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세트 - 전2권 - 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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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애정일수록 식을 땐 더 매몰차다.' 

한국 문학에 대한 나의 태도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십대후반부터 이상문학상집을 모았고 각종 문예지들을 정기구독했으며 신춘문예 발표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 그러다가 (글을) '쓰는 삶'보다 '읽는 삶'이 나에게 더 적합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한국 문학과도 서서히 멀어지지 않았나 싶다. 물론, 여기엔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 아니면 서사를 배제한 채 의식의 흐름만을 지나치게 추구한 당시 문학 풍토도 한몫했음을 부인하진 않겠다.


이런 나에게 한국 문학을 다시 사랑하게 만든 작가가 있다.

바로 김연수다.

나는 2년 전 어느 여름날, 그를 작품이 아닌 에세이집으로 먼저 만났다. 그가 서른 즈음에 쓴 <청춘의 문장들>과 그후 십년 뒤에 쓴 <청춘의 문장들 +>을 읽으면서 공감 버튼을 백만번쯤은 누른 것 같다. 


 

작가가 서른 넷에 출판한 <청춘의 문장들>은 이십대를 막 지나 직장생활을 거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직후까지의 작가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유년시절과 사춘기의 추억들 그리고 시인으로 등단하고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및 습작의 세월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열정적이고 치열하다. 뭔가 이루고자 하는 충만함이랄까...? 확실히 청춘의 기운이 느껴진다.


당시, 나 역시 서른 초반이었고 그때를 떠올리면 십대와 이십대의 방황과 미숙함에서는 많이 벗어났지만 여전히 막막했고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때 그시절 내곁에만 머물고 있다고 생각했던 김광석이었는데, 김연수 작가에게도 찾아갔었던 모양이다. 그에 대한 작가의 애상에,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뚝ㅡ'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까지 팽팽하게 작동하던 한국 문학에 대한 방어기제가 순식간에 해제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김광석은 젊어서 죽고 2003년을 기점으로 나는 김광석이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살게 됐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41 -

 

 

이를 두고 <청춘의 문장들 +> 발문을 쓴 작가 김애란은, "세상의 모든 인연들은 두 번 만난다. 한번은 각자의 나이로, 또 한번은 상대방의 나이가 되서..."라고 표현했다.

순간 머리속이 '멍'해졌다.


한때 너무 좋아했던 사람들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린 자기자신을 발견한다는 건, 놀라운 깨달음을 동반한다.



 

<청춘의 문장들> 곳곳엔 고전과 한문, 한시가 자주 등장한다.

익숙한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낯선 것들이다. 작가는 몇 백년 혹은 그보다도 훨씬 더 먼 옛날 옛적 사람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냈지만, 난 아쉽게도 그와 같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너무 고풍(?)스러워서 책장을 덮으라치면, 등장하곤 하는 빼어난 문장들... 문장들...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영어 가정법 문장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배웠고 3차 방정식을 그래프로 옮기는 법도 배웠다. 하지만 내가 배운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일 수 있는지 알게 된 일이다. 내 안에는 많은 빛이 숨어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란 그 빛의 극히 일부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이다.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p195


재촉하는 만큼 빨리 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나이가 들고 싶다는 아이의 소원쯤이야 들어준다는 것. 삶이 너그러운 건 그때 뿐이다.  -  p210


흘러간다. 세월은, 그렇게, 그렇게, 부드럽게, 따뜻하게, (...) 가끔 아무런 후회도 없이, 아쉬움도 없이 세월을 보내던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다. 내가 그리워 하는 것은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이지 그 시절이 결코 아니다.  -  p212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어른들은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자라나고...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온 곳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것이구나. 울어도 좋고, 서러워해도 좋지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 삶이란 이런 것이구나.  - p242


이런 문장들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때론 조각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바다를 건너갈 때 '노'가 되어 주기도 한다. 이런 건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다.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

그래서 청춘일때는 절대로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니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는 것들...



 

피는 꽃이 좋았던 시절에는 그 꽃잎들이 지는 걸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나이가 들고, 이제는 지는 꽃은 모두 화려한 옛 시절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수없이 반복된, 꽃지는 시절의 이별은 오늘도 계속된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에게는 떨어지는 꽃잎 앞에서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

 -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 p191 -


 

청춘인 나에게, 삶이란 사랑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의 집합같은 거였다.

그러나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과정이 삶이라는 걸 깨달은 뒤부턴 삶이란 이해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언제 눈물을 흘리는가? 적어도 나는 짐작과는 다른 일들을 겪을 때 눈물을 흘린다. 대체적으로 삶이란 짐작과는 다르다.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부터 나는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 뒀다. 삶이란 추측되지 않았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소설은 그 일어난 일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이다. 짐작과 달랐던 일들의 의미를 나와 당신이 함께 납득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어느 순간에, 당신이나 내게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혹은 진심으로 기뻐하게 만들었던 그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걸 당신과 내게 납득시키는 일이다. 당신이나 나나 이제 다른 존재가 돼 살아가겠지만, 그 일들이 사라지지는 않으리라. -  p100~101

 

그는, '한국 소설은 이젠 왠지 잘 읽지 않게 된다.'라는 생각을 남몰래 가지고 있던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순전히 지어낸 이야기일뿐인 소설을 읽는다는 건, 어쩌면 아이같은 순진함이나 미성숙함의 발로라는 생각들도 부끄럽게 만들었다.

.

.

.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이런 거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일들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이해할 순 없지만 그래도 사랑하게 만든다.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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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로버트 제임스 월러 지음, 공경희 옮김 / 시공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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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서로 사랑할 때,

린 여름 안에 있었습니다.   -김연수-



 

이 문장이 우연히 눈에 띄었을 때, 때마침 창밖에는 소나기가 지나가고 있었고...

내 마음속에선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작품 한 편이 떠올랐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200여쪽 남짓한 비교적 짧은 소설인 이 작품은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앞 유리창의 와이퍼가 빠르게 움직이는 자동차 조수석에서 한 중년 여성이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채, 빗속을 천천히 빠져 나가는 앞 차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장면을 아직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으리라. 


작품의 배경 또한 8월. 여름의 한가운데다. 


'그래서였을까...?'


"둘이 서로 사랑할 때, 우린 여름 안에 있었습니다."라는 일견 평범해보이는 어느 작가의 한 문장에 이끌려, 읽고 있던 책마저 내던지고 이 작품을 서둘러 집어 들었던 이유였을까...?


  

1965년 8월의 어느 오후.

평범한 시골 농부의 아내 프란체스카는 길을 묻기 위해 집앞 진입로로 들어서는 차 한 대를 발견한다.

한편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로버트는 매디슨 카운티의 일곱 다리 중, 마지막 일곱번째 다리인 '로즈먼 다리'를 찾아 헤매다가 프란체스카의 집 마당으로 들어선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이내 사랑에 빠지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해 프란체스카는 로버트를 떠나보내고 로버트 역시 그런 그녀의 입장을 존중하여 두 번 다시 연락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서로를 그리워하다가 생을 마감하게 되고 프란체스카 사후 그녀가 두 자녀에게 남긴 일기를 통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쓰여진다는 내용이다.


줄거리 자체만 놓고 본다면 진부하기 그지없은 중년의 로맨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어디 줄거리 뿐이랴.

로맨틱했던 영화와는 달리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 작품속 그 어디에도 내 시선을 끈 문장은 딱히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특별하다. 


한때의 사랑을 추억하면서도 그 사랑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옛사랑이 아니며,

매순간 품고 있는 현재 진행형 사랑이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조차도...


사람이란 무한히 변덕스럽고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서 주고받지 않으면 금방 잊혀지고 멀어지는 법이다. 특히 사랑처럼 원초적인 감정일수록 더욱 그렇다. 


로버트와 프란체스카는 사랑을 주고받지 않았으나 또한 서로를 사랑했다. 

상대방이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지 심지어 기억이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각자 상대방을 마음속 깊이 새기면서 오롯이 추억하고 사랑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런 사랑을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실패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편과 자녀에게 솔직하지 못한 프란체스카는 손가락질 받아야 하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비난받아 마땅할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찾아온 사랑이라는 감정을 끝까지 거부하고 부인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렇다면 이것은 남편과 자녀에게 솔직한 것일까?


이런 질문에 애당초 정답은 없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는 그녀가 남편과 자녀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을 자신의 감정보다 훨씬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설령, 그 감정이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단 한번만 찾아오는 것일지라도...


 

​끝으로, 그저그런 소설로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를 이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히 읽히는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영화 덕분이 아닐까 싶다. 특히, 소나기 퍼붓는 가운데 자신이 옮겨타기만을 바라면서 천천히 좌회전하는 로버트의 차를 두 눈으로 뒤쫓는 장면은 배우의 명연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으리라는 데에 기꺼이 한 표 던지겠다. 비록 내가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연기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로버트 킨케이드를 뒤따라 몇 블럭 북쪽으로 갔다. 거기서 169번 국도는 동서쪽으로 뻗은 92번 도로와 교차했다. 그곳은 사방으로 통행량이 많은 십자로였다. 비가 내리고 안개가 더 심해져서 네거리는 복잡했다.

20초 가량 그들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가 바로 앞에, 그녀에게서 겨우 1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아직도 감행할 수 있었다. 차에서 내려 해리의 오른쪽 문으로 뛰어가, 배낭과 아이스박스와 삼각 다리 위로 올라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지난 금요일, 로버트 킨케이드가 떠난 이후, 그녀는 깨달았다. 그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심하게 과소평가했었다는 것을. 도저히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프란체스카는 그가 이미 이해했던 것을 이해하기 시작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책임감에 꽁꽁 얼어붙어 앞 트럭의 뒤창문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평생토록 무엇을 이렇게 집중해서 쳐다본 적이 없었다. 해리의 왼쪽 깜박이에 불이 들어왔다. 다음 순간, 그는 사라져버렸다. 리처드는 트럭의 라디오를 켰다.

그녀의 시선에는 모든 사물이 느릿느릿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음 속에서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그의 차례가 오자 천천히....느릿느릿...그는 해리를 네거리 안쪽으로 몰았다. 그녀는 그가 긴 다리로 클러치와 액셀러레이터를 작동하는 모습을, 그리고 기어를 바꿀 때 오른팔의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그려 볼 수 있었다. 그러더니 좌회전해서 92번 도로로 들어서 카운실 블러프스로 향했다. 블랙 힐즈로, 북서쪽으로....천천히....느릿느릿 낡은 픽업이 돌았다..... 굉장히 천천히 네거리를 돌아 서쪽으로 향했다. (....)

그녀는 그의 목소리가 고속도로에서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몇 번을 다시 살더라도, 다시는 오지 않을 거요."

리처드는 트럭을 몰아 네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향했다.   -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149~152쪽-


 


 

둘이 서로 사랑할때, 그들은 여름 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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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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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게 도무지 존재하지 않는, '공유'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노출증과 관음증에 빠져있는 이 시대에 책읽기 역시 정신적 성찰의 과정이라기보다는 어떤 책을 누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서로 확인하고 자랑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이런 시대에 소통이란 기껏해야 공감받기 위한 '공감'에 불과할 뿐, 나를 내려놓고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노력이나 겸손 따윈 더이상 찾아 볼 수 없다.


 

이처럼 읽고 쓰는 행위의 무상함을 통감하고 있는 요즘, 아니 에르노의『단순한 열정』을 읽게 되었다.


'성공한 대학 여교수가 유부남과 벌인 '치정극'을 정확한 기억력으로 적나라하게 기록한 작품일 뿐'이라는 혹평과 함께 '영혼 밀착형 글쓰기의 표본'이라는 호평이 공존하는, 소위 호불호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작품이었다. 어찌됐건, 보편적 고전은 물론 묻혀 있던 거장의 작품들도 발굴한다는 기치 아래 편찬되고 있는 어느 대형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프랑스 현지에서는 고속도로 휴게소나 대형 마트의 계산대 옆 진열대에서나 볼 수 있는 작가들만 널리 읽힐 뿐, 뒤라스상과 르노도상 등 각종 문학상은 물론 생존 작가로는 유일하게 갈리마르 총서를 낸 작가는 외면받는 나라...'


이땅의 베스트셀러 목록만 봐도 슬퍼지는 독자로서, 나에게 이 한줄의 문장보다 더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게 또 있을까?

'도대체 프랑스인들은 얼마나 교양 있고 잘났기에 여성지에나 실릴 법한, 성인 여성의 은밀한(?) 체험담에 열광하는 걸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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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녀의 '체험담'을 통해 글쓰기의 본질을 깨달았다.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에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이런 행위가 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무의식적으로 구분지어왔던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지적인 사치와 허영이 산산조각 나는 체험을 해야만 했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65쪽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이 내게 준 무엇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67쪽



 

 

흔히, 프랑수와 사강이 사랑의 허무를 집중적으로 그려낸다면, 아니 에르노는 사랑의 열정을 주로 이야기하는 작가라고들 한다.  

그런데 미안하게도 이 말은 틀린 것 같다.


 

 

프랑수와 사강이 사랑을 특히 사랑의 본질 중 하나인 허무를 세련되게('소설답게') 그려냈다면, 아니 에르노는 인생을 특히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단순하게') 이야기했다.


 


 

어느 유명한 소설가가 말했던가.

'누구나 생애 첫 소설은 쓸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면 되니까.... 그래서 두번째부터가 진짜 소설인 거...'라고...
 

 

그렇다면 우린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다. 아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의 강렬함에 비춰볼 때, 우린 누구나 마땅히 소설 한권씩은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설령 많은 사람들이 일기나 자서전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시도하지만 도중에 포기하고 만다.

 

내면의 자신과 마주한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나간 과거의 기억 한 조각조차도 우린 있는 그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고통스럽거나 어릴적 기억일수록 아름답게 각색하여 추억으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만큼 우리는 경험한 것들 지나온 시간들에 지극히 취약하다. 

 


 

아니 에르노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미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아버지가 죽은 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려다가 사실을 왜곡시켜 거짓으로 지어내야만 하는 작업에 역겨움을 느껴 결국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최대한 기억을 더듬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들을 기록하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책이 『남자의 자리』다. 

 

 

 

그 후 첫 발령지를 기다리며 여름을 보내고 있을 때, <이 모든 것을 설명해 봐야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그의 삶에 대해, 그리고 소녀 시절에 그와 나 사이에 찾아온 그 거리에 대해 말하고,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계층 간의 거리, 하지만 무어라 이름 붙이기 힘든 특별한 거리였다. 헤어진 사랑의 그것처럼 말이다.

그 이후, 나는 그가 중심인물이 되는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야기의 중간 부분에 이르러 역겨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얼마전 부터 난 소설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물질적 필요에 얽매였던 삶을 그리려고 할 때, 내겐 예술의 편을 들 권리도, 무언가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감동적인>것을 만들 권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말과 행동과 취향, 그의 생애의 주요 사건들, 나도 함께한 바 있는 그 삶의 모든 객관적 표징을 모아 볼 것이다.

추억을 시적으로 꾸미는 일도, 내 행복에 들떠 그의 삶을 비웃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단순하고도 꾸밈없는 글이다. 과거 내가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 핵심적인 내용들을 알리기 위해 사용했던 바로 그런 글 말이다.  -20~21쪽

 

 

내가 부유하고도 교양 있는 세계에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내려놓아야 했던 유산을 밝히는 작업을, 난 이제 이렇게 끝냈다. -124~125쪽


그는 나를 자전거에 태워 학교에 데려다 주곤 했다.

빗속에세도 땡볕 속에서도 저 기슭으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이었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6~129쪽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목동에서 농장 일꾼으로 다시 공장의 노동자로 마침내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소상인으로 신분 상승을 이룬 아버지와 명문대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하여 상류층에 진입한 딸의 이야기는 커다란 감정 기복도 드라마틱한 반전도 없이 술술 흘러간다.

 


 

그녀의 이야기는 부모의 쉼없는 노동과 희생으로 학업을 마치고 도시인이 되고 다시 중상류층의 반열에 올라선 수많은 이들의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아르노라는 작가와 그녀의 작품을 놓고 호불호를 논할 순 있어도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진정성 여부를 의심할 수는 없을 것같다. 그리고 나는 이 점 한 가지만으로도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란 우리가 배신'당'했을 때가 아니라 배신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므로...


 

 

 

 -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

 

 

 

 

나는, 이렇게 한번 설명해 보련다.


 

 

글쓰기란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알기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

자신의 삶과 마음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면서 타인의 그것을 이야기한다는 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거...

진정한 작가란 대중의 눈과 귀를 속이는 게 아니라, 글로써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이라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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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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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시적인 제목에 끌렸고... 게다가 작가 또한 선호하는 독일출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보다 더 시적인 책 뒷면의 문장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와 그 바로 전,  

                              바로 그 후에도

 




밤과 낮 그리고 그 사이에도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사람...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심히 약하다. 어리석고 바보같은 인물이지만 기어이 뒤돌아보지 않고는 배겨낼 재간이 나에겐 없다. 


 

시작은 잘못 보내진 한통의 이메일 때문이었다. 잡지 <라이크>지 정기구독을 취소하려던 E. 로트너...

그녀는  woerter@like.com으로 메일을 보낸다는 것이  그만 ' l '과 ' i ' 사이에 ' e '를 집어 넣어, woerter@leike.com으로 메일을 보내고 만다.


잘못 받은 메일주소의 주인은 레오 라이케(Leike)...

그는 대학에서 '이메일이 우리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감정 전달수단으로서의 이메일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인 언어심리학 전공 부교수다.

 


연초(年初)에 잘못 배달된 이메일은 그로부터 9개월 뒤 '기쁜 성탄절과 복된 새해 맞이하라'는 식상한 문구를 담은, 단체메일이 뻔해 보이는 형태로 다시 레오 라이케를 찾아간다. 문제는 이 메일이 도착한 '타이밍'이었다. 공교롭게도 메일은 레오 라이케가 5년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고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성탄절 연휴 여행을 제안한 후, 그녀의 답 메일만 초조하게 기다리던 순간에 날아든다. 그날 저녁 9시까지만 기다리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 순간, 불쑥!


레오 라이케에겐 분명 반갑지 않은, 심지어는 불쾌한 메일이었을 터...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메일을 계기로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몇 통의 메일을 주고 받기 시작하면서 장장 1년에 걸친 '소통'이 시작된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호기심과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우린 이 도시에서 발행되는 별 볼일 없는 잡지 덕에 우리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그것말고 또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 우리에겐 밤낮의 구별도 없어요. 우린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두 개의 모니터뿐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하나씩 각자 따로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우린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 갖기. 브라보! From : 레오. -p33



레오, 조금 더 얘기할게요. 이따금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쾌적하고 평온하고 조화롭고 재미있고, 때론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이번 가족 스키 여행 내내 저는 레오 라이케라는 이름의 알지도 못하는 회색 곰을 생각했어요. 여행은 괜찮지 않았어요. 고통스러웠다고요. 알아요? 당신에게 묻고 싶네요. 우리, 이 관계를 끝내면 안 될까요?  From : 에미. -p74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랍게도 이메일로만 전개된다. 


대화체에 이메일 형식을 빌린 편집으로 여백도 많아서 반나절이면 충분할 이 짧은 소설에 나는 무려 나흘이나 붙잡혀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듬어가다보면, 감정이 이입되어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추리소설도 아니건만 독자의 애간장을 제대로 태운다.  마치 노련한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랄까. 흔해빠진 통속연애소설이건만, 한번 붙잡히면 자발적으로 빠져 나오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불가능하므로...

 



에미, 우리가 이메일을 사흘이나 쉬었군요. 슬슬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From : 레오. -p145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오랫동안 그 누구와도, 당신과 그랬던 것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요. 이런 식의 감정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저 스스로도 놀랐답니다. 당신에게 보낸 이메일들에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에미다운 에미가 될 수 있었어요. '현실의 삶'에서는 무난하게 버텨나가려면 끊임없이 자기 감정과 타협을 해야해요.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주위 사람들에게 맞추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일상에서 오만 가지 자질구레한 역할을 떠맡고, 구조 전체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균형을 잘 잡아 평형을 유지해야 해요. 저 또한 그 구조의 일부니까요.

그런데 레오, 당신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아요. 당신에게 이건 기대해도 된다. 이건 안 된다........ 그런 걸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거리낌 없이 저돌적으로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사실 이건 다 당신 덕이에요. 레오. 그래서 당신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From : 에미.-p169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물론, 이들은 사람 많은 대형커피숍에 한날 한시에 머물기로 약속함으로써 직접 만나진 않지만 서로에게 서로의 '실존'을 증명해 보인다. 


참!

그리고 한가지 흥미로운 건, 레오와 에미가 직접 만나려고 한 그 이유다. 이들은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이상 진전되는 걸 막기 위해서 만남을 시도한다. 직접 두눈으로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마음 속으로 상상해왔던 것보다 못한(?) 모습에 자연스럽게 실망하길 바라면서...



온라인 세계의 만남을 오프라인 세계로 연장시키려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온라인 세계에서의 관계는 온라인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오프라인으로 이동한 순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릴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온라인 세계의 가장 큰 매력은 책임과 의무가 지배하는 오프라인 세계에서는 절대로 형성될 수 없는, 솔직담백함과 사적인 친밀성을 띠기 때문이다.


암튼,

작품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다가 예측불가한 우연적 요소로 막을 내려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더 이상의 작품 소개는 스포가 될 것 같으니 그만두련다.



끝으로,

이 작품은 낯선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들이 읽혀지고 평가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향도 끼칠 수 있다는 점에 남다른 두려움을 갖고 있는 나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어 주었고, 또한 에미와 레오의 사랑과 우정을 지지하고 성원한다는 의미에서 블로그 제목과 닉네임을 빌려왔음을 덧붙인다.

 


 

 

당신을 기다리진 않겠지만,   

당신이 돌아왔을 때 여기에 있을게요.

  

저는 당신을 위해 늘 여기에 있었어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p267 中 -


 


 


 


 


 


#-책속의 문장들...


 


모험을 찾는 사람은 정작 모험을 하지는 못합니다. -p114

 


함께 있어도 안 되고 서로에게 없어서도 안 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요. 레오,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 당신은 다시 사랑에 빠져야 해요.  -p184

 


가깝다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거예요. -p184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은 상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데서 열정을 얻는 법이에요. -p185


 

익숙해지기에 앞서 우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는군요. -p259


 

화장이 지워진 감정의 일상을 위해 약간의 화장이 필요한 거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나에게 기우는 것은 그때문이에요.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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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강상중의『마음』을 읽었어요.


일찌기 저자의 『고민하는 힘』을 인상 깊게 읽었던 터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택했습니다.


네, 그래요...


저는 언젠가부터 그러니까 스스로 더 이상 젊지 않다고 절감한 그 순간부터 까다로워(?)졌답니다. 특히, 책을 선택하는데 있어서만큼은 아주 이기적(?)으로 변해 버려서  최소한 두번은 생각하게 되는 거 같아요. 왜냐하면, A라는 책을 읽으면 B라는 책은 포기되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세상의 책들은 늘어나지만 내 생에 남은 시간들은 점점 줄어드니까... 비단 책을 선택하는 것 뿐만 아니라 나이들수록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암튼, 이 작품은 전문 작가의 작품이 아니기에 처음부터 빼어난 문학성을 기대했던 건 아니에요. 다만, 자신만의 소신과 철학으로 일본사회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저자의 목소리(?)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을 따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뜻밖에도 책을 다 읽고 난 후, 마음의 울림은 생각보다 깊었습니다.   


 

강상중 교수는 『마음』이라는 작품을 통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중심으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탐색해 나갑니다.  특히 죽음에 대해선, 과거의 추상적인 방식 대신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죽음이란 무엇이며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혹은, 갖어야 하는지를-단호하게 말해줍니다.


 

나 역시도, 언제부터인가 죽음을 잊고 생(生)과 생(生)의 취사선택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들의 죽음이라는 비극은 나에게 처음으로 죽음이 삶과 이웃하고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나는 깨달은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불길하게 여기고 꺼리는 죽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영겁의 함정'임을. 동일본 대지진의 비극 또한, 죽음이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이라는 것을 널리 알려 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음과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일상의 희극을 끊어 내고, 자신이라는 존재의 근거, 그 심연을 되돌아보게 하는 죽음이라는 비극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아버지로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때의 나는 그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속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음은 무(無)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이란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다름 아니다. 그 마음은 반드시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져 간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이어져 있기에 그저 한결같이 생(生)만을 욕망하는 쾌락의 추구라는 것이, 두렵고 그로테스크한 죽음을 암흑 속에 봉해 버리려는 헛된 시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강상중, '한국의 독자들에게' 中-


 


'죽음은 무가 아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얻기 때문이다.'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의미한 집단적 죽음'과 아들의 죽음이라는 저자의 '개별적이고 특별한 개인적 체험'이 함께 공명하면서 거대한 울림을 자아냅니다. 제대로 잘 살기 위해서라도 죽음을 명확히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흔히,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는 말 한마디로 죽음을 흔하디 흔한 예식으로 만들어버리거나 애써 외면해버립니다. 특히 전쟁이나 자연 재해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경우, 죽음은 형식적인 숫자로 표현되고 슬픔은 상징성을 띈 집단 애도로 대체되어 버리죠.


 

200명 사망...2천명 사망... 2만명 사망... 등등의 표현 앞에서 우린 무감각해져버립니다. 도무지 죽음을 실감할 수 없습니다. 실감하지 못함으로, 죽음에 대한 진정한 슬픔도 삶에 대한 그 어떤 깨달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바로 이 점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과 행방불명된 사람이 3천 명, 5천 명, 7천 명, 만명...... 큰 규모의 지진과 쓰나미가 가져온 수많은 죽음은, 피해지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실감 나는 리얼한 죽음이 아니라 그저 통계적이고 무미건조한 '숫자상의 죽음'으로 치환되어 버린 것입니다. (...)


텔레비전 화면에도, 신문이나 잡지의 사진에도, 죽은 이의 구체적인 모습은 하나도 찍혀 있지 않은 것을. 그러니까 나오히로 군이나 동료들과는 달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는 은폐된 죽음, 아니면 깨끗하게 소독된 죽음 밖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애도의 마음이나 외경의 마음을 느끼겠습니까. 어떻게 눈물을 흘린다든가 또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피한다든가 하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p169~171 中 요약발췌-


 

곰곰 생각해 보니, 저 역시나 이 나이 먹도록 죽음의 실체와 대면한 적은 없었던 것 같군요. 설령 가까운 가족의 임종을 지켰다 한들, 그건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장례식장 이용 계약서에 서명하는 따위의 현실적인 행위들과 동일 선상에 놓여 있을 뿐, 죽음의 본질이라고 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일상 즉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질 뿐이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와 같은 공간에 있던 이의 부재(不在)를 미처 실감하기도 전에 일상으로 복귀하고 맙니다. 네, 그럽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하니까요. 아니, 산 사람은 저절로 살아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삶을 초월한 죽음을 삶 속에서는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 그러므로 죽음에 대한 통렬한 슬픔도 깊은 애도도 충분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게 아닐까요? 


 

저는 주인공인 나오히로가 '라이프 세이빙'을 하면서 죽은 자(시체)와 마주하는 장면을 읽을 때, 온몸이 떨려왔더랬죠.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한 시신들을 마주한 순간, 비록 찰나에 불과했지만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죽음'을 감지했다고나 할까요. 


 

'아, 아, 죽음이란 바로 이런 거로구나...'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을 읽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에 사로잡혔더랬죠.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이 작품 역시 '똑똑히 봐라!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작정이라도 한듯 전쟁통에 죽은 사람들의 모습 즉 시신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죠. 그리고 이런 죽음 앞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공포도 살아있다는 위안도 아닌 깊은 공허 즉 삶의 허무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강상중교수의 『마음』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죽음의 실체와 삶의 허무 그 너머에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 합니다.

 


죽음의 실체를 알기 위해 '라이프 세이빙'에 나선 나오히로에게 강상중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지요.


 


물론, 죽은 이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망가집니다. 밀랍과 비슷한 황색의 치즈 같은 물체가 되거나, 가스가 가득 차서 퉁퉁 부어오른 덩어리 같은 것으로 전락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는 존엄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한 물체로 전락해 버린 그 하나하나에, 죽음 바로 직전까지 그 사람만이 간직하고 있던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해도 죽은 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고, 가족이나 육친의 슬픔이 덜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사람들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고인의 과거야말로 죽은 이에게 영원의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었던 것 같네요.

지금 창밖에는 저녁노을의 마지막 낙조가 희미해지고 별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저는 그 무서운 지진이 있던 날, 구조를 기다리며 바다 위에서 별을 바라보면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떠나가 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하게 됩니다. -p142


 

구조를 기다리며 바다 위에 떠 있던 사람들...

그들의 심정을 상상하는 마음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임을 깨닫게 되는 게 아닐까요?

죽은 사람은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기억됨으로써 마침내 영원히 존재하게 됩니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을 빛나게 해 주는 것이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죽음'가운데에는 인생의 '기억'이 있고, 그 사람의 '과거'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의해서 그 사람은 영원히 된다고 말입니다. 제가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건지 확신은 없습니다만, 시신을 한 구 한 구 인양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과 마주하는 동안, 어쨌든 '나는 살아야 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살아야 해. -p165


삶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 죽음을 찾아나섰던 나오히로...

마침내 죽음의 실체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 작품을 단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메멘토모리.

즉, 죽음을 기억하라! 일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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