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가요 언덕
차인표 지음, 김재홍 그림 / 살림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스멀스멀 걷히는 안개바다 아래로 열여덟 개의 거대한 봉우리들에 에워싸인 백두산 천지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파란 하늘을 가득 담은 천지에는 거대한 봉우리들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물구나무 서 있습니다. 천둥소리를 내며 하얀 물을 쏟아내는 폭포 위를 날아 우산대 처럼 하늘로 길게 뻗어 있는 이깔나무 숲을 지나니, 끝없이 펼쳐진 노란 들꽃 밭이 나타납니다. (p.11)"

 
보이나요? 백두산 천지를 둘러싼 거대한 봉우리들, 하얀 물 쏟아내는 폭포와 숲, 장관을 이룬 노란 들꽃... 저는 보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곳 이지만 마치 사진을 보는 것 처럼 눈 앞에 펼쳐집니다. 밥 짓는 굴뚝마다 몽실몽실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를 보니 여기가 호랑이 마을인가 봅니다. 백두산 천지를 박차고 날아 오른 새끼 제비의 비행을 뒤쫓다 보니 잘가요 언덕을 지나 호랑이 마을에 까지 다다랐네요. 

 
"호랑이들은 우리가 이곳에 마을을 만들고 정착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 산에서 살고 있어네.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지 생각을 해 보게나. 사람에게 해가 된다고, 혹은 조금 불편하다고, 혹은 조금 이득이 생긴다고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설령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일지라도,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일세. 짐승과 더불어 살지 못하는 사람은 사람과도 불어 살 수 없는 법일세. (p.25)"

 
평화로운 풍경에 마음을 놓아버린 탓인지 온 몸이 노곤해 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한 낯선 손님의 방문으로 마을에는 긴장감이 감돕니다. 황 포수와 용이 부자는 아내이자 어머니의 원수를 갚기 위해 백호를 찾아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황 포수는 마을의 골칫거리였던 호랑이 육발이를 잡아 영웅이 되었고,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떠돌던 용이는 호랑이 마을에 머무는 동안 순이와 훌쩍이를 만나 우정을 나눕니다. 하지만 마을 아이들의 질투와 잘못된 호기심은 크나 큰 비극을 불러오고 용이와 아버지는 쫓겨나듯 호랑이 마을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아픔도 무뎌질 것이라 생각했지만 7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마을에 일본군 부대가 찾아 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인구 조사를 하겠다고만 했습니다. 주민들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일상적인 조사일 뿐이라고도 했습니다. 지휘관 가즈오 대위는 일본군에 대한 소문과는 달리 공손했고 사람들은 그를 믿기로 합니다. 폭우로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울 때는 일본군과 마을 사람들 구분 없이 모두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부로부터 전달된 명령서 한 장은 가즈오 대위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고, 무언가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순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지. 용이는 순이를 구하러 돌아와 줄 것인지. 한시도 긴장감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똥친 막대기' 처럼 아름다운 우리말 어휘가 조합된 문장과 그림처럼 펼쳐지는 묘사를 좋아하는데 이 책도 그에 속합니다. 오랜 세월의 진통으로 빚어진 작품이어서 그런지 문체나 구성이 훌륭합니다. 용이가 순이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일본군에 맞서는 설정은 어린 시절 호랑이 마을에서의 추억이 뒷받침 되어 주고, 가즈오가 조선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군인으로서 수치스러워 하는 장면은 그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를 통해 설득력을 얻습니다. 시종일관 마을을 비행하면서 코믹스런 대사를 날리던 제비는 극적 긴장감을 완충해 줌으로써 무거운 주제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전 엄마라는 이름으로 죽고 싶어요. 한 아이가 아닌 여러 아이들의 엄마. 아이들이 울 때 업어주고, 아플 때 만져주고, 슬플 때 안아주고, 배고플 때 먹여주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평생 살다가 아이들과 헤어질 때쯤 되면 아이들도 엄마라는 이름을 갖게 되겠죠. (p.113)"

 
순이가 소망하던 꿈, 그 소박하기만 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순이의 아픔은 우리 역사의 아픔이며,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치유되지 않은 상처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작가는 말합니다. 그럼에도 용서하라고, 상대가 용서를 빌지 않아도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순이의 용서는 그녀의 꿈이 샘물이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해주었고, 용이의 용서는 엄마별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도 처음 이 글을 구상할 때 용서와 화해보다는 그들의 잘못을 널리 알리고자 했던 마음이 앞섰다고 합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단순한 창작 활동이 아닌 것은 확실합니다. 집필을 통해 작가의 마음이 정화되면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끌어 냈으니 말입니다. 

 
 <잘가요 언덕> 배우 차인표 씨가 책을 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반가움과 걱정이 뒤섞인 감정이었습니다. 솔직히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꼼꼼히 챙겨볼 만큼 열성팬은 아닙니다. 단지 유명 연예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기 때문에 굳이 낯선 분야에 도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글이란 결국 그 사람의 생각과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고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을 낸다고 해서 모두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배우 차인표 씨는 이 한권의 책으로도 충분히 차인표 작가 라고 불려도 좋겠습니다. 
 

 
 "따뜻하다, 엄마별." 이 말이 가져다 주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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