알아내는 일이 번식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자연선택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정보를 얻는 활동에서 짜릿한 즐거움을 느끼게끔 석기 시대의 우리 마음을 설계했다. 하지만, 대중매체와 과학 기술이 득세하는 현대 환경에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현실 또는 상상 속 인물들의 사생활을 엿보면서 즐거움 그 자체만을 탐닉하는 현상이 뒷소문을 추구하는 적응의 부산물로서 생겨나게 되었다. 아니면, 이야기를 즐기는 성향 그 자체가 어떤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된 진화적 적응일 수 있다.(...)

 

이야기는 극중 인물이 살아가면서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고 어떻게 해결하는지 생생하게 재현함으로써 독자에게 유용한 가르침을 주게끔 설계된 적응이다. 즉 이야기는 삶의 모형이다. 생존과 번식이 결판나는 치열한 전장으로 투입되기 전에 이러한 모의실험이 굳이 필요한 까닭은 우리의 인생항로가 그만큼 예측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p148~149

 

'옛날 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옛날 옛적부터 있어 왔다.

그러므로 우리가 책읽기를 싫어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인류에게 '이야기'는 본능이다.

한편, 여성이 남성보다 책을 더 자주 사고 더 많이 읽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남성 작가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를 설명한 진화론적 관점이 흥미롭다. 제프리 밀러는 저서 <연애>에서, 여성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는 반면 남성은 이야기를 하길 좋아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잘 하는 남자가 여성에게 선택받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이야기를 많이 지어내는 쪽은 남자일 수 밖에 없노라고... 

 

이 책의 저자 역시 인간의 '웃음 본능'을 설명하면서, 여성은 웃기는 남성을 선호하는 반면 남성은 자기를 웃기는 여성보다는 잘 웃어주는 여성을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프리 밀러의 가설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남성은 이야기를 잘 지어내는 재주를 특화시키고 여성이 이야기를 잘 듣고 읽는 재주를 특화시킨 건, 좋은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를 구분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자연선택했기 때문이란다.

 

물론, 진화심리학과 진화생물학 및 진화행동학 등에서 인간의 마음과 행동이 어떤 초월적인 영혼이나 합리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선택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은, 20세기 초 인간 행동의 모든 원인을 '성'과 연관지었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롭지만 또한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동성애의 비율이 돌연변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비율(1~10%)을 차지한다는 점은 진화생물학에서는 변변한 가설조차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과 행위를 무조건 진화론과 연관지으려는 태도에는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창조론를 창조학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창조론은 종교의 영역일 순 있어도 결코 과학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종교는 인류의 생존과 번식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자연선택되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불투명한 단서로부터 내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지닌 행위자의 존재를 다짜고짜 가정하는 성향은 사악하고 지능적인 악령, 그리고 이로부터 사람들을 지켜 주는 자비로운 신에 대한 관념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 인지심리학자 파스칼 보이어에 따르면, 사람들은 아주 약간만 낯설고 이상한 것에 가장 관심이 가고 더 잘 기억한다. 반면에 시시하도록 정상적인 것이나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이상한 것은 제대로 기억하거나 전파하지 못한다. -p218

 

'신이 실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신을 믿는다면 실재로 신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나는 잃을 게 없지만, 반대로 내가 신을 믿지 않는데 실재로 신이 존재한다면, 나는 전부를 잃는 것이다.'

 

인간이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에서 유신론쪽으로 더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실재로 인류의 조상은 길을 가다가 낯선 존재와 마주쳤을 경우, 일단 상대를 자신보다 강력하다고 전제한 후 잽싸게 도망감으로써 생존 확률을 높여왔다. 신처럼 '불가지론'에 대한 인간의 비과학적인 믿음과 복종 역시 진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표현처럼 인류에게 종교란 부정할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인간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된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다면, 본능 즉 직관은 이성적 판단, 즉 추론보다 앞선다. 설령 그것이 현대 과학에는 위배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인간의 경우 혐오감이라는 감정이 작동하여 병원체가 들어 있는 대상을 멀리하게 해준다. (...) 단순히 어떤 사람이 우리 집단에 속하지 않은 외부인임을 알려주는 단서만으로도 그를 회피하거나 배척하는 기제가 작동한다. 내부인들끼리 뭉치며 외부인을 몰아내려는 심성이 어떻게 전염성 질병을 막아주는 방패가 될까? 답은 기생체와 숙주 사이의 공진화 군비경쟁에 있다. -p73

 

동물의 사체 섭취, 더러운 물체와의 접촉, 근친 상간,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 흉칙한 외모와 자극적인 냄새에 대한 거부 등등......

굳이 배우지 않아도... 법에 저촉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아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들은 전통과 터부 등의 이름으로 불허되어 왔는데, 이는 전염병이나 병균을 멀리함으로써 생존에 유리하도록 설계된 우리의 마음 지도 때문이란다. 

 

여기에는 음식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향신료의 종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많은 양을 사용하는 음식을 선호하는 지역일수록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온도가 높고 습해서 병원균에 훨씬 쉽게 노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국가가 서구에 비해 문화적으로 덜 개방적이고 더 폐쇄적인 것도 다양하고 많은 향신료를 사용하는 음식이 발달한 이유도 모두 진화론적으로 보면 전염병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자연 그 자체에 깃든 외부적 실재가 아니다. 잡식성 영장류인 인간이 오랜 세월 진화하면서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던 특정한 환경을 잘 찾아가게끔 그 환경에 대해 느끼는 긍정적인 정서일 뿐이다. -p126

 

어째서 진화적으로 쓸모 없어 보이는 꽃에 매혹되었을까? 꽃은 오래지 않아 이 자리에서 과일이나 견과, 덩이줄기 같은 음식물이 나게 되리라고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꽃이 있는 곳에는 인간의 먹이가 되는 초식동물도 찾아온다. -p135

 

아프리카 사바나 풍경과 폭포 및 분수대 등등... 

이런 사진과 그림들을 보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런 장소들이 먹이를 구하고 위험을 피하기 쉬우며 생존에 꼭 필요한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지역으로 우리 마음 속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꽃이나 나무에 대한 인류의 높은 호감도 역시 이들 지역이 그렇지 않은 지역보다 생존과 번식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카페의 2층 창가 자리부터 손님이 차는 이유와 백화점 1층 정중앙에 주로 분수대가 자리하고 있는 이유 역시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 대한 인류의 동경과 모방에 다름 아니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도 역시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아무리 지고지순한 지위를 부여한다 한들, 기껏해야 '털없는 원숭이'에 불과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화생물학과 진화심리학 등에 흥미를 갖는 이유 역시 진화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하기에 앞서, 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더 나아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인간은 역시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탐구하도록 진화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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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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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봄은 여인의 계절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꽃가루와 황사를 걱정하면서도 노랫가락이 절로 나오니 말이죠.

 

사실 짐짓 들떠있는 척하지만, 해마다 이 계절만 돌아오면 왠지 모르게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건만...

'처연함'이랄까... ?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보일듯 말듯한 슬픔에 애잔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번에 소개할 작품 역시 어딘지 모르게 이런 계절을 닮아 있는 것 같군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살인이라던지...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에게 감추어진 상처라던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관계들이 사실은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져 있다던지...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라는 작품은 <고백>에 이어 제가 두 번째로 접한 작가의 작품인데요, 이 두 작품 모두 '복수'를 중심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자랑거리라고는 '깨끗한 공기'가 유일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정밀기계 생산업체(아다치 제작소)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회사 공장이 가동되면서 직원 가족들이 속속 이사를 오지요. 에미리네도 그 중 하나였죠. 아, 에미리 아빠는 평사원이 아니라 창업주의 손자로 아다치 제작소의 유력한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에미리와 같은 사랑스러운 외동딸과 아사코처럼 교양있고 세련된 아내가 곁에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겠죠... 

 

작품은 이 아사코에게 부쳐지는 사에의 편지로 시작됩니다. 사에가 누구냐고요? 에미리의 친구 중 한명이죠. 에미리가 죽기 직전,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배구를 하며 놀던 네 명의 친구 중 한명...

 

네...

안타깝게도 에미리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온 지 얼마 안 지나, 환풍기 수리기사로 가장한 남자를 따라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사에, 마키, 아키코, 유카와 함께 놀다가 혼자만...

 

범인은 당시 초등학교4학년 동급생으로 함께 배구를 하며 놀고 있던 다섯명의 여자아이들에게 접근해서는 수영장 탈의실의 환풍기 수리를 도와달라는 구실을 댑니다. 그리곤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서는 다른 아이들을 물리치곤 에미리만 데리고 수영장쪽으로 사라지죠.

 

그로부터 한시간 쯤 흐른 뒤, 네명의 친구들은 에미리를 찾아 나섰다가 수영장 탈의실에서 죽어 있는 에이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극이었지만 아사코를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은 네 명이나 목격자가 있으니 범인은 쉽게 붙잡힐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문제는 이 네명 모두 범인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수사는 난관에 부딪치고... 외동딸을 잃은 아사코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맙니다. 

친하게 어울려 놀던 네명도 사건이 일어난 뒤부턴 두 번 다시 함께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안타깝죠... 만약 이들이 함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들이 겪었던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슬퍼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랬더라면 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건이 발생한지도 어느덧 3년이 훌쩍 지나버립니다. 

아사코는 마을을 떠나기 하루 전날, 죽은 딸의 친구들 네명을 마지막으로 부릅니다.  소녀들은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었기에 아사코의 초대가 반갑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범인조차 붙잡지 못한 채 죽은 딸을 마을에 두고 떠나야 하는 아사코의 마지막 청을 거절하긴 힘들었을 테죠.

 

그런 소녀들에게 아사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던가 아니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속죄를 하라. 그렇지 않으면 복수 하겠다'

 

그저 딸을 잃은 엄마의 애통함이려니... 하고 잊어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만, 네 명의 소녀들은 아사코가 남긴 이 마지막 말을 믿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네명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죠.

 

체구가 작아 인형같았던 사에는 결혼 뒤 남편을 따라 유럽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그만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 되어 돌아옵니다.  

당차고 똑똑했던 마카는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체육수업 도중 흉기를 들고 학생들에게 달려든 범인을 제압하다가 그만 범인을 죽게 만듭니다. 용감한 그녀의 행동은 처음엔 칭찬을 받지만 부상당한 범인의 둔부를 발로 걷어차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면서 비난을 받게 되지요.  물론, 그녀의 행동은 법정에서 업무상 과실치사로 판결나지만 말입니다.

 

한편,

남자처럼 체구가 크고 뚱뚱했던 아키코는 의붓딸을 성폭행한 자신의 친오빠를 죽이고 맙니다. 

그래요...

오빠와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짜리 의붓딸에게 못쓸 짓을 하고 있는 친오빠를 보는 순간, 에미리를 떠올렸을 겁니다.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아키고...

에미리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길은 오빠를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유카...

어려서부터 천식을 앓고 있는 언니에게 엄마의 관심이 집중되어 늘 소외감과 애정결핍에 시달렸지요. 언니를 미워하면서도 언니를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어린 동생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로부터 그 어떤한 위로나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그녀가 기댈 곳은 파출소의 안도 순경뿐...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니가 경찰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안도 아저씨와 형부를 동일시(?)한 유카는 그만 형부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갖게 됩니다. 그리고 유카가 형부와의 잘못된 관계를 청산하려는 과정에서 몸싸움 끝에 형부가 그만 계단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을 아사코가 보게 되죠......

자신의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아사코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기뻤을까요? 딸의 원수를 갚아서 마음이 놓였을까요? 

아닙니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어린 아이들에게 아사코가 가당찮은 속죄를 주장하는 이유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렸더랬죠.

그런데 그 이유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그녀의 편지를 통해 밝혀집니다. 

 

경악스러운 반전과 결말에, 나도 모르게 '악!'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이 비명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나 예상치 못함에서 오는 놀람이라기보다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본사회 특유의 부조리가 전해주는 충격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이처럼 우리와 엇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인과 일본사회를 소설 그것도 주로 추리소설을 통해서 접하곤 합니다. 실체가 아닌 허구로 말이지요.... 부디, 그 실체는 허구를 닮았으되 허구 자체가 아니길 바래봅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이야기 구조가 복잡한 것에 비해 작품은 200페이지 남짓한 경소설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도 충분치 않을 뿐더러,  '속죄'라는 제목이 부적합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딸의 죽음은 엄마에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지요. 그러나 질투로 인해 연인을 갈라놓고 그중 한사람을 자살하게 만든 아사코가 딸을 잃어버렸다고해서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속죄는 결코 될 수 없는 법이지요.

 

 

속죄란 용서나 사죄보다 한차원 더 높은 겁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떠안게 된 비극을 속죄라고 할 순 없지요. 그건, 인과응보에 더 가깝겠지요. 속죄란 용서를 빌 수 있는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당사자의 용서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갚아 나가는 겁니다. 이언 매큐언의 작품 <속죄>의 브리오니처럼 말이지요.

 

사실, 저는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바로 얼마 전에 읽었어요. 미나토 가나에의 이 작품을 읽게 된 것도 동명소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때문이었습니다.

근데, 두 작품이 너무 비교가 되네요. 그렇다고 해서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폄하하려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이죠. 십여년의 시차(?)를 두고 있으니, 어쩌면 미나토 가나에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읽었을 수도 있고...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봤을 따름입니다.

 

아무튼 저로선,

같은 제목이지만 전혀 다른 두 작품을 읽으면서 명작이란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닌, 주제의 구현과 감동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지요. 

 

 

감동이란,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또한 느끼게 함으로써 온통 '나'에게만 쏠려 있던 '시선'을 나 이외의 타인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시켜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바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심 즉 사랑이죠. 

 

그러므로 제가 판단하는 좋은 책이란, 읽고 난 다음 내 눈에 비쳐드는 일상의 풍경들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를 수도 있고... 정당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부당하며...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든지 거짓일 수 있는...

 

 

아무래도 저는 오늘도 낯선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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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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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너무 슬프고... 너무 아름답고... 너무 장엄하며... 또한 고결하고 숭고하다...

이 작품에 대한 한결같은 평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는 내 관심권 밖으로 멀찌감치 밀려나 있던 작가였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유별스런' 소재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가였으니까...  한마디로, 그의 이전 작품들은 심기불편함을 주특기로 했다.

 

그런 그에게 이 작품은 명실공히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나이 오십에 쓴 <속죄>라는 작품은 19세기 고딕소설의 진중함과 도덕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동시에 20세기 현대소설의 사실성과 재미(반전)까지 두루 갖춘 명작이라는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는다.

 

작가는 이 소설을 발표하기 2년 전인 1999년 <암스테르담>이라는 작품으로 부커상을 수상했다. 만약, 두 작품간의 시차가 조금만 더 벌어졌더라면 존 맥스웰 쿠체(존 쿳시)의 뒤를 이어, 부커상을 두 번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만큼 이 작품은 수십년 동안 추구해오던 작가의 작품 스타일을 하루아침에 바꾼 작품으로, 이언 매큐언이라는 작가가 '대가'임을 입증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영국 남부 서리에 위치한 탈리스가(家)의 잭 탈리스와 에밀리 탈리스는 슬하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1935년 찌는듯한 여름의 어느날.

13살 짜리 막내딸 브리오니는 허마이니 이모가 이혼하게 되면서 탈리스 가에 의탁하게 된 이종사촌 3남매와 함께 때마침 내려온 오빠 레온과 그의 친구 폴 마샬을 위해서 자신이 직접 지은 <아라벨라의 시련>이라는 희곡작품으로 연극 공연을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사촌들의 비협조로 연극 공연을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방을 나섰던 브리오니는 우연히 저택 앞마당 분수대에서 언니 세실리아와 하녀(파출부)의 아들 로비 터너 사이에서 벌어진 뜻밖의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브리오니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된다. 평생에 걸쳐 속죄하게 될 바로 그 죄를...

 

언니 방으로 뛰어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하라고 추궁해야겠다는 충동도 일었다. 그러나 아까 본 일을 혼자 되살려보려면 적어도 감정적으로나마 그 일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흥분을 맛보고 싶어서 참았다. 그 일에 대한 정의는 앞으로 많은 세월을 두고 차츰 다듬어질 것이다. 그때 가서는 그 일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추측했던 것은 자신이 열세 살의 어린아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무 어려서 그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고, 다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마음만 다급해졌던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p66

 

브리오니는 돌아오기 전에 벌써 하느님과 같은 창조주로서의 힘을 잃고 말았지만, 그 상실이 가장 분명해지는 것은 되돌아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공상의 논리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다는 착각이 그것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p114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고 캠브리지에서 같이 대학을 다녔던 세실리아와 로비는 꽃병에 물을 받는 걸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그만 꽃병을 깨뜨리고 만다. 분수대 물속으로 빠져버린 꽃병 조각을 건지지 위해 로비 앞에서 겉옷을 벗은 세실리아가 물속에 들어갔다가 밖으로 다시 나오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브리오니...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어찌보면 에로틱할 수 있도 있는 이 장면은 열세살 브리오니에게 각인되어 버린다. 실제로는 세상을 제대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이미 세상(어른의 세계)을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바로 그런 나이에...

 

어쩌면 평소 예민한 감수성을 자랑하며 소설 쓰기를 즐기는 브리오니가 죄를 향해서 첫발을 내딛게 된건 순전히 지나친 상상력과 과도한 정의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를 향해 두어발 더 내딛었던 걸음을 거두어드리지 못하게 만든 건, 주변 환경 즉 어른들의 몰이해와 편견 때문이었다.

 

브리오니는 그들로부터 그날 밤의 정황에 대해 진술해달라는 요구를 수도 없이 받았고, 그래서 설명을 반복할 때마다 이전에 한 진술과 일치해야 한다는 부담이 점점 더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이전에 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전의 진술과 달라지면 경찰은 이마를 찌푸리거나 금세 태도가 냉랭해졌으며, 그녀에 대한 동정심도 거둬들여 버렸다. 그러자 브리오니는 그들을 기쁘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다르게 표현하거나 덧붙인다면 그녀가 자초한 사후 처리 과정이 방해를 받으리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 차렸다.  -p243~244 中 발췌-

 

그러나 그 다음 한주가 채 지나가기도 전에 그렇게도 굳건했던 확신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브리오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문자 그대로 자기가 본 것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은 눈이 아니었다.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p242

 

그래서 그녀가 보는 것들은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나 알고 있다고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그 형태가 일부 수정되어야 했다. -p177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내용이 뒤바뀐 로비의 편지와 이를 언니 세실리아에게 전해주는 심부름을 하는 과정에서 읽어 버린 브리오니...

그리고 예기치 못한 그러나 브리오니의 의심을 부채질할만한 상황이 또 다시 그녀 앞에 펼쳐진다. 마치 희곡의 이미 정해진 각본처럼...

 

그애는 언니를 보호하거나 언니에게 충고를 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에 불타 언니를 찾아 나섰고, 닫힌 서재 문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어린애의 무지와 어리석은 상상과 정의감에 사로잡혀 로비에게 그만 하라고 요구하기 위해 서재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애가 뭐라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서로에게서 떨어져 조용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p200

 

언니 세실리아와 로비 사이에 막 싹트기 시작한 사랑이 어린 브리오니에게는 어째서 전혀 다른 상황으로 비추어졌던 걸까? 도대체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을까?

정말, 단순히 브리오니가 상상력이 너무 풍부한 아이였기 때문일까? 단지 그 이유 하나때문이었을까? 인간이 비록 빈틈이 많은 존재라곤 하지만 그렇게 손쉽게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존재였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물주도 실수를 했으므로 이 사건에 일말의 책임이 있는 거 아닌가?  

 

사실 어린이를 지나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그것도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를 떠올려 본다면, 브리오니를 유난히 특별난 아이로 단정지을 수도 없다. 선과 악, 현실과 상상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주변 어른들은 자신들이 평소 갖고 있던 무지와 편견이라는 폭력을 무의식적으로 휘둘렀던 건 아니었을까?

이와 같은 주변사람들과 남들보다 좀 더 많은 허영심과 어리석음을 타고난 대신 죄책감과 책임감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또 다른 두 사람에 의해 '죄'가 저질러지고 감춰진 건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내가 묻고 싶은 건, 사랑하는 연인을 떼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아간, 이 어처구니 없는 엄청난 범죄 앞에서 속죄를 해야 할 사람이 정말 브리오니 단 한 사람뿐일까? 하는 점이다. 

 

흥비로운 점은 세실리아와 로비는 브리오니와 만나기 전까진, 물론 전적으로 브리오니(또한 작가)의 상상이긴 하지만 범인을 대니 허드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이 브리오니와 마찬가지로 오해를 하고 자신의 착각을 확신했다고 해서 그들과 브리오니의 행위가 똑같은 무게를 갖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어찌됐든 세실리아와 로비의 '오해'와 '확신'은 대니 허드만을 감옥으로 보내지도 않았고 전쟁터로 내몬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그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눈먼 운명의 '지팡이'이 역할을 하진 않았으므로...

 

자신이 본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브리오니가 롤라가 해야 할 일까지 다 떠맡아줄 것이다. 롤라는 그저 진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그 진실을 빨리,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리고, 자신이 브리오니와는 다른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확신이 없는 거라고만 믿으면 되었다. 그의 손이 눈을 가리고 있어서 그를 보지 못했고, 공포에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고 자신을 설득하기만 하면 되었다. 브리오니는 단계마다 곁에서 그녀를 도와줄 터였다. 브리오니는 일어난 일들이 모두 퍼즐 조각처럼 잘 맞아들어간다고 생각했다. -p241

 

롤라의 어깨와 마셜의 얼굴에 난 할퀸 자국들. 머릿속 공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새침한 사촌여동생이, 지나치게 고지식해서 한심해 보이는 그 사촌여동생이 다른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면서 정작 범인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침묵하던 그날 밤 연못가에 앉아 있던 롤라. 짧은 진주 목걸이에 장미 향수를 뿌린 허영심 많고 나약한 롤라. 어린 소녀의 제약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기를 바랐던 롤라. 사랑람에 빠짐으로써, 아니 사랑하게 되었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 수치의 늪에서 자신을 건져낸 롤라. 브리오니가 끝까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믿을 수 없어 했을 롤라. 그 롤라가, 이제 겨우 어린애티를 벗은 롤라가 자신을 강간한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다. (......)

 

저 폴 마셜과 롤라 퀸시, 그리고 이 브리오니 탈리스가 작당을 하여 침묵과 거짓말로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냈던가? 그러나 그를 유죄로 만든 증언은 바로 브리오니 자신이 했다. 지방 법원에서 큰 소리로 선서를 한 뒤 행한 그녀 자신의 증언이었다. 게다가 형 집행도 이미 끝났다. 대가를 치른 것이다. 배심원의 평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p454~455 中

 

 

과연...

롤라는 14살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불쌍한 여자 아이이기만 한 걸까?

폴 마샬은 그 사건이 있은 후, 5년 뒤 자신이 성폭행한 여성이 스물살이 되던 해에 그녀와 결혼식을 올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약, 자신을 대신하여 죄를 뒤집어 쓴 사람이 친구인 레온이었더라도 그는 침묵했을까? 혹시, 로비가 레온가를 드나들면서 허드렛일을 도맡아해주던 하녀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신분이었기때문에 죄책감따위는 갖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던 걸까?

 

한편, 저택의 여주인인 에밀리 탈리스는 어른으로서의 분별력을 왜 발휘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어린 딸인 브리오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큰딸 세실리아가 파출부의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걸 처음부터 탐탁찮게 여겼기 때문에...?

 

 

결국, 모두 자신은 그저 조금 이기적이고 타산적으로 행동했을 뿐 죄는 없다고 항변하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단 한사람이 속죄에 나선다. 평생에 걸친, 그러나 영원히 용서받지 못 할...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521 

 

 

마지막 반전과 에필로그는 너무 애절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친언니와 무고한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13살 소녀는 어느덧 77세 할머니가 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으로 남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작품을 남김으로써 그녀가 얻으려 했던 건 뭘까? 용서였을까...? 

아니, 아니다.

그녀는 이미 당사자인 세실리아와 로비가 죽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용서를 빌 대상조차 사라져버렸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냥 침묵하고 깨끗이 잊어버리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속죄하고자 노력했다.

 

세실리아와 로비와 같은 슬픈 사랑은 찾아보려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브리오니와 같은 실수 역시 비록 흔하다 할 순 없을지언정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1940년 첫원고가 나왔고 1999년 여섯번째 수정본이 나온, 브리오니의 소설과 같은 이야기... 그러니까 13살 어린 나이에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평생에 걸쳐 속죄하며 살다가는 그런 삶은 극히 드물것 같다. 아니 어쩌면 전무할지도 모른다.

 

 

이 작품의 주제를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죄책감'이 아닐까 싶다. 평생을 속죄해도 갚지 못하는 죄와 그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죄책감말이다.

 

이언 매큐언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는 롤라와 마셜을 마지막까지 살려놓음으로써 심지어 브리오니보다 더 오래 살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인간을 인간으로 완성시키는 기준이란 죄의 유무라기보다는 죄책감과 속죄에 있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끝으로,

이 작품은 소설 작법에 있어서 출중하기 때문에 작가지망생들에게는 일종의 '바이블'과 같은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나는 두 가지를 꼽고 싶다.

 

하나는,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사건을 전개하면서 미래 시점으로 넘어가선 과거로써의 현재를 설명하는 문장들이다. 뛰어난 소설 작법으로써 작품의 가치를 한 차원 높게 끌어올렸을 뿐만 아니라, 작가에 대한 작가로서의 사유가 응축되어 있어 마치 한편의 철학 에세이를 읽는 것 같다. 

 

 

육십년이 지난 후 브리오니는 유럽의 민속설화를 모방한 동화에서 시작하여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담은 희곡을 거쳐, 1935년의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 아침에 직접 목격한 일을 소재로 한 편견 없는 심리적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품에 이르기까지 자기 작품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묘사하게 될 것이다. 자기 자신을 얼마나 신격화했는지 깨달은 그녀는 자조적인 혹은 냉소적인 어투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도덕의 굴레를 벗어난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될 것이고, 반복되는 한가지 질문에 계속 시달리는 작가들이 그러듯 그녀 역시 자기 정체성을 확연히 깨달은 순간을 담은 자전적 내용의 소설을 발표해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어차피 희곡은 한편에 그쳤기 때문에 '희곡 작품들'이라고 복수로 지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고, 냉소적인 태도로 인해 진지하고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속의 어린 아이와는 단절되었으며, 자신이 바로 얼마전의 일처럼 생생한 그날 아침의 일보다는 그 일에 대해 쓴 자신의 글을 훨씬 더 자주 떠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구부린 손가락에 대한사색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과 똑같이 살아 있는 마음이 있는가하는 생각, 소설이 희곡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등은 그 이전의 어느날 생각했던 것이라고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또한 실제로 일어난 일은 그녀가 출판한 소설 덕분에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소설이 없었다면 그 일은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p67~68

 

 

두번째는, 마지막 마무리다. 

보통 문학작품들은 맨 앞의 도입 부분이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반면 마무리 즉 맨 뒷부분은 결말 속에 파묻혀 버리곤 하는데, 이 작품은 마지막 문장이 오래도록 나를 지배할 것 같다.

 

연인들을 살려두고 마지막에 다시 만나게 한 것은 나약함이나 도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으로 베푼 친절이었고, 망각과 절망에 맞서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그들이 나를 용서하게 할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그럴 만큼 이기적이지는 않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다. 내 생일 축하 파티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려낼 힘이 있다면......아직까지 살아 있는 로비와 세실리아가 서재에 나란히 앉아 <아라벨라의 시련>을 보며 미소짓는 것으로 결말을 바꿀 수 있다면......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선 잠부터 자야겠다. -p521

 

 

마지막 순간까지 속죄를 위해서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주인공(브리오니)의 의지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속죄'라는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면서도 미완성으로 작품을 남겨둠으로써 또 다른 상상과 여백을 남겨둔다. 바로 이 순간, 독자는 문학작품이 전해주는 감동의 골짜기를 지나 숭고미와 고결함의 언덕으로 나아간다.

 

 

만약, 제인오스틴 작품들을 좋아한다면 이 작품을 놓치지 말길...

당신 인생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 소설이 바뀔지도...

 

반면, 제인오스틴풍의 작품을 그닥 선호하지 않더라도, 이 작품만은 꼭 읽어보길...

당신의 독서 취향이 바뀔지도...

 

 

누군가 자꾸만 나에게 고전 명작으로 돌아가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고갈되지 않는 무궁무진한 작품이다.

 

 

 

 

[그리고...내가 밑줄 그은 문장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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