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읽는 러시아 역사
마크 갈레오티 지음, 이상원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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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푸틴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역사책은 너무 두꺼운 반면 실제 러시아 역사는 천년 밖에 되지 않아 놀랐다.

그나마도 북방 민족이 남하하여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을 중심으로 들어선 '루시'가 그 시초란다.




류리크공이 라도가 호숫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린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그림은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12세기 당시를 기록한 유일한 문헌인 <원초연대기>는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원문에서는 이들을 '바랑기아인들'이라고 표기하고 러시아어로는 '바랴그'라는 명칭이 있다.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바이킹으로 통일한다-옮긴이)을 몰아내기 위해 슬라브 민족들이 수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추드, 메리아, 라디미크, 크리비크 등 무수히 많은 토착 부족들의 자치 시도는 또 다른 전쟁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법과 서열, 영토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이들은 바이킹에게 가서 통치자를 청했다. "저희 땅은 드넓고 비옥합니다만 질서가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통치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류리크(862?~879)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류리크 왕조는 17세기까지 러시아를 지배했다. 바스네초프의 그림을 보면 용 머리가 특징적인 바이킹 배를 타고 온 류리크가 형제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라도가 호숫가에 내려선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손에 든 도끼는 그가 전사공후라는 것을 강조한다. 새로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족 대표단이 예의를 갖추고 이들을 환영한다.

이 그림은 바이킹의 뾰족한 투구며 슬라브족의 옷에 놓인 전통적 자수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충실하게 당시를 재현한다. 새로운 지배자에게 새로운 신민들이 공물을 바치는 장면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명백한, 매우 명백한 거짓이기도 하다. -20~21쪽




당황스러웠다.

첫 페이지부터 '거짓의 역사'라고 선언하고 시작하는 역사책이라니....

시차만 11시간이 나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거대한 영토를 보유한 러시아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도 다시 없을 것 같다.


'강대국인가?' 하면 국제 무대에서 늘 조연이고, '선진공업국인가?' 하면 무기를 제외하곤 'Made in Russia'는 눈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땅만 큰 대국인가?' 하면 세계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했고, '문명의 후발주자인가?'하면, 톨스토이와 <백조의 호수>의 나라다. 그만큼 러시아는 땅크기만큼이나 다면적일 뿐만 아니라 다층적이기도 하다.

거칠고 야성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정이 넘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이들의 역사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류리크는 도레스타드의 로릭, 즉 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경건왕에게 미움을 사서 860년에 추방된 덴마크의 야심가로 추정된다. 류리크의 도착 시기(860~862)가 서구 연대기에서 그가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침략자 겸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슬라브 땅을 알고 있었다. (...) 고향을 떠나야 했던 도레스타드의 로릭이 슬라브 지역을 새로운 공국으로 삼으려 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 가능하다. 그는 우선 라도가에 성채를 지어 정착했고 내륙의 교역 거점을 차지해 홀름가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이 바로 고대 러시아의 중심지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새로운 도시'라는 뜻)가 된다. 하지만 그가 슬라브인들의 초청을 받았다는 증거는 나온 적 없다. 류리크의 여정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한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22쪽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할 즈음 아스콜드와 디르라는 바이킹 모험가 두 사람이 부하들을 이끌고 남서쪽 슬라브 도시인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는 야심한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보다 반세기쯤 앞서 남쪽의 흑해변을 약탈한 스칸디나비아 출신 모험가들도 이미 시도했던 일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이들 바이킹 정복자들을 '루시'라 불렀고(스웨덴 인을 뜻하는 핀란드어 단어 '루오치(Ruotsi)'에서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루시의 땅이 탄생했다. -24쪽




지도를 찾아보니, 노브고로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중간 쯤에 위치해 있었고,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유럽식 도시로 건설한 새로운 도시였고, 모스크바는 사냥꾼들의 움막 몇 채가 모여있던 작은 촌에 불과했으나 13세기 몽골 지배기에 킵차크 한국의 중심지(사라이)로 공물을 보내는 중계지역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그후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게 된다.



러시아 민담에 계속 등장하는 것이 삼형제 이야기다. 형제들은 레크, 체크, 루스인데 폴란드(레히트인들이라고도 불렸다), 체코, 루시라는 슬라브 세 민족의 시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형제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민담에서 한 명은 강하고 공정한 이로, 또 다른 한 명은 영리한 모험가로, 그리고 막내는 아주 나쁜 놈이나 신심 깊은 바보로 등장한다.

이와 연결시켜 보자. 옛날 옛적에 세 도시가 있었다. 이 세 도시는 러시아가 택할 수 있었던 각기 다른 세 가지 길을 대표했다. 키예프는 가장 위대한 도시인 동시에 가장 전통적인 봉건적 중심지였다. 그 권력은 가문의 혈통을 통해, 그리고 키예프가 루시의 심장이자 영혼이라는 믿음을 통해 표현되었다. (...) 노브고로드는 북쪽에 위치한 교역 동시로 발트해의 부유한 국제항구들에까지 영향력을 떨쳤다. 돈 많은 시민 대표들, 그리고 과두제 민주주의가 큰 힘을 발휘했다. (...)

키에프와 노브고로드의 전성기 시절 셋째이자 막내인 모스크바는 도시라 부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모스크바에 대한 첫 기록은 유리 돌고루키('긴 팔의 유리'라는 뜻)가 키예프 대공이 되기 전인 1147년, 거기서 한차례 모임을 주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몰려오자 키예프는 파괴되고 노브고로드는 몰락하면서 모스크바가 번성기를 맞이했다. 루시 전체의 주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전통, 몽골 관행, 모스크바 특유의 실용주의가 결합된 정치 문화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44~51쪽 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라는 푸틴의 주장은 맞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동시에 러시아의 시조는 키예프, 즉 우크라이나고 우크라이나는 바이킹에 의해 세워졌다는 말과 이어진다. 러시아만의 전통을 내세우며 러시아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는 푸틴에게, '러시아의 전통이 무엇인가?' '과연 독립적인 러시아의 전통이라는 게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블라디미르의 케르소네소스 정복은 러시아의 2014년 크림합병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크림반도를 러시아 정교의 품에 다시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바스 지역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와중, 모스크바와 키예프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전쟁이 벌어졌다. 블라디미르 대공을 어느 쪽 선조로 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키예프 대공이라 한다면 오늘날 러시아의 정신적 조상이 우크라이나인이 되어 버린다. 다른 한편 류리크 왕가 혈통을 강조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절반만 피를 나눈 관계가 될 것이었다. 이처럼 고대 역사, 민족 신화, 현대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밀접할 수 있다. 루시의 땅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44쪽




안타깝게도 러시아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체성 자체가 흐릿해지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역사 위에 역사를 덧씌워 재생산해냈다. 하지만,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과거일수록 끈질기에 오래 살아 남는다. 역사란 바로 그런 흔적의 기록이다.



이 짧디 짧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은 여러 차례 답답해졌다. 마치 '아비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분명 유럽을 기원으로 뒀고 유럽의 일원임을 내심 바라지만 유럽을 적으로 삼고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날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국가 러시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진심은 언제나 유럽 속에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걸 감안한다면 러시아의 타자화는 서양에 의한 동양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얼마나 단단하게 고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른 바 '몽골 멍에' 시기는 러시아 스스로 상상하는, 또한 많은 외부인들이 바라보는 러시아 모습의 핵심을 이룬다. 몽골의 압제가 러시아를 유럽과 단절시켜 당시 진행되던 르네상스와 초기 종교개혁에서 소외되었다고들 한다. 당대의 문화, 사회, 경제, 종교적 변화를 경험하는 대신 불쌍한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노예라는 피투성이 늪'(칼 마르크스의 표현이다)에 빠져 허우적대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적'통치 형태, 즉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최상층이 극단적인 잔혹함을 무기로 하위층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무자비한 형태를 내면화했다. 몽골 제국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었던 모스크바는 가장 열정적으로 그 정치 문화를 수용했고 러시아 땅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에 부합하나 전체 그림에서는 일부분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몽골의 정복이 러시아를 외부와 차단시키지는 않았다. 상인과 사절단, 망명객과 선교사들은 여전히 오갔다. 노브고로드는 발트해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고 모스크바 공후들은 콘스탄티노플, 리투아니아 양쪽과 정략 결혼을 했다. 러시아가 고립되었다면 이는 울창한 산림을 동서로 통과하는 강의 수로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빈곤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몽골 지배를 벗어난 후 러시아에 르네상스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농작물의 생산 증대, 그리고 상인 계층 및 도시 인구의 급성장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몽골 침략은 분명 러시아의 도시화나 도시 중심의 장인 경제를 후퇴시켰다. 공물 부담이 커지면서 교역이나 농경 확대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러시아의 깊은 산중에서 르네상스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65~66쪽




13세기 몽골의 유럽 침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듣도 보도 못한 말발굽들이 돌풍처럼 나타나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을 멸절시키더니 어느날 돌연히 사라져버렸다.

정확한 공포의 실체를 알지 못했기에 유럽은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몽골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후유증에서 동반된 신경증은 유럽의 동쪽 끝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러시아로 향했다.


어찌됐든 러시아는 비잔티제국 멸망 후 제3의 로마로 자처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유럽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 속에는 슬라브, 바이킹, 타타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북방의 소수민족의 전통까지 녹아들어가 있다. 러시아는 이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만 하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유럽의 근대산업화에 러시아가 뒤처지면서 이에 따른 질투와 선망이 교차하면서 유럽의 대 아시아 신경증은 이제 러시아 자신에 전염되어 종종 히스테리를 동반한 고질병이 되고 만다.



오스트리아 외교관 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슈타인이 이반 4세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대귀족들이 "그 찬란한 위업에 압도되거나 공포에 질려서 복종했다"고 나온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을 테지만 한 개인의 권력이 공포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 권력은 유지하기 어렵다. 이반 3세와 4세는 신이 권리를 부여한 전제군주정의 이념적, 제도적, 더 나아가 미학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농민에서 대귀족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 이런 통치자를 혼란과 굶주림, 외적 침략에 대한 대안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기까지는 '동란의 시대'라는 총체적 위기가 필요했다.

결국 1613년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가 16세의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차르를 원하고 필요로 한 끝에 마침내 차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키예프 루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에 강력한 총주교 필라레트의 아들이라는 점에 이르기까지 손색 없는 인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실은 지친 러시아가 안정된 미래를 원했다는 데 있었고 미하일은 바로 그 안정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645년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왕조는 1917년까지 지속된다. -92쪽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옐친과 푸틴도 모두 위와 같은 '동란의 시대'에 등장했던 어린 미하일처럼 러시아인들에게 받아들여진 통치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집권으로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그만큼 사회적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은 사라졌다.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비애는 바로 이와같은 양극단을 역사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러시아는 유럽을 향한 애정과 질투를 멈춰본 적이 없다.

표트르 대제는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염세를 매기겠다고 엄포하면서까지 유럽을 따라했지만 전근대적인 농노제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예카테리나2세는 독일계로 러시아 왕가에 시집을 와 남편 암살 후 왕위에 올랐던 인물로, 통치 자체보다는 볼테르 등 유럽의 지식인과 나눈 서신 등으로 유명하다. 비록 여왕은 충분히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유럽혈통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통치로 러시아가 근대화되거나 유럽을 따라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러시아 역사는 침략과 전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피해는 엄청났지만 승리로 끝나는 이상한 희비극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러시아인들의 정신 세계 또한 분열되었다.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도, 영광의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올릴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폴레옹과 싸워 거둔 승리는 러시아 체제의 근본적 유효성을 중명하는 편리한 신화로 자리 잡았다. 보로지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승리할 자격이 충분함을 보인 반면 러시아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였다"라고 썼다. 독이 든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체제는 위험에 빠지는 법이다.

그 체제의 가장 젊고 총명한 이들이 정반대의 결론을 내는 상황이라면 두 배로 더 위험하다. 예카테리나 시대 이후 프랑스어, 프랑스 문학과 사상은 교양의 핵심이었다. 교육받은 엘리트 출신 젊은 장교들은 혁명 시대의 사상에 열광했고 프랑스에서 직접 이를 경험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 1세 통치 초기에는 러시아에도 곧 변화가 찾아와 보수적 반동이 척결되리라는 희망이 가득했다. 질서정연한 표면 아래에서 비밀 결사체, 급진 정치세력, 모반 세력이 활발히 움직였고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이들도, 곧장 공화제로 가야 한다는 이들도 나왔다. 1820년대가 되자 무장 봉기만이 변화를 일으킬 유일한 희망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심지어 1825년 12월로 거사 날짜까지 잡혔다. 이 때 신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죽음이라는 자비를 베풀었다. 예정된 봉기 한 달 전에 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152쪽




근대를 향해 달려가던 유럽은 내부 모순으로 구체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한다. 대포와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의 내전을 정리해주겠답시고 갑옷을 입고 창을 둔 중세 기사가 등장한 형국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러시아는 풍차를 보고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에 걸쳐 성공적인 전사-차르였다. 그는 러시아군에 열정과 시간,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다. 전체 인구가 6~7천만 명인 가운데 군 규모는 백만 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외양 꾸미기를 진짜 전투 능력 효율화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곧 드러났다. 알렉산드르 1세가 그랬듯 니콜라이 1세도 전 세계의 전통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책무를 느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동료 군주들이 혁명의 불씨를 짓밟아 끌 수 있도록 도와주러 달려가는 '유럽의 헌병'으로 불리게 되었다. 1831년에는 폴란드 반란을 진압했다. 러시아가 폴란드인들의 헌법적 권리를 짓밟은 탓에 일어난 반란이었다. 한때 자기 의회까지 갖춘 왕국이던 폴란드가 임명된 러시아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격하되어 버렸던 것이다. 1848년, 유럽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최악의 흉작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콜레라가 유행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과거 질서 수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1846년, 오스트리아를 도와 크라코프 자유 도시 봉기를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1848년에 몰다비아 민족 운동을 분쇄하고, 1849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러시아 군을 보내 헝가리 혁명을 지지했다.

다시 한 번 쌍두 독수리는 양쪽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이는 신의 뜻에 거스르는 불법적 자유주의로부터 유럽을 구해내는 동시에 유럽 사상으로부터 러시아을 보호하고자 했다. 서구 과학 기술의 발전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유용한 것들은 도입하고자 했지만 그 유용한 것을 낳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 맥락은 외면했다. 투자 자본을 만들 상인 계층이 번성하지 못한 상황, 대학과 교육계에서 자유로운 토론으로 아이디어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혁신가와 회의론자가 새로이 등장할 사회적 이동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영원히 뒤처진 채 남들의 발명품을 도입하고 적응하려 애써야 할 형편이었다. -157~158쪽




러시아의 역사는 최소 500년 뒤늦게 시작되었다. 이건 아마도 지리적으로 외지고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역간 교류와 인구증가가 미흡했고 곡물생산도 뒤떨어져서 국가의 기틀이 뒤늦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러시아인들은 기질적으로는 유럽인에 비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물론, 신체적으로도 부족하긴 커녕 우월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어울릴 만한 국가 체제는 갖추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전히 후진적이었다. 또래 집단에 체구만 큰 미숙한 아이가 한 명 있는 셈이다. 뭔가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바로 이때 한 인물이 나타난다.



1917년에 권력을 잡은 인물은 '실용주의자 레닌'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성숙한 거대한 노동계급을 갖추지 못했고, 아직 사회주의를 건설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준비 안 된 나라에 사회주의를 억지로 도입했다가는 보수적인 성향에 혁명 에너지만 넘치는 정권을 낳는 역효과가 나타난다고 경고했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이 경고가 옳다는 것은 스탈린이 증명했다.) 레닌은 기회를 포착했고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권력 획득을 정당화했다. 어차피 세계 혁명이 곧 일어날 테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귀결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182쪽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앞의 몇 권의 책에서 차고 넘치도록 읽고 적었으므로 여기서 또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레닌의 희망은 희망으로 그쳤고 소비에트민주공화국연방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체제로 돌아선다. 일당독재를 넘어 일인독재는 2차세계대전(러시아식으론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의 승리로 면죄부를 받는다. 또다시 승리는 러시아 편이었고, '절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은 공인되었고, 이런 뜻밖의 전쟁과 승리의 역사가 오늘날 러시아인에게 어떤 유전인자를 물려줬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레닌 사후 러시아는 국가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해 빠른 경제성장에 올인했고 '또다시' 성공한다. 이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이었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까지 30여 년 동안 러시아는 마치 스스로 이룬 성취가 외부 세계로부터 오염되는 걸 막기라도 하려는 듯 스스로 크렘린이라는 요새에 갇혔다.


자체적인 봉쇄와 고립이 성공적으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국제 상황이라는 운도 따랐다. 1970년 대 중동 위기로 러시아의 천연가스 가격이 고공 행진을 하면서 국민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경제는 성장을 멈췄지만 등 따뜻하고 배부른 국민들을 러시아 관영TV 앞으로 끌어모으기는 쉬웠다.

하지만 이런 가식적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또다시 경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면서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한 게 화근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등은 전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소련에 향하도록 만들었음과 동시에 견고했던 크렘린이라는 요새에 수많은 금이 가있다는 것도 노출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좀더 현대적인 나라로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개혁 개방이 필요했는데, 개혁 개방은 오히려 그동안 감춰뒀던 러시아라는 국가의 단점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고, 결국 소비에트연방은 해체된다.



1990년대는 '제2의 동란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고프고 지친 인민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지도자, 모욕받은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줄 강력한 차르가 또다시 필요한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혁명이 필요한 순간에 레닌이 있었듯, 바로 이때 적임자가 나타난다.



물론 푸틴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것은 훨씬 더 많다. 때로 지나치게 남성성을 드러내는 성향에 대해, 반대 세력을 극단적으로 (더 나아가 치명적으로) 억누르는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럽고 심지어는 조력하기까지 하는 이중성에 대해, 네 번째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4년 이후 또 다른 집권 가능성을 모색할지, 은퇴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말이다. 러시아의 남다른 역사에 남겨진 큰 흔적으로 볼 때 푸틴은 차르나 서기장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당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는 의문도 가능하다. 물론 국가를 안정시키고 세계 무대에서의 적대적인 역할, 더 나아가 심통 부리는 역할을 되살렸다는 면에서 그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면서도 이반 뇌제나 (그보다 한층 더했던) 스탈린처럼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고 표트르 대제처럼 실제 모습보다 과장되지 않았다. 레닌이나 안드로포프처럼 냉정한 지성을 지니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여제나 드미트릴 돈스코이처럼 예민한 정치 본능을 갖지도 않았다. 이는 푸틴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 세우려는 것이다. 그가 러시아 역사를 새로 만들고자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승리를 극대화하고 비극은 최소화하는 공식판 역사를 초중등교과서와 대학 강좌들은 점점 더 수용하게 될 것이다. 스탈린은 꼭 필요했던 산업화를 이룬 전시의 지도자가 되고 굴라크 이야기는 밀려나게 될 것이다. 푸틴은 이 새로운 공식 역사가 "내부 모순이나 이중 해석의 여지를 없애야"한다고 요구했다. 진정한 역사란 그처럼 말끔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푸틴이 러시아의 이미지와 역사 기록을 통제하려 한 첫 번째 인물은 아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도 말 잘 듣는 연대기 기록가들을 두었고, 예카테리나 여제는 유럽에 비친 러시아의 모습을 신중하게 관리했으며 알렉산드르 3세 치세 때의 '관제 민족주의' 열풍은 이의를 제기하는 골칫거리 학자들이 입 다물고 따르도록 만드는 조치를 동반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스탈린이 편집해 1938년에 출판한 <모든 연합 공산당(볼셰비키)의 역사: 속성과정>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를 뒤바꾸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20년에 걸쳐 67개 언어로 4백만 부 넘게 인쇄 배포된 이 책은 아마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힌 책일 것이다. -220쪽





과거를 꾸미고 가꾸는 건 비난 권력자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개인도 지나간 과거는 예쁘게 미하시켜 기억한다.

그리고 러시아만 역사를 치장하고 왜곡한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강대국일수록 악취나는 과거를 갖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건 굳이 여러 말이 필요없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이지만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고, 그 기준은 결국 국가(조국) 내부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얼마나 유익한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미화하고 왜곡했지만 그 나라가 특히 잘못된 역사를 통해 인류 전체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했다면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코티드부아르와 니제르를 방문해서 과거 식민통치와 노예제에 대해 사과했을 때 노예제는 아프리카인들 스스로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로 사과를 받아주고 잘못된 과거를 스스로 인정했던 건 인상적이다. 노예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서로 싸우고 전투에서 진 부족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과거를 지배한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미래를 위해 역사를 왜곡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현재를 지배하기 위해 과거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일수록 미래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미래는 과거를 왜곡하는 현재의 야만까지도 잊지 않고 새긴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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