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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은 없다 - 2008 대표 에세이
김서령 외 41인 지음 / 에세이스트사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웃기지 마 이것들아~ 내가 살아온 인생을 책으로 쓰면 츄럭 100대로도 모자란다. 내가 열 여덟에 느그 할배한테 시집을 와가지고..." 라디오에선 그저 옛노래 한 곡 흘러나왔을 뿐인데... 할매 또 시작이다, 언니가 내게 눈짓을 보내며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일어설 타이밍을 놓쳐버린 나는 두 사람 몫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결국 한 시간 넘게, 50번만 들으면 100번이 될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먹고살기 힘들어 만주로 떠날려다가 그나마 가진 재산 사기당한 이야기, 6/25 때 고향 떠나 피난 간 이야기, 고릿보개 넘기느라 소나무 껍질, 칡뿌리 뽑아 먹던 이야기~ 너무 많이 들어서 거의 외울지경이다. ^^;;
그땐 그랬다. 내가 겪지 않은 이야기,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것은 고역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처럼 수필이 좋아졌다. 그것도 무게감 있는 내용보다는 개인적이고도 소소한 일상에 촛점이 맞추어진 경수필을 더 좋아한다. "너는 나중에 수필가가 되렴~" 초등학교 때, 일기장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후에 수필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면 이상하게 들리려나? 수필가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글 쓰는 사람'인 것은 분명했다. 수필은 위대했다. 한 없이 수줍기만 하던 한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꿈이 생겼으니 말이다.
수필이 좋은 이유는 정형화된 형식이 없고 주제가 자유로워 편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수필은 잡탕이어야 한다. 잡식성이어야 한다. (p.5)" 라고 주장한 저자의 생각에 100% 공감한다. 수필에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고 규격화 하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 글은 더이상 수필이 아니다. 왜냐면 수필은 '인간극장'이기 때문이다. 연출가가 있고 편집도 하지만 대본은 없다는 것. 허구가 아닌 저자의 경험과 생각, 느낌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생생한 리얼다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을 읽더라도 '논픽션'이라고 하면 감동이 배가 되는 것처럼 수필은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글이기에 더 큰 울림이 있다.
<약산은 없다> 이 책에는 2008년도 에세이스트에 소개된 300여 편의 수필중 42편을 '엄선'해서 수록하였다.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글~ 제대로 된 '잡탕'을 맛볼 수 있다. ^^ 우리 땅 지키기위해 농촌으로 내려갔지만 투기바람이 불어 이웃마저 배신하는 현실, 자식들 대학시험 치르는 날 고행하듯 찬바람 맞고 서있던 모정, 스물 아홉에 큰 뜻을 품고 가출하였다가 결국 고래만 잡고 3박 4일만에 귀가한 이야기, 자신에게 혹은 친구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내 마음도 숙연해지는 것 같았다. 이처럼 유년에 대한 그리움과 젊은 날의 추억, 크고 작은 일상이 주를 이룬다.
수필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학이다. 이 말에 대해서는 누구나 생각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많지만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참 어렵기 때문이다. 내용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고, 그저 수다스런 말로 그쳐서는 아니될 것이기에 드러나지 않게 주제를 심는 것도 중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수필이 참 쉬워보인다는 것이다. 고음 파트를 힘 들이지 않고 노래하는 가수처럼 심오함이 느껴진다. 문득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글 한 줄 쓰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게 만든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인간극장'이요, '수필'의 한 장면인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