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이젠,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봄은 여인의 계절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꽃가루와 황사를 걱정하면서도 노랫가락이 절로 나오니 말이죠.

 

사실 짐짓 들떠있는 척하지만, 해마다 이 계절만 돌아오면 왠지 모르게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만물이 소생하고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봄이건만...

'처연함'이랄까... ? 화려함 속에 감추어진, 보일듯 말듯한 슬픔에 애잔해지는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이번에 소개할 작품 역시 어딘지 모르게 이런 계절을 닮아 있는 것 같군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살인이라던지...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에게 감추어진 상처라던지...

지극히 정상적으로 보이는 관계들이 사실은 비정상적으로 일그러져 있다던지...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라는 작품은 <고백>에 이어 제가 두 번째로 접한 작가의 작품인데요, 이 두 작품 모두 '복수'를 중심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자랑거리라고는 '깨끗한 공기'가 유일한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정밀기계 생산업체(아다치 제작소)가 들어섭니다. 그리고 회사 공장이 가동되면서 직원 가족들이 속속 이사를 오지요. 에미리네도 그 중 하나였죠. 아, 에미리 아빠는 평사원이 아니라 창업주의 손자로 아다치 제작소의 유력한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에미리와 같은 사랑스러운 외동딸과 아사코처럼 교양있고 세련된 아내가 곁에 없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겠죠... 

 

작품은 이 아사코에게 부쳐지는 사에의 편지로 시작됩니다. 사에가 누구냐고요? 에미리의 친구 중 한명이죠. 에미리가 죽기 직전, 학교 운동장에서 함께 배구를 하며 놀던 네 명의 친구 중 한명...

 

네...

안타깝게도 에미리는 시골 학교로 전학을 온 지 얼마 안 지나, 환풍기 수리기사로 가장한 남자를 따라 갔다가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사에, 마키, 아키코, 유카와 함께 놀다가 혼자만...

 

범인은 당시 초등학교4학년 동급생으로 함께 배구를 하며 놀고 있던 다섯명의 여자아이들에게 접근해서는 수영장 탈의실의 환풍기 수리를 도와달라는 구실을 댑니다. 그리곤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서는 다른 아이들을 물리치곤 에미리만 데리고 수영장쪽으로 사라지죠.

 

그로부터 한시간 쯤 흐른 뒤, 네명의 친구들은 에미리를 찾아 나섰다가 수영장 탈의실에서 죽어 있는 에이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극이었지만 아사코를 포함하여 마을 사람들은 네 명이나 목격자가 있으니 범인은 쉽게 붙잡힐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문제는 이 네명 모두 범인의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수사는 난관에 부딪치고... 외동딸을 잃은 아사코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맙니다. 

친하게 어울려 놀던 네명도 사건이 일어난 뒤부턴 두 번 다시 함께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안타깝죠... 만약 이들이 함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자신들이 겪었던 아픔을 서로 나누면서 슬퍼했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랬더라면 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사건이 발생한지도 어느덧 3년이 훌쩍 지나버립니다. 

아사코는 마을을 떠나기 하루 전날, 죽은 딸의 친구들 네명을 마지막으로 부릅니다.  소녀들은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었기에 아사코의 초대가 반갑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범인조차 붙잡지 못한 채 죽은 딸을 마을에 두고 떠나야 하는 아사코의 마지막 청을 거절하긴 힘들었을 테죠.

 

그런 소녀들에게 아사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찾아내던가 아니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속죄를 하라. 그렇지 않으면 복수 하겠다'

 

그저 딸을 잃은 엄마의 애통함이려니... 하고 잊어버렸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만, 네 명의 소녀들은 아사코가 남긴 이 마지막 말을 믿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네명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죠.

 

체구가 작아 인형같았던 사에는 결혼 뒤 남편을 따라 유럽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그만 남편을 죽인 살인범이 되어 돌아옵니다.  

당차고 똑똑했던 마카는 초등학교 교사가 됩니다. 그런데 체육수업 도중 흉기를 들고 학생들에게 달려든 범인을 제압하다가 그만 범인을 죽게 만듭니다. 용감한 그녀의 행동은 처음엔 칭찬을 받지만 부상당한 범인의 둔부를 발로 걷어차 죽음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면서 비난을 받게 되지요.  물론, 그녀의 행동은 법정에서 업무상 과실치사로 판결나지만 말입니다.

 

한편,

남자처럼 체구가 크고 뚱뚱했던 아키코는 의붓딸을 성폭행한 자신의 친오빠를 죽이고 맙니다. 

그래요...

오빠와 유난히 사이가 좋았던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짜리 의붓딸에게 못쓸 짓을 하고 있는 친오빠를 보는 순간, 에미리를 떠올렸을 겁니다.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던 아키고...

에미리에게 속죄할 수 있는 길은 오빠를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유카...

어려서부터 천식을 앓고 있는 언니에게 엄마의 관심이 집중되어 늘 소외감과 애정결핍에 시달렸지요. 언니를 미워하면서도 언니를 동경하고 부러워했던 어린 동생은 그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족들로부터 그 어떤한 위로나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그녀가 기댈 곳은 파출소의 안도 순경뿐...

그런데 공교롭게도 언니가 경찰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안도 아저씨와 형부를 동일시(?)한 유카는 그만 형부와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갖게 됩니다. 그리고 유카가 형부와의 잘못된 관계를 청산하려는 과정에서 몸싸움 끝에 형부가 그만 계단 아래로 떨어져 사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을 아사코가 보게 되죠......

자신의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아사코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기뻤을까요? 딸의 원수를 갚아서 마음이 놓였을까요? 

아닙니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아무런 잘못도 없었던 어린 아이들에게 아사코가 가당찮은 속죄를 주장하는 이유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렸더랬죠.

그런데 그 이유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그녀의 편지를 통해 밝혀집니다. 

 

경악스러운 반전과 결말에, 나도 모르게 '악!'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이 비명은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이나 예상치 못함에서 오는 놀람이라기보다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일본사회 특유의 부조리가 전해주는 충격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이처럼 우리와 엇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른 일본인과 일본사회를 소설 그것도 주로 추리소설을 통해서 접하곤 합니다. 실체가 아닌 허구로 말이지요.... 부디, 그 실체는 허구를 닮았으되 허구 자체가 아니길 바래봅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와서...

이야기 구조가 복잡한 것에 비해 작품은 200페이지 남짓한 경소설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도 충분치 않을 뿐더러,  '속죄'라는 제목이 부적합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딸의 죽음은 엄마에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지요. 그러나 질투로 인해 연인을 갈라놓고 그중 한사람을 자살하게 만든 아사코가 딸을 잃어버렸다고해서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속죄는 결코 될 수 없는 법이지요.

 

 

속죄란 용서나 사죄보다 한차원 더 높은 겁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떠안게 된 비극을 속죄라고 할 순 없지요. 그건, 인과응보에 더 가깝겠지요. 속죄란 용서를 빌 수 있는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당사자의 용서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갚아 나가는 겁니다. 이언 매큐언의 작품 <속죄>의 브리오니처럼 말이지요.

 

사실, 저는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바로 얼마 전에 읽었어요. 미나토 가나에의 이 작품을 읽게 된 것도 동명소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때문이었습니다.

근데, 두 작품이 너무 비교가 되네요. 그렇다고 해서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폄하하려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아쉽다는 말을 하고 싶을 따름이죠. 십여년의 시차(?)를 두고 있으니, 어쩌면 미나토 가나에가 이언 매큐언의 작품을 읽었을 수도 있고... 영감을 받아서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봤을 따름입니다.

 

아무튼 저로선,

같은 제목이지만 전혀 다른 두 작품을 읽으면서 명작이란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충격을 주는 것이 아닌, 주제의 구현과 감동에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지요. 

 

 

감동이란,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을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또한 느끼게 함으로써 온통 '나'에게만 쏠려 있던 '시선'을 나 이외의 타인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시켜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바로, 인간과 세상에 대한 관심 즉 사랑이죠. 

 

그러므로 제가 판단하는 좋은 책이란, 읽고 난 다음 내 눈에 비쳐드는 일상의 풍경들이 참으로 낯설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그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를 수도 있고... 정당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실은 부당하며...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얼마든지 거짓일 수 있는...

 

 

아무래도 저는 오늘도 낯선 하루를 보내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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