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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릴린 - 이지민 장편소설
이지민 지음 / 그책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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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아름답다기보다 견딘다는 말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견디는 자만이 아름다움의 기회를 갖는다. 어느 책에서 본 이 문구를 나는 벌써 몇 년째 의혹에 시달리며 몸소 시험해보고 있는 중이다. p.13"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그녀는 오늘도 죽음을 생각하면서 출근을 한다. 얼굴에는 아낌없이 분가루를 바르고, 낡은 스타킹에 구두코가 닳은 슈즈, 구멍 난 레이스 장갑, 거기에다 맥주로 감아 노랗게 탈색된 머리가 유난히 눈에 띈다.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은 마치 그녀가 '미군들이 쓰다 버린 인형' 일 거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질 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미군부대에서 번역일을 하고 있다. 김애순이란 본명보다 앨리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더 편하게 느끼는, 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를 가진 여인이다.
전쟁전만 해도 일본에서 그림을 공부하며 귀하게 자랐던 앨리스는 귀국 후 미군정 공보처에서 일하던 여민환과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유부남이었던 여민환은 가정을 버릴려는 의지가 없었고 그런 사실이 앨리스로 하여금 복수를 결심하게 만든다. 그녀가 받았던 상처만큼 그도 마음이 아프기를 당혹해 하기를, 단지 그 정도만 바랬을 뿐이었다. 그녀는 몰랐던 것이다. 한순간의 치기어린 행동이 전쟁이라는 변수와 맞물리면서 이토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게 될줄은... 그로인해 너무나 오랜 세월을 고통속에서 보내게 될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하얀 눈가루가 꽃잎처럼 날리고 마릴린 먼로는 무대 한가운데 서 있다. 그녀의 블론드는 지금 이 시간 모든 브라운과 레드와 블랙을 무의하게 만든다. (중략) 열이 나고 아플수록 그녀는 무대 위에 서야 한다. 외롭고 고독할수록, 오해받고 거부당할수록, 그녀는 사람들 앞에 있어야 한다. 어쩌면 그녀는 한 남자의 사랑도 받지 못하면서 모든 남자를 사랑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p.95)"
앨리스는 때마침 한국에 위문공연을 온 마릴린 먼로의 통역을 맡아 3박 4일의 일정을 함께 하게 된다. 그런데 앨리스와 마릴린... 이상하게도 닮았다. 만인의 연인이지만 외로움에 움츠러든 세기의 스타 먼로와 전쟁으로 인해 산전수전 다 겪고 정신줄까지 놓아버렸던 적이 있는 앨리스가 묘하게도 닮은 것이다. 화려한 의상과 짙은 화장으로 외로움도 감추고 슬픔도 감추고 상처도 감춰야만 하는 생활, 두 사람은 상대방의 아픔과 삶에 대처하는 방식에 공감하며 말없이 서로를 보듬어 준다.
<나와 마릴린> 처음엔 '모던 보이' 원작자의 작품이라는 이유와 퓨전시대극에 대한 관심으로 가볍게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괜찮은 작품을 만났다. 한국 전쟁당시 유엔군과 북한 포로 사이에서 통역을 하던 여인의 사진 한 장과 한국에 위문 공연을 왔던 마릴린 먼로의 사진, 이렇게 두 장의 사진에서 소설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또 한번 감탄하게 된다. "아름답던 그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작가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나로서도 무척 궁금하다. 그리곤 알수 없는 이유로 코끝이 찡해진다.
무수히 많은 책에서 전쟁과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전쟁의 검은빛과 사랑의 핑크빛은 너무나 강한 대비를 이루면서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다. 이 책에서는 특히 섹시함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마릴린 먼로를 등장시킴으로써 더욱 강열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는데, 마릴린과 앨리스가 동질감으로 이어진 모습을 통해 화려함의 이면에 감추어진 인간의 모습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폐허 속에서도 밤마다 댄스홀을 찾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친듯이 살아가는' 치열함이랄까 슬픔을 잊기위해 몸부림치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전쟁에 대한 아이러니는 그 시대만의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일제 강점기가 남긴 흔적은 많아도 전쟁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고, 삶의 질을 고민하는 시대가 오면서 때론 물질적 풍요가 '휴전'이라는 상황을 잊어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전쟁을 겪은 세대는 점차 줄어들고 젊은 세대들은 전쟁을 영화나 소설 속에서만 만나게 된다. 전쟁을 떠올릴 때, '사랑을 애틋하게 만드는 배경' 쯤으로 이해하지 않기를, 전쟁으로 인해 이 땅이 얼마나 피폐해 졌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그리고 살아 남은 자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려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