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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여행자란 으레 다른 이가 이미 걸어간 길을 끝도 없이 가야 하는 운명이기에. p.165"
때는 1800년대의 서부 개척시대, 소년은 14세의 나이로 집을 나왔다. 그리고 소년은 여행한다. 때론 걷기도 하고, 때론 말을 타기도 한다. 혼자서 길을 가기도 하고, 둘 혹은 셋이 되기도 하고... 살인을 목격하고, 약탈하는 이들과 함께 하면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있다. 처음엔 14세의 나이라는 설정이 그런 잔인하고 피비린내나는 상황을 겪기에 너무나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 그 시대는 어땠을까 하고 생각볼 필요가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19세기말 미국을 배경으로 한 것인데 당시에는 어린이와 여자들을 배려하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어린이는 '작은 어른'일 뿐이라고 한다.
소년은 인디언 사냥꾼 글랜턴 무리와도 함께 한다. 미국인들을 위협한다는 명목으로 인디언들을 잡아 오는 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자 글랜턴과 같은 야비한 자들이 등장하여 인디언 뿐만 아니라 이주민, 멕시코인, 어린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죽인다. 미국 역사상 가장 잔혹했던 순간들이 재현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로드'에서 보여주었던 잔인하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장면들이 다시 떠올랐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하튼 매카시는 희망을 보여주는데 너무 인색하다.
'쌍둥이 같다~!! ' 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최근에 코맥 매카시의 <로드>를 읽고 떠올랐던 생각들이 하나 하나 겹쳐진다. 특유의 암울함과 건조한 문체, 불친절한 대화체... 우습게도 논란 많았던 그 책에 알수 없는 매력을 느꼈었는데, <핏빛 자오선>을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이 여러면에서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언제일까. '로드'가 2006년인데 비해 '핏빛 자오선'은 1985년이다. 헉스~ 매카시는 '로드'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 20여년 전 이미 묵시록적 사고를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번역된 책의 경우, 작가가 어느정도 유명해 진 후에 베스트셀러가 먼저 소개되고 그 후에 초기 작품들이 선보인다는 점에서 코맥 매카시도 다르지 않다. 일단은 2007년도 퓰리쳐상을 수상한 후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매카시의 경우 '핏빛 자오선'이 묵시록적 사고가 밴 첫 작품이 되는 것이고, 배경도 서부개척시대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 후에 서부를 배경으로 '국경 3부작'이 선보였으니... 작품이 집필된 상황만 그려보아도 무척 흥미롭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순서대로 읽을 수 있다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코맥 매카시의 책이라고는 이제 겨우 두 권 읽었는데 느낌이 비슷해서 너무 신기했다. 솔직히 '로드'도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지만, '핏빛 자오선'은 더 힘들었다. 끝이 날듯 하면서도 반복되는 여정과 잔인한 장면이 '로드'보다 더 길게 이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폭력도 반복되면 둔감된다고 처음엔 끔찍스럽기만 하더니 중반이후 넘어가서는 덤덤해 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로드'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대재앙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이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잔인해 지는 것이지만, 이 책에서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빚어낸 상황이라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마무리를 꼭 그렇게 했어야 하는 건지...
다시한번 말하지만 코맥 매카시는 희망을 보여주는 데 너무 인색하다. ;;