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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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에 있어서 화려했던 한 시절, '풀밭 위의 식사'가 가장 큰 소망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 땐 날마다 그런 상상을 했다. 피크닉 가방에 샌드위치 몇 조각과 음료를 챙겨넣고 푸른 잔디가 깔린 공원에 돗자리 깔고 앉아 책 읽는 상상을... 내 옆에는 영혼을 다해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한 남자가 있고 저만치 앞에는 우리의 아이들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머리속에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내가 꿈꾸던 상황을 현실화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상은 단조로우면서도 분주했다. 여유로움이 없는 단순함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결과다.

    

 <풀밭 위의 식사> 이 책은 마네의 명화 '풀밭 위의 식사'와 제목이 같다. 19세기 중반 살롱에 출품된 그림은 당시 비평가들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대낮에 점잖은 신사들과 벌거벗은 여인이 풀밭에 동석한다는 설정도 파격적이었지만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스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학 작품이나 음악, 미술 같은 예술 작품의 경우 당대에는 비난받았지만 후대에 그 가치는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작품들의 특징은 새로운 기법을 선보이거나 기존의 관념을 뒤엎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치'라는 것은 결코 고정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전경린 작가의 책은 <엄마의 집> 이후에 오랜만에 읽었다. 이혼이라는 아픔을 겪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여인과 이제 스무살의 된 딸의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엄마의 집'은 가족의 이야기였고 상처와 치유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작과 비교했을 때 거의 180도 다른 이야기다. 20대 중반이면서 아직도 미성숙한 여인과 중년의 사랑이다. 누경과 서강주, 안타깝게도 그들의 사랑은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여자의 나이와 두 배 가까이 차이난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먼 친적이라는 점도 익숙치 않은데다 대학교수에 가정이 있는 남자와 불륜이라니... 누경은 자신이 빚어내는 유리공예처럼 위태하고도 치명적인 사랑에 빠져들고 만다.   

 

 며칠 전에 중국소설을 읽으면서도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들어 부쩍 금지된 사랑, 운명적인 사랑, 엇갈린 운명, 치명적인 사랑 이런 주제의 소설을 대하기가 참 힘들다. 사랑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 있을 때는 가슴시린 사랑조차 낭만이요 동경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여주인공의 생각에 공감하지 못하고 감정이입이 되지 못하는 상황인데다 아내와 이혼할 생각이 없는, 투병중인 부인 옆을 지키면서도 누경을 지우지 못하는 서강주를 보면 오히려 격한 감정이 생기기까지 한다. 난 이미 누경의 입장보다는 한 남자의 아내로 이 소설을 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인가?

 

  명절에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요즘 화재가 되고 있는 '아마존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밀림 깊숙한 곳에 자신들만의 문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거 개념과는 다른 생활을 한다. 특히 성인 남녀가 함께 혼숙을 하고 자녀를 낳아 공동으로 키운다는 것은 핏줄에 대한 집착 자체가 무의미함을 의미한다. 현대인들의 시선으로 보면 경악할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비난할 근거는 없다. 어쩜 미래인의 시각에서 보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억제해가면서 1부 1처제를 고집했던 현대인들이야말로 이해받지 못할 인류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엄청난 편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의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수세기동안 '자유'를 위해 투쟁해온 결과가 초라할 만큼 오히려 많은 제약속에 살아간다. 타인으로 인해 속박 당하기도 하고 개개인이 스스로를 옳아매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고, 뻔히 보이는 불행한 결과를 떠올리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누경의 모습은 사회적 규범에 의한 속박이자 동시에 굴레를 벗어나고자 했던 몸부림일 수도 있다. 문득 누경을 통해 풀밭 위의 그녀를 본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을 쳐다보던 그녀... "더 많이,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 " 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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