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생은 요지경이라는 말을 체감하는 것은 언제나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된 이후였다. 더 큰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될 때마다 나의 이해도가 참 보잘 것 없음을 느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사회로 나가면서 나의 인간 관계는 복잡해졌고 그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것은 많아졌다. 돌이켜 보면, 왜 그렇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면서 살아갔는지 놀랍다. 왜 그토록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 받고 싶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남들과 반드시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는 강박은 어쩌면 그렇게라도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퀴즈쇼』의 등장인물들이 퀴즈를 맞추는 일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 정답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사회자의 물음에 순발력과 정확성을 발휘하여 정답을 맞추면, 내 손으로 피를 묻히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을 패배시킬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은 승자의 영광을 정당하게 차지한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부와 명예를 취한다. 그것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하나의 '쇼'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 세계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도무지 쓸모 없다고 여겨졌던 잡다한 지식과 평소에 허비했던 시간에 수집했던 정보들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순간, 사람들은 전례 없는 짜릿함과 성취감을 맛본다. "내 인생에 헛된 순간은 하나도 없었구나! 나의 방황과 실패도 이렇게 결실을 맺는구나"라고 떠들고 다닌다. 그 말을 하는 순간조차도 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또는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있었던 모든 불화와 음모와 폭력을 외면한 채 그 욕망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한 성과 이름인 '이'와 '민수'를 사용하여 주인공의 이름을 설정한 까닭은, 그가 겪었던 기묘한 사건들이 사실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조금 대상을 좁히자면,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나서도 인생의 정답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 『퀴즈쇼』의 줄거리는 달콤한 환상과 같다. 대학원을 졸업했으나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짠내 나는 고시원 생활을 하는 이민수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인터넷 채팅방에서 벌어지는 퀴즈 대결이었다. 그는 옆방 여자의 선의에 힘입어 퀴즈 프로그램 피디를 진행하는 서지원과 교제한다. 그녀는 부유하고, 여유도 많고, 사랑이 넘친다. 또한, 이춘성의 제안을 받아 약 세 달간 '회사'에서 퀴즈쇼 출전을 위한 시간을 보내며 잠깐이나마 성취감과 돈을 얻는다. 그곳을 극적으로 탈출한 후에 그는 평범하되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로 결정한다. 옆방 여자, 서지원, 회사, 이 모든 것은 이민수의 노력보다는 순전한 우연으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주인공은 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만 반복한다. 김영하 작가는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잡지 못하는 청춘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려는 듯 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기 싫겠지만, 청춘은 정말로 바보 같다. 우리는 매일 같이 인생을 낭비하고, 후회할 결정을 내린다. 젊음은 실로 젊은이에게 주기에 아까운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정말로 완고해서, 아무리 충고를 듣고 고통을 겪어도 그 시간이 지나갈 때까지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작가도 그 사실을 아는지, 『퀴즈쇼』에서 젊은이의 삶을 고스란히 담되 어떠한 조언이나 교훈을 이끌어낼 의도는 추호도 없다. 거듭해서 실패하는 이민수의 모습을 자화상처럼 여기고 보라는, 무언의 떠밀기만 느껴진다. 그것에 대해 젊은 독자는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한다. "나는 이 사람과 달라"라는 부인 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라는 공감 속에서, 대개는 더 쉬운 길을 고른다. 그리고 창작자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서지원을 통해, 어떤 길을 택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의 청춘이 어리석은 이유는 언제나 정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무책임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정답이라고 인정해 주는 사회자가 없을 뿐이다. 정해진 답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세계는 이춘성이 구현한 불완전한 퀴즈 지옥(나는 이민수가 다녀온 소사회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답보다 이유가 중요하고, 결과보다 과정이 의미 있으며, 성공하는 법보다 실패를 극복하는 법이 삶을 살아가는 데 더욱 필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모든 청춘이 그 해답을 발견하면 좋겠지만, 고시원의 옆방 여자처럼 끝내 찾지 못한 이들도 있다. 나는 어떤 교훈도 말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어떻게든 인생을 살아가 주면 좋겠다. 남아 있는 기회가 있기에, 우리는 젊음을 낭비할 권리가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젊음이 지나가고 나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최선을 다해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이렇게 해서 좀더 가난해진다. 그들은 가난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결국 더 가난해진다. 가난을 숨기기 위해 ‘남들 다 하는 것‘을 하고 그 ‘남들 다하는 것‘ 때문에 빚을 지고 빚을 갚느라 세상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 P1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을유세계문학전집 52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줄곧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에 매료되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그랬고, 『페스트』가 그랬으며, 『율리시스』가 그랬다.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모일 수밖에 없고, 다양한 군상이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는 그 공간은 모순적으로 나를 매료한다. 나는 도시에 살기를 원치 않으면서 도시에 살기를 선택한다. 도시의 체계에 대해 늘 불안함을 느끼면서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아간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뒤에는 각종 추악한 범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만족한다. 현재로부터 약 100년 전에 묘사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속 베를린의 모습은 서울 내지는 대한민국의 대도시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이 고전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주인공 프란츠는 분명 선한 인물은 아니다. 전과가 있고, 출소한 이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끊어내지 못한다. 그의 주변 인물인 라인홀트나 미체도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다. 작중에 묘사되는 범죄자들 역시 잔혹하고 폭력적이다. 그러나 도시는 이 모든 인물들을 끌어안는다. 마치 화려한 조명의 도시 아래에 그림자가 필연적이라는 듯, 그들의 삶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그리하여 작가인 알프레트 되블린이 묘사하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성경 구절과 한낱 유행가가 한데 어우러지는 장소가 된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한다.


 역사 의식에 대한 생각을 빼놓을 수 없다.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4년 동안 옥살이를 했던 프란츠 비버코프의 행적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감과 가난에 고통 받았던 독일 자체를 연상시킨다. 서술자가 프란츠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이 따갑듯이, 되블린은 독일의 과오를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어딘지 모를 연민이 느껴진다. 다시는 그러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듯이. 그러나 피조물의 범죄를 지켜보는 창조주처럼, 프란츠의 범죄와 고통과 심판에 대해 작가는 냉정하게 그 흔적을 따라간다. 소설 내에서 전쟁에 대해 언급되는 장면은 많지 않아서 현대의 독자는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전쟁의 여파가 모든 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작중의 모든 인물은 패전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소설가는 광고나 유행가 등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인용하여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려는 독일 시민들의 모습을 조명한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상징은 '도살장'이다. 도축되고 싶지 않아 저항하는 이들, 그러나 제사의 순서대로 정결하고 기계적으로 도축되는 가축들이 묘사된다. 어쩌면 작가는 도시 속의 인간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는지도 모른다.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올라왔지만, 그래 봤자 먼저 도축될 뿐이라고. 도시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 억압하는 자와 차별 받는 자를 모두 품어주는 이유는 그것이 자비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정하기 때문이라고. 분명 인간 속에는 한 도시, 한 우주와 같은 무수한 가능성과 생각이 있지만, 한낱 칼날 앞에 스러질 뿐이라고. 비관론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시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도시가 아니라면 사람들 틈에서) 현실을 분명히 직시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나의 쓸모를 결정하는가? 타인을 살해하고 난봉꾼처럼 살아가는 프란츠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가축과 같은 존재인가? 살아가도 된다는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인가, 아니면 타인인가? 


 작중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인용해 본다.

 고인들에게 명복이 있기를. 베를린에서는 1927년에 사산아를 제외하고 4만 8782명이 죽었다.

 4570명은 결핵으로, 6443명은 암으로, 5656명은 심장병으로, 4818명은 혈관 질환으로, 5140명은 뇌졸중으로, 2419명은 폐렴으로, 961명은 백일해로 죽었고 어린아이들 중 562명은 디프테리아로, 123명은 성홍열로, 93명은 홍역으로 죽었으며 그 밖에 3640명의 영아가 죽었다. 총 출생 수는 4만 2696명이다.

 죽은 사람들은 공동묘지의 자기 무덤에 누워 있고, 묘지기는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다. (p.609)

 지금도 이 도시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그만큼 죽지만, 나는 결코 그들의 인생을 알지 못한다. 숫자로 집계된 사람들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도시와, 저마다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운행되는지 나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죽고 태어나는데, 나의 삶은 전혀 변동이 없는 것처럼 보일까? 그 신비함에 다시 한 번 잠잠해진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나의 거창한 다짐과 행적은 공동묘지에 누워 있는 이들에게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며, 죽음이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휴지 조각을 쿡 찔러서 줍는" 일과 같이 일상적이다. 생명과 죽음, 쾌락과 고통, 편리와 불편이 공존하는 이 도시에서 나는 어떤 것을 보려고 하는가? 도시가 주인공인 소설들은 나에게 언제나 질문한다. 그리고 말한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단지 선택하라고. 도시를 구성하는 통계 속의 인간이 될 것인지, 그 마음 안에 도시 전체를 품는 자로 살아갈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기에 적을 필요도 없다. 그 결과와 책임은 내 삶에 고스란히 드러날 따름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 니콜라 (양장) 꼬마 니콜라 1
르네 고시니 글, 장 자끄 상뻬 그림, 윤경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꼬마 니콜라』의 내용은 대단하지 않다. 각 에피소드에 전율을 일으키는 서사도 없고, 이야기가 남기는 교훈도 딱히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그곳에는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있다. 때로는 짖궂기도, 더러는 순수한 그들의 사소한 여정이 이 두꺼운 책을 가득 채운다. 에피소드의 길이도 그렇게 길지 않기에, 나는 일상을 살아가며 꼬마 니콜라와 그의 유쾌한 친구들이 벌이는 이야기들을 가볍게 엿볼 수 있었다. 마치 프랑스의 어딘가에 이 장난꾸러기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글을 읽으면서 어떻게 작가는 이토록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헤아렸을까, 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어른들은 자꾸 자신의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려고 한다. 직업이 교사든 그렇지 않든, 친자식이든 처음 보는 아이든 어른들은 종종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길 원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그것은 참 가혹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순수한 마음을 지켜낼 권리가 있다. 물론 니콜라와 친구들이 벌이는 행적이 사회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언제나 용인되지는 않는다. 요즘 시대면 학교 폭력 등의 사유로 처벌 받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이제는 금지된 체벌로 그 대가를 치르긴 하지나 말이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그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른들이 세운 기준과 가치관은 편향적일 때가 많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의견의 차이로 싸워도 서로의 말을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인다. 중재하는 자가 나서면, 씩씩거리다가도 금새 잠잠해지곤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한쪽의 의견이 꺾일 때까지 도무지 굽히질 않는다. 그 양상이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한다. 타인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는 니콜라, 알세스트, 아냥, 외드, 조프루아와 같은 아이들이 없다. 있다 해도 금방 낙오되거나 변하고 만다. 개인의 다름을 존중해주지 않는 분위기와 성적이 '좋은 아이'의 기준이 되어버린 교육 현장에서 꼬마 니콜라의 재기발랄한 일탈은 처벌의 대상일 뿐, 그를 인정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가상의 인물이기에 너무 잣대가 느슨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수 있지만, 니콜라처럼 학교에서 꼴찌를 밥 먹듯이 해도 위축되지 않고 친구들과 놀러다니고 사고를 치는 아이들을 우리나라에서 용인할까? 부모든 교사든 어떠한 조치를 취해서 친구들과 분리하거나 그 아이를 '치료'하려고 할 것이다. 그렇게 니콜라보다 어린 나이부터 아이들은 교육 시스템 속에서 획일하게 양산된다. '공부'라고 불리는 입시 제도에 대부분 순응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니콜라가 학급 친구들과 벌이는 말썽들과 좌충우돌한 여름방학의 시간들은 공부가 아니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채로 눈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모든 과정이 곧 공부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다시는 그렇게 살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고 돌아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그 깨달음을 얻기도 전에 한 가지 길로 걸어갈 것을 강요받았기에, 마침내 부모의 간섭에 벗어났을 때 다시 그 미숙한 행동을 반복한다. 입시를 위한 공부는 할 줄 알았지만,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 배우지 못했다. 성공하라는 강요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만, 어떻게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지 배우지 못했고, 가난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위로를 받지 못했다. 물론 아이들의 잘못은 아니다. 그렇다고 부모 세대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니콜라와 같이 순수했던 마음을 잃어버렸고, 그 시간을 돌려받지 못할 만큼 험난하게 발전해 온 시대의 결과이리라. 대한민국의 처참한 교육 현실에 대해 통탄하지만, 이것조차 최선의 결과일 수 있었다. 그 치열한 교육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도달한다. 지금의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아이의 마음을 간직하는 방법이다. 그 마음은 스스로 되찾을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의 생애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71
찰스 디킨스 지음, 원은주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자녀가 꼭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리고 책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것을 출판하지 않고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 작가가 죽은 지 64년이 지나서야 증손자의 요청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책의 내용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이야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에 대한 것이었다. 기독교 문화권인 서구 사회에서는 사실 예수님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그분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킨스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예수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이유는,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것에 간절했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의 생애』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이미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훨씬 더 풍부하게 담겨 있고, 여기서는 디킨스가 자식들을 위해 쓴 논평에 가까운 글들을 살펴보면 된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비참한 자'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들 한가운데로 내려가 그들을 가르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고, 그분의 보살핌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떠올리거라. 그리고 언제나 그들을 가엾게 여기고 가능한 좋게 생각하거라"(p.28) 등의 구절은 유일한 독자인 자녀들에게 전하는 진심이다. 디킨스 역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고, 그 사실을 잊지 않은 채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이 역경을 극복하는 소설들을 숱하게 써 내려갔다. 아무리 대중적으로 성공을 거두어도, 디킨스의 초점은 언제나 가난한 아이들과 힘든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었으며, 동시에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차별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그는 놓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기독교에 대해 이렇게 쓴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에게도 항상 선을 행하는 것이 기독교란다.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이 기독교란다. 상냥하고 자비롭고 용서를 해 주며, 그러한 미덕을 우리 마음속에 조용히 간직하고 그 사실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 또는 우리의 기도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결코 자랑하지 않는 것, 그리고 겸손하게 묵묵하게 올바른 일을 함으로써 주님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 기독교란다."(p.113) 참으로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되묻는다. 여기에 쓰인 대로 온전히 실천할 수 있는 기독교인은 과연 몇이나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적 대문호이자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려고 애썼던 찰스 디킨스도 부족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위대한 작가는 그의 작품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자신의 꿈에 사로잡혀 가정을 소홀히 하고, 자신을 혹사한 디킨스의 모습이 그렇게 달갑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자녀에게 전달하는 개인적인 호소가 놀라운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의 노력을 높게 평가한다.


 로마의 엄청난 탄압을 받으면서도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기까지 기독교는 가장 사적인 바람으로 이어져 왔다. 나의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적인 바람은 인류의 구원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이해함으로써 확장된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나면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는 만큼이나 내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원수를 똑같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것이 우리가 황금률을 따라야 하는 이유이자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것은 강제적인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 역시 한 치의 줄임 없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며, 그 자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음을 인정하는 일에서 비롯된다. 


 나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 싶은 가정이 있다. 그 가정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서 평안이 찾아오면 좋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한 번 알게 된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단 한 번, 그 결정적 순간을 위해 나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실패와 가난과 아픔과 고난은 두렵지 않다. 이미 죽음이라는 가장 큰 실패를 이겨내신 예수님께서 나를 받쳐주고 계시니까. "어떻게 하면 눈앞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대답하신다. 나를 자기 자신보다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나서야, 나 하나만을 위한 삶을 벗어나 가장 사적인 그러나 가장 보편적인 꿈을 꿀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06-03 0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현재 미국에서 기생충보다 더 많이 미국인들이 본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 킹 오브 킹스의 원작이 바로 찰스 디킨스의 예수의 생애지요.찰스 디킨스가 어린 자녀들을 위해 에수의 생애란 책을 지은 것은 알았지만 온전히 자녀들에게만 들려주고 살아 생전 출판을 안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되었네요.

starover 2025-06-07 23: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실 그 뉴스를 보고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서 찾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것이 없지만, 자신의 자녀가 선하게 자라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이 잘 느껴졌어요.
 
가든 파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5
캐서린 맨스필드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갑작스러운 호기심에 구매한 작품.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기적처럼 포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작은 서사 속에 보편적 심리를 끌어내는 것이 문학이 가진 힘이다. 단편에 함축된 깊이를 이해하려면 좀 더 살아봐야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