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지음, 김명남 엮고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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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갔을 때, 마침 작가 초청 강연이 시작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타이밍이 절묘하기도 했지만 나름 관심있었던 작가였기에 계획엔 없었지만 2시간을 기꺼이 투자하기로 했다. 강사는 기계적으로 준비된 멘트만을 하는 것 같았다. 태도는 무성의하다고 할 순 없지만 무심했고, 내용은 약간 과장하면 오프라 윈프리쇼나 생방송 아침마당에 나올 법한 이야기들이었다. 

상처, 트라우마, 고통, 대면, 용서 등등...

지극히 자기연민적 단어들로 가득 채워졌던 강연이 끝나자 다들 재밌었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로선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사실, 남들은 재밌다고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들을 꼽아보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표를 얻는다. 예를 들면, 유명인사 강연 듣기라던지 전통있는 지역 축제에 간다던지 아니면 맛집 방문이나 익스트림 스포츠 하기 등등 말이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쓰고 나서야 실은 이 모든 것들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삽질'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머릿속으론 '도대체 누가 이따위를 두고 재밌다(혹은 맛있다)고 한 거야?'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바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같은 사람들 덕분이리라. 단, 오해하진 마시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아니라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처럼 경제적 댓가를 받고 글을 쓰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요즘에는 굳이 경제적 이득이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재밌다(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그저 내가 이런 부류로 분류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이 글을 쓴다.


 

1995년 3월 11일부터 18일까지, 나는 자발적으로 또한 돈을 받고서, 카리브해 7박 크루즈(7-Night Caribbean) 여행을 경험했다. 내가 탄 배는 4만7,255톤 규모의 동력선 제니스 호로, 현재 남부 플로리다에서 운영되는 20여 개 크루즈 회사 중 하나인 셀리브리티 크루즈가 소유한 배이다. 선박과 시설은, 이제 내가 좀 아는 이 산업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단연코 일급이다. 음식은 훌륭하고, 서비스는 흠잡을 데 없고, 육지 관광과 선상 활동은 사소한 수준까지 최대의 재미를 제공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배는 워낙 깨끗하고 하애서 꼭 삶은 것처럼 보인다. 서카리브해의 파랑은 아기포대기 파랑부터 형광 파랑까지 다채롭다. 하늘도 마찬가지다. 기온은 자궁 속 같다. 태양 자체가 우리에게 알맞게 설정되어 있는 것 같다. 승무원 대 승객 인원 비는 1.2에서 2사이다. 정말 호화 크루즈다. - 25~26쪽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월간지 <하퍼스>로부터 취재 의뢰를 받고 일인당 2,700달러 정도 하는 호화 크루즈 여행권을 받는다. 당연히 원고료는 따로 받기로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초호화 크루즈 여행의 문제점만을 집중 취재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순전히 느낀 그대로를 기록해달라고 요구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진짜(!) 느낀 그대로를 기록한다. 그것도 무려 엄청난 각주를 포함하여 170여 쪽에 걸쳐서.



 

투명인간이 해주는 것 같은 신비로운 방 청소가 어떤 면에서는 근사하다는 걸 나도 인정한다. 누군가 짠 나타나서 방을 지저분하지 않게 만든 뒤 도로 짠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진정한 지저분쟁이의 꿈 아닌가. 꼭 죄책감은 쏙 뺀 채 엄마의 보살핌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는 나름대로 스멀스멀 솟는 어떤 죄책감이 있다. 깊은 불안감과 불편함이 차츰 증가하여, 결국에는ㅡ적어도 내 경우에는ㅡ 기이한 형태의 응석받이 편집증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이 근사한 투명인간 방 청소 서비스를 이틀 겪은 뒤 내가 언제 1009호실에 있고 언제 없는지를 페트라가 어떻게 아는지가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페트라를 직접 본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페트라는 1009호 객실 청소 담당 직원의 이름이다) -85쪽


이전에 나는 미국 밖을 나가본 적이 거의 없고, 이처럼 고소득 무리의 일원으로 나가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지금 항구에서는ㅡ이렇게 멀찍이 떨어진 12층 갑판에서 그냥 내려다보기만 하는데도ㅡ 내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또한 불쾌하게 의식하게 된다.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갑자기 내가 백인이란 사실을 의식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저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을 그만둘 수가 없다. 저 무덤덤한 자메이카인들과 멕시코인들에게, 특히 네이디어의 백인이 아닌 하급 직원들에게. (...) 호화 크루즈 여행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절망은,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나의 본질적이고 새삼 불쾌한 미국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일부 비롯된다. 그리고 이 절망은 항구에서 절정에 달한다. 난간에 서서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안에 속하는 사람들 무리를 내려다볼 때, 이 위에 있든 저 밑에 있든 나는 미국인 관광객이고, 따라서 그 정체성상 크고, 살찌고, 벌겋고, 시끄럽고, 거칠고, 오만하고, 자기 생각뿐이고, 응석꾸러기이고, 외모에 신경 쓰고, 창피해하고, 절망하고, 탐욕스럽다. -104~106쪽


그리고 모든 상층 갑판의 모든 카트에는 풀타임으로 일하는 수건 남자들 특수부대가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당신이 몸 앞뒷면을 웰던으로 잘 익히고 이제 그만 갑판 의자에서 가뿐히 일어날 때 수건을 집어서 방으로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심지어 카트의 '다 쓴 수건'칸까지 가져갈 필요도 없다. 당신의 궁둥이가 의자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홀연 수건 남자가 나타나서 당신 대신 수건을 카트에 담아줄 것이기 때문이다. (...) 11층 갑판 수영장 옆 윈드서프 카페에서는 언제나 격식 없는 뷔페 형식으로 점심을 먹을 수 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카페테리아를 우울한 경험으로 만드는 길고 느린 줄이 없고, 앙트레 요리만 73가지 종류가 있으며, 엄청나게 맛있는 커피가 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노트를 한 뭉치 들고 있거나 쟁반 위에 음식을 너무 많이 담기만 했어도, 당신이 뷔페에서 떨어져 나오자마자 홀연 웨이터가 나타나서 쟁반을 들어줄 것이다. -78~79쪽

 

 

저임금 유색인종들이 제공하는 황제급 서비스와 무한정 제공되는 고급 음식들에 둘러싸여 저임금 유색인종 직원들보다 더 열악한 삶에 직면하여, 호화 여객선에서 잠깐 하차한 관광객들에게 조잡한 기념품들을 판매하려 애쓰는 현지인들의 슬픈 미소에 익숙해지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어쩌면 지나치게 짧은 시간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데이비스 포스터 월리스의 글이 이렇게 길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재밌으면서도 서글프진 않았으리라.  



 

모두 아홉 편이 실려 있는 에세이 중 첫 번째인 <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번 다시 하지 않을 일>을 읽고 나서 고민에 빠졌다. 계속 읽자니 그의 글들이 너무 방대하고 난해해서 그가 쳐놓은 선들을 따라가다가 나도 모르게 미궁에  빠져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그만 읽자니,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엄청나게 길고 요란한 문장들을 구사하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작가의 인력(引力)에 저항하려면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나는 하루를 쉬어 갔다.  다들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다시 읽고 싶은 이런 글을 쓴 저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상상하면서...


 


 


 

 

 

알고 보니, 그는 십대 때 우울증을 앓았고 알콜중독에 시달렸으며 카프카와 도스또옙스키를 흠모했고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를 숭배했으며 조너선 사프란 포어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후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상태였다. 

이 말인 즉슨,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글들은 어쩌면 이 단 한 권으로 끝날 소산이 지극히 크다는 뜻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우리나라에 번역되지 않은 그의 책들이 추가로 번역 소개될 여지는 10% 미만이라는 데에 한표 던진다. 그의 문체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고 단번에 익숙해지긴 힘들지만 일단 마음을 열고 나면 놀라운 흡입력으로 빠르게 읽힐 뿐만 아니라 뜻밖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우와, 내가 이런 문장을 한번에 읽고 단숨에 이해하다니...'


그만큼 그는 유능한 작문 강사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어법 전문가였다. 브라이언 A 가너가 편찬한 <현대 미국 영어 어법 사전>(글제목: '권위와 미국 영어 어법')에 대한 그의 서평을 읽어 보라! 글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다할지라도 문장의 형식과 관점의 올바름에는 완전히 감동하고 감탄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이 책을 번역한 번역가의 이름에도 눈길이 한번 더 갈 것이고, 그 이름 석자를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앞으로 읽을 책을 선택할 때 또하나의 기준으로 삼을지도 모른다. 부디 그러길 바라마지 않는다.



끝으로, 이런 글들을 쓴 작가도 작가지만 이런 글들을 실어 준ㅡ그것도 원고료까지 주면서ㅡ 미국의 잡지사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또다른 한편으론 이점 역시 지극히 미국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나라는, 어느 때 보면 더할나위 없이 야만적이고 어느 때 보면 더할 나위 없이 문명적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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