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터인가 서평을 쓸 때 일정한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기준에 충족하지 못한 서평은 아쉽고, 남들의 눈에도 그럴 것으로 보였다. 삶에서 독서의 비중을 줄이고, 다짐들을 흘려보내면서 '책을 읽을 때마다 꼭 독후감을 남기자'라는 약속에 점점 소홀해졌다. 이대로 문학과는 거리를 두는 생활이 지속될 것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다만, 프랑수아즈 사강의 데뷔작인 『슬픔이여, 안녕』은 적절한 자극제가 되었다. 습관적으로 펼쳐들지 않고, 어디선가 들어본 명성에 이끌려 소설을 집어들었다.

 

 소설의 첫 번째 문단은 언제나 설렌다. 작가, 당신이 할 이야기가 무엇인지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가 없으니까. 독자에게 오는 수많은 외부의 정보들은 활자 너머의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초점을 옮긴다.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이 감정이 어찌나 압도적이고 자기중심적인지 내가 줄곧 슬픔을 괜찮은 것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느껴진다. 슬픔, 그것은 전에는 모르던 감정이다. 권태와 후회, 그보다 더 드물게 가책을 경험한 적은 있다. 하지만 오늘 무엇인가가 비단 망처럼 보드랍고 미묘하게 나를 덮어 다른 사람들과 분리시킨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세실은 슬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다. 처음에 그것은 사춘기의 역경과 결합하여 친구처럼 늘 그녀 곁에 있는다. 자신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존재로 여겨졌던 안이 죽고 나서야, 자신의 관계를 왜곡시킨 존재가 바로 슬픔임을 인지한다. 그리고 다시 세실이 슬픔의 이름을 불렀을 때, 두 친구는 작별을 고한다. 물론 그녀는 알고 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제라도 슬픔은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일일이 이름을 부르는 과정이 부끄럽고 거추장스럽기에 그녀는 미리 인사를 남긴다. 


 1부를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소설의 주제가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안으로부터 빼앗긴 세실의 상실과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가 시릴과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인간이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안이 죽고 나서야 세실은 고백한다.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나는 그가 내게 준 쾌락을 사랑했을 뿐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떠날 터였다. 이 별장을, 이 청년을, 이 여름을." 이 고백이 『슬픔이여 안녕』을 독특한 지점에 올려놓는다. 아픔과 시련이 늘 주인공의 방황을 종결시키고 내면을 단단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어른이 지어낸 동화다. 그들은 이미 그것들을 받아들였으니까. 열일곱 살에게 죽음이란 가혹하다. 너무나 아프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실수로 인해 초래된 것임을 알고 있을 때는 말이다. 세실에게 필요한 것은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남자 친구가 아니라 고독의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그 시간들을 견뎌낸 후에야 부녀는 다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때 여름은 지나 있었다.


 처음 느낌 그대로, 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늘 똑같은 일상조차 매일 미묘하게 다른 것을.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계를 지키는 여정이 쉽지만은 않다. 비단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각자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유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정신은 불변하나, 나약하다. '처음'이라는 말만큼 떨리고 간절한 단어가 있을까? 한 번 경험된 느낌과 행동이 다음에 똑같이 다가올까? 세실에게 또 다른 여행이, 여름이, 사랑이, 안이 찾아온다 해도 처음 느낌과는 분명 다르리라. 슬프게도 그녀는, 그리고 우리는 그 사실을 모두 안다. 자신이 만들어 낸 세상은 쉽게 흔들린다. 교훈은 여정을 마친 자의 몫이다. 아직 우리는 길 위에 있고, 자주 슬픔과 마주친다. 그 친구와의 관계는 무딜 만큼 무뎌져서 이제 그다지 반갑지 않다. 그래도 목 끝에 탁 걸린 그 말을 뒤로 하고, 다시 손을 뻗는다. 처음 만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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