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파리
목수정 지음 / 꿈의지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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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좋아할 거라면서 누군가로부터 추천받은 책이다.


성격상 여행을 매우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는지라 평소에도 여행 서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새로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도 아닌, 이미 닳을대로 닳은 프랑스 파리라니...  기껏해야 '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어느 보보(보헤미안 부르주아)의 하릴없는 '덕질'이겠거니 싶었다. 그저 추천해준 사람과 앞으로 몇 차례의 만남이 더 있을 예정인지라 면전에서의 난처함이나 면해볼 요량이었다.


 

수천 번쯤 사진으로 보았던 어떤 곳에 다다랐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두 가지다. 마침내 동경하던 그곳에 이른 가슴 벅참. 그리고 보자마자 금세 식상해져서, 온몸으로 그것을 감각하기보다, 사진 한 장 박고는 서둘러 자리를 떠나고 싶어지는 마음이다. 자주 우린 명소에 가서 실망을 경험한다. 혹은 더 구체적으로 실망할까 봐 실체에 다가서길 외면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46쪽



 

순간 속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어디 명소뿐이겠는가.

사람이나 책 혹은 어떤 사상이나 행위 등등 한때 열렬히 좋아하고 추종했던 것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결국 실망하고 외면한다. 본질보다는 겉모습(허상)을 좋아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드물긴 하지만 욕망이 제거된 시선으로 본질에 다가서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신의 욕망을 투영시켜 파리라는 도시를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에게 파리는, 우리 각자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존재하듯, 그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이 집에서 뒹굴던 잡동사니가 저 집으로 옮겨져서 다시 뒹굴다가 몇 년 뒤, 다시 태양 아래로 이끌려 나와 새 주인을 기다리고, 그 사이에 1~2유로의 돈이 오가는 이 다락방 비우기('비드 그리니에 Vide Grenier')의 룰. 마음만 먹으면 21세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물물교환에 가까운 사람들 간의 거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람살이가 자본의 논리에서 조금만 길을 틀어도, 우리 얼굴엔 생존을 위한 고단한 긴장 대신, 느긋한 휴식의 미소가 어른거린다는 사실도. -66쪽



 

재미있는 건, 정류장을 안내하는 방송 목소리가 한국은 낭랑한 20대 여자 목소리인데 반해, 여기는 차분한 중년 여성, 혹은 중년 남성의 목소리라는 사실 (새로 생긴 트랩에서 그것은 종종 5살 짜리 아이의 목소리로 대치되곤 한다). 이는 프랑스에서 만날 수 있는 거의 모든 안내 방송 목소리에 해당되는 사실이기도 한데, 20대 여자만이 여자로서의 유용성을 인정받는 듯한 우리 사회의 암묵적 풍경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75쪽



 

'어...?!'

글쓴이의 사뭇 다른 시선에 한껏 풀어져있던 자세를  나도 모르게 바로 잡았다.

최소한 이 책만큼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베르사이유 궁전과 센느강이 얼마나 화려하고 매혹적인지 혹은 파리가 얼마나 지저분하고 파리지앵들이 불친절한지 등등으로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보통 여행 에세이들은 자아도취(혹은 자기자랑) 아니면 자기발견(혹은 자기개발) 로 적당히 치장되어, 책 한 권 정도에 불과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2~30대 여성 독자들의 환상을 자극하고 만족시키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출판되는 것 같다.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행복감에 빠져들게 해야지 불편한 감정이나 현실 인식을 불러일으켜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불문율을 교묘하게 깨뜨린다.


그 후, 나는 파리 시내에 있는 가장 큰 공동묘지, 페르 라셰즈를 종종 들렸다. 오자마자 접했던 하나의 인상적인 죽음은 삶의 끝으로부터 이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내게 전했고, 나는 그 길을 따랐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도시에서 내가 일방적으로나마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죽은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들을 만나 차분히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82쪽



글쓴이에 대한 호기심이 존중감으로 바뀌었다.  

단순히 솔직 발랄하다고 하기엔 가닿는 시선들이 너무 넓고 깊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고 훨씬 더 잘 쓸 수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살짝 힘을 빼고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랄까. 

분명 자신만의 '히스토리(history)'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리라.   


니체는 '구걸은, 주는 자도, 받는 자도 친구로 대할 수 없게 만드는 나쁜 행위'라고 규정한 바 있다. 거지는 스스로를 불쌍하게 만듦으로써 뭔가를 받고자 하는 자이기 때문이란 거다. 반면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부의 재분배라는 차원에서, 그에게 구걸하는 모든 걸인에게 주머니를 털어주었다. 거지들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내 안에서 니체와 사르트르가 싸우는 걸 느낀다. 대부분은 사르트르가 승리한다. 그들에게 내 동전 몇 닢을 털어주는 것이 교회에 가서 헌금하는 것보단 훨씬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이 최종적으로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돈을 건네게 한다. -257쪽


 

파리의 수많은 거지와 소매치기들을 보면서 이렇게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설령 서로를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 뒷모습만을 보며 따라가도 괜찮을 것 같다. 


 

야트막한 능선으로 이루어진 뷔트 쇼몽(Buttes Chaumont) 공원에서 오전 한때를 보내다가 파리의 먹자골목인 '붉은 아이들의 시장(Marche des Enfants Rouges)'에서 쌀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센느강변을 따라 걷다가 '라탱 구역(Quartier Latin)' 으로 접어들어서 2,30년대 고전영화 한 편을 감상하거나, 입장료가 무료인 '빅토르 위고의 집' 혹은 '기메 박물관'을 찾아가리라.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아르스날 항구(Port Arsenal) 에서 석양을 바라보면서 와인 한잔으로 하루를 마감해도 좋겠다. 



 "Si vales bene est, ego valeo. 시 발레스 베네 에스트, 에고 발레오"

(당신이 잘 계신다면, 잘되었네요. 저는 잘 지냅니다) 라고 속삭이면서...  



나는 이 책으로 목수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지만, 한 눈에도 저자의 '대표작'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엔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책들이 셀 수도 없이 많고, 그녀의 눈길이 머물렀던 세계가 넓디 넓으며, 무엇보다도 그녀가 잠 못들고 고민하며 지새웠을 밤들이 너무 길었을 거라는 걸, 그녀의 문장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여행 안내서라는 본분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느낌과 감상을 내세우지 않는다. 최대한 멋부리지 않고 담담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한 흔적들 속에서 오히려 저자의 깊은 내공이 느껴졌다.  세상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알고,  세상과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도전도,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여정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녀의 또다른 책들도 읽어봐야겠다.

더불어 나에게 이 책을 추천해준 분에게도 감사 인사를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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