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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1 - 사랑과 권력을 가슴에 품은 최초의 여왕
한소진 지음 / 해냄 / 2009년 4월
평점 :
'경기가 불황일수록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된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극장에서는 배우들의 파격적인 노출신이, TV에서는 막장드라마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때이른 더위에 과감한 패션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 주는듯 하다. 불황일수록 인기를 끈다는 또 한가지를 꼽자면 바로 '사극(팩션) 열풍'이다. 난세에 영웅을 원하는 간절함이 이유이든, 전쟁신을 통해 맛보는 짜릿함이 이유이든 분석은 잠시 미루어 두자. 여기 대박을 꿈꾸는 한 편의 사극이 있고 뚜껑을 열기도 전에 소설로 먼저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반가울 뿐이다.
<선덕여왕 1,2> 이 책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역사에서 '최초'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으리라. ) 선덕여왕은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의 둘째 딸로 태어나 여왕으로 등극하기전까지 덕만공주로 불렸다. 언니 천명공주가 심약했던 마야왕후 곁을 지키는 동안 덕만은 보다 자유롭게 궁궐 안밖을 누비며 일찌기 세상 이치에 눈을 뜨게 된다.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진심이 통했던 까닭인지 덕만의 주위에는 두풍과 지귀, 화랑들을 비롯하여 평생의 사랑인 김용춘이 함께하면서 힘이 되어준다.
초반부에는 24대 진흥왕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복잡하게 얽힌 왕실의 가계도와 왕위 계승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성골이니 진골이니 도대체 혈통이 무엇이길래... 덕만이 혼인을 눈 앞에 둔 시점에서는 성골인 왕족이 손에 꼽힐 정도로 줄어든 상황인지라 왕실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위해 숙부와 혼인을 하는 경우도 있고 결혼하여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재혼시키는 경우도 있고 하여튼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왕족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것 그리고 왕족이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 덕만은 여왕이 된 후에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두가지로 인해 고민해야만 했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맏딸이었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고 알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관해 씌여진 삼국유사와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선덕여왕에 관한 몇가지 부분에 대해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는 보다 극적인 효과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가져다 쓴 것으로 보인다. 곳곳에 낯익은 에피소드도 등장하는데 향기없는 모란, 옥문곡에서 백제군을 물리친 일, 여왕이 자신의 죽음에 관해 예지력을 발휘한 것이나 김유신이 말을 벤 사건, 문희와 김춘추의 만남 등 이미 알려진 내용들이 전체적인 스토리 속에 잘 녹아있다.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 선덕여왕 만큼이나 매력적인(?) 인물이 있으니 바로 미실이라는 여인이다. 왕실을 번창하게 할 목적으로 색공이 되었으나 진흥왕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함으로써 부와 권력을 원없이 휘두른 여인이다. 제24대 진흥왕, 제25대 진지왕, 제26대 진평왕에 이르기까지 세 명의 왕을 모셨을 뿐만 아니라 남편도 따로 있고, 화랑의 우두머리와도 대놓고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우리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캐릭터다. 천하의 미실이 결국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세월'이라는 장사를 만나면서다. 왕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잠깐이나마 안스럽긴 했지만 갑자기 모든 것을 초월한듯 선한 모습으로 돌변하여 생을 마감하는 설정은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죽는 순간까지 약사발을 걷어 차며 저항했던 장희빈의 당찬 모습을 기대했건만... ;;
모든 것을 다 잊더라도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선덕여왕이 골품제의 혜택으로 손쉽게 왕위에 오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선덕여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을 뿐만 아니라 공주로 있었던 오랜기간 동안 아버지 진평왕을 보필하면서 왕이 되기위한 검증을 거쳤다는 점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왕이 된 후에도 외적으로 주변국들의 침략을 막아내고 내부적으로 귀족들과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힘썼으며 김춘추, 김유신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은 높게 인정되어야 할 부분이다. 선덕여왕에 대해 왕으로서의 재질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록 소설이긴 하지만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팩션(faction)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이 합쳐진 말이다.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것. 한동안 팩션이 좋아서 열심히 읽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개인적으로는 팩션의 판타지적인 면에 상당히 끌리는 것 같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 뼈대를 이루고 있는 만큼 '말도 안되는' 내용은 아니면서도 '말이 되나?' 싶은 스토리에 빠져드는 것이다. 다시말해 논픽션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드라마틱한 흐름이 팩션의 강점이다. 어쩜 불황일수록 팩션이 뜬다는 말도 맞는 것 같다. 암울한 현실이 아닌, 불확실한 미래도 아닌 차라리 과거로의 판타지에 살짝 발을 담그고 싶은 간절함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