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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에이브레햄 링컨, 찰스 다윈, 에드가 앨렌 포우는 1809년에 출생한 동갑내기들로 근대의 끄트머리에 태어나 인류 역사를 현대로 옮겨놓은데 일조한 인물들이다. 그 중에서도 찰스 다윈은 인류가 철학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최초로 과학적인 답을 한 학자이다. 철학과 정신 그리고 신을 운운하던 인류도 결국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진화에 따른 우연적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만큼 위대한 발견도 없으리라.


다윈 자신은 윈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transmutation)' 또는 '수정된 상속(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

진보라는 말 속에는 목적 또는 목표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성이 없다. 만일 진보가 '향상'이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면 거의 모든 생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적응 현상들은 다 나름대로 예전 상태보다 향상된 상태를 의미한다. 개선이나 효율의 관점에서 진보를 얘기하려면 각각의 생물이 처해 있는 환경 내에서 분석해야 한다. 인간의 지능이라는 잣대에 맞춰 다른 동물들의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는 능력을 비교하면 초음파를 보낸 후 그것이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한 박쥐들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인간보다 훨씬 진보했다고 평가해야 옳을 일이다. 따라서 진화의 역사에서 객관적인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현대 진화 생물학의 관점이다.


-최재천, <다윈 지능> p68 中-


<다윈 지능>은 생물학자로서 인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조예가 깊은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학부 교수가 2009년 다윈 탄생 200주년 겸 <종의 기원> 출간 150년을 기념하여 발간한 책이다. 구체적인 사례와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진화론에 얽힌 오해와 진실을 알아가다 보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대전제에 슬며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진실 앞에서 만큼은 어쩔 수없이 누구나 겸손해지는 법이다. 


생명의 기원과 진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 역시 작은 풀 한포기 곤충 한 마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존중이 저절로 솟구친다. 저자인 최재천 교수의 지적처럼 찰스 다윈의 위대함은 일찍이 비글호에 몸을 싣고 갈라파제도를 여행하면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진화한 우연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발견을 통해 유아독존식 오만함에 빠져 있던 인류에게 겸손함을 일깨워 준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집단 지능의 결과라기보다는 장기간에 걸친 관찰과 개인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탄생한 걸작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찰스 다윈은 학문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영국의 외딴 고향마을에서 동식물들을 수 십년 동안 관찰하면서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갈라파제도 방문을 통해 자신의 가설을 입증해냈다. 일찍이 찰스 다윈이 명나라 명의인 이시진(李時珍)이 작성한 <본초강목>을 참조했다거나, 마르크스가 자신의 <자본론>을 찰스 다윈에게 헌사하려했다는 말들은 다분히 설(說)에 불과하다.


찰스 다윈의 위대한 발견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번식은 수컷이 아닌 암컷에 의해 결정되고 주도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성권위적인 이데올로기가 아직도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점에 볼때, 만약 찰스 다윈과 그의 <종의 기원>이 갈리레오 갈리레이가 살았던 중세시대에 등장했더라면 진실은 빛조차 보지 못한채 사장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내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유전자다'라는 지적은 가히 자연 과학적 지식과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합하여 빚어낸 빼어난 통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해묵은 논쟁에 일갈을 고할 수 있다. 즉, 알이 닭을 낳는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다윈주의자들의 해석이 윤회사상을 주장하는 동양불교와 일맥상통한다는 추측을 불러 오는 것이리라.


해밀턴의 이론에 의하면 번식이란 결국 유전자들이 자신들의 복사체들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드 대학교의 사회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영국 작가 새뮤얼 버틀러의 표현을 빌려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 낸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흔히 뜰에 돌아다니는 닭을 보면서 닭이라는 생명의 주인은 당연히 닭이라고 생각하지만 버틀러와 윌슨의 관점에서 보면 닭은 기껏해야 몇 년 동안 알을 낳고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덧없는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닭을 만들어 낸 유전자는 그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어쩌면 영원히 그의 후손으로 이어져 갈 존재이다.

(......)

유 성 생식을 하는 생물의 경우, 사실상 개체들이 직접 자신들의 복사체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후손에 전달되는 실체는 다름 아닌 유전자이기 때문에 적응 형질들은 집단을 위해서도 아니고 개체를 위해서도 아니라 유전자를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에 도킨스는 개체를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이라고 부르고, 끊임없이 복제되어 후세에 전달되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 immortal coil)'이라고 일컫는다. 개체의 몸을 이루고 있는 물질은 수명을 다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그 개체의 특성에 관한 정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최재천, <다윈 지능> p213~215 중 발췌-


이 쯤되면 나란 존재는 한없이 작어지고 삶은 한없이 허무해진다.

'나란 존재는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에 불과하다면, 열심히 노력하여 삶을 가꿀 필요도 없지 않은가. 하물며 나의 노력으로 얻어진 우수한 획득 형질이 후세로 유전되는 것도 아니라면 말이다.


진화란 결국 우연적 돌연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차가운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뜨거운 가슴으로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글을 이어나가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정신세계가 참으로 얕디 얕고 나의 마음세계 역시 넉넉치 못함을 통감한다.


이와 같은 진리를 담아내기에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그릇이 너무도 얕고 좁다. 어쩌면 바로 이렇기때문에 종교가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의 피할 수 없는 숙명적 조우에 대해 저자는 대니얼 데닛의 표현을 빌리고 있다.  


데닛은 우리가 종교의 실상을 철저하게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종교를 보다 철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연구하게 되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종교를 축소하거나 또는 종교를 보다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belief in god)'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belief in belief in god)'의 확산을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최재천, <다윈 지능> p248 中-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 '신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 대한 믿음'이란 바로 인간의 '선함'을 믿는 믿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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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함정 - 무엇이 우리의 판단을 지배하는가
자카리 쇼어 지음, 임옥희 옮김 / 에코의서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한번 내린 비에 단풍잎은 무심히 떨어져 낙엽이 되고,

생각도 더 한층 깊어진다...


올 한해를 통털어 읽은 책 중 가장 인상적인 책 세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한권은 리사 맥클라우드의 <한쪽 눈을 감은 인간>이고 또 다른 한권은 바로 이 책이다. 자카리 쇼어의 <생각의 함정>. 마지막 한권은 글쎄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되지 않을까.


사실 이 책은 예전에 1/3정도 읽다가 포기(?)한 책이었다.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리사 맥클라우드의 <한쪽 눈을 감은 인간>을 다 읽고 난 후, 쌓아놓은 책더미 속에서 다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지난번에 읽지 않은 부분을 다 읽고나서 다시 첫페이지로 돌아와 처음부터 '제대로' 읽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국제정치를 연구하는 교수로서 저자는 동서양은 물론이고 과거와 현대를 넘나드는 풍부한 사례들을 연구하면서 인간이 그것도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평가받는 지식인이 어떻게 인지 함정이라는 오류에 빠져 개인적 역사적 오류를 반복하는지을 꿰뜷어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이론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저자는 조지 오웰(본명: 에릭 블레어)이 자국(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에 파견되어 코끼리를 사살하는 에피소드를 예로 들면서  '노출불안'의 전형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은 때론 자신의 나약함이나 결함이 들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불필요할만큼 과격한 혹은 무모한 행동을 취한다. <더 리더: 책읽어 주는 남자>의 주인공 한나 역시 자신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죄를 뒤집어 쓰고 장기간에 걸친 고된 수형생활을 감내해내지 않던가.


'노출불안은 단순한 두려움 그 이상이다.

이는 단호하고 의지적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약화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노출불안은 이스라엘의 레즈볼라 공격과 미국의 이라크에서의 과잉진압 등을 불러왔다.

심경의 변화나 타협이 곧 나약함을 상징한다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날때 노출불안의 인지 함정에서 벗어날 수있다.


그 다음으로 저자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인지 함정으로 '원인혼동'을 들고 있다.

말 라리아가 썩은 물에 의해 걸리는 질병이라는 속설과 항우울제의 남용 등이 모두 다 원인혼동으로 야기된 심각한 폐해라는 사실을 안 순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극동지방의 보보가 살았던 마을의 사람들처럼 익은 돼지고기를 맛보기 위해 집을 불태우는 우를 범하지는 않지만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인하거나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일을 빈번하게 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는 특히 '원인혼동'이 의학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정신질환이 가족역학관계로부터 기인한 병이라거나 유전적 질병이라는 것과 허리통증은 디스크의 기형으로부터 유래한다는 점 등이 그렇다.

인간이 이처럼 원인혼란에 잘 빠지는 이유는 문제나 상황을 분류하고 범주화시켜 단순하게 보려는 환원적인 사고방식 혹은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평면적인 관점' '만병통치주의'라는 인지적 오류를 불러온다.

평 면적인 관점은 리사 맥클라우드가 주장한 '거울 이미지'와 똑같다. 즉, '상대방도 나와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라는 인지적 오류야말로 프랑스와 미국이 객관적인 전력 우위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인도차이나반도(와 베트남)에서 패배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평면적인 사고와 만병통치주의는 상상력의 여지를 처음부터 차단해버린다. 만병통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모든 사례에 적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만병통치주의'란 과거에 맞아 떨어진 이론이나 방식을 고수하고 무조건 신뢰하는 것이다. 폴란드에서 성공한 경제이론이 소련에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제프리 삭스나 남미식 긴축재정과 개혁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경제위기에도 들어맞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IMF 역시 모두 만병통치주의라는 인지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정보를 독점하려고 하거나 정보를 회피하는 '정보집착증' 역시 심각한 생각의 왜곡을 불러온다.

정보독점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만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국엔 전체적인 소통 부재를 불러와 '득'보다 '실'이 많다. 정보회피 역시 유리한 판단을 내리게 할 수도 있는 정보를 외면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심각한 사태를 불러온다. 이와 같은 '정보집착증'은 국가와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회사와 단체 및 개인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고질병이라 하겠다.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방(혹은 상황)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한데,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방과 같은 시선과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상대방과 같은 시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분법적인 논리에서 벗어나 또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는 여유와 상상력이 작동할 여지가 커진다. 


'상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대방도 나와 똑같은 걸 얻기 위해 투쟁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린다.

그렇다면,

상대의 욕망을 제대로 알고 인정하는 것이 승리 더 나아가 대승적 승리의 첫걸음이라 하겠다. 상대의 욕망을 알려면 무엇보다도 거울 이미지를 깨뜨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리 열심히 거울을 들여다 본다한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이미지는 상대방이 아닌 바로 나 자신임에 다름 아니다. 케네디가 당시 소련 지도자 후르시초프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봄으로써 쿠바 미사일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처럼 상대방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마지막 일곱번째 인지함정인 '정태적 집착'은 변화하는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직류전류만을 고집했던 에디슨과 새로운 인터넷 세상의 도래를 보지 못했던 90년대 초반의 IBM이 바로 이와 같은 정태적 집착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언제나 옛것이 좋다'라는 사고 방식으로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들을 얼마나 고집스럽게 고수하고 있는가?

바로, 슈퍼밈이다. 슈퍼밈이란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널리 만연하여 다른 모든 믿음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거나 억압을 가하는 모든 종류의 믿음, 생각, 행동을 거리킨다.


새로움에 호기심을 갖고 받아들이고 적응하려는 자세가 없다면 '정태적 집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기성세대는 이와 같은 인지적 착각으로 소중한 아들딸들과 후손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잘못을 수시로 범하고 있다. 일명, '경험주의자의 함정'이라고 하겠다. 경험한 사람과 상황을 참고하는 것은 좋으나 도가 지나쳐서 맹신하거나 다른 변수들에 대한 고려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고들 한다.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당연히 좀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고들 한다. 그러나 과연 이 말이 사실인지는 그다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지혜는 경험 하나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보다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성향을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을 수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현명해지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말하자면 경직된 사고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자카리 쇼어, <생각의 함정>p 301 中-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건,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함임을 잊지 말아야 겠다.



자카라 쇼어는 이상의 일곱가지 인지 함정을 극복한 인물이나 사례로 마이클 메이, 시암(태국)의 국왕 뭉쿳, 루퍼트 머독같은 이들을 들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 저자인 자카리 쇼어도 포함시키고 싶다. 그는 맹인이지만 정상인보다 훨씬 더 멀리 더 넓게 바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들에게 '눈뜬 장님'이 되기 않는 방법까지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동안 나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살아온 것 같다.

상대방의 의도와 동기를 내식대로 해석하고 분노하고 화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금까지 변연계의 작동에 따라 움직이는 그저 한마리의 파충류에 불과했다면 이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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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 눈을 감은 인간 - 상대의 양면성을 꿰뚫어 보는 힘
리사 맥클라우드 지음, 조연수 옮김 / 토네이도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모든 만남과 일에는 적당한 시기 즉 '타이밍'이 있듯,  책읽기 역시 적당한 시기가 있나 보다.

같은 책 같은 내용일지라도 어느 시점에 읽느냐에 따라 느낌과 감동이 다르다. 리사 맥클라우드의 <한쪽 눈을 감은 인간>은 바로 이런 진실을 나에게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사실, 이 책은 지난 5월달에 대출하여 1/3 정도 읽다가 아마도 반납마감일이 임박하여 도중에 읽기를 중단했던 책이었다. 근데, 이 책이 우연찮게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도서관 서고 앞에 서서 홀린 듯이 첫장을 다 읽어내려가면서도 불과 몇 개월전에 읽었었던 책이라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책들을 읽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제목만 보고 다섯권의 책들을 빌려온 적이 있었다. 그 중, 네 권의 책들을 다 읽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집어든 책이 바로 <한쪽 눈을 감은 인간>이다. 책의 초반부는 정말 놀라웠다. 현재 내가 감정적으로 직면해 있는 문제들을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책에도 읽기에 적당한 시기가 있다는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나에게 이 책은 5개월전이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읽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였던 것이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우리는 한쪽 눈을 감고 있다. '불안' 때문이다. 한 번 눈 밖에 난 사람은 다시는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 내 생각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를 더 큰 하나의 합일로 묶어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상대의 생각을 계속 받아주다 보면 언제나 손해는 내 몫일 것이라는 불안...

그래서 우리는 상대가 아니라 내 생각과 입장만 바라보는 '외눈박이'관계를 선택한다. 감고 있는 눈을 뜨기 위해선 고통에 가까운 노력이 뒤따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라는 편안한 길을 선택한다.


-리사 맥클라우드, <한쪽 눈을 감은 인간> p32-


정서적으로 불편한 상황이나 사람과 마주하게 되면, 0.001초만에 자신도 모르게 솟구치는 분노. 그리고 당혹스러움과 함께 얼굴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지며 행동은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워진다. 생존에 대한 위협에 즉흥적으로 반응한다는 변연계(파충류의 뇌)가 순식간에 작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순간부터 우리는 현실 상황을 직시할 수 있는 여유와 이성을 잃어 버린 채, 두려움에 휩싸인 한 마리의 도마뱀처럼 행동한다.


'멈춤->도망->싸움'

생존을 위해 인류가 진화시켜온 행동 양식이다.


상대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최대한 움직임을 줄인다. 즉 멈춤의 단계이다. 뜻밖의 상황이나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이 바로 이 '멈춤'의 단계에 해당된다고 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도망갈지(회피할지) 아니면, 맞서 싸울지(화를 내고 주먹을 휘두른다)를 결정하게 된단다.


이와 같은 생리적 반응은 사실 인류의 조상이 수 백만년에 걸쳐 정글에서 생존하기 위해 강화시켜 온 진화의 산물이다.  단 0.001초만에 잡아 먹히느냐 마느냐의 '생사(生死)의 기로'에서는 이와 같은 변연계의 역할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과거 정글에서처럼 강한 동물들과 생존경쟁을 벌일 필요가 없어진 현대 사회에서 우리들은 이와 같은 변연계의 작동으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훨씬 많다. 왜냐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우리를 눈 뜬 장님으로 만들어 현실을 직시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리기 때문에......


이 처럼 이분법적 사고 혹은 양자 택일이라는 딜레마에서 벗어나 양측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일명, 진실의 삼각형의 꼭짓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취해야 할 태도이며,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첫걸음은 조직 전체의 취지와 목적을 재확인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렇다!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나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 역시 결론은 '잘 해보자'는 것이다. 즉, 나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목표가 동일하다면 어느 한쪽의 패배나 양보없이 목표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반드시 존재한다. 협조하겠다는 마음, 아니 최소한 상대방이 나를 해치려는 의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린 불필요한 대립과 싸움을 피할 수 있다.  


저자는 위와 같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사랑' 즉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녀가 전해 들었다는 스톡데일 제독과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의 저자 짐 콜린스와의 일화는 메아리가 되어 두고두고 울려퍼졌다.


스톡데일 제독은 베트남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수용된 미군들중 가장 고위급 장교였고,미 해군 역사상 최고의 훈장을 받은 인물이었다. 2005년 그는 알츠하이머병으로 8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베 트남의 호아 로 감옥에 갇혀 있던 7년 6개월 동안 스톡데일 제독은 20번이 넘는 혹독한고문을 견뎌야 했으며 매일같이 구타를 당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다리에 족쇄를 차고 좁은 독방에 갇혀 지냐야 했다. 포로의 권리 따위는 있을리 만무했고, 석방도 기대할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다시는 가족을 만날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총지휘의 책임을 지고 있던 스톡데일 제독은 그대로 부하들이 절망에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을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

"나는 단 한번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스톡데일 제독이 답했다.

"내가 석방됨은 물론이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고, 이는 내 인생의 중요한 사건이 되리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어요.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나는 그때의 경험을 그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짐 콜린스는 잠시 아무 말도 안했고, 그들은 교수 식당을 향해 계속 걸어갔다.

(......)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죠?"

"그야 뻔하지 않겠소? 낙관주의자드리죠."

"낙관주의자들이요? 무슨 말씀이신지..."

" 이런 말을 하는 낙관주의자들 말입니다. '성탄절에는 분명 풀려날 거야.'그러다가 성탄절이 지나도 풀려나지 않으면 이렇게 말하죠.'부활절에는 나갈 수 있을 것야' 그렇게 부활절이 지나가고 추수감사절을 기다리고, 그러다가 다시 성탄절이 되고... 결국은 실의에 빠져 죽게 됩니다."

(......)

콜린스는 스톡데일 제독의 그 말을 잊을 수가 업었다. 그래서 그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스톡데일 제독의 명언을 삽입하기로 한다.


"상황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희망을 간직하는 동안 끔찍한 현실과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이 자기 삶을 주도하거나 조직을 이끄는 위업을 이룬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리사 맥클라우드, <한쪽 눈을 감은 인간> p60~p65 중 일부 발췌-


현실을 낙관하지 말고 직시하되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한쪽의 패배나 양쪽 다 만족시킬 수 없는 타협이 아닌 모두 다 승자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두려움에 가득 차서는 자신의 이익과 생존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파충류형 인간처럼 구는 사람을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한편, 주위 사람들을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 아닌 같은 목적을 공유한 동지라고 생각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 방어와 의혹을 풀고 그를 깊게 신뢰하면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상대방에 대해 먼저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상대방에게 그대로 전달되어 나 역시 상대방으로부터 존중받고 이해받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단순하지만 위대한 이치를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익혀야 한다.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노력해자.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습관처럼 몸에 붙어 익숙해지겠지...


한때 목욕용품 세일즈우먼이자 유명한 커뮤니케이션 강사 그리고 간판광고사업체를 운영했던 경험에서 나온 풍부한 실전 사례들은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준다.


수단과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는 때때로 목표와 기본을 잃어 버린다.

햄버거를 많이 팔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수단과 방법), 일단 맛있는 햄버거를 만들겠다는 기본을 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가게에 고객을 많이 끌어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자 한다면, 일단 고객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객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여 만족시키면 된다.

회사에서 붙자는 1% 직원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리에 맞는 업무능력을 겸비하고 회사와 상사(혹은 동료) 그리고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이 얼마나 단순명쾌한 이치란 말인가.

그러나 행동에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파충류와 같은 본능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장애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대선이 얼마 안 남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는 과연 누구인가?"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을 리더로 선출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리더에 대한 저자의 정의를 되새겨 본다. 


훌륭한 리더는 이중성을 통합할 줄 아는 사람이며, 상대에게도 그것을 가르칠 줄 아는 사람이다. 윗사람이 알려주는 정보도 잘 받아들이지만 아랫사람이 전해주는 정보 또한 잘 수용할 줄 안다.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면서도 창조적 사고력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낼 줄  안다. 확고한 신념과 진정어린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말할 때는 위엄이 있고 들을 때는 겸손한 사람이다. 사람들이 나아갈 방향을 명확히 보여주면서, 세상이 안겨주는 시련도 열린 마음으로 헤쳐 나갈 수 있게 격려해주는 사람이다.


-리사 맥클라인,  <한쪽 눈을 감은 인간> p267~p2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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