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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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시적인 제목에 끌렸고... 게다가 작가 또한 선호하는 독일출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보다 더 시적인 책 뒷면의 문장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와 그 바로 전,  

                              바로 그 후에도

 




밤과 낮 그리고 그 사이에도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사람...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심히 약하다. 어리석고 바보같은 인물이지만 기어이 뒤돌아보지 않고는 배겨낼 재간이 나에겐 없다. 


 

시작은 잘못 보내진 한통의 이메일 때문이었다. 잡지 <라이크>지 정기구독을 취소하려던 E. 로트너...

그녀는  woerter@like.com으로 메일을 보낸다는 것이  그만 ' l '과 ' i ' 사이에 ' e '를 집어 넣어, woerter@leike.com으로 메일을 보내고 만다.


잘못 받은 메일주소의 주인은 레오 라이케(Leike)...

그는 대학에서 '이메일이 우리 언어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감정 전달수단으로서의 이메일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인 언어심리학 전공 부교수다.

 


연초(年初)에 잘못 배달된 이메일은 그로부터 9개월 뒤 '기쁜 성탄절과 복된 새해 맞이하라'는 식상한 문구를 담은, 단체메일이 뻔해 보이는 형태로 다시 레오 라이케를 찾아간다. 문제는 이 메일이 도착한 '타이밍'이었다. 공교롭게도 메일은 레오 라이케가 5년동안 사귀어온 여자친구로부터 결별 통보를 받고는 그녀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성탄절 연휴 여행을 제안한 후, 그녀의 답 메일만 초조하게 기다리던 순간에 날아든다. 그날 저녁 9시까지만 기다리겠다고 결심한 바로 그 순간, 불쑥!


레오 라이케에겐 분명 반갑지 않은, 심지어는 불쾌한 메일이었을 터...


그러나... 두 사람은 이 메일을 계기로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몇 통의 메일을 주고 받기 시작하면서 장장 1년에 걸친 '소통'이 시작된다.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약간의 호기심과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우린 이 도시에서 발행되는 별 볼일 없는 잡지 덕에 우리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그것말고 또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 우리에겐 밤낮의 구별도 없어요. 우린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두 개의 모니터뿐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하나씩 각자 따로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우린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 갖기. 브라보! From : 레오. -p33



레오, 조금 더 얘기할게요. 이따금 짜증스럽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엄청나게 쾌적하고 평온하고 조화롭고 재미있고, 때론 낭만적이기까지 했던 이번 가족 스키 여행 내내 저는 레오 라이케라는 이름의 알지도 못하는 회색 곰을 생각했어요. 여행은 괜찮지 않았어요. 고통스러웠다고요. 알아요? 당신에게 묻고 싶네요. 우리, 이 관계를 끝내면 안 될까요?  From : 에미. -p74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놀랍게도 이메일로만 전개된다. 


대화체에 이메일 형식을 빌린 편집으로 여백도 많아서 반나절이면 충분할 이 짧은 소설에 나는 무려 나흘이나 붙잡혀 있었다.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더듬어가다보면, 감정이 이입되어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는다.  추리소설도 아니건만 독자의 애간장을 제대로 태운다.  마치 노련한 사냥꾼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사냥감이 된 기분이랄까. 흔해빠진 통속연애소설이건만, 한번 붙잡히면 자발적으로 빠져 나오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불가능하므로...

 



에미, 우리가 이메일을 사흘이나 쉬었군요. 슬슬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 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From : 레오. -p145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오랫동안 그 누구와도, 당신과 그랬던 것처럼 격렬하게 감정을 나눠본 적이 없어요. 이런 식의 감정교류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저 스스로도 놀랐답니다. 당신에게 보낸 이메일들에서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에미다운 에미가 될 수 있었어요. '현실의 삶'에서는 무난하게 버텨나가려면 끊임없이 자기 감정과 타협을 해야해요.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주위 사람들에게 맞추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량을 베풀고, 일상에서 오만 가지 자질구레한 역할을 떠맡고, 구조 전체를 위태롭게 하지 않으려면 균형을 잘 잡아 평형을 유지해야 해요. 저 또한 그 구조의 일부니까요.

그런데 레오, 당신을 대할 때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꾸밈없이 드러내는 게 조금도 망설여지지 않아요. 당신에게 이건 기대해도 된다. 이건 안 된다........ 그런 걸 깊이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거리낌 없이 저돌적으로 글을 쓰는 거죠. 저는 그게 너무 좋아요!!! 사실 이건 다 당신 덕이에요. 레오. 그래서 당신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From : 에미.-p169 



미래를 기약할 수 없고...

실체를 확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물론, 이들은 사람 많은 대형커피숍에 한날 한시에 머물기로 약속함으로써 직접 만나진 않지만 서로에게 서로의 '실존'을 증명해 보인다. 


참!

그리고 한가지 흥미로운 건, 레오와 에미가 직접 만나려고 한 그 이유다. 이들은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더이상 진전되는 걸 막기 위해서 만남을 시도한다. 직접 두눈으로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을 때 마음 속으로 상상해왔던 것보다 못한(?) 모습에 자연스럽게 실망하길 바라면서...



온라인 세계의 만남을 오프라인 세계로 연장시키려는 욕구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러나, 온라인 세계에서의 관계는 온라인이기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오프라인으로 이동한 순간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릴 개연성이 크다. 왜냐하면 온라인 세계의 가장 큰 매력은 책임과 의무가 지배하는 오프라인 세계에서는 절대로 형성될 수 없는, 솔직담백함과 사적인 친밀성을 띠기 때문이다.


암튼,

작품은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다가 예측불가한 우연적 요소로 막을 내려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더 이상의 작품 소개는 스포가 될 것 같으니 그만두련다.



끝으로,

이 작품은 낯선 사람들에게 내가 쓴 글들이 읽혀지고 평가될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향도 끼칠 수 있다는 점에 남다른 두려움을 갖고 있는 나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어 주었고, 또한 에미와 레오의 사랑과 우정을 지지하고 성원한다는 의미에서 블로그 제목과 닉네임을 빌려왔음을 덧붙인다.

 


 

 

당신을 기다리진 않겠지만,   

당신이 돌아왔을 때 여기에 있을게요.

  

저는 당신을 위해 늘 여기에 있었어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p267 中 -


 


 


 


 


 


#-책속의 문장들...


 


모험을 찾는 사람은 정작 모험을 하지는 못합니다. -p114

 


함께 있어도 안 되고 서로에게 없어서도 안 된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군요. 레오,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필요한 거예요. 당신은 다시 사랑에 빠져야 해요.  -p184

 


가깝다는 것은 거리를 줄이는 게 아니라 극복하는 거예요. -p184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은 상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데서 열정을 얻는 법이에요. -p185


 

익숙해지기에 앞서 우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게 되는군요. -p259


 

화장이 지워진 감정의 일상을 위해 약간의 화장이 필요한 거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나에게 기우는 것은 그때문이에요.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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