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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 18현 - 조선 선비의 거울
신봉승 지음 / 청아출판사 / 2010년 5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54974145567468.jpg)
조선시대는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나라다. 고려가 멸항하고 조선이 개국할 시점, 다시말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있어서 국가를 정비할 기본 사상으로 채택한 것이니, 유교를 선택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를 떠올릴 때마다 부패한 정치권과 선비들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붕당정치를 일삼고, 반상의 제도를 고집하여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들에게서 기회를 빼앗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외면하는 모습만 떠오르는 것을 보면... 그리고 그 책임을 모두 유교라는 이념에 떠넘기게 되는 것을 보면 도대체 그 이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유교는 다들 알고있다시피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인과 의, 예, 선 등 도덕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상이다.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규범이나 법은 사람의 행동을 제약하고 하지말아야 할 것을 정하거나, 하지말아야 할 것을 행했을 때 벌을 주는 것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되다보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피동적인 입장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면을 바탕으로 '어떻게 해야한다', 라는 것을 가르치게 되면 스스로의 행동에 책임질 줄 알고 능동적으로 법과 질서가 바로 잡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철학적 가르침이 그러한 것 처럼 공자를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이 말하는 내용이 아무리 옳다고 하여도 배우고 익힌 자들이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조선시대가 그 모양인 것은 유교 때문이야!!" 라고들 하지만 실제로 유교의 이념 자체는 너무나도 이상적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공자를 그토록 숭상하고 떠받들었던 자들이 머리 속에 가득 채운 지식들을 오로지 자신들의 성공만을 위해서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문묘 18현> 이 책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함께 배향된 18인의 성현들에 대해 설명한 책이다. 유교의 시조이자 성인으로 추앙받던 공자의 위패를 모신 곳에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유교를 갈고 닦은 선비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영광이며 대대손손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조선시대 500년을 뒤돌아 보자면 얼마나 많은 유학도들이 있었을 것이며, 높은 관직에 올라 이름을 떨친 이들도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문묘에 올릴 성현을 정하는 것은 서로 대립하고 있던 정치세력들에게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문제였을 것이고 정말 흠잡을데 없는 인품과 덕망과 유교적 이념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어야 했다.
문묘 18현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있다. 김굉필은 임금의 노여움을 살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위해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다. 조광조의 경우는 4년여라는 짧은 정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의 도덕성과 죽음을 무릅쓴 개혁가로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길이라고 믿었던 율곡 이이는 설명이 필요없는 인물이며, 김장생과 김집은 부자가 함께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기에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정몽주의 경우는 어찌보면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절만큼은 높이 인정되어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선비님들이 이렇게 쿨~ 할때도 있는가 보다 싶었다.
18인의 가장 큰 특징은 성리학의 가르침과 실천 사이에 간격을 얼마나 좁혔는가 하는 것이다. 유교는 스스로에게 끊임없는 절제와 인내를 요구하면서도 타인을 배려하는 삶이기에 정말 어려운 학문이다. 그리고 그들중 적지 않은 수의 인물들은 당대에 인정받지 못하고 충심을 전달했던 임금께 사사된 경우도 있다. 비록 안타까운 죽음을 맞긴 하였으나 후에 명예를 회복하고 역사에 성현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역사의 심판은 냉혹하면서도 정확하다 하겠다. 문묘 18인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것은 세월에도 빛바램이 없는 고귀한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