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열쇠 다시 읽고 싶은 명작 1
A. J. 크로닌 지음, 이승우 옮김 / 바오로딸 / 202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평화와 사랑을 내세우는 기독교는,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갈등과 분열을 거쳐왔다. 다른 종교와의 싸움은 물론이요, 교단과 교파로의 쪼개짐은 필연이었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는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똑같아 보일 정도이다. 개신교도인 나는 신부(가톨릭)를 주인공으로 삼은 이 소설에 이입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했다. 그의 행동 원리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신념도 섞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통 가톨릭과는 거리가 멀어서, 본회로부터 도리어 이단으로 취급 받기도 한다. 편하지 않은 길을 택한 자의 삶은 늘 그런가 싶었다.


 작가는 프랜시스 치점의 삶을 죽 훑지만, 마음의 심연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독자는 그가 어떻게 신부가 되었는지 궁금해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는 이미 '되어 있다'. 또한, 천국의 열쇠가 어디서 등장하는지, 천국에 가까이 도달한 적이 있는지 종잡으려고 하지만,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특히나 선교를 떠난 중국에서 보낸 시간들은 붕괴와 재건의 반복이었다. 치점 신부가 열쇠를 찾게 되었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드러나는 것은 시련이지만, 나는 그속에서 어렴풋이 단서를 발견한다. 천국의 열쇠란, 얽매임 없는 삶, 즉 자유에 있지는 않을까?


 자유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결코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든 맞출 수 있는 힘,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목표한 바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그 다짐을 언제든 내려놓을 수 있는 결단이 종합되어야 자유는 실현된다. 프랜시스가 신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는 엄격한 가톨릭의 규정에 반발한다. 남녀를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순수하다는 주장에 대해, 그는 자연의 힘을 억누를 수 없다고 반박하는 그의 모습은 가톨릭의 근간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성(性)이라는 것을 썩어가는 시체처럼 더러운 홑이불 밑에 숨겨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수상한 짓이나 음탕한 행위를 하는 겁니다. 잘 지도해서 좀 더 건강하게 성을 인식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독사나 해충처럼 목을 졸라 질식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실패만 따를 뿐입니다. 순결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하게 만들 뿐이지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p.209)


 그는 종교가 세운 원칙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지 고민한다. 그리고 주의 말씀에 순종한다. 교단에서는 그를 파문하듯이 중국에 보내지만, 그는 그곳에서 또 다른 생명을 피운다. 참혹한 전쟁의 물결에 익사할 뻔했지만, 그들은 기어코 살아남는다. "인간이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가 지옥이라고 증언하며 말이다. 프랜시스 치점은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죽임 당하는 순간에서도 절망하지 않았다. 바로 그 자리에 천국의 열쇠가 놓여 있었다. 그는 세상의 가치에 짓눌리지 않았다. 어떠한 어려움 뒤에도 솟아날 구멍이 있음을 확신했고, 그리하여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그는 망가진 어린 시절의 인연들을 뒤로 한 채 생명을 구하는 일에 힘쓴다.


 프랜시스는 평생을 인정받지 못했다. 심지어 같은 교단에게도 말이다. 선교사로 보내졌을 때, 그는 사기 당했고, 가난했으며, 수모를 면치 못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실패한 자의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놓여져 있고, 그의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복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부러워하지 못할 인생을 기꺼이 자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소설의 끝에서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누구도 내 삶을 질투하지 않게 하소서. 오직 예수님만 내 삶에서 드러나게 하소서." 내가 부서지고 연약해 보일수록, 그러한 죄인을 이끄시는 주님의 능력은 드러난다. 이것이 세상이 알 수 없는 신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