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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철길을 따라 걷는 소년이 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안개에 휩싸인 상황인지라 내 딛는 한 걸음 마다 위태롭기만 하다. 이런 설정 왠지 불길하다. 짧은 순간 영화 '박하사탕'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내 설마가 현실이 된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는 기차와 마주서는 소년,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첫장면에서 느꼈던 충격에도 불구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있다면,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나가기 위해서는 좀 더 마음을 굳게 먹었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게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중략)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p.165)"
책 읽는 내내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마음이 무겁더니, 책을 덮은 후에도 먹먹함이 가시질 않았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을 접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에 안타까움이 배가 되었던 것이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에 읽었던 문학 작품들이 여러 면에서 '어렵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들이 많았다. 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머리만 쥐어뜯다가 그냥 묻어야만 했던 기억... 이번 작품도 만만치가 않다.
강인호는 안개로 유명한 무진시의 농아 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런데 첫날 부터 학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당황한다. 사립학교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금품을 요구하는 교장, 학생이 자살했다고 하는데도 너무나 조용한 학교, 농아 학교의 교사라면서 수화를 못하는 선생님들, 학생들에 대한 강압적이고도 부당한 대우 등 도대체 어디서 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듣게 됨으로써 엄청난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는 내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정의감을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아이들의 편에 서기로 한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p.246)"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유명한 이유는 그게 천지창조 이래 한번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해요? (p.254)"
진실을 밝혀내는 것과 동시에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줄 알았다면 내가 너무 순진한 것일까. 피의자들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피해자들과 피해자들을 도우려는 이들까지 수세에 몰리에 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당하고 또 당하는 것이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고 외치며 흥분했던 마음은 이미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어짜피 현실을 담아내려 했으니 전개도 현실적으로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사건의 전말을 인터넷에라도 터뜨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 조차도 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고야 만다. 권력과 돈 앞에는 민심도 흔들리더라. 과연 '진실의 힘' 이라는 것이 있긴 한 것일까?
책을 읽을수록 강인호라는 인물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그가 소망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안정된 직장과 가족이 모두 함께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등이다. 재단의 비리와 폭력앞에서 정의감에 불타는 모습도 특별하다기 보다는 평범해 보였고, 농아 학교 아이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도 아름다워 보였다. 결국 무진을 떠나게 되지만, 그런 결말 조차도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나쁘지 않았다.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무엇보다 '암흑의 도가니' 였던 무진에도 희망의 빛이 보이는 듯 해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도가니>는 거울이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거울. 사람들을 늘씬하게 비추는 옷가게 거울이었으면 좋으련만 '도가니'는 너무나 선명해서 마음이 불편하다. 가진자의 횡포와 권력의 비리, 불합리, 부조리, 이중성 등 온갖 종류의 '악'을 보여준다. 더구나 법을 수호해야 할 사람들이 법을 어기고, 아이들을 돌봐야 할 사람들이 아이들을 유린하고, 사랑을 부르짖던 사람들이 거짓을 말하기에 더욱 충격이다.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고 했다. 웃음을 주고 기분 전환을 가져다 주는 소설도 필요하지만 '도가니' 처럼 사회적인 문제를 들추는 소설도 반드시 필요하다.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사실이지만 공지영 작가가 큰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