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 - 나사의 회전 외 7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1
헨리 제임스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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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제임스 조이스를 필두로 한 모더니즘 문학에 굉장히 매료되었다. 나는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서술자와 주인공의 경계를 넘어서며 독자를 이야기에 참여하게 하는, 그러나 한편으로는 "쓰기는 쉽고, 읽기는 어려운" 기법에 익숙해졌다. 이것을 너무 관성적으로 쓰다 보니, 작중 인물의 의식을 파고드는 행위가 당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모더니즘 문학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과 비평가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작중의 세계와 현실이, 독자와 등장인물이 철저히 구분되기를 원했고, 만약 작가가 실제와 소설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싶다면, 반드시 1인칭 시점을 써야 했다. 이 문학적 전통을 함부로 깨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떤 이들은 취미 생활을 위해 글을 썼지만, 역사에 기록된 소설가들은 대개 인생을 걸고 창작에 임했다. 그들에게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라고 누가 강요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나는 헨리 제임스를 너무 늦게 알았다. 『데이지 밀러』나 『나사의 회전』 등의 작품에 대한 소문만 얼핏 들었지, 그 작품들을 직접 읽지도 않았고, 그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개척했을 뿐 아니라, 현대 소설을 정의하는 데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배운 것이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만 파고들고,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배우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악습이 다시 나왔다. 영미권 독자들도 그의 소설을 어려워 한다. 아무리 번역이 유려하게 되었다 한들, 자신만의 문체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을 연단한 장인의 솜씨를 단번에 깨우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나사의 회전』은 공포 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그 안에 무수한 재해석의 여지를 품고 있지 않은가? 그 분량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은, 헨리 제임스가 소설 곳곳에 치밀한 장치를 배치했음을 알게 한다. 역자의 해석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이 소설을 평범한 공포 소설로 이해했으리라. 


 역자는 「중년」의 가장 유명한 문장을 "우리는 어둠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로 시작되는 덴콤의 말이라고 설명하지만, 나에게 더 인상 깊은 것은 그 이후의 대화이다.


 "만약 선생님이 의심을 하고, 절망을 했다 하더라도, 선생님은 언제나 그것을 '해내셨습니다.'" 방문객이 미묘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을 합니다." 덴콤이 인정했다.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이 결국 모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럴 법한 것이고, 그것은 선생님 당신입니다."

 "위로를 주려고 하는 자여!" 불쌍한 덴콤이 냉소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건 진실입니다." 그의 친구가 고집했다.

 "그건 진실이지요. 좌절은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좌절이야말로 삶입니다." 휴 선생이 말했다. (p. 290)


 대화 중간에 언급되는 '어떤 것 혹은 다른 것'(something or other)이 결국 모더니즘 문학의 정수이다. 소설의 소재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고갈되었다는 이론이 유행하던 당시, 헨리 제임스는 아직 우리가 표현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다고 주장했다. 단지 그것을 언어로 포착하지 못하는 예술가들의 역량이 부족할 뿐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문학들은 모두 '어떤 것' 혹은 '다른 것'을 표현하기 위한 노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서야 이해에 가까워진다. 그 미묘한 과정을 카버는 '어떤 것'(something)의 변화로 설명한다. '어떤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순간, 더 이상 '어떤 것'이 아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직접 말하는 대신,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황의 변화, 등장인물들의 반응을 통해 독자가 유추하게 만든다. 헨리 제임스는 그 추리의 과정에 독자가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소설에 참여하는 것이라 믿었다.


 혹자는 이러한 알쏭달쏭한 기법에 질색을 하기도 한다. "독자에게 이야기를 떠맡기다니, 무책임한 것이 아니냐?"라고 반문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머리를 식히려고 소설을 읽는데, 왜 굳이 어렵게 쓰느냐?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따지기도 한다. 그렇다. 창작자보다 예술을 진지하게 임하는 이는 없다. 모두에게 남의 예술은 가벼운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이 현실의 일과 무관하다는 주장에는 반박하고 싶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이 결국 이 삶의 실천에 이바지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거의 모든 소설가에게 적용되는 가치관이다. 타인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당신의 삶에 충고하고 간섭하겠는가? 단지 "이렇게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라고 조심스럽게 제안할 뿐이다. 그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은 철저히 독자의 몫이다. 예술이 선전이나 세뇌를 위해 사용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것'의 가치를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작품이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창작되기를 원치 않으리라.


 의식의 흐름 기법은 헨리 제임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작가를 설명하는 수십 가지 방법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현대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였다는 것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문학적 관습과 전통을 깨기 위해 그는 많은 비난을 감수했다. 그가 걸었던 일은 결코 쉽지 않았고, 그의 노력 덕분에 뒤이은 모더니즘 문학들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로 채워졌다. 누군가가 그 길을 걸었기에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누군가가 길을 터주었기에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편할 수 있다. 예전에는 어떤 한 사람이 세운 공에 눈길이 갔다면, 지금은 그 공을 이루기까지의 배경에 더 관심이 간다. 텍스트(text)보다 맥락(context)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비평이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는 그 말에 약간 얼굴이 붉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가 말하는 은빛 라이닝은 일반인이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에 비교해 보면 너무 추상적이라고 거듭 말하면서 그것을 피난처로 삼았다. "그건 당신이 그것을 흘낏이라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그것을 한 번이라도 엿본다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것이 당신이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될 겁니다." -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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