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H. 카 러시아 혁명 - 1917-1929
에드워드 H. 카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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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로 너무나 유명한 E.H. 카는 역사학자라기보다는 외교관으로 오랜 기간 일을 했다.

그를 두고, 일본의 역사가인 가토 요고는 '이상한 역사가'라고 했고, <코뮤니스트>의 저자는 '포스트19세기의 리버럴리스트에서 유사코뮤니스트로 변신했다'고 했다.


내가 E.H. 카에 다시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내눈에 비친 E.H. 카는 이상하지도 유사코뮤니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담당 외교팀에서 근무하면서 러시아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퇴직 후 1944년부터 1977년까지 30년여 년 동안 기념비적 저서인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를 썼다. 이 책은 열네 권짜리로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방대한 양이기 때문에 30분의 1로 요약한 책이 바로 <러시아 혁명: 1917-1929>다. 30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인이 읽기엔 쉽지 않다.


일단, 무엇보다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진 게 주원인인 것 같다. 암튼, 이 책은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같은 해 10월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러시아가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은 혼합된 성격을 띠었다. 이 혁명은 독단적이고 낡아빠진 전제정에 맞선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입헌주의자의 반란이었다. 그것은 '피의 일요일'이라는 잔혹한 학살에 의해 점화되어 최초의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대표소비에트(노동자대표평의회) 선출로 이어진 노동자의 반란이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조정되지 않은, 종종 대단히 가혹하고 폭력적인 광범한 농민 반란이었다. 이 세 개의 실은 결코 하나로 엮이지 않았고, 혁명은 몇 가지 비현실적인 헌법상의 양보를 얻은 채 쉽게 진압됐다. 1917년 2월 혁명에서도 동일한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이번에는 전쟁에 따른 피로와 전쟁 수행에 대한 광범한 불만 때문에 이 요인들이 더욱 강화되고 두드러졌다. 차르가 물러나지 않는 한, 반란의 물결을 막을 길은 없었다. 전제정은 의회 두마의 권위에 바탕을 두는 민주적 임시정부 선포로 대체됐다. 하지만 혁명의 혼합된 성격은 곧바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났다. 임시정부와 나란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ㅡ수도는 1914년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ㅡ가 1905년의 선례에 따라 재건됐다. -15쪽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온 러시아는 백군과의 내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트로츠키의 주도로 붉은 군대(적군)가 만들어지는데, 트로츠키는 이때 차르 시대의 훈련받은 장교들을 대거 받아들인다. 적군이 백군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구체제가 쌓아놓은 탄탄한 군대조직이었던 셈이다. 적폐 세력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트로츠키는 레닌보다 현실적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두 개의 주요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중앙집중적인 통제와 관리, 소규모 생산 단위의 대규모 단위로의 대체, 통일된 계획 조처 등 경제적 권한과 권력의 집중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업적 금전적 형태의 분배로부터 이탈, 무상이나 고정 가격의 기본 재화와 서비스 공급 도입, 배급, 현물 지급, 가정된 시장이 아닌 직접 사용을 위한 생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요소 사이에 아주 뚜렷한 구분선을 그을 수 있었다. 집적과 집중 과정은 비록 전시공산주의라는 속성 재배 온실에서 지나치게 번성했지만, 혁명의 첫 번째 시기와 유럽 전쟁 중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과정의 연속이었다.

(...)

집적과 집중 정책은 산업에 거의 배타적으로 적용됐고, 이 정책을 농업에도 적용하려는 시도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 화폐에서 이탈하고 '자연' 경제로 대체하는 정책은 사전에 구상된 어떤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후진적인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나온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프티부르주아의 열망을 품은 농민의 반봉건주의 혁명과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부르주아 반자본주의 혁명을 결합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도시와 농촌의 갈등에 대처하려는 시도가 갖는 근본적인 난점의 표현이었다. 이 정책은 결국 전시공산주의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그것을 파괴한 모순이었다. -54~55쪽 중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끝내자 식량 위기가 찾아왔다. 자급자족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농촌에서 잉여 생산물을 도시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농민의 희생을 강요한 게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레닌의 처방은 신경제정책(NEP)이었다. 즉, 농민이 잉영 생산물을 자율적으로 암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이들이 필요로 하는 소비재를 만드는 공업과 상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한마디로, 신경제는 레닌이 공산주의에서 한 발 물러난 타협의 소산이자 일정 부분 구체제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신경제정책은 농민을 재난에서 구해 준 반면, 산업과 노동시장을 혼돈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경제정책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착취"의 약자라고 선언하며 '노동자그룹'을 자처한 당내의 한 지하 반대파 그룹은 4월 당대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신경제정책이 농민에 대한 양보 정책이라고 가볍게 설명됐을 때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은 이 양보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하는 점이었다. 혁명의 영웅적 기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과 산업 혼란의 영향 속에서 분산과 해체, 극적인 감소를 겪었다. 산업 노동자는 이미 신경제정책의 의붓자식이 됐다. -88쪽




레닌이 주도한 신경제정책은 농촌에 이익을 가져다주면서 식량 부족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이에 따른 대가는 산업화의 부진과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 계속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 기류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백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레닌과는 달리 농촌의 잉여생산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비록 과거 반대파(멘세비키)였던 전력과 노동의 군사화를 주창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진영에서 의심을 사고 있었지만 트로츠키만큼 당시 러시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가도 전무했다. 그러나 현실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이 연합해서 反트로츠키 대열을 주도하면서 트로츠키는 서서히 고립되어갔다.




카메네프는 인격의 힘보다는 지성이 더 많았다. 허약하고 허영심과 야심이 많은 지노비예프는 빈 왕좌를 차지하려는 열망이 지나칠 정도로 충만했다. 그는 부재한 지도자의 권위에 지나칠 정도로 굴종하는 언사로 당대회를 주재하고 발언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레닌의 지혜를 해설하는 권위자인 양 행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겸손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기 몫으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면서 레닌을 '스승'이라고 거듭 칭했다. 레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연구해서 바르게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조직에 관해 말할 때면 관료제에 대한 레닌의 비난을 되풀이하면서, 이런 가시 돋힌 말이 대부분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위선적이게도 무시했다. 민족 문제에 관한 보고에서 스탈린은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단호하게 지지했으며, 자신에게 가해진 '조급하다'는 비난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101쪽




레닌이 말년에 스탈린의 권력욕과 교활함을 꿰뚫어보고 멀리하려 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스탈린은 소수민족인 그루지아(조지아) 출신으로 심지어 슬라브족도 아니었다. 全세계 공산화를 지향했기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주의 색체가 내면화되어 있었고, 그의 이런 성향은 향후 소비에트가 국가주의와 일당독재로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많은 식민 지역에서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공산주의=민족독립'이라는 등식이 손쉽게 성립되었고, 이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처음부터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에 의한 반제국주의 혁명에는 동의했지만 그 뒤에 일어나야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반자본주의 혁명은 애초 시도할 마음 자체가 없었다.




1921년 창건된 중국 공산당은 당시 당원이 1000명 남짓으로 주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었다. 보로딘이 도착하기 전에, 명백히 코민테른의 선동에 따라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국민당에도 가입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분명, 공산당원 다수가 이중으로 노동당원 자격도 갖고 있던 영국을 본보기로 삼았다. 입당 조치의 의도는 규율 있고 헌신적인 집단이 더 크고 느슨한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조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쑨원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의 불일치를 은폐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혁명에 종속되는 한 어려운 일은 없었다. 보로딘이 국민당 강령에 지주의 토지 몰수를 포함시키라고 재촉하고 나서야 쑨원은 완고하게 저항했고, 결국 보로딘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150쪽


위기는 국민당 자체의 분열을 통해 발생했다. 국민당 좌파를 대변하고 보로딘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우한 정부는 민족 혁명에 대한 지지를 사회혁명의 목표에 대한 말뿐인 동의와 결합했다. 우한의 남쪽에 있는 후한 성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했는데, 이때가 마오쩌둥이 처음으로 농민의 옹호자로 이름을 날린 순간이었다. 난창에서는 장제스와 그의 장군들이 우파로 급격히 변신하면서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심에 사사건건 끼어드는, 다루기 힘든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와 공산당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현했다. 영국 정부의 바뀐 태도도 이런 상황 전개를 부추겼다. -155쪽




1920년대 초, 내전이 마무리되자 러시아는 대외 외교에 치중하지만 러시아에 호의적인 나라는 독일 정도였다. 특히, 레닌은 독일의 전시 경제의 일환인 중앙집권적 통제와 계획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쟁 전에 자본주의가 자체의 내적 발전에 의해 향하고 있던 최종 단계는 독점 자본주의였다. 레닌이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지칭한 과정에 따라 전쟁은 독점 자본주의가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을 촉진하고 있었다. 국가독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물질적인 준비"를 구성했다. 레닌은 1917년 9월에 "대규모 은행 없이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 모델을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후진적 경제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 내재한 온갖 어려움을 제기했다. 러시아에서 최근 산업 성장이 매우 집중되고 국가에 직간접으로 의존했지만, 여전히 산업은 원시적인 조직 단계에 있었고 사회주의 계획가들에게 제공할 만한 이론적 실천적 원조나 지침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계획경제라는 원칙에는 어떤 저항도 없었다. 1919년 당 강령은 경제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인 국가 계획"을 요구했으며, 이때부터 경제 문제에 관한 당과 소비에트의 결의안에는 항상 "단일한 경제 계획"의 요구가 포함됐다. -163쪽




소비에트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변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 선전용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이미 全세계 공산화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나라도 러시아와 접촉하거나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공산당에 입당하는 당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춘 자만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과는 달리 누구나 마음(열정)만 있으면 공산당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신규 공산당원들을 장악한 인물은 당연하지만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이렇게 레닌 사후 공산당을 아래서부터 서서히 장악해 나가는 한편, 트로츠키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다른 소수 반대파들에 대해서도 '편향'과 '반당'이라는 굴레를 씌워 몰아낸다.




당과 국가의 최고 권위는 하나의 기관ㅡ당 정치국ㅡ에 집중됐고 이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반대파가 공식적으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사례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구 민주주의의 관행에서 익숙한 반대파라는 단어는 집권당에 대한 반대당, 즉 야당을 의미했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양립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음 단계에서 소수 반대파는 "편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치적 차이가 아니라 이론상의 이단을 가리키는 언어였다. 결국 소수 반대파 그룹은 단순하게 '반당(反黨)'이라는 낙인이 찍혔는데, 당에 대한 적대는 국가에 대한 적대와 무조건 동일시됐다. -181쪽




이렇게 해서, '공산당=국가'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스탈린식 통치는 소비에트 사회에 씻을 수 없는 폐해를 남기게 된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방식은 결국 관료화를 불러왔고, 관료화는 부패와 통제를 일삼게 된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권력은 절대권력을 지향하게 되고 절대권력은 통제와 독재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소비에트 사회는 점점 더 혁명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1928년 12월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출판을 당과 국가의 통제 아래 둔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이 통제는 사실상 전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협회가 행사했다. 이런 결말을 중앙위원회나 더군다나 스탈린이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아마 바라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타락은 위에서부터 확산됐다. 하급의 소규모 독재자들은 상급의 권력자를 구워삶거나 아첨하고, 위의 독재자가 사용하는 방법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경쟁자를 제거했다.

권력을 강화하고 집중하는 움직임은 특히 법의 영역에서 두드러졌다. -182쪽




한편, 신경제체제로 굴락(부농)과 중농들 위시한 농촌이 혜택을 본 반면, 도시 노동자들은 식량난과 낮은 임금에 시달렸다. 빠른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농민을 위한 정책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 기획 시도된다. 바로, 5개년계획이다.



1차 5개년 계획의 채택은 소련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경제정책의 본질은 농민 경제에 일정한 자유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농민 경제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무분별한 처사였을 것이다.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이 "사적 상업에 어느 정도의 자유"를 제공하면서도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 역할"을 보중했다고 주장했다. 신경제정책의 목표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공식 당국은 신경제정책이 폐지됐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소규모 사적 산업의 생산물과 무엇보다도 농산물을 거래하는 자유시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주요한 경제 활동이 계획의 지시에 종속되고 농민에게 점차 가혹한 압력이 가해지자, 신경제정책의 생존은 이례적인 동시에 불안정한 현상이 됐다. -225쪽




공산주의 혁명은 분명 레닌의 작품이었지만,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사회는 스탈린에 의해 구상되고 구축되었다.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떼어놓고는 러시아의 1917~1929년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터인데, E.H 카 역시 두 인물 특히 스탈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빼먹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스탈린은 대중을 경멸하는 태도로 바라보았고, 자유와 평등에 무관심했으며, 소련 이외의 어떤 나라에서든 혁명의 전망에 대해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찍이 1918년 1월에 당 중앙위원으로는 유일하게 레닌에 반대해 "서구에는 혁명 운동이 전무하다."고 주장했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스탈린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덕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들을, 어쨌든 본인을 깊이 감동시킨 유일한 정치 신조인 러시아 민족주의와 조화시킬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작은 나라에 대한 스탈린의 처리 방식에서 민족주의는 쉽게 국수주의로 변질됐다.

레닌과 초기 볼셰비키에게 준엄하게 비난받았던, 러시아의 오랜 反유대주의의 가락이 들렸다. 공식적으로는 반유대주의가 계속 비난을 받았지만 어조의 단호함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미술과 문학에서 혁명 초기의 열정적인 실험주의가 포기되고, 그 대신 점점 더 엄격해진 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전통 양식으로 회귀해야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학파와 법학파는 빛을 잃었고, 과거 러시아와의 연속성을 찾는 일은 이제 질책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는 레닌뿐 아니라 마르크스도 거부했던 과거 러시아의 민족적 배타성으로 복귀하는 신호였다. 이것은 스탈린 체제를 러시아 역사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았다. -251~252쪽




E.H 카의 러시아 혁명사는 1929년에 끝난다.

하지만 그 이후 소비에트 사회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대를 거쳐 2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가 간신히 살아남는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승자의 편에 섰다는 점이다.

만약 러시아가 2차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공격에 무너졌거나 싸움을 포기한 채 무기력한 방관자로 남았더라면 혁명 이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소비에트의 손을 들어줬고 그 반향은 뜻밖의 형태로 멀리 퍼져나갔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예측과 바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 생겨난 흥분 상태가 대체로 파괴적인 수준에 머물면서 혁명적 행동을 위한 어떤 건설적 본보기도 제시하지 못한 반면, 후진적인 비자본주의 나라에서는 흥분 상태가 더욱 널리 퍼지고 생산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거의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주요 산업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혁명 체제의 위신 덕분에, 자연스럽게 소련은 1914년 이전에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서구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에 대항하는 후진국 반란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서구의 눈에 소련의 자격을 의문시하게 만든 오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후진적인 비자본주의 세계의 반란을 통해 자본주의 열강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으며, 그 잠재력은 아직 소모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스스로 정한 목표와 그것이 만들어낸 희망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혁명의 기록은 결함과 모호함으로 점철됐다. 하지만 혁명은 현대의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도 세계 전체에 걸쳐 더 심대하고 지속적인 반향을 미치는 원천이었다. -280쪽




<러시아 혁명사>라는 대작을 남겼음에도 E.H 카는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접은 커녕 공산주의자, 친소련학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녔다. 그는 역사학계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받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쓴 책이 다름아닌 <역사란 무엇인가>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데, 일본인들은 그의 주장이 전범국인 일본의 항변을 암암리에 대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어째서 E.H 카의 유명세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걸까? 도대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E.H 카의 말은 참으로 옳다.

러시아 혁명을 냉전이 한창이던 1960~70년대에 바라본 것과 소련이 해체된 후인 1990년대 그리고 다시 한 세대가 더 흐른 현시점에서 바라볼 때 그 의미와 평가는 결코 같을 수 없다.

E.H 카는 당시 냉전의 프레임으로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고 평가했던 보편적 역사관을 기꺼이 외면했기에 외면당했다.

그가 30여 년에 걸쳐 냉철한 언어로 기록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앞으로 19세기 초반의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려는 후세들에게 바이블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E.H 카의 대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 혹은 그 요약본인 <러시아 혁명: 1917-1929>가 되어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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