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지니 아들 녀석이 귀가 시리다고 난리다.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는데 내 아이의 귀는 좀 오목하면서도 쫑긋(?)하다. 시끄러운 곳에 가면 보통 사람들은 손 바닥으로 귀를 막는데 내 아이는 귀로 귀를 막는다. --; 아가때 귀를 만질때마다 도대체 누굴 닮은건지 궁금증해 했던 기억이 난다. 귀에 대한 미스테리는 아이가 돌이 훌쩍 지나서야 밝혀졌다. 어느날 남편의 외가쪽 어른들을 뵈었던 자리가 있었는데 시어머니의 작은아버지 되신다는 시할아버님의 귀가 울 아들이랑 같은 것이 아닌가!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완전 배잡고 쓰러졌다. 거봐~ 조사하면 다 나와 하면서... ㅋㅋ 우리의 몸 속에 특정한 피가 흐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 정체성까지도 규정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으로 거슬러 올라가 운명처럼 마주대할 수 밖에 없는 본성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보의 피'는 무엇이란 말인가? <유정천 가족>이라는 책을 받아들고는 "우리 몸속엔 주체할 수 없는 바보의 피가 흐릅니다"라는 카피를 한참동안 바라 보았다. 일본 에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고양이 버스를 연상시키는 표지부터 왠지 이 가족에겐 뭔가 엄청난 것이 있을 것만 같은, 뭔가 빵~ 터지는 것을 기대하고픈 마음이 솟아났던 것이다. '유정천'이란 보통의 경우 불교에서 말하는 구천 중에서도 가장 높은 하늘을 말하며 욕계와 색계의 윗 단계를 말한다. 하지만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상태'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유정천 가족은 즐겁고 행복한 가족이거나 그런 삶은 추구한다는 의미가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참 다양한 종이다. 우선 유정천 가족은 너구리고 너구리 가족의 스승은 늙고 힘없는 텐구이며, 텐구가 좋아하는 이성은 바로 인간 여자다. 너구리들은 인간이나 짐승, 사물을 가리지 않고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원한다면 인간들과 자연스럽게 섞여서 살아갈 수도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너구리들의 세계뿐 아니라 텐구들에게도 인정받는 훌륭한 너구리였다. 그런 아버지가 뜻하지 않게 '너구리 요리'가 되는 운명을 맞이하자 너구리 사형제들에게는 험난한 앞날이 펼쳐진다. 때론 강하게 때론 사랑으로 형제들을 감싸주시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운명이 얼마나 더 참혹했을지... 큰형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최고의 너구리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키우지만 오래전부터 아버지와 갈등을 빚어왔던 작은 아버지와 사촌들의 방해가 만만찮다. 거기다 스승님의 애정을 등에 업은 텐구가 된 인간여자의 횡포와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 면박을 주는 파혼한 약혼녀 때문에 주인공의 일상이 참으로 다사다난하다. 출판계에 불어닥친 일본소설의 파워에 대해서는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다들 느끼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작년에는 어느 해보다도 일본소설을 많이 읽었던 것 같은데 설정이나 전개가 너무나 독특하고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독특한 맛이 있어도 자주 대하면 익숙해 지기 마련인지 올 들어서는 좋아하는 일본 작가의 책만 선별해서 읽었는데 모리미 토미히코의 경우는 예외의 경우가 되었다. 전작인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 대한 평이 '기발하고도 독특한 상상력' 이었다면 이 책은 작가가 데뷔 초기부터 구상하고 쓰고 싶었던 내용인 만큼 더욱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유정천 가족>은 지금까지 읽었던 일본 소설 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파격적인 설정인 책이다. 우선은 캐릭터들 부터 독특하기도 하고 내용면에서도 실없이 웃음이 나는 장면들과 심각한 장면, 그 와중에도 깊이가 느껴지는 문구들과 마음이 숙연해지는 장면들이 적절하게 녹아 있다. 인생이 고달프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온다면 세상이 나를 버렸다고 단정짓기에 앞서 과한 욕심과 집착이 원인은 아닐지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쩜 저자가 원한 것은 깊이 있는 의미 전달 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주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끝으로 사형제의 아버지이자 위대한 너구리 소이치로의 유언으로 글을 마무리 하련다. "재미있는 건 좋은 거야." 밑줄 친 문장 "이 세상에 널린 '고민거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어찌 되건 별 지장 없는 고민. 또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을 고민. 이 두 부류 고민의 공통점은 괴로워하는 만큼 손해라는 사실이다. 애써서 해결될 일이라면 고민할 시간에 노력하는 것이 최고다.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노력해 봤자 헛수고다. (p.71)" "너구리는 원래 태평천하를 사랑하는 동물이다. 특히 따뜻한 물에 들어가 앉아 있다 보면 욕조에서 넘치는 뜨거운 물처럼 태평천하에 대한 사랑이 넘쳐흐른다. 너구리들에게 태평천하란 무엇일까. 그것은 시모가모 강둑에 누워 푸른 하늘을 멍하니 바라볼 수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p.285)" "작년에도 여러가지 소원이 있었지만 일단 모두 살아 있고, 일단 즐겁게 지낸다. 올해도 여러 가지 일이 있을 테지만 일단 다들 살아 있고, 일단 즐거우면 그만이다. 우리는 너구리다. 너구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재미있게 사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교토에 우글거리는 너구들이여, 분수에 맞지 않는 모든 소망을 버려라. (p.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