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그림자 - 김혜리 그림산문집
김혜리 지음 / 앨리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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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영화평을 읽기 위해 일주일을 꼬박 견뎠던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과거가 있었기에 나는 스스로 좀 덜 망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한권의 책이 세상을 바꿀 수 없듯 한편의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권의 책이 한사람의 세계를 바꿀 수 있듯 한편의 영화가 전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된 것도 순전히 그녀 덕분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로 인해 내 삶의 명도가 한 단계 더 밝아졌다고나 할까. 


 

이십 년 전에도 그녀의 글에 감탄했었는데 이십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감탄하게 된다. 다만, 이번엔 영화가 아니라 그림이다.


 


 

    불꽃이 작렬할 때 사람들은 말하기를 멈춘다. 꼬리를 흔들며 솟구치는 불씨의 '피융'하는 비명에 귀 기울인다. 불꽃놀이란 대개 군중 속에 섞여 보게 되지만 개인의 내밀한 기억으로 애장되곤 한다.


    왜일까?

    우선 소중한 사람과 함께 구경하는 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예고된 불꽃놀이를 부러 탐탁지 않은 사람과 보러 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한 불꽃놀이는 찰나적이다. 그리하여 우리 의식에 지워지지 않는 점을 찍는다. 불은 적극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동시에, 사로잡힌 대상을 태워 무화시키는 이율배반적 원소다. 완성의 순간 곧 수십만 개의 소멸로 흩어진다. 절정은 곧 죽음이다. 흡사 벚꽃의 미학이다.


    불꽃놀이는 색종이 모자이크 기법으로 일가를 이룬 일본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1923~71)의 평생에 걸친 탐닉이었다. 같은 소재를 다룬 그의 많은 작품 가운데, 여기 소개한 그림은 불꽃의 활짝 뻗친 살이 유난히 가늘고, 밤하늘 장관을 올려다보는 구경꾼이 남자 한 명뿐이라는 점에서 도드라진다. 흰 윗도리에 검은 바지, 귀가 드러난 머리 모양을 한 그림 속 남자는 화가 본인이다. 그림 속 그는 너무 조그마해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붉고 노랗게 만개한 꽃불들은, 수면의 반영과 다정이 쌍을 이루지만 남자는 혼자다. 그날 밤 야마시타는 정녕 혼자였을 수도 있고, 깊이 고독했던 나머지 혹은 불꽃의 흥취가 도저히 남과 나눌 수 없을 만큼 충만해 사람 무리를 짐짓 생략했는지도 모른다. -63쪽


  

우선 알록달록한 둥근 원형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화면 맨 아래 사람의 뒷모습같은 건 주의깊게 보지 않았으면 놓치고 말았을 게 분명하다. 그녀의 지적 덕분에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다시 보니 지적 장애와 평생 다리를 절었다는 작가의 외로움이 불꽃으로 화하여 형형히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소멸함으로써, 존재가 증명되는 불꽃의 이미지는 일말의 오차도 없이 작가의 삶과 겹쳐진다. 기억되지 못하고 불꽃처럼 사라져간 수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만약 불꽃이 예술 작품이라면 이렇다할 흔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불꽃을 이루는 작은 불씨들일 터. 결국 (나란 존재는) 한송이 꽃도 못되는, 꽃잎에 불과하다는 걸 기어이 깨닫게 만든다. 



 

일간지나 잡지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출간한 책들은 어딘지 모르게 현시성(現時性)이 떨어진다. 

김빠진 맥주나 식어버린 튀김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고급진 재료와 수준 높은 솜씨로 만들었다 한들 이미 그 본연의 맛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 책 역시 <씨네21>에 실렸던 글을 모았단다. 그렇지만 이 책만큼은 가뿐히 시간을 초월한다. 어디 이 책 한권 뿐이랴. 김혜리의 영화 평론집 『영화를 멈추다』 역시 나온지 벌써 십여 년이 지났건만 다시 읽어봐도 세월의 무상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언급된 영화 작품조차도 마치 최근 개봉한 영화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김혜리의 시선으로 재해석된 영화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영화가 아니라 전혀 다른 또다른 영화로 탈바꿈한다.


잘 쓰는 줄은 익히 알았지만, 이토록 잘 쓰는 줄은 몰랐다.




 

타인의 몸이 아주 가까워져 마침내 나와 그의 거리가 제로, 나아가 마이너스가 될 때 인간의 육체는 홀연 하나의 장소로 변모한다. 자전거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코를 묻은 아빠의 등은 너른 평원이고, 최적의 자세로 포옹한 연인에게 서로의 품은 경건한 성당이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도입부에서 거대한 사막의 능선을 보여주는데, 잠시 후 변화한 카메라 앵글은 그 풍경이 여인의 벗은 몸이었음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상대의 몸을 극접사로 더듬는 이의 시각과 촉각에 감각된 연인의 겨드랑이는 그 어떤 바다보다 완벽한 곡선을 지닌 만이며, 쇄골에 패인 웅덩이는 애틋한 해협이다.

타인의 육체만이 아니다. 심한 통증이 엄습하면 우리는 갑자기 몸을 하나의 공간으로 느끼기 시작한다. 자궁은 동굴이 되고 내장은 협곡이 된다. 격심한 감정은 혈관을 달리며 전신에 메아리친다. 영혼과 의식이 거주하는 우리 안의 차원 없는 공간이 불현듯 실루엣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 159쪽




 

달큰시큰한 몸내음과 손끝에 어릴듯 말듯한 솜털들 그리고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의 크레마가 입안에 감도는 것만 같다. 


물론 나도 글을 읽고 감동하고 그림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나 이렇게 '느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그녀는 글을 가장 잘 쓰는 사람이다. 아니, 그냥 단순히 잘 쓰는게 아니라 가장 관능적으로 잘 쓰는 사람이다.  정말 인간적으로 까놓고 말해서, 사랑에 '풍덩' 빠지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글을 써낼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제정신(?)으로 빚어낼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마치 조물주는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똑같이 부여한 건 아니라는 걸 재확인시켜주는 것만 같다. 조물주는 정말 그녀처럼 특별한 심미안을 갖춘 이들에게만 자신을 대신해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준 게 아닌가 싶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여성학자 정희진 등등 쟁쟁한 문장가들조차 그녀의 글에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건 이처럼 조물주의 편애가 유독 그녀 한사람에게만 향한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한몫 했으리라. 


 


   

     프란스시코 데 고야(1746~1828)가 그린 '검은 그림' 연작의 한 작품인「개」는 천진한 무방비함의 초상이다.  14점의 벽화로 이뤄진 검은 그림 연작은 의뢰나 대중에게 공개될 계획 없이 그려졌다.

 

    화가는 광대한 배경에 몹시 조그만 개 한 마리를 떨어뜨려놓았다.

  

    배경인 창백한 황색 허공과 암갈색 바닥은, 형체와 스케일을 헤아릴 수 없어 더욱 위압적이다. 지평선 혹은 수평선으로 나뉜 위아래 공간의 극단적 비율은 배경을 우물이나 벼랑 바닥처럼 보이게 한다. 개의 네 다리를 집어삼킨 어둠은 홍수에 불어난 물 같기도 하고 유사(流沙)같기도 하다.  

 

    공포의 근원이 하늘에서 오는지 땅에서 오는지조차 불분명하고 사방을 둘러봐도 개를 구해줄 지푸라기 하나 없다. 순종의 표시로 귀를 뒤로 젖힌 개가 주시하는 오른쪽 허공에는 어렴풋한 음영이 어른대는데 상상력을 발동하면 인간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개의 눈빛에는 원망도 호소도 없다. 그저 영문을 모른 채 곧 내려질 심판에 한없는 신뢰를 보일 뿐이다. 그것이 자기를 끝장낼지언정.


     돌이켜보건대 우리 모두도 한 번쯤은 이 개처럼 연약하고 맹목적이었다. 고야의「개」는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에 빠져 허덕였던 인생의 연약했던 한 철을 상기시킨다. 또한, 신의 뜻과 그 종착점을 알지 못한 채 오늘도 걷고 있는 이 길의 풍경을 멈추어 돌아보게 한다. -189~192쪽 



 

 


 

사실 나는 이 글을 쓰지 말았어야 한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리뷰는 불가능하다는 걸 예감했으니 말이다. 그녀가 온몸으로 통과하며 쓴 글들을 나는 온몸을 내던져 느끼고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그껏해야 벗은 신발을 양손에 움켜쥐고 모래 사막 위를 걷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게 고작일 뿐이었다. 행여나 발이 데지는 않을까 물집이 잡히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다. 


이렇듯 나는, 나에 대한 사랑이 너무 커서 나를 내던지고 타인을 문학을 예술을 사랑할 여력도 자격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글을 남기는 건, 나 자신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 말 한마디 때문이다. 



사랑한다면, 그녀처럼

부디, 그녀처럼 세상을 무한히 신뢰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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