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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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래, 그는 분명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미국적이다.

부디 이 말을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한국산(産)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전적으로 미국산(産)이라는 뜻도 아니라는 의미니까...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에겐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그의 작품 역시 이와같은 꼬리표를 떼어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점부터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작품은 시종일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된다.  보통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독자와 화자와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감정적 동화가 부드럽게 일어나는 법인데, 이 작품은 어찌된 영문인지 과속방지턱을 만난 것처럼 천천히 흘러가다가 예상치 못한 순간 덜컹거린다. 이게 독자에게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으로 읽혀져 사실성을 높이고자 한, 작가의 글쓰기 전략이었다는 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감지되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닌 이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언제나 제3자의 입장일 수 밖에 없고, 이점은 작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자전적 기록일지라도 얼마든지 실제보다 더 강하게 혹은 더 약하게 감정의 기조를 조절할 수 있다. 마치 사실보다 더 진짜같고 실물보다 더 근사해 보이는 사진처럼...


 

아마도 작가는 이점을 강하게 의식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1인칭 주인공시점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감정적인 어조를 지양하고 건조체로 일관한 건 아닌지... 마치 사실만을 기록한 일지(日誌)나 역사책처럼...

 

독자의 입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작가의 이와 같은 전략은 나에겐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고 하겠다.

강력한 감정의 쓰나미를 겪지 않아서 다소 재미없는 독서였고, 별 다른 감상(느낌)이 없어 독후감 쓰기마저 미적거리게 만들었지만, 훌륭한 작품이라는 점에는 이견을 달 수 없었으니까...


 

이 작품의 뛰어남은 무엇보다도 남다른 경험으로 치부되는 것들이 사실은 전혀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전쟁 중 윤간이나 강간 등은 수시로 일어나는 일일테고 사람을 동물처럼 아니 동물보다 더 잔인하게 다루고 죽이는 일쯤이야 다반사로 일어났음은 설령 참전 경험이 없다하더라도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작품 속 주인공인 프랭클린 하타와 같은 경험(혹은 정신적 트라우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말이다.

 

전쟁 이후 그들의 후일담은 다양한 스토리로 표면화되었지만, 그들의 내면이 투명하게 비추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감추려했다기보다는 '외면'했기 때문이다.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내야 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척 '하는 삶을 우리는 이창래의 장편소설 <척 하는 삶>을 통해 마주하게 된다.


 

삶이란 결국은  '~척'하는 것이고, 인생이라는 것 역시 '척'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슬프지 않은 척, 아프지 않은 척,

친절한 척, 별일 없는 척,

사랑하지 않은 척, 혹은 사랑하는 척,


 

이런 것들이 지식층과 전문가가 갖추어야 할 예절이자 중산층 삶의 표상이요, 무엇보다도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삶에 대한 숙달이라고 우리 대부분은 믿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인 프랭클린 하타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좋은 사람이요, 성공한 사람으로 모범적인 삶을 영유한 인물의 전형이다.

 

2차 대전에 참전하여 위안부로 끌려온 다섯번째 여자 끝애(조선여자 K)에게 정신적 사랑인지 육체적 욕망인지 애매모호한 감정을 느꼈고, 결국 끝애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봤을 뿐이다.


 

전쟁터에서 일본 장교(오노 대위)를 은장도로 찔러 죽인 위안부를 위해 그 누가 나설 수 있겠는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믿었으며 그녀를 탈출시켜 함께 살기로 굳게 맹세한 군인(구로하타 소위=플랭클린 하타)이라 한들,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하타가 자신이 사랑한 여자의 죽음을 막기는 커녕, 막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탓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엔도 상병을 제외하곤... 엔도 상병은 자신이 좋아하는 위안부를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고 부대원 전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형에 처해진 인물이다. 


비록 왜곡된 방식이긴 하지만 전쟁터라는 극단적인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엔도 상병은 자신이 사랑한 여자를 능욕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길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손으로 죽이고 자기도 함께 죽어줌으로써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고 완성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주인공 하타는? 조선인 위안부 끝애를 향한 하타의 사랑은 어떻게 증명되고 완성될 수 있을까?



 

그나저나 내가 나이를 먹은 탓일까...?

 

단언컨대, 내가 이 작품을 2~3년만 더 일찍 읽었더라도 난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좋아하기는 커녕, 끝까지 읽지도 않고 도중에 포기했을 가능성 아주 크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작품들을 주로 읽고 있으며 공감 또 공감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않고 주인공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삶을 관조하는 문장들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행복하게 기억하기는 하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만 가능한 것이고 나 혼자 간직하고 끌어안아야 할 것인데, 마치 다른 사람의 기억이나 생각처럼 어떤 뚜렷한 형태가 없다. 그 기억의 따뜻함은 구름 사이를 지나가는 겨울 해처럼 덧없고, 나에게 남은 것은 내 반박하는 증류기의 신경질적인 열기뿐. -p62

 


어떤 면에서 내가 한 행동은 일종의 무시였다. 나는 이 애를 서니로서, 까다롭고, 성급하고, 화 잘 내는 서니로서 마주하지 않았다. 그렇게 무시하면서 나는 그것이 합의를 구축하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는 전형적인 일 처리 방법이라고, 한 사람의 인생과 그 사람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인생을 조화시키는 그 어려운 일에서 불가피한 측면이라고 합리화했다. 사실 그런 합리화는 체계적인 공작이며, 언제나 무지막지하게 성공을 거둔다. 삶의 불확실함과 복잡함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대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삶이 구체화되고 진실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삶의 정확한 양식과 내용을 깨닫는다는 것 또한 대단히 매혹적인 일이다. 밀어내고, 밀어내고, 또다시 밀어냈는데 옛 수로표지들이 다시 한 번 까닥 하며 떠올라, 눈앞의 물에 점점이 박혀 빛나는 불의 고리를 이루는 것. -p392~393

 

 

나는 내 운명이나 숙명을 찾아 나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창조주의 얼굴에서 위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죽은 자들에게서 용서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p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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