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끼호떼 동서문화사 월드북 57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김현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무엇이 진실인가? 

 세르반떼스의 『돈끼호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읽어 머리가 돌아버린 시골 귀족 라 만차가 자신을 기사로 여기고 이름을 '돈끼호떼'라고 바꾼 후, 말 로시난떼와 현실적이고 비열한 종자 산초와 함께 온갖 모험을 다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흔히 사람들은 이 소설을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평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윌리엄 포크너, 엘리엇 같은 문호들은 『돈끼호떼』를 단순하게 보지 않고 이 소설에 대해 최고의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소설이 왜 그러한 명성을 얻게 되었을까? 이 리뷰에서 나만의 해석을 해 본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가 번성함에 따라 그리스인들은 부유함뿐만이 아니라 '지혜'를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어떻게 지혜를 얻는지에 대한 지혜를 알지 못했다. 그럴 때 등장한 사람들이 바로 '소피스트(복수로는 '소피스테스')'라는 사람들이다. 궤변론자인 그들은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그들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을 아테네인들에게 가르쳤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소피스트는 바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이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상대적 주관주의'를 주장한 소피스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만약 프라타고라스의 '상대적 주관주의'가 진실이라면, 이 소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현실은 두 가지 이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돈끼호떼』 1부에서 돈끼호떼와 산초가 서로 다른 각각의 진실을 말한 것과 같이, 상대적 주관주의는 그러한 모순을 담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단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끼호떼』는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적 주관주의'를 풍자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돈끼호떼』의 1부를 보자. 여러 장에 걸쳐서 돈끼호떼와 산초는 한 가지 대상에 대해 대립되는 생각을 가진 채 서로 대립했다. 한 가지의 현실을 놓고 두 개의 이론이 대립한다면, 작품 밖에 있는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오직 진실을 전해주는 현실이 직접 보여주는 것만이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준다. 심지어 저자 세르반떼스는 아라비아 학자 씨데 아메떼라는 자를 저자로 내세우고 자신은 이 이야기의 화자 또는 편집자로서 나서서 우리로 하여금 둘 중에 누가 진짜 저자인지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물론 우리는 세르반떼스가 이 이야기의 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가 아라비아 학자를 저자로 내세운 까닭은 당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혼돈 속에서 우리는 현실 속에서의 분명한 진실을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르반떼스가 노린 것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을 통해 확고한 진실을 아는 것 말이다. 

 

 

 상대적인 진실  

 우리는 1300페이지에 걸친 엄청난 모험의 대부분이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논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골 귀족 돈끼호떼와 종자 산초가 처음으로 대립하는 사건인 '풍차 사건'을 보자. 돈끼호떼는 그것을 '거인'이라고 부르고, 산초는 그것을 '풍차'라고 부른다(내가 '풍차'라고 명명한 것은 풍차가 아니다. 그것은 풍차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가? 돈끼호떼에게는 '거인'이 진실이고, 산초에게는 '풍차'가 진실이다. 진실은 하나뿐인데, 어떻게 진실이 두 개로 나타날 수 있는가? 이것이 상대적인 진실의 모순이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적인 진실을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러한 갈등은 계속된다. 주막이라 불리는 곳을 '성'이라고 부르는 돈끼호떼와 그 곳을 '주막'이라고 부르는 산초 간의 갈등, 다가오는 무리를 '군대'라고 부르는 돈끼호떼와 그 무리를 '양떼'라고 부르는 산초 간의 갈등, 돈끼호떼가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본 것이 진실인지에 대한 둘의 갈등……. 이렇듯, 『돈끼호떼』는 진실과 거짓, 현실과 상상의 갈등의 변증법을 통해 전개된다. 그래도 대부분의 독자들과 연구가들은 더 진실에 입각한 쪽을 산초라고 평하고 있다. 그가 지극히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초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진실이 아니듯이, 현실에 나타난 것들을 모두 진실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갈등의 변증법의 혼돈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광인처럼 여겨지던 돈끼호떼가 점점 성숙한 기사로 변하게 되는 사실이다. 『돈끼호떼』 1부에서 보였던 돈끼호떼의 모습이 무모하고 몽상적인 어리석은 기사의 모습으로 보였다면, 2부에서 보이는 돈끼호떼의 모습은 숭고롭고 고귀한 '영웅'의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우리는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저자가 교묘하게 돈끼호떼를 점점 성숙한 인간으로 바꾸어가는 것과 산초와 돈끼호떼의 성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이 여러 문인들의 찬사를 받은 이유이며, 이 소설이 고귀롭고 숭고한 두 인물을 창조한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이다. 

 

 

  스페인에 대한 비판 그리고 사랑

 세르반떼스가 이 소설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부패에 찌든 중세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서, 당시 스페인(에스빠냐)의 사회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성격이 분명한 두 인물을 통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감동시키기 위해서…….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저자의 말로는 '당시 스페인에 팽배했던 기사도 소설을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읽어 머리에 온갖 이상한 것이 담긴 돈끼호떼의 내면을 묘사한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

 실제로 우리는 세르반떼스가 서술한 것과 같이, 이 소설이 기사도 소설을 타파하기 위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소설 초두에서 알 수 있다. 사람들에게 '착한 알론소 끼하나'로 불렸던 시골 귀족이 기사도 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는 바람에, 결국 자신을 기사도 소설의 기사로 생각하게 된다. 『돈끼호떼』에 흔히 등장하는 기법인 '위장'이 등장하는 것이다. '위장'이란, 자신의 진실, 또는 정체를 감추는 것들을 일컫는다. 이 경우에는 '돈끼호떼'라는 이름이며, 이 이후에도 『돈끼호떼』에서는 위장이 수없이 많이 등장한다. 

 

 어쨌든 우리는 이로써 깨달을 수 있다. 당시 스페인에 팽배했던 기사도 소설은 착한 사람을 남에게 피해를 주는 미치광이로 전락시킨다는 것, 그리고 기사도 소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게 망쳐버린다는 것, 그리하여 그런 기사도 소설은 뒷마당에서 '처형'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세르반떼스가 『돈끼호떼』를 통해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단순히 '기사도 소설'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사도 소설에서 한층 더 나아간 '중세 사회의 스페인'이다. 기독교의 논리를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부패한 성직자들, 기사도 소설에 빠져 깨우치지 못하는 스페인 백성들, 폭정을 하는 통치자들……. 세르반떼스는 이 모두를 겨냥하여 이 작품을 쓴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 곳곳에는 스페인 세계에 대한 비판과 유토피아에 대한 저자의 갈망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이 속에서 세르반떼스의 사랑을 엿보았다.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 따르면, 모든 인문고전 속에는 인문고전 저자의 사랑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치열한 독서를 통해 그 속에 담겨진 천재들의 사랑을 엿보아야 한다. 여러 문호들과 문인들이 열렬하게 찬사를 남긴 『돈끼호떼』가 어찌 인문고전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나는 이 소설에서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사랑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세르반떼스는 『돈끼호떼』에서 당시의 스페인 사람들, 나아가 전 세계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그들을 좋은 상태로 이끌어나가려는 갈망을 담았다.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사람을 좋은 상태로 이끌어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르반떼스는 전 세계 사람들을 좋음의 길로 이끌어나가려고 했다. 즉, 그는 모든 인류를 사랑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 세르반떼스는 중세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과 악들을 그의 생애를 통해 알고 있었다. 한때 노예선에 붙잡혀 심한 고생을 하던 그로서는 어느 부류의 인간은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까지 무시하고 온 인류를 좋음의 길로 이끌려고 했다. 나는 그의 초월적인 사랑에 감탄했다. 그의 초월적이며 숭고한 사랑이 돈끼호떼가 보여준 사랑과 숭고함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책 속에서 살아있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액자와 삽화 

 『돈끼호떼』는 하나의 장대한 대서사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줄거리가 그다지 길지 않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고전을 읽는 동안 지루해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돈끼호떼』 속에 수많은 액자 소설과 에피소드를 담아놓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모여 『돈끼호떼』의 주제는 더욱 확고해지고, 이 소설은 더 숭고하고 위대해진다. 

  

 『돈끼호떼』는 수많은 액자로 가득 채워져 있다. 1부에서만 해도 6가지의 액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2부에서의 돈끼호떼가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겪은 이야기와 공작의 노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의 이야기 등을 합친다면, 『돈끼호떼』 한 소설에 등장하는 액자 소설만 해도 10가지 이야기 남짓한다. 게다가 우리는 이 방대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659명의 인물 중 459명이 액자 소설에 등장한다는 사실만 알아도 이 소설에서 액자 소설의 비중이 얼마나 크고, 또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돈끼호떼』는 본 줄거리보다 온갖 삽화가 더 비중이 클만큼(온갖 노래와 시도 한 몫한다) 삽화 천국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삽화는 분명히 2부에 등장하는 '공작의 장난'일 것이다. 사실 이 삽화는 삽화로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 많다. 이 거대한 삽화는 또 다시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지기 때문이다(공작의 장난이 처음 두 번째의 이야기로 나타나며, 산초가 섬의 영주로 통치한 이야기와 혼자 남은 돈끼호떼의 개인적인 이야기, 그리고 노시녀 도냐 로드리게스의 이야기, 총 다섯 가지 이야기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돈끼호떼 없이 통치하는 산초의 이야기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돈끼호떼가 산초를 종자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혹 때문이었다. 자신의 모험이 성공하기만 하면 그를 섬의 영주로 앉힌다는 유혹으로 말이다. 그 말을 듣자 산초는 바로 가족을 내팽개쳐버리고 모험길에 오른다(이 부분에서 세르반떼스는 권력욕에 눈이 먼 현실적인 사람을 풍자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모험을 계속 해 왔지만 자신에게 오는 것은 고통과 광인 돈끼호떼의 변명뿐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돈끼호떼와 산초가 간 공작의 성에서 공작이 산초에게 섬 하나를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 이후로 산초는 가식적인 행동을 하며 섬의 영주가 되기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바라따리아 섬의 영주로 임명받아 그곳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솔로몬처럼 섬의 갈등을 해결하고 돈끼호떼와 서신을 교환하는 등 통치자로서의 자질이 보였다. 그리고 그 때까지 그는 드디어 자신의 오랜 갈망을 이루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적의 습격으로 산초가 비참하게 전락하여 "나도 불행한 녀석이지! 내 어리석음과 몽상이 이런 결말을 가져오다니!"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는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애초에 영주직에 앉을 자질이 없었고, 그것은 어리석은 소망이었다는 것을. 또한, 우리는 돈끼호떼 없이 통치한 그의 비참한 운명을 통해 우리는 통치는 돈끼호떼와 같은 것(상상력, 용기 등. 참고로 2부의 이야기이므로 더 이상 그를 광인 취급하면 안 된다)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산초의 이 허황된 생각으로 만들어진 모험은 굴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산초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내미는 돈끼호떼와 만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찌 보면 공작 부부의 성에서 벌어진 삽화는 산초를 위해 만들어진 삽화가 아니었는가 싶다. 왜냐하면 이 삽화가 만들어내는 결과는 모두 산초에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둘씨네아의 마법을 풀기 위해 엄청난 양의 곤장을 맞아야 하는 사람도 산초고, 영주가 되어 비참하게 전락한 사람도 산초다. 그리고 우리는 33장에서 산초가 공작 부인과 시녀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이 거대한 삽화의 목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님, 지금 여기서는 이 방에 계시는 분들 이외에 아무도 몰래 엿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무서워하거나 겁을 먹는 일 없이 방금 물은 말과 앞으로 물을 만한 일에 대답해 드릴 작정입니다. 우선 말씀드릴 것은 저는 주인 돈끼호떼 님을 손도 댈 수 없는 미치광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이따금 생각이 깊고 도리에 맞는 말을 악마 사탄이라도 그렇게 잘 지껄일 수 없을만큼 잘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정말 주저 없이 주인을 정신병자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다고 생각합니다."

 (…) 

 "그 말을 듣고 보니 내 마음 속에서 한 가지 걱정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그리고 내 귓전에서 이렇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요. '돈끼호떼 데 라만차님이 미치광이이고 바보라면, 그것을 알고도 그 사람을 섬기고 따라다니면서 구름을 잡는 듯한 약속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종자 산초 빤사도 틀림없이 주인 못지 않은 미치광이이며 바보가 틀림없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런 산초 빤사에게 다스리도록 섬을 준다면,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도 다스릴 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남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하고 말이에요." 

 산초가 말했다. 

 "마님, 그 걱정은 알맞게 나왔습니다. 그에게 좀더 마음대로 지껄이라고 하십쇼. 그게 옳은 말이라는 걸 저도 알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제가 영리한 사나이라면 벌써 주인을 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제 팔자인 걸요. 싫어도 제 팔자니까 어쩔 수 없이 주인을 따라다녀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마을에 살고, 저는 주인의 빵을 얻어 왔으며, 또 저는 주인을 좋아합니다. 주인도 그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저에게 당나귀 새끼를 주셨습니다. 저는 우직한 인간입니다. 큰 괭이나 삽이라도 사용하지 않고서는 우리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만일 마님께서 약속하신 영주 자리를 저한테 주시기 싫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니 억지로 그런 걸 받지 않는 편이 제 양심을 위해서도 더 좋을지 모릅니다(p.900~901, 『돈끼호떼』 제 33장, 「공작부인과 시녀들이 산초 빤사와 나눈, 읽을 만하고 기록할 만한 뜻 깊은 대화에 대해서」 중)." 

 

 그래서 산초와 돈끼호떼는 위대하고 고귀로운 인물이다. 그들은 비록 우스꽝스럽고, 무식하게 저돌적이며, 항상 크게 깨지지만, 결코 그들은 지치지 않는다. 계속 그들은 도전한다. 그리고 꿈꾼다.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뭐든지 마다않고 우직하게 덤벼든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면 병으로 쓰러져 죽어버리는 못말리는 무식쟁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멸의 인간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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