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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옷 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사람과 사람간의 '인연'이란 참으로 질기고도 묘한 것이다. 때로 인연이란 사람과 동물과의 사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사람과 책이라는 생명과 무생물간에도 이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제중원'은 내게 특별한 인연으로 기억될 책이다. (...) 여기까지 쓰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왠지 제일 마지막에 써야 할 문장을 앞에서 써먹어 버린 기분이랄까. ^^;; 아, 답답하다. 뭔가 그럴듯한 찬사로 시작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냥 내 식대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와우~ 딱 내 스타일이야! 정말 재미있어!!!!" 이제 좀 속이 시원하네~
때는 고종 21년 한일 강제 병합 직전이다. 한양은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여러 세력들로 어수선했고, 백성들은 개화의 물결에 혼란스러워하던 시기였다. 주인공 소근개는 아버지 마당개와 함께 백정일을 하던 인물이다. 그는 어머니의 약값을 마련하기위 위해 나라법으로 금지된 밀도살(당시 소는 농사를 짓느데 중요한 가축이었기 때문에 도둑질한 소를 불법으로 도살하는 행위는 중죄에 해당되었다고 한다.)을 시도하다가 쫓기는 몸이 된다. 포교가 쏜 총에 맞아 죽게된 소근개는 석란 아씨의 도움으로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의 치료를 받고 살아나는데 신분을 숨긴 채 자신을 '황정'이라 소개한다. 이를 계기로 알렌의 조수를 자청하여 서양 의술을 익히게 된 것이다.
팩션 참 좋아한다.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실존인물과 가공의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조합은 시간여행 같다고나 할까 판타지 처럼 느껴진다. 팩션을 읽을 때 가장 흥분되는 것이 바로 '모티브'의 발견이다. 역사라는 거대한 바다에서 작은 조각 하나를 건져 이야기를 엮어 나가는 과정이 기가 막히다. '제중원'도 예외는 아니다. 책의 저자는 드라마 '하얀 거탑'을 각색한 드라마 작가인데 일본 원작을 우리 실정에 맞게 작업하는 과정에서 우리 나라에 처음 서양의학이 들어오던 시대를 배경으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제중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우리 나라 최초의 의사 면허를 받은 일곱 명 중 하나가 백정의 아들" 이라는 사실은 작가에게 '유레카'와 같은 대발견이었고 이리하야 한 편의 역사소설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소설이고 뭐고 다 덮어두고 그냥 짐작만 해보자. 구한말, 아무리 서양의 문물이 파도처럼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라고는 해도 조선왕조 500년간 유지되어오던 '반상의 법도'가 하루 아침에 사람들의 의식속에서 사라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 속 주인공의 모델인 박서양 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힘든 여정을 거쳤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인물 중심의 전개에서 빠질 수 없는 구도가 있다면 라이벌과 러브 라인이 아닐까 싶다. '제중원'에서는 황정과 석란 아씨가 애틋한 감정을 키워가는 한편, 연적이자 라이벌인 도양이 있어 재미와 긴장감을 더한다. 황정은 외과적 시술에 있어서 타고난 의사였고 도양은 노력파이면서도 기회주의자이다. 황정은 사람의 목숨에는 귀천이 없다고 믿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겼지만, 도양은 살릴 수 있는 사람만 선별해야 하고 때론 선별과정에서 환자의 배경이나 신분이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의사가 되기위해 양반의 신분까지 버렸다고 하지만 의사가 된다는 것은 그에게 신분상승을 위한 또다른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다.
각각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역시나 팩션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가령 외과 시술을 받고 살아난 여염집 규수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다는 설정은 그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인 것이다. 또한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구한말에서 강제 병합 직후까지 이어지는데 갑신정변, 임오군란,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 대부분 스토리화 되었다. 혼란의 시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열강들의 다툼에 씁쓸해 하면서도 제중원을 지키려는 이들의 노력과 사랑, 우정 그리고 휴머니즘에 감동했던 시간이었다.
덧붙임 -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서민들이 '귀족'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사회적으로 신분의 벽(?)을 느낀다고들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정은 일종의 대리만족,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 대한 울분을 해소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신기하게도 서구 열강들이 문호를 개방하라며 압박하던 시대적인 사황도 그때와 너무 비슷하다. 무서울 정도로... --;; 따라서 우리 사회가 지금의 모습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해서는 소설 속 황정(실제 모델인 박서양)과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